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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2권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의 구원> 9쪽에 있는 글입니다.
19. 죄에 거할 수 없는 이유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으므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로마서 6장 1~11절
하나님의 진리는 너무나 깊고 오묘해서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고 소화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광대한 하늘을 우리 가슴에 다 품을 수 없듯이 심오한 하나님의 진리를 모두 다 우리 마음에 담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나 분수에 넘치다 보면 잘못되기 쉬운 것처럼 우리가 이해하기에 너무 심오한 진리는 오해하기 쉬운 법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예로 들어 봅시다. 하나님의 사랑은 크고 위대합니다. 그분의 사랑은 너무나 광대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채우고도 오히려 남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간혹 이렇게 오해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했어. 그렇게 사랑이 많으신 분이 어떻게 우리를 벌할 수 있어? 하나님은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시기 때문에 지옥 같은 것은 만들지 않아. 하나님이 지옥을 만드셨다니 이것처럼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이 어디 있어?' 이런 오해는 하나님의 사랑을 잘못 아는 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쪽으로만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마음대로 하시는 일에는 인간이 거들어야 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순종하고 노력하여야 하는 인간의 책임을 회피하는 구실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부분적으로만 아는 데서 생기는 오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진리에 대해 우리가 그 심오한 깊이를 다 헤아릴 수 없어서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앞 장에서 우리는 5장 20절에서 소중한 진리를 배웠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 말씀은 오해의 소지가 매우 큽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말씀을 편중된 시각으로 보면 '이제부터 죄짓는 문제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없어.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많다고 했잖아. 은혜를 많이 받기 위해 죄짓는 거라면 나쁜 것이 아니야.' 이렇게 오해를 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논리적으로 따져 볼 때는 충분히 그런 오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사람은 균형 감각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가 어떤 말씀에 지나치게 몰입하다 보면 균형을 잃기 쉽습니다. 로마서 5장 20절에서 은혜받은 자는 반드시 로마서 6장 23절 말씀도 깨달을 줄 알아야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이 말씀은 5장 20절 말씀과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라는 말씀이 있는가 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요" 라고 준엄하게 경고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균형 있게 이해할 줄 아는 감각을 소유해야 합니다.
죄에 거할 수 없는 이유
사도 바울은 우리가 자칫하면 빠질 수 있는 이 오해의 소지를 막기 위해 6장을 기록한 듯 합니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1절).
죄에 거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계속해서 죄를 짓는다, 또는 죄를 끊지 못한다, 혹은 회개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은혜를 더 받기 위해 계속 죄를 지어야 하겠습니까?" 라는 질문에 2절이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이것은 무섭게 칼로 자르듯 선언하시는 말씀입니다. 대단히 강한 어투입니다. 일종의 막말이나 다름없습니다. '무슨 소리야?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 둬!' 라는 식의 말입니다. 진리를 오해하고 악용하는 자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이렇게 강경하게 단호한 어조로 말씀하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해서 죄를 자꾸 범하는 생활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우리가 죄에 거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2절 중간에 나옵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죄 속에 거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죽음은 한 번 죽는 것이요, 이미 과거에 죽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과거동사로 쓰여 있습니다. 이것은 죄를 안 지으려고 날마다 죽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리고 앞으로 거룩하게 살기 위해 영적으로 계속 죽는 훈련을 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고백했던 "나는 날마다 죽노라"(15:31)고 하는 그런 유의 죽음도 아닙니다. 과거에 단 한 번 죽었던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언제 어디서 우리가 죽었습니까? 그 대답을 우리가 읽은 본문 전체를 가지고 검토하기 전에 좀더 기억하기 좋도록 먼저 한마디로 요약하고자 합니다. 11절 초두의 "이와 같이"를 주목해 보십시오. 이것이 해답입니다. 이 말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10절과 11절을 연결시켜 보면 그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10절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10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시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죄에 대해서 단번에 죽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났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언제 죽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을 때 우리도 죽었습니다. 우리가 언제 살아났습니까? 예수님이 다시 사셨을 때 우리도 살아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죄가 왕 노릇 하는 영역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여자에게서 나셨고 율법 아래 매이셨습니다. 그리고 천사보다도 못한 처지에 놓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죄의 권세가 미치는 자리에 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죄인처럼 죄사함을 받는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뿐입니까? 죄인처럼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친구인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드디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는 자리까지 가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하고 부르짖으시며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악을 짊어지고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죽음은 단번에 죽은 것입니다. 단 한 번 죽은 것으로 끝난 죽음입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예수님은 죄와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죄로 인해서 괴로움을 당하는 영역에서 벗어났습니다. 죄의 세력에서 완전히 자유하였습니다. 더 이상 그를 죄가 시험할 수 없었습니다. 더 이상 그에게 슬픔을 안겨 줄 수 없었습니다. 그가 완전히 죄와 단절되었기 때문입니다.
