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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 우리의 반응 (로마서 3:19~31)

by 【고동엽】 2022. 9. 7.

 하나님의 은혜, 우리의 반응   (로마서 3:19~31)
  
지난 시간에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전적인 신앙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전적으로 부패하여 도저히 스스로는 구원을 받을 길이 없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의 재판장이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는 주문 판결을 받았습니다.
구원의 소망이라고는 어느 한 구석에서라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타락을 하였다는 선언을 들었습니다. 정말 앞이 캄캄한 절망의 상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에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인간이 되었구나 생각하니 어안이 벙벙할 따름입니다.
그래도 어느 한 구석에는 나의 의로움이 있는 줄 알았는데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는 말씀까지 듣고 보니 천하에 고약한 인간이 바로 나였구나 생각이 되었습니다.
이번 한 주간 내내 신창원 신드롬(syndrome, 증후군)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매스 미디어(mass media)에서 단골메뉴로 삼고 화제거리로 삼았으며 심지어 지각이 없는 사람들 중에는 신창원을 의적이니 석방을 하여야 한다, 신창원만 도둑놈이냐 더 큰 도둑놈 은 왜 안 잡아가느냐는 등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여기에 대하여 설교하는 저도 예외가 아닙니다. 설교하는 그 밑바탕에는 그래도 나는 주의 종이 아닌가? 내가 아무리 타락을 한다한들 신창원하고 비교를 하겠는가? 그래도 매일 경건의 시간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있고 눈만 뜨면 하는 일이 주님의 일을 한다고 자처하고 있는데 어찌 그렇게까지 떨어질 수 있다는 말인 가? 사람을 비교해도 그렇지 어디에다 비교할 데가 없어서 신창원에다 비교할 수 있으랴? 이렇게 생각하고 말을 하는 저의 입을 여지없이 막아버리는 것이 있는데 율법입니다.

본문 19절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감히 율법 앞에서 의롭다고 입을 열자가 있겠느냐? 아무도 율법으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함으로서 입을 다물게 하고 있습니다.
다만 율법을 통하여 우리들의 죄악상을 낱낱이 파헤쳐 보이고 율법을 통하여 나의 하고 있는 일이 전부 죄밖에 없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하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율법의 정죄하에서 신음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던져 주시는 하나님 의 음성이요 이 음성이 복음이요 성경 전체에 흐르는 주요 사상인 것입니다.

I.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함을 통하여 나타난 진리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 21절의 "이제는" 이란 말입니다. 개역 성경에서는 '이제는' 이라고 말했지만 문맥상 "그러나 이제는" 말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20절에서 그러므로 율법으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하였기 때문에 21절에서는 그러나 즉 율법으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으나 이제는 무언가 좋은 소식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21절의 "나타났으니"라는 말을 잘 적용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휴가철을 맞이하여 동해안의 주문진 해수욕장에 수영을 하러 가서 재미있게 물놀이를 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어떤 사람이 허우적거리면서 물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사람을 살려 달라고 아우성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보고 달려왔는지 구조대가 나타났습니다. 물에 빠져가는 사람에게 구조대가 나타났으니 이거야말로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물에 빠져 가는 사람의 마음에 안도의 한숨이 흘렀으며 그 기대대로 구조대는 빠른 동작으로 물에서 건져내었습니다.

아주 쉬운 예이며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만 오늘 본문을 정확하게 설명하여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율법으로는 그 어떠한 죄의 쇠사슬에서 해방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철학이나 수양, 양심이나 그 어떠한 공로로서도 죄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지를 않았습니다. 아무리 선행을 한다고 하여도 죄 문제에서 빠져나갈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탄식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구조대가 나타났습니다. 그 구조대를 21절에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잘 정리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나서 우리들을 율법으로부터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여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이것보다 더 좋은 소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말씀이 복음입니다. 믿음의 본질입니다. 두고두고 전하여야 할 증거의 제목입니다. 일평생 자랑하여야 할 사실입니다.
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고 하였는데 이것은(의) 인간 스스로가 소유할 수 없는 의입니다. 이미 죄로 죽었던 인간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의를 받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한 순간만이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의를 받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구조대가 나타났는데 다름이 아니라 우리들을 죄와 사망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심으로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자에게 구원의 은총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 본문 23,24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소식을 한마디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죄와 사망가운데서 구원받을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공로와는 무관하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도저히 소망이 없는 죄인 중의 괴수와 같은 우리들을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이러한 구원에 대하여 감사하는 신앙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간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본문이 우리에게 강력하게 심어주고 있는 진리를 몇 가지로 찾아보면서 그 은혜에 깊이 동참하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거저 주시는 은혜입니다. 24절에서 분명히 말하기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마틴 로이드 죤스 목사님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은혜"라는 단어보다 더 놀라운 단어는 없다. 그것은 전혀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값없이 베푸는 호의 또는 친절을 뜻한다..... 그냥 값없이 베푸는 선물이 아니라 정 반대의 대접을 받아야 할 사람에게 값없이 베푸는 선물이며 우리가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일 때 이런 선물이 제시되었다".

즉 지옥가야 마땅한 죄인들이 지옥에 가기는커녕 천국에 갔다는 말씀입니다. 그것도 자격이나 공로가 조금이라도 있고 무언가 내보이고 싶을 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아주 형편이 없는 사지에까지 여지없이 추락하고 있을 때에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당연히 감사가 저절로 나오고 찬양이 저절로 나와야 정상입니다.

