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 우리의 뜻 (살전 5:16~22)
우리들은 곧잘 민심이니 천심이니 하는 소리를 우리 주위에서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정치인들은 민심이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가를 파악하느라고 노심초사 하고 있습니다. 금강산 관광 길에 올랐다가 북한의 생트집에 강제로 억류되었다가 5일만 에 어저께 풀려난 민영미 씨 같은 경우에도 북한당국이 모르기는 몰라도 우리 나라는 두 말할 것도 없고 국제사회의 여론이 따가워서 더 이상 억류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각종 선거철만 되면 입후보한 사람들이 겉으로는 민심을 운운하면서 백성들의 마음을 살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윗사람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김심"이란 말이 한동안 유행하였던 것입니다.
즉 대통령의 뜻이 어디에 있느냐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분의 뜻을 헤아리고 그 분의 의중을 살피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대통령도 민심 앞에는 결국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들은 민초들의 탄식에 귀를 기울일줄 알아야 하며 백성들은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은 어디에다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겠습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뜻, 즉 천심이 어디에 있느냐를 위하여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 니다. 하기야 예수 믿는 사람치고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하지 않는 자들이 어디에 있겠습니 까? 아마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가장 많이 하는 말이 "하나님의 뜻"일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하여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금식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고 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기도로 밤을 지새우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목회를 하는 저 자신이 때로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 가로 인하여 몸부림치 기도 하며 어떤 때는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몰라서 갈등을 느낄 때도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과연 우리 대성교회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며 우리 성도들 각자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바로 우리들을 향한 외침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기적으로 찾는다거나 막연하게 찾는다거나 먼데서 찾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과연 성경은 하나님의 뜻, 천심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지를 생각하여 보면서 여러 가지로 어려운 상황에서 천심을 바로 따르는 자들이 되십시다.
I. 항상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분명하게 말하였습니다. 애매모호하게 말하였다거나, 상징적으로 말하였다면 핑계라도 될 수 있겠지만 문자적으로 분명하게 항상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우리들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기뻐할래야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제쳐놓고서라도 나 자신의 주위에서 속이 상하는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기쁨보다는 슬픔이 앞을 가리고 웃음보다는 화를 내는 일들이 많습니다.
찬송가 256장을 불렀습니다만, 그 가사의 내용이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너무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 소리 들려온다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헤매이며 탕자처럼 기진하니 믿는 자여 어이할고 ♬♬♬
우리가 처한 환경만을 바라보면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자녀문제로 기쁨을 잃어버린 가정들이 있습니다. 물질문제로 기쁨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직장문제로 인하여 기쁨을 잃어버린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건강문제로 기쁨을 잃고 실망가운데 나날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무기력한 신앙생활 속에서 기쁨을 잃어버리고 할 수 없이 교회에 왔다갔다하는 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들의 상황을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음을 기억하여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본심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우리가 항상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본 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자꾸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자식 가운데서도 오해하면요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 적어도 3가지 확실한 보장을 가지고 있음을 다시 한번 기억하여 보십시다. 우리가 아무리 밉다 하여도 이 세 가지만은 확실히 보장하여 줍니다. 구원의 보장, 기도응답의 보장, 생활의 보장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지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기쁨은 우리들이 처한 환경의 좋고 나쁨에 의하여 결정되지를 않습니다. 환경여하에 따라서 기쁨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 세 가지를 보장하여 주시는 주 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로마의 옥중에 갇혀 있으면서도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외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근거는 주 안에서입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있다할지라고 저와 여러분이 주 안에 있다면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자녀이며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이 찬송이야말로 주 안에 있는 자만이 부를 수 있는 찬송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처럼 비록 우리가 가진 것이 없고 이루어 놓은 것이 없다하여도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항상 기뻐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우리가 귀가 따갑도록 듣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요 무기'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기도는 인간이 숨을 쉬는 호흡과 같다고 하였으니 이것처럼 중요한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사야 선지자의 외침을 들어보십시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이 말씀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이 이만큼 가치를 발하고 사는 것은 그래도 숨을 쉬고 호흡하고 있기 때문 입니다. 대통령도 호흡이 끊어지면 그 시로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소리 치고 떵떵거리고 살아도 하나님이 우리들의 호흡을 멈추게 하면 어떻게 됩니까? 시편 146:3,4절에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영혼의 호흡이 끊어지면 더 이상 성도의 가치가 없다 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서울의 공기가 좋지를 않다고 하여 호흡을 안하고 살 수 있습니까? 산소가 많은 공기 좋은 곳에서만 호흡하고 있습니까? 아무리 밀폐된 공간에서라도 호흡을 하여야만 살 수 있습니다. 호흡을 하지 않고 4-5분만 지나면 뇌 신경에 산소가 부족하여 식물인간이 된다고 합니다. 호흡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하물며 영적 신앙생활에 기도는 호흡과 같은 것이기에 기도가 끊어진 신앙생활은 식물인간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식물인간과 같습니까? 기도하지 않는 자들이며 바울은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고 하였으니 세상을 즐기며 편안히 제멋대로 사는 자들은 기도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이 천심을 거스리고 사는 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바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처럼 기도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원리를 바로 깨달았기에 금년에도 파수꾼 기도회를 비롯하여 새벽기도회 금요기도회를 강조하고 있지만 어떤 성도들은 마이동풍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저는 이 시간 정중하게 권면을 합니다. 기도를 쉬는 것도 죄라는 사무엘 선지자의 말을 다시 한번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번에 선교지 페루를 탐방하면서 해발 4,000m의 고산지대 올랐다가 고산병에 걸려서 잠시나마 고생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고산병이라는 것은 건강과는 별개의 것으로서 산소가 부족하여 생기는 현상인데 머리가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고 속이 미식거리고 구토를 하게 되고 심하면 죽기도 하는 병이라고 합니다. 저는 구토를 두 번씩이나 하고 머리가 너무 아프고 힘이 들어서 cuzco라는 공항의 응급실에서 산소 마이크까지 쓰게 되었습니다.
