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사람 (시 1: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주님의 평안을 기원합니다. 엊그제 저는 신문과 방송에서 다음과 같은 슬픈 사건을 접했습니다. 염 모라는 사람이 그의 외동딸과 함께 동반 자살을 시도하였다가, 딸은 결국 죽고 자신은 죽지 않은 채로 경찰에 구속되었다고 합니다. 사연을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염씨는 번듯한 대기업에 다니다가 부인과 사별한 후에 "격무로 힘이 들고 승진도 누락된다"는 이유로 지난 해 5월에 사표를 내고, 서울로 올라와 양평동 옥탑방에서 아무런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고교 시절에 수재라는 칭찬을 들으며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던 딸도 직장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을 해서 팀장까지 맡았지만, 큰 자리에서 연거푸 밀려나자 퇴직하였다고 합니다. 그녀가 퇴직금으로 받은 돈은 5천 만원이었습니다. 그녀가 퇴직한 뒤에도 취업이 되지 않자, 아버지에게 "앞으로 1년간 10억 원을 벌지 못하면 삶의 희망이 없다"며, "10억 원을 못 벌면 같이 죽자"고 제안하고서, 10억 원을 벌기 위해 작전에 착수하였습니다. 부녀는 퇴직금을 절반으로 나눠서, 반은 주식에 투자하고, 나머지 반은 로또 복권에 쏟아 부었습니다.
하지만 주가는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고, 인생역전을 기대했던 로또 복권도 2천 여만원 어치를 샀지만, 150만원 내외의 당첨금을 받을 수 있는 3등에 2번 밖에 당첨되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1년만에 5천 만원을 허무하게 날려버린 부녀는 지난달 22일 오후 자신의 집에서 목을 매어 목숨을 끊기로 했습니다. "이제 저 세상으로 갈 때가 돼서 간다"는 내용의 유서를 써놓은 후, 딸이 먼저 목숨을 끊으면 아버지가 시신을 수습한 뒤 뒤따라 죽으려고 마음을 먹고, 딸이 먼저 목을 매 목숨을 끊었습니다. 딸의 뒤를 이어 염씨도 사람이 죽을 만큼 많은 술을 마시고 잠이 들었지만, 마침 월세를 받으러 온 집주인에게 발견되어, 병원으로 옮겨져 목숨을 건졌다고 합니다. 영등포 경찰서는 염씨를 자살방조 혐의로 구속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단번에 일확천금을 얻으려다 실패하자, 결국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처럼 많은 돈을 가지면 인생이 참으로, 그리고 길이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개의 사람들은 많은 돈을 버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정하고, 많은 돈을 버는 일에 최대한 열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사람들은 겨우 하루하루를 연명해 갑니다. 하지만 소수의 부자들도 참으로 행복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98년도에 런던 정경대학에서 "어느 나라 사람이 가장 행복한가?"를 조사한 적이 있는데, 어이가 없게도 방글라데시와 아제르바이잔, 나이지리아가 1, 2, 3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그 후에 영국의 심리학자 로스웰(Rothwell)과 인생 상담가 코언(Cohen) 씨가 2002년에 발표한 행복 공식(행복지수)에서도 방글라데시가 1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 이유를 사람들은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로, 사람들은 더 좋은 여건에 금방 적응해 버리기 때문에 행복감이 오래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더운 여름에 부채만 있을 때에는 선풍기만 있어도 사람들은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선풍기를 갖고 난 다음에는 사람들은 에어컨을 갖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에어컨을 갖게 되어도, 사람들은 또 다시 더 좋은 조건을 바라기 때문에 행복감은 금방 사라진다고 합니다.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 두 번째 이유는 소득 수준의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버드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가 실시된 적이 있었습니다. "남들이 2만 달러를 받을 때에 5만 달러를 받는 것이 좋으냐, 아니면 남들이 20만 달러를 받을 때에 10만 달러를 받는 것보다 더 좋으냐?"라고 물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남이야 얼마를 받든, 5만 달러보다는 10만 달러를 받는 것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비록 작게 받아도 남보다 더 많이 받는 것이 더 좋다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선진국 사람들이 잘 살면서도 후진국 사람들보다 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물질적 만족에는 한이 없기 때문이고, 항상 남과 비교하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잘 사는 나라일수록 자살하는 사람들과 정신과 의사들이 더 많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상대적인 물질에 매여 사는 한, 사람들은 영원히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최근에 나온 책 중에서 "꾸뻬씨의 행복여행"(프랑수아 클로르 지음, 오유란 옮김, 오래된 미래)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파리에서 정신과 의사로 일하고 있는 꾸뻬씨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 소설입니다. 그의 진료실은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불행한 사람들로 넘쳤습니다. 그 자신도 자신의 직업과 결혼에 대해 늘 의문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행복을 찾아서 여행을 떠납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작은 수첩을 하나 들고 여행하다가, 깨달음이 올 때마다 수첩에 적습니다. 엄마를 찾아 떠나는 동화 속의 소년처럼 꾸뻬씨는 단순하고 순진한 마음으로 여행하는 동안 만나게 되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행복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이런 질문에 남자들은 웃지만, 여자들은 울게 된다는 사실을 그는 깨닫습니다. 그는 동양의 창녀를 사랑해 버리기도 하고, 스승을 찾기도 합니다.