11절에 나오는 "이와 같이"는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이 그를 믿는 우리에게 그대로 일어났다는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우리도 죽었습니다. 죄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고통당하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 처절한 운명의 종지부를 찍어 버린 것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4절).
'아버지의 영광'은 성령의 능력을 말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켰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 2:24).
죽음은 예수님을 붙들어 놓으려고 발악했습니다. 무지막지한 돌덩어리로 무덤을 인봉하고 힘센 파수꾼을 세우는 등 갖가지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망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사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로 앎이로라"(9절).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죽음이 예수님을 지배할 수 없고 해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본래 가졌던 영광을 회복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하나님으로 더불어 누렸던 영광을 다시 찾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5절을 보면 예수님이 기도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
바로 이 기도가 성취된 것입니다. 주님은 죽음이 따라올 수 없는 생명의 영역, 의의 나라에 오르셨습니다. 죄와 사망의 자리에 오르신 것입니다.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 1:18).
생명이 왕 노릇 하는 의의 자리에서 주님이 사망과 음부를 심판하시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의 원칙에 따라 우리도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습니다. 그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죄의 지배로부터 벗어났고 죽음의 철권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영광의 자리에 앉아 세상을 심판하는 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라는 말이 담고 있는 이상과 같은 엄청난 사실은 우리의 이성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영역의 진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앞 장을 공부하면서 아담과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는 말씀을 통하여 비슷한 사실을 한 번 접한 일이 있습니다. 아담이 죄를 지을 때 우리는 그 자리에 없었지만 우리는 함께 죄지은 자가 되었고 그 결과 아담이 죽은 것처럼 우리도 함께 죽었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우리가 그 현장에 없었지만 우리는 그와 함께 죽었습니다. 그가 부활하실 때 우리가 영광의 현장을 목격하지 못했지만 우리는 그와 함께 살아났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다루시는 일입니다. 우리를 아담 안에서 부르신 것처럼 우리를 예수 안에서 부르시고 그의 죽음과 부활을 우리의 죽음과 부활로 간주하셨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결정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이해를 할 수 없다고 해서 거짓이거나 꾸민 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와 같이'의 원칙이 성립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무엇에 근거해서 그것이 가능합니까? 그 대답은 11절 중간에 있는 말 한마디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라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이와 같이'의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근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라는 말은 바울 서신서에서 나오는 가장 유명한 구절의 하나입니다. 이 말은 가장 깊은 의미를 담고 있고 가장 많이 애용되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이 헬라어로 몇 번 사용되었느냐 하는 문제는 약간의 의견 차이가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원문상의 해석에 따라서 애매모호한 구절이 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충 164번에서 200번 정도로 사용되고 있다고 보면 틀림이 없습니다. 얼마나 자주 반복되는 말인지 수치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 말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이 본문 3절에서 9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 관계를 의미합니다. 즉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더 실감나게 이야기하자면 예수와 우리가 결혼한 관계라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예수가 있는 관계를 말합니다.
