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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오라 (마 11:28-30)

by 【고동엽】 2022. 9. 10.

내게 오라   (마 11:28-3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주일 동안도 힘든 세상을 살아가시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 온갖 무거운 짐을 지고 사시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 연령과 능력과 행운에 따라서 차이는 나지만, 이 세상에서 전혀 수고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무릇 생명체는 수고한 만큼 먹을 수 있고, 수고한 만큼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오늘도 땅에 붙어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들은 열심히 수고하고 있습니다. 동물은 거의 모든 생애 동안 먹고 번식하는 일을 위해 수고하고 있습니다.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이미 영양을 가급적 많이 뺏어 먹으려고 어머니와 치열하게 싸운다고 합니다. 태어난 아기는 피가 나오도록 젖을 세차게 빱니다. 철이 들 무렵부터 죽을 때까지 사람은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공부하고 일하면서, 온갖 수고를 다 해야 합니다.

노동이 아무리 고되다고 하더라도, 노동이 곧 저주는 아닙니다. 죄를 범하기 전에도 분명히 사람은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적당한 노동은 건강과 행복의 지름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담에게 노동을 부과하셨습니다. "땅을 정복하고, 만물을 다스려라." 노동은 생계 수단일 뿐만 아니라 삶의 보람이기도 합니다. 모험과 창의가 가득한 노동은 그 자체로서 축복이기도 합니다. 일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 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런 일도 없이 사는 것은 곧 저주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일자리가 없다는 것은 곧 사망 선고와 다름이 없습니다. 실직과 사업 실패로 인해 가족 전체가 자살하는 사건을 접할 때마다 우리는 일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불행과 일하는 사람들의 행복을 동시에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주어진 시간과 능력을 다하여 가족과 이웃과 교회를 위해 땀흘려 수고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타락하기 전에 노동은 행복과 축복의 조건이었지만, 타락한 후에 노동은 저주로 변했습니다. 남자는 수고한 만큼 충분한 수확을 거둘 수 없게 되었고, 여자는 해산과 자녀 양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창 3:16-17). 그래서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전도서 기자도 말합니다.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전 2:11).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 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2:23).

축복이었던 노동이 저주로 변한 것은 노동한 만큼 대가가 따라오지 않기 때문이요, 노동이 항상 실패할 위험에 빠지기 때문이요, 그래서 죽을 만큼, 아니 죽도록 노동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일벌레가 되었기 때문이요, 자기의 삶은 자기 스스로 꾸러가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요,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자립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착각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믿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인간은 노동의 주체가 아니라 노동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노동이 삶의 수단이 아니라 삶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실업도 심각한 문제지만, 과도한 노동은 더욱 심각합니다. 일평생 개미처럼, 기계처럼 죽으라고 일만하다가 죽는다면, 인생은 얼마나 불쌍하고 허무합니까? 일한 다음에는 적당히 쉬어야 합니다. 그리고 잘 일하기 위해서는 잘 놀아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어린이들이 부모와 가정의 품을 떠나 이 학원, 저 교습소로 쫓겨다닙니까? 요즘의 어린이들을 보면, 정말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활 상태는 상당히 좋아졌지만, 마음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어린이는 잘 놀아야 합니다. 그래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잘 자랄 수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잘 노는 어린이가 커서도 공부를 잘 할 수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바로 그랬습니다. 서양의 어린이 교육도 놀이를 중시합니다. 한국에서만 유독 어릴 때부터 자녀들을 공부의 노예로 만듭니다. 그래서 그들이 대학에 들어간 후로는 공부에 질린 탓으로 놀기를 엄청 좋아합니다. 한국의 대학생들만큼 잘 노는 대학생들이 없습니다. 서양인들은 자녀들이 어릴 때에는 충분히 놀리고, 대학교에 들어가서 엄청나게 공부를 시킵니다. 우리는 그 반대입니다.

요즘의 학생들은 가난했던 저의 어린 시절보다 더 불행한 것 같습니다. 해마다 100 여명의 중-고등학생들이 학업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여 자살한다고 합니다. 제 둘째 아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보면, 한편으로는 대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엾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청년과 장년이 된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지나친 노동과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 한국 남자들이 40대에 사망하는 비율은 세계에서 제일입니다. 사람의 질병의 대부분은 지나친 스트레스 때문에 생긴다고 합니다. 어른도 잘 쉬어야만 일을 잘 할 수 있습니다. 과도한 업무로 일찍 쓰러진다면, 도대체 사람이 무엇 때문에 노동한다는 말입니까?