꾸뻬씨가 수첩에 써넣은 글귀들은 대충 다음과 같은 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복이 오직 미래에만 있다고 생각한다." "행복은 내 집 한 칸과 채소밭을 갈 수 있는 소박한 삶에 있다." "행복은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생각하는 것이다." "행복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행복이란 남과 비교하지 않는 데서 온다." 그리고 꾸뻬씨는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엽서를 보냅니다.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무소유'라는 베스트 셀러로 유명한 법정 스님도 이 책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진정한 행복이란 먼 훗날 그 어떤 거대한 목표가 아닙니다. 바로 지금 여기 내가 숨쉬며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행복의 요체입니다. 어때요. 좋지요? 두루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독일의 시인 칼 부쎄(Karl Busse)도 다음과 같은 시를 썼습니다. "저 산너머, 또 너머 저 멀리에 모두들 행복이 있다 하기에 남을 따라 훌훌히 찾아갔건만, 다만 눈물을 흘리며 되돌아 왔네. 저 산너머, 또 너머 저 멀리에 모두들 행복이 있다 하건만..." 이처럼 행복이 저 멀리에 있거나, 더 좋은 환경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개는 실망으로 끝나고 맙니다. 그러므로 동서양의 많은 스승들은 멀리서 행복을 찾지 말고 가까운 데서, 아니 지금 여기서 행복을 찾을 것을 가르칩니다. 다른 말로 하면, 행복은 지금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세상사 모두가 정말 마음먹기에 달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도 종종 이런 생각에 동의합니다. 실로 물질이나 환경보다는 마음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잠언 4장 23절도 마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설령 물질이나 환경이 망가졌다고 하더라도, 마음만 굳게 먹으면 언젠가 좋은 날이 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물질과 환경이 좋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망가지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마음으로는 얼마든지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은 환경의 지배를 받을 수도 있지만, 환경을 초월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위대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을 갖는 사람은 위대하다는 겁니다. 이 모든 게 마음이 요상한 조화를 부릴 수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사가 모두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지만, 마음이 그리 마음대로 되던가요? 매사가 마음대로 되던가요? 내 마음대로 마음을 움직일 수가 있던가요? 대개의 범인은 마음조차 마음대로 먹기 힘이 듭니다. 마음은 내 안에 있는 같기고 하지만, 내 밖에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아니 마음이 어디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불교를 배우는 어떤 수도승이 그의 고승에게 다서 "스님, 마음이 괴로워 죽겠습니다. 좀 도와주십시오."라고 하소연했더니, 스승이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꺼내서 보여 주라. 그러면 마음을 고쳐주마"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말에 수도승은 크게 깨달았다는 겁니다. "아하, 마음은 어디에도 있지 않구나. 그런 것도 모르고 마음을 꿍꿍 앓았으니, 내가 참으로 어리석었구나."
하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마음이 괴롭다고 괴로워하다가, 마음이란 원래 형태와 장소가 없는 유령과 같은 것임을 깨닫고 돌아선 불교 수도승의 가르침을 따르시겠습니까? 저도 실로 마음이 가슴에 있는지, 머리에 있는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머리, 즉 두뇌에 있다고 하더라도, 두뇌의 신비는 여전히 아리송합니다. 두뇌의 신비는 우주의 신비만큼 크고 깊습니다. 내 마음을 내가 잘 모르는데, 내가 어찌 내 마음을 마음대로 먹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경은 참 행복이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마음이 얼마나 연약하고 모호한지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얼마나 죄악과 탐욕으로 가득한지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런 연약하고 더러운 마음을 내가 어떻게 잘 움직일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내 마음대로 행복을 결정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성경은 매사에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말합니다. 매사에 자신의 마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가르칩니다. 여기에 행복이 있고, 여기에 구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복 있는 자는 ..."하며 시작합니다. 여기서 "복 있다"는 말은 "행복한 자는 ..."이란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 행복한 사람입니까?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여기까지는 "하지 않고..." 하면서 부정적으로 말합니다.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처럼 살지 않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곧 복을 받는 비결, 행복의 비결은 아닙니다. 단지 불행과 심판을 면하는 길이 될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복을 받는 길이고, 행복한 길입니다. 바로 그 다음 구절에 나옵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여호와의 율법이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말합니다. 참으로 복된 사람,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되새기는 사람입니다. 매일 밥을 먹지 않고서는 살지 못합니다. 밥을 적게 먹으면, 반드시 허약해집니다. 이처럼 영적인 존재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안 먹게 되면, 반드시 영적으로 죽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어도 무감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아도 전혀 불행한 줄을 모릅니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덜 먹게 되면, 반드시 영적인 영양실조에 걸립니다. 작은 일에 실망하고, 작은 일로 넘어집니다. 작은 시련에도 허우적거리고, 작은 직분도 감당하지 못합니다. 요즘 우리 교인들이 왜 영적으로 무력한지, 왜 영적으로 진보하지 않는지, 왜 작은 일로 시험을 받고 왜 방황하는지 고민하고 기도하다가, 그 원인을 깨달았습니다. 그 원인은 아주 단순합니다. 영적인 양식을 안 먹거나 덜 먹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음으로 행복할 리가 없고, 영적으로 건강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교회가 힘차게 활동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을 리가 없으며, 매사가 형통할 리가 없습니다.
사람은 밥으로만 살 수 없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먹어야 삽니다(신 8:3, 마 4:4).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기쁨과 즐거움이 생겨납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렘 15:16).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과 길을 밝혀 줍니다(시 19:8, 119:105).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의 능력이 되고, 영생의 길이 됩니다(요 8:51, 6:63, 68, 롬 1:16). 그래서 욥은 음식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욥 23:12). 어느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금은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시 119:72).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종일 묵상한다고 말합니다(119:91). 아니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꿀보다 더 달다고 고백합니다(119:103). 행복의 비결은 돈에 있지 않습니다. 마음에 있지도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있습니다. 지독한 무더위가 물러가고 독서하기 좋은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이 읽읍시다.
출처/이신건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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