그럼에도 부패하고 교만한 인간들은 이렇게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오히려 싫어하고 거부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마디로 자존심이 상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거저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황공무지로소이다" 하고 받지 못하고 그 잘난 자존심이 발동하여 그래도 그렇지 내가 힘이 없나 지혜가 없나 무언가 대가를 지불하고서야 구원을 받아야 그래도 할말이 있지 거저 받을 수야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은 자연히 구원에 대하여 감사가 없고 겸손함이 없습니다. 무언가 대가를 지불하려고 계속 노력하니까 피곤하기만 하고 기쁨이 없습니다. 교회의 신앙생활도 그런 식으로 하니까 감격이 없습니다. 잘하면 교만하고 못하면 스스로 시험에 빠지고 맙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한번 이렇게 생각해봐요,
금년에도 집중호우 현상이 있어서 제주도에는 비가 많이 내렸다고 하는데 예를 들면 산에 야영캠프를 갔는데 밤중에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서 계곡의 물이 순식간에 불어나서 꼼짝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죽었구나 하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연락도 하지 않았는데 어디선가 헬리콥터가 와서 빨리 타라고 하였습니다. 그럴 때 구조 받는 사람이 "그래! 내가 한번 타보지" 하고 천천히 탈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이제는 살았다하는 안도감에 감격스러운 자세를 가지고 빨리 탈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구원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와 행위들로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 분이 오셨습니다. 그 분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오셨습니다. 오시라고 연락도 하지 않았는데 그 분이 오셨습니다. 값없이 오셨습니다. 조건 없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두말하지 않고 죄와 사망의 구덩이에서 건져주었습니다. 너무도 충격적입니다. 그래서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감격이 있는 바로 그것이 우리가 받은 구원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신앙생활이 힘이 없습니까?
왜 교회생활이 집에서 T.V 보는 것보다 재미가 없습니까? 무엇보다도 구원의 감격이 없어서입니다. 우리의 지은 죄와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거저 베풀어주시는 은혜에 우리의 마음과 몸이 전율하는 것입니다. 예배에 참석할 때마다 나 같은 죄인에게 이러한 사랑을 베풀어주시다니 하는 뜨거운 감격의 떨림이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종류의 사람들은 무언가 나의 공로를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에 도달하려고 하는 모습들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계속 이루려고 하니까 때로는 불안합니다. 때로는 자신만만하게 교만한 행동을 보입니다. 피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또 한 종류의 사람들은 마치 거저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 천국에 가는 것은 확정된 일이고 거저 신앙이라는 것이 자율로 하는 것인데 알아서 하면 되지 않느냐는 식으로 경건에 사활을 걸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자연히 신앙에 긴장성이 없고 뜨거움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대성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의 구원이 이런 것이 아닙니다.
정말 저와 여러분들이 누가 봐도 죽었다는 상황에서 거저 살려 주었다면 어찌 감사가 없겠으며 그 은혜가 너무도 고마워 내 있는 힘을 다하여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을 가질 것 입니다. 그 어떠한 우리의 허물과 죄도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를 소멸시킬 수 없다 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겸손히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은혜는 차고 넘치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디서 절정을 이루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여러분! 구속이란 말을 아시지요? 값을 지불하고 사신 것을 말합니다. 속전이란 말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값없이 주어졌다고 하여 너무 헐값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거저 받았지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 편에서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들을 건져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의 죽음을 대신 지셨다는 것은 보통의 은혜가 아닙니다. 그야말로 차고 넘치는 은혜가 아니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설명을 하였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그렇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성도들은 신앙생활이 충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차고 넘치는 은혜를 주신 것을 생각하고 우리의 믿음도 넘치고 우리의 봉사도 넘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넘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부르는 405장의 작시자 죤 뉴턴(John Newton)는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여위고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해군에 입대하여 거칠고 방탕한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1748년 3월 10일 배를 타고 아프리카에서 영국으로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성난 폭풍우가 배를 강타하였습니다. 심각한 위험에 처한 뉴톤은 하나님의 임재 하심 앞에 죄를 회개하고 새사람으로 태어나는 중생의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학을 공부하고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 차고 넘치는 은혜를 찬양하였습니다. (우리 다함께 405장 찬송을 부르십시다) 우리가 구원받고 새사람이 된 것이 뉴턴과 같은 형편은 아니었을지라도 지난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교만하게 행하고 방탕하게 행하고 내 마음대로 살다가 나는 잊어버리고 한번도 찾지도 않았는데 강권하시는 그 사랑으로 우리들을 찾아 주시고 만나 주셔서 지금까지 이렇게 은혜의 생활을 하게 하시니 어찌 찬양하지 않겠습니까? 가사를 생각하시면서 불러보십시다. ♬♬♬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아멘}

사랑하는 대성 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은혜, 차고 넘치는 은혜를 받았는데 우리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27절의 말씀을 보십시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구원받은 사람은 절대로 자랑하거나 과시하지 않습니다. 오직 송구한 마음, 감사한 마음만 있을 뿐입니다. 무엇을 주장하기보다는 묵묵히 순종하는 겸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노력으로나 선행으로 구원받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목구멍이 열린 무덤이요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는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피 흘리는데 빠른 우리의 발이 복음을 전하는 복되고 아름다운 발이 되었습니다. 어디를 가도 파멸과 고생이 있어 참 평강을 알지 못하였으나 이제는 어디를 가든지 주의 평강을 전하는 화목의 사신이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저는 다시 한번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하면서 오늘의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구원은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은 우리들의 공로와는 무관하게 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였습니다. 이제 우리의 구원은 확실한 것입니다. 구원의 주도권이 처음부터 하나님께 있었기 때문입 니다. 이제 우리의 자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엡2:8,9). 오직 구원을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릴 뿐입니다.

출처/김홍근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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