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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이 비밀

by 【고동엽】 2022.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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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2권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의 구원> 337쪽에 있는 글입니다.

 

 

35. 이 비밀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너희가 전에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느니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로마서 11장 25~36절

 

 

 

 

 가끔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성경 가운데서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지요?" 이렇게 말을 하고는 부럽다는 눈빛으로 저를 쳐다봅니다. "아니요, 모르는 말씀이 너무 많아요. 배우면 배울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은 것 같아요" 하고 대답을 하면 뜻밖이라는 듯이 의아한 시선을 보냅니다. 아마 목사가 성경을 다 아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자기가 아는 본문만 들고 나와서 가르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 주시기 위한 수단으로 허락하신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리켜 '계시' 라고 하는데,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이 뚜껑을 열어 들여다보게 만드신 진리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록된 성경 말씀을 우리가 완전하게 다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기록된 말씀 중에도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는 진리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로마서를 위시해서 바울이 쓴 서신 중에도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풀 수 없는 어려운 내용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놓고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5, 16).
 
 우리도 다 아는 것처럼 우쭐대면 망합니다. 이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떠들면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펼 때마다 겸손해야 합니다. 모르는 것이 있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지금 우리가 읽은 본문 가운데 25, 26절은 우리가 알기 어려운 말씀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난해한 구절을 만나면 설교자는 "이것만이 옳은 해석이다"라는 독선적인 주장을 하거나, 아니면 적당히 얼버무리면서 넘어가려는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두 가지 태도가 다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는 것은 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겸손하게 인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알려 주시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그 지식이 보잘것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이 본문을 가지고 저 자신이 옳다고 믿고 있는 입장에서 이야기하기보다는 좀더 객관적인 입장에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인 우리에게 유대인을 향해 잘난 척하면서 자만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25절).
 
 이 말은 "스스로 지혜 있다는 말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바꿀 수 있습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는 말은 '다 아는 척하며 자랑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시대에 믿음이 좋은 이방인들 가운데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 잘못된 생각을 가진 자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를 안 믿으니까  "이스라엘의 희망은 사라졌다. 이방인인 우리가 너희들 대신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았기 때문에 너희들은 이제 영원히 멸망받는다"는 식으로 거만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었나 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같은 오만한 태도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구원은 이방 사람들의 것과는 좀 다른 독특한 성격의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아직도 완전히 계시가 안 된 비밀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이 비밀"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비밀이라는 말은 완전히 공개가 안된, 아직도 알지 못하는 부분이 남아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의 지혜와 연구를 통해서도 알아내기 어려운 은밀한 무엇이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구원 여부를 놓고 함부로 떠들거나 교만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1장 25절의 '이 비밀'
 
 그러면 이 비밀이 무엇일까요? 25, 26절을 보면서 살펴보도록 합시다. 첫째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완악해서 믿지 않는 것은 특정한 기간까지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영원히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시한부 현상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먼저 지적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25절).
 
 이 말씀을 주의해서 읽어 보십시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는 기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되 무한정으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만 구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두고 계시는 숫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수가 다 찰 때까지 이방 사람들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 두십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하신 이야기에 의하면 잔치 자리가 다 찰 때까지 기다리는 기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잔칫집의 주인이 "이제 자리가 다 찼소. 더 이상 데려오지 마시오"라고 소리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방인의 숫자가 다 차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한 가지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 믿을 기회가 마냥 남아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하나님이 "이제 되었다" 하시면 문이 닫혀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때는 예수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 중에서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정원이 있습니다. 그 숫자를 채울 동안 이스라엘은 계속 예수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완악은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동안 개인적으로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민족적으로는 여전히 완악하여 예수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언제까지 완악할지 모릅니다. 다시 말해서 이방인의 수가 언제쯤 다 차게 될지 그때를 정확하게 모릅니다.
 그러나 추측할 수는 있습니다. 그때는 아마 주의 재림 직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방인 중에서 구원받을 자의 총수가 얼마냐 하는 것도 우리는 모릅니다. 충만한 수,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 속에만 있는 수입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그것을 가르치는 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 역시 하나님의 비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겸허해야 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함부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완악한 태도를 멸시하면서 우쭐거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을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의 완악은 일시적인 현상입니다. 그들이 영원히 버림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로마서 11장 26절에 대한 몇 가지 신학적인 견해들
 
 둘째로, 또 하나의 비밀이자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26절).
 