더욱 심각한 사실은 사람의 지나친 욕심 때문에 오직 하나 뿐인 지구가 거의 다 망가져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인류가 이대로 계속 과도한 욕심을 부린다면, 약 50년 후에는 인류가 멸종할 것이라고 예언하는 과학자들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곧 닥쳐올 불행을 외면하거나 무시합니다. "설마 그럴 리야!" 하며 과학자들의 충고를 애써 부인합니다. 이제 자연을 지키고 생명을 지키기 위해 조금 덜 일하고, 조금 덜 쓰고, 자연을 보호하는 일이 시급한 일이 되었습니다. 이제 이 일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중대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도 자연 보호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가 남북으로 오랫동안 분단됨으로써 많은 고통을 겪었지만,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분단 때문에 비무장 지대의 자연이 상당히 잘 보존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으로 이루 다 측량할 수 없습니다. 역대하 36장 21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70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한 것은 그로 인해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리기" 위함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7일), 안식년(7년), 희년(50년) 제도를 제정하셔서, 백성과 동물과 땅이 쉬도록 명령하셨으나, 그들은 이 명령을 잘 지키지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그들은 포로 생활이라는 가혹한 대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류도 이런 가혹한 형벌을 치르게 되어야만 비로소 자신의 잘못은 깨닫게 될까요? 지나친 욕심과 지나친 노동은 자신과 가정과 인류와 지구를 망치는 주범입니다. 우리는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쉬어야 합니다.  

  타락한 후에 과도한 노동 때문에 신음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은 안식의 제도를 제정해 주셨습니다. 아주 옛날에는 일년 내내 일하여도 입에 풀칠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니 어찌 일주일에 단 하루라도 쉬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기적으로 안식하기를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뭐가 부족해서, 사람의 예배를 요구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뭐가 아쉬워서 사람의 예배를 강요하시겠습니까? 예수님도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게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유대인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유대인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유대인을 지켰다." 만약 유대인과 인간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더라면, 사람과 동물과 땅은 금방 망가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세계인이 쓰는 모든 달력마다 빨간 색깔로 인쇄된 주일이 들어가 있는 것은 아마도 "주일은 반드시 쉬어라"는 경고의 표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말씀은 "일하지 말고 나처럼 놀고 지내자"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이 어떻게 놀면서 먹고 살 수 있습니까? "무거운 짐을 내가 함께 져 주마"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너희는 아무 것도 하지 말고 푹 쉬어라. 내가 모든 일을 다 감당해 주마"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짐을 져주셨고, 우리의 상처도 고쳐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책임을 완전히 면제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말씀의 뜻은 이렇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나처럼 너희는 무거운 멍에를 내려놓고, 내가 주는 가벼운 멍에를 지어 보라. 그리하면 너희도 마음의 안식을 누릴 것이다."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 당시에 멍에는 일반적으로 율법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멍에는 스스로 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강제로 씌우는 굴레입니다. 그 당시에 유대인들은 수많은 율법의 멍에를 메고 살았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율법을 하나만 어겨도 율법 전체를 어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죄인이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의 일점 일획을 그대로 지키려고 애썼을 뿐만 아니라,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한 수많은 전통들을 지키려고 무던히 애썼습니다. 유대인들은 마치 강박관념에 빠진 사람처럼, 마치 결백증 환자처럼 자신들의 힘으로 율법과 전통을 지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러다 보니, 일반 대중은 율법을 다 알지도 못하거니와, 설령 알아도 지킬 능력이 없었습니다.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율법을 지나치게 확대하고 엄격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율법의 공로로 뒤바꾸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 당시의 백성은 이런 가혹한 율법의 멍에 아래 신음하였고,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죄인이라는 오명을 덮어쓰고 살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현대인들이 오직 자신의 노동으로만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일의 노예가 되어버린 현실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방법만 다를 뿐이지, 인간은 언제나 자기를 신뢰하고 자기를 강하게 내세움으로써 안정과 행복을 얻으려고 애써왔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인류는 더 폭력적이 되었고, 더 불행해졌습니다. 이처럼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수고와 노동이 참 안식을 가져오지 않는다. 강해지고 성공하는 것도 참 안식을 가져오지 않는다. 온유하고 겸손한 나를 따르는 것만이 참 안식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나처럼 하나님을 겸손히 의지하는 법을 배우라. 참 평안은 오직 만물을 지배하시는 하나님만이 주신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자녀들을 언제나 자상하게 돌보신다. 들에 핀 백합화를 보아라. 수고하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지만, 솔로몬보다 더 화려한 옷을 입고 있지 않느냐?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는데, 하물며 너희를 볼보시지 않겠느냐? 자신을 많이 믿고 하나님은 적게 믿는 어리석은 자들아! 하나님의 진정으로 사랑하고 의지해 보라. 하나님의 은혜를 겸손하게 구해 보라. 그리하면 너희의 노동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고, 너희의 염려가 찬송으로 변할 것이다. 내게 와서 배우라. 나의 겸손과 온유를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도 참 평안을 얻으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일은 바로 여러분의 행복을 위해 있습니다. 여러분의 평안을 위해 있습니다. 주일 성수는 여러분에게 지워진 또 하나의 무거운 짐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진정한 행복을 약속하는 가벼운 짐이요,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늘 가까이 모심으로써, 여러분을 위해 준비된 복되고 거룩한 주일을 늘 힘써 지키심으로써, 여러분의 생애가 언제나 행복과 평안으로 넘쳐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 오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출처/이신건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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