이 관계가 언제부터 우리에게 시작되었습니까?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부터라고 말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3절).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4절).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5절).
3, 4절에는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했는데 5절에는 '본받아 연합했다'고 합니다. '본받아 연합했다'는 말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말을 좀더 구체적으로 해석해서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접붙임을 받은 가지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또 6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예수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이 되고 그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될 수 있었던 근거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통하여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세례는 일차적으로 물 세례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집례 목사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하고 성도의 머리에 물을 뿌리는 세례 의식을 다 보셨을 줄 압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다는 것을 고백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머리에 물을 뿌리는 세례보다는 온 몸을 물 속에 푹 담그는 침례가 훨씬 더 실감이 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침례 의식을 보신 적이 있나요? 강으로 가서, 아니면 큰 목욕탕 같은 곳에서 목사가 성도를 물 속에 담급니다. 그때 그는 예수와 함께 죽은 것입니다. 조금 후에 목사가 그를 물 속에서 일으킵니다. 그때 그는 예수와 함께 살아나신 것입니다. 훨씬 더 실감이 날 것 같지요?
그러나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물 세례라는 형식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엄격히 말하면 물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 세례는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사실을 공인하는 후속 절차에 지나지 않습니다.
좋은 예로 사도행전 10장을 들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는데 갑자기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말씀했습니까?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줌을 금하리요"(행 10:47).
고넬료의 집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물 세례를 받기 전에 이미 베드로의 설교를 들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고 동시에 성령을 받았습니다. 믿음과 성령 세례가 먼저였고 그 다음이 물 세례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게 하는 연합은 물 세례라는 의식 절차를 통해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무릎을 꿇는 순간 그 영광스러운 사건은 일어납니다. 성령이 알게 모르게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시고 새사람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세례입니다. 우리는 성령 세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고
그러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나는 누구입니까?
6절에 그 대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6절).
우리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혀 죽었습니다. 옛 사람이란 우리의 본성이나 기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에 남아 있는 죄의 성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옛 사람은 아담 안에서 함께 죄를 지었던 나입니다. 아담 안에서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던 나입니다. 죽음의 노예가 되었던 나입니다. 그 옛 자아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대단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단 죽음이 오면 인간관계는 완전히 끊어집니다. 법적 관계나 생존 관계도 중단되어 버립니다. 만약 남편이 죽었다면 아내는 남편을 향해서 사랑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빚쟁이도 채무자가 죽어 버리면 손을 들 수밖에 없습니다. 법관도 죽은 자에게는 형을 선고하지 못합니다. 죽은 자는 완전히 자유하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장례를 집례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그 지방에는 장례 행렬에 특권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장례 행렬이 거리를 지날 때는 교통 신호의 제약을 받지 않았습니다. 유해가 장지까지 한 번도 신호등에 걸리지 않고 무사 통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죽음은 우리를 모든 책임에서 벗어나게 하고, 모든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고, 자유하도록 만듭니다. 죽음 앞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힘이 무력해지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옛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버리자 우리는 죄와 완전히 단절되었습니다. 죄의 힘이 통제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자유했습니다.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된 것입니다.
4절은 우리도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장사되었다'는 말은 완전히 죽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례식은 사망 확인서와 같은 것입니다. 최근에 우리 사회에서 뇌사 문제가 다시금 뜨거운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 뇌사를 법적으로 인정하려는 조짐이 보이기 때문에 우리 사회의 법조계나 종교계, 의학계에서 논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뇌사가 무엇입니까? 뇌관을 포함한 전뇌의 기능 정지가 의학적으로 인정되면 심장이 뛰고 허파가 작동하고 있어도 사망으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정상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뇌의 활동이 정지되었다는 진단이 나왔다 해도 심장 박동이 완전히 멈추지 않은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취급한다는 것은 고려해 볼 여지가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것이 보이면 장례식을 할 수 없습니다. 장례식은 확실한 죽음이 인정될 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의 죽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장례를 치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확실한 이상 우리 옛 사람의 죽음도 확실한 것입니다. 장례식을 치르고 묻은 것처럼 확실한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 옛 사람은 완전히 죽었습니다. 이것은 죽어가고 있다거나 죽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는 완전한 죽음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죄의 통치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6, 7절).