 이방인 중에서 구원 얻을 자가 다 돌아오면 오랫동안 마음이 완악했던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고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전 국가적으로 개종 사건이 일어난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개인적으로 구원받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이 난제에 대해 확실한 언질을 주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여러 가지 견해들을 내놓고 있습니다. 간추려 보면 대략 일곱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세 가지 견해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온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다'는 것을 영적으로 해석하는 견해입니다. 신약시대에 들어와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타고난 사람들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한국인이나 미국인이나 이제는 혈통에 구애받지 않고 예수 믿는 사람은 모두 다 영적으로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온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중에서 구원받게 될 사람들의 총수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견해는 분명히 문제점이 있습니다. 로마서 9장부터 시작하여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 문제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가 사용하는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타고난 사람들을 통칭하는 민족적인 용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말을 영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26절에 와서 갑자기 '이스라엘'을 영적인 의미로 해석한다는 것은 어딘가 모르게 자연스럽지 못한 데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문제가 있는데 '비밀'이라는 말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방인 가운데서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이 구원 얻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비밀이 될 수 없습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를 믿으면 구원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천하에 알려진 복음입니다. 비밀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분명히 '온 이스라엘의 구원'은 비밀이라고 단서를 붙이고 있습니다. 만일 온 이스라엘이 신약시대에 전 세계를 통해 구원받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면 갑자기 '이 비밀'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온 이스라엘'을 영적인 이스라엘로 해석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견해는 '온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가운데 개인적으로 예수 믿고 돌아오는 '남은 자'의 총수를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택하신 '남은 자'가 있다는 사실은 앞장에서 이미 우리가 배워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남은 자'들이 예수 믿고 돌아올 때 그들을 전부 묶어서 '온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다'고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대단히 멋있는 해석입니다. 또 바람직한 해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26절의 "그리하여"라는 말을 '이와 같이' 혹은 '이런 식으로'라고 번역합니다. 26절 바로 앞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도 어떤 사람은 끝까지 완악하게 되고 어떤 사람은 더러 믿고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믿을 사람은 믿고 안 믿을 사람은 안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인이 구원받는 방법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식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고 돌아온 그들의 총수를 일컬어 '온 이스라엘'이라고 부른다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다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역시 비밀이라는 말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인이 택함을 받아서 돌아오는 자들의 구원 문제를 두고 하나님께서는 비밀이라는 말을 쓰시지 않습니다. 특별히 이 본문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온 이스라엘'을 개인적으로 믿고 구원 얻은 자의 총수로 결론을 내리기는 대단히 어색해 보인다는 것이 솔직한 말입니다.
 한 가지 견해를 더 소개하겠습니다. '온 이스라엘'을 글자 그대로 이스라엘 전 민족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개개인을 초월하여 이스라엘이 전 국가적으로 회개하고 돌아오는 사건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을 위한 구원의 기회가 끝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국가적으로 구원하는 새로운 장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하신 민족이기 때문에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그들을 특별한 방법으로 구원하신다고 보는 것입니다. 26절 이하를 보십시오.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이사야서에 나오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시온이라는 말은 예루살렘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예언은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등장하셔서 그동안 완악해서 믿지 않던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그들의 죄를 다 씻어 주시고, 그들 모두를 돌아오게 하실 찬란한 역사적 사건을 약속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 언약대로라면 반드시 이스라엘 전 민족은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28절).
 
 지금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서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조상 아브라함 때부터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언약을 맺은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29절).
 
 하나님은 자기가 사랑하고 선택하고 자기 자녀로 삼아 주신 자를 중간에 후회하셔서 버린다든지 포기하시는 법이 절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때부터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포기하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결국은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30~32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용을 요약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은 순종하지 않고 있지만 그것이 구원받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인 우리가 순종하지 않고 살다가 긍휼을 입은 것처럼, 이스라엘 역시 반드시 긍휼을 입을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백성이므로 하나님께서 전 민족이 구원 얻을 수 있도록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견해를 지지하는 자들 중에는 전천년설을 믿는 세대주의 계통의 성도들이 많습니다.
 세대주의자들은 하나의 아름다운 각본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 지상 교회는 휴거되고 그와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국가적으로 회개하고 돌아온다는 시나리오입니다. 우리가 이 주장을 그대로 다 받아들여야 할지 아직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을 전제하고 성경을 꿰어 맞춘 듯한 인상이 여기저기 남아 있는 학설이라 우리가 맹종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바울 자신이 비밀이라는 단서를 붙여 남겨 놓은 진리를 어느 개인이나 학파에서 다 깨달은 것처럼 주장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바울은 9장부터 시작해서 11장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구원이 은혜로 택하심을 받은 '남은 자'에 한한다고 설명해 왔습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5절).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7절).
 
 이스라엘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택하신 자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동안 바울은 자기 민족이 국가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말을 바꾸어 전 국가가 예수 믿고 돌아온다는 의미로 '온 이스라엘'이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상 모순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만일 예수님 재림 직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전 국가적으로 개종하는 사건이 일어난다면 재림 직전에 살고 있던 제일 마지막 세대만 구원받는다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이전 세대는 어떻게 되나요? 개인적으로 믿고 돌아온 사람 외에는 다 버림을 당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왜 하필이면 마지막 세대만 사랑하셔서 구원하실까요? 그렇다면 그 이전 세대 이스라엘은 사랑받을 만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었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학설은 예수님의 말씀과도 일치하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8장 11,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8:11, 12).
 