산소 마스크를 쓰고 산소를 공급을 받으니 언제 아팠느냐는 식으로 머리가 개운해지고 몸이 정상적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물론 제가 워낙 유명한(?) 사람이 되어서 그런 줄은 알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어떤 목사님 은 헬리콥터를 타고 내려오기도 하고 어떤 분은 코피까지 훌리면서 고생을 했다고 하는데 그래도 저는 여러분들의 기도덕분에 힘입어 비록 고생은 했지만 차질없이 일정을 마치고 무사히 귀국하여서 이렇게 주일을 지키고 있으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선교지 여행을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비록 잠시 고생은 하였습니다만 직접 열악한 선교지에서 선교하시는 분들에 비교하면 어찌 고생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러한 경험을 통하여 소중한 설교자료를 얻었으며 하나님의 세미하신 사랑을 깨닫게 되었으니 어찌 고생이라고만 하겠습니까? 기도가 없으면 마치 산소가 부족한 현상으로 머리가 아프듯이 우리의 신앙생활이 병들 수밖에 없음을 절실히 깨닫고 기도에 더욱 열심을 내시기를 바랍니다.
III.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감사는커녕 불평할 때가 너무도 많이 있었습니다. 문자그대로 모든 일에 감사를 하여야 하지만 좋은 일이 생기면 좋은 일이 생겼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를 크게 하지 못하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이거야말로 기다렸다는 듯 이 하나님과 사람을 향하여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요 영적 이스라엘인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입니다.
사실 저와 여러분들이 감사의 조건을 멀리서 찾으려고 하지 말고 거창한 감사의 조건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가까운 곳에서 찾아보시기를 바랍니다. 6.25의 전쟁이 발발한지도 어언 반세기가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북한은 남침야욕을 버리지 않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여차하면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불안한 상황입니다. 지금이야말로 긴장을 풀지 않고 방심하지 않고 깨어서 기도하여야 하는데도 긴장이 풀어지고 해이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너무도 부요한 생활을 하다보니 배가 불러서 호강에 지쳤습니다.
지금 북한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고 있고 페루에서도 먹을 것이 없어서 구걸을 하는 사람들이 수도라고 하는 리마 거리에도 수두룩하고 아니 세계 도처에서 아우성을 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나라는 먹고 버리는 쓰레기만 하여도 10조나 된다고 하는데 이거야말로 정신 차릴 일이 아니겠습니까? 너나 할 것 없이 배가 부르다보니 망령된 행동만 하고 쓸데없는 짓들만 골라가서 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대한민국을 복주셔서 세계를 복음화 하는데 앞장설 수 있도록 제사장 나라로 세워 주셨건만 우상숭배나 하고 육신의 정욕만을 위하여 배를 불리고 있으니 어찌 하나님이 진노하지 않겠습니까? 어저께 새벽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들의 행한 대로 봐서는 전쟁이 나도 벌써 났어야 하는 상황이지만 하나님의 뜻이 있기에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베풀어서 이렇게 살려 두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남한에 태어나게 해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며 대성교회의 성도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건전하게 양육을 받게 해주시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세상의 하는 일도 큰 일이지만 더욱이 주님께서 피 흘려 세우신 교회의 한 모퉁이에서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니 자다가도 감사할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감사보다는 원망과 불평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감사는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사실을 꼭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 주일에는 반년 동안도 지켜주시고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맥추 감사절로 지키게 됩니다. 사실 금년 상반기를 지나오면서 우리들은 힘겹게 살아온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또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어려운 상황가운데서도 우리 하나님의 선하신 보살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때를 따라서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이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하는 시인의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께 넘치는 감사를 하여야 하겠습니다. 어렵다고 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게을리 하거나 인색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거저 일년만에 한 두 번씩 하는 연례행사처럼 하지 마시고 좀 더 정성을 다하는 감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감사입니다. 감사절을 지킬때마다 너무도 안타까운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물질로 어찌 다 계산할 수 있겠습니까만 우리들이 육신의 일을 위하여서는 분에 넘치는 생활을 하면서도 유독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하면 정말 저 자신부터 낯이 뜨거워서 머리를 들지 못하겠습니다. 마게도냐 성도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한 가난 가운데서도 넘치는 기쁨과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이 대립이 될 때는 언제나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 켜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의 뜻을 과감히 포기하십시다.
출처/김홍근목사 설교 중에서
'◑ 자료 18,185편 ◑ > 자료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흥하는 자, 쇠하는 자 (사무엘하 2:1~17, 3:1) (0) | 2022.09.07 |
---|---|
그 한 가지 (열왕기하 5:1~7) (0) | 2022.09.07 |
하나님의 모성애 (이사야 49:14~21) (0) | 2022.09.07 |
하나님의 은혜, 우리의 반응 (로마서 3:19~31) (0) | 2022.09.07 |
하필이면 왜 나를! (로마서 11:1~12) (0) | 2022.09.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