우리 옛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죄에 매인 육체를 죽여서 다시는 죄의 종이 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에 끌려다니던 우리는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렇게 달라진 처지에 있는 우리가 어떻게 은혜를 더 받으려고 죄를 지으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4절 끝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새 생명 가운데 행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새 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와 죽음이 다스리는 어두움의 세계에 붙들려 있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의의 나라에 옮김을 받은 것입니다.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8절).
이것은 미래형 동사로 쓰여 있어서 마치 미래에 일어날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결코 미래의 사건이 아닙니다. 이것은 논리상 당연한 귀결을 말하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사셨기 때문에 그와 함께 죽은 자는 틀림없이 산 사람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산 새사람입니다. 이제 우리는 은혜가 왕 노릇 하는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분은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닙니다. 우리는 의의 종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신분이 된 사람이 어떻게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머물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와 같이'라는 원칙에 따라서 예수의 죽음이 내 죽음이 되고, 예수의 부활이 내 부활이 되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 사건이 가능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럼 이 사실을 확인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11절).
여기에서 "여길지어다"라는 말은 명령문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여겨라' 하는 말입니다. '여겨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믿으라는 말보다 더 강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깨닫든지 못 깨닫든지 체험과 상관없이 이미 일어난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나는 아직도 습관적으로 죄를 짓고 있는데 어떻게 옛 사람이 죽었다고 말할 수 있나?' 하고 스스로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똑똑히 알아 두십시오. 자기 자신을 보면 실족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내가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습니까, 예수님이 죽으셨기 때문에 내가 죽었습니까? 물을 필요 없이 예수님이 죽으셨기 때문에 내가 죽었습니다. 우리 자신을 보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죄에 대해 죽은 것이 사실이면 내 옛 사람은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에 대해 사신 것이 사실이면 나도 새사람으로 살아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설혹 당신이 죄를 짓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문제 삼지 마십시오. 죄 용서함을 받은 느낌이 있는가 없는가를 따지지 마십시오.
우리는 항상 주체의식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네가 누구냐?"라는 질문 앞에서 "나는 예수님과 함께 산 새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너는 어디에 사느냐?" 하고 물을 때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지배하는 의의 나라에 사는 사람입니다." 하고 분명히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옛날에는 오늘날의 결혼 양상과는 다르게 여자가 일단 시집을 가면 친정에 자주 드나드는 것을 금기로 여겼습니다. 옛말에 '출가외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죽하면 그 집 귀신이 되어야 한다는 말까지 했겠습니까? 가문의 명예를 생명처럼 중요시하던 유교시대에는 지체가 높은 집안일수록 딸에게 이런 사상을 철저히 주입시켜서 시집을 보냈습니다.
가령 이씨 집안의 딸이 김씨 집안으로 시집을 가면 그는 그 순간부터 출가외인이 됩니다. 그의 과거는 장사해 버리고 김씨댁 며느리로 태어납니다. 옛날 처녀 시절에 행복했던 추억은 잊어야 합니다. 심지어 부모 형제의 생각마저도 끊어야 합니다. 과거가 살아 있을수록 결혼생활이 힘들기 때문에 친정을 멀리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악습이 있었습니다. 양식이 없어서 굶어 죽을 지경이 되어도 친정을 찾지 않는 여인이 부덕을 갖춘 여인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딸을 시집 보낸 부모도 완고한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딸이 시집살이가 너무 힘들어서 친정을 찾아왔는데도 끝까지 대문을 열어 주지 아니하고 도로 돌려보낸 이야기는 과거에 흔하게 들을 수 있는 고담거리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던져 줍니다. 예수 믿는 순간에 시집오기 전의 나는 이미 죽었습니다. '죄(罪)'씨 집안의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예수 믿은 다음에 '의(義)'씨 집안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주체의식을 분명히 가져야 합니다. 예수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한 사람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물 세례를 통해 옛 사람은 죽고 새사람이 된 것을 공적으로 선언합니다. 이제부터 자꾸 과거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무슨 죄를 짓고 어떻게 방탕했는가를 들먹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생활을 하던 옛 자아가 무덤 속에 들어가 버렸기 때문에 지금은 죄의 종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의 구원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았다는 연합 관계를 우리가 분명한 사실로 받아들이면 얼마나 큰 위로와 확신을 받게 되는지 모릅니다. 그 유익을 몇 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죄에 쉽게 끌려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의 지배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주체의식이 분명하기 때문에 쉽게 죄에 끌려 들어가지 않습니다.
둘째는 죄에 빠져도 절망하지 않고 즉시 회개하고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죄 속에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노예가 되었던 옛 자아가 죽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거기에 오래 머물 수가 없습니다. 마치 남의 집에 간 사람이 오래 머물지 않고 금방 돌아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셋째는 설혹 죄를 범했다고 하더라도 그 범죄가 우리의 구원을 흔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다고 해서 구원의 확신이 흔들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을 때마다 구원 문제를 놓고 의심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예수 믿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구원을 받았다, 못 받았다 하며 우왕좌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칫 부주의해서 문을 잠그지 않고 잤더니 밤중에 도둑이 들어왔습니다. 도둑이 집문서, 땅문서, 인감 도장 등을 몽땅 털어서 나가려고 하니까 그 집주인이 너무 낙담이 되어 "우리 집에 있는 재산을 당신 다 가졌으니 난 어쩔 수가 없소. 이제부터 당신이 우리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시오. 내 아내도 마음대로 하시오. 난 완전히 포기하겠소." 이렇게 말하는 주인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리 가진 재산을 다 빼앗긴다 해도 가장으로서의 자기 자리를 내놓는 천치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연약해서 죄를 용납할 수는 있지만 이것이 곧 구원받은 특권까지 포기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어쩌다가 잘못 죄를 저지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까지 내놓고 "아이고 주님, 마음대로 하세요. 나는 이제 어쩔 수가 없는 놈이에요. 구원을 포기하겠나이다"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말입니다.
평소에 예수를 잘 믿는 훌륭한 신앙인이라 할지라도 임종할 때 이해할 수 없는 언동을 하는 분이 가끔 있습니다. 우리 할머니가 그런 분이었습니다. 평생 예수 안에서 살았던 분이 임종 3일 전부터 정신착란 증세가 일어나 마치 예수 안 믿는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심지어 예수가 어디 있느냐고 소리칠 정도로 본 정신을 완전히 잃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구원을 의심할 수 있습니까? 몸의 기능이 온전하지 못한 데서 오는 발작 행위 때문에 그의 영혼이 버림받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흙으로 빚어진 우리 육신이 노쇠하면서 그 기능에 심각한 장애가 올 수 있습니다. 의학적으로 중추신경이나 순환기 계통에 장애가 오면 정신착란 증세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머니의 육체가 무너지는 순간을 이용해서 마귀는 틀림없이 그의 영혼을 끌어가려고 발악을 했을 것입니다. 그 틈에 할머니는 잠깐 이상하게 행동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그의 영혼이 버림받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래 전부터 할머니는 예수 안에 들어와 있는 하나님의 자녀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몸의 기능이 비정상으로 떨어진다 해도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산 그를 어두움의 세력이 끌고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와 함께 다시 산 새 생명입니다. 우리는 예수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설령 어떤 죄를 지었다 해도 죄 속에 거하지 않습니다. 죄를 범해도 즉시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구원의 확신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크나큰 축복입니다.
이토록 큰 축복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머물 수 있겠습니까? 다음 말씀을 외워 둡시다. 가슴에 새기면 새길수록 큰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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