 이 말씀에서 주님은 국가적으로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다는 언질을 주지 않고 계십니다. 오히려 그들 중에 상당수가 버림을 당한다고 경고하고 계십니다.
 이상과 같이 분명히 풀 수 없는 난제가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많은 교회가 세 번째 견해를 지지해 왔습니다. 그들은 온 이스라엘의 구원이 곧 국가적인 개종 사건이 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1948년 5월에 팔레스타인 지역에 기적적으로 이스라엘 국가가 창설되자 그들은 굉장히 흥분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약 2천 년 만에 자기 땅을 찾아 나라를 세웠으니 불가사의한 기적이 일어난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세계 역사상 2천여 년 동안 기적이 일어난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세계 역사상 2천여 년 동안 지구 도처에 흩어져 있으면서 혈통과 언어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가 나라까지 되찾은 민족은 이스라엘을 빼놓고는 전무할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가 이때부터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를 개인적으로 보기보다 국가적으로 보는 입장으로 돌아서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해 특별한 계획을 가지신 것으로 느꼈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 국가 건설은 하나님이 그 백성을 국가적으로 구원하시기 위해서 준비 작업을 하시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지금 구소련을 위시해서 에티오피아 등지에서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모여들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것 역시 보통 사건이 아닌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지구 저끝에서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으로 몰려드는 것을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예비 조치 중의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신념을 가진 자들을 일컬어 '시온주의자'라고 합니다.
 시온주의자들은 이스라엘이 국가적으로 회개하고 돌아오고 팔레스타인에 하나님의 지상 왕국이 건설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망명자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집결하는 것을 성경의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고 망명자들을 도와 주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1992년 1월 27일자 <워싱턴 타임즈>에 "미국의 7천만 그리스도인이 부시에게 이스라엘 난민촌 건립을 위해 100억 달러 차관을 허락할 것을 촉구하다"라는 머릿기사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미국 교회가 정부를 향해 이스라엘 난민들을 도와 주라고 압력을 가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곳에서 국가적인 구원 드라마가 일어나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온주의자들의 견해를 앞으로 계속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최근 들어서 시온주의자들에게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최근에 조사한 자료를 보면 그들 중에 40%가 마음이 변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주변 아랍 국가 사람들을 너무나 비인도적으로 다루는 것을 보고 회의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중동에 자리를 잡고 나서부터 그 주변에 있는 아랍인들이 얼마나 고초를 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여호수아가 가나안으로 진격해 들어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남아 있는 일곱 족속을 씨도 남기지 않고 다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을 근거하여 오늘날 이스라엘이 "가나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땅이다. 주변에 있는 족속들을 다 몰아내야 한다"는 철저한 종교적 신앙을 가지고 행동하기 때문에 자연히 가나안의 후손들을 비정하고 난폭하게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과연 그들의 태도를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나 아랍 사람들 중에는 신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이 가나안의 피가 흐른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믿든 안 믿든 상관없이 가나안 사람들을 씨를 말려야 할 대상으로 보고 계실까요? 이스라엘 사람만 끝까지 우대해서 구원하려고 하실까요? 대단히 의심스럽게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온주의자들 중에서도 똑같은 회의를 갖기 시작한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최근들어 이스라엘에 대해 노골적으로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모순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그들의 특별한 위치 때문에 마지막 때에 특별한 방법으로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우세합니다. 독특한 그 무엇이 없다면 바울이 "이 비밀을 알기 원한다"는 말을 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9장부터 시작하여 바울이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고 돌아올 날의 아름다운 꿈을 여기저기서 이야기하는 것을 참고해 보아도 틀림없이 무엇인가 있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을 향해 자랑하거나 교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난 2천 년 동안에는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믿고 돌아오는 사람들만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는 무언가 우리가 모르는 어떤 방법을 통해서 그들을 구원하실 계획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는 마치 사진은 찍었지만 아직 현상을 하지 않아서 정확하게 그림을 보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완전히 드러나지 않고 있는 무엇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언제까지 이스라엘이 완악해질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이방인의 충족한 수가 몇 명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돌아오는 것이 국가적이냐, 개인적이냐 하는 것도 정확하게 선을 그을 수 없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 현상을 하지 않아서 잘 알 수 없는 사진과 흡사합니다. 이것은 충분히 비밀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정도로 만족해야 합니다. 바울도 더 이상 자세한 언급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알려 주실 때까지 이 정도로 만족하고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
 
 우리가 완전한 해답을 얻지 못한다고 해서 잘못되었다거나 불행하다거나 부끄러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 이유를 33절 이하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가 어려운 문제를 완전하게 풀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위대한 지성의 소유자였으나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는 마치 기하 문제를 풀듯이 시원하게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는 아직도 베일에 가리워져 있는 비밀로 남아 있습니다. 약간의 대답을 했을 뿐입니다. 그는 속시원하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신학이 찬양으로 바뀌는 것을 봅니다.
 바울이 왜 찬양합니까? 그가 완전한 대답을 모르면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36절).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시요, 보존자시요, 목적 그 자체이십니다. 바울은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소리 높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모든 것이 하나님을 통해 존재하고 하나님 안에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하나님이야말로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하나님 안에 모든 우주가 들어 있고 하나님 안에 모든 세계 역사의 문제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 광대하시고 놀라우시고 지혜로우신 하나님을 바울이 묵상할 때 아직도 밝혀지지 못한 비밀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문제가 안 되었던 것입니다. 붓을 던지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찬양하고 싶은 심령이 그의 가슴속에서 끓어올랐던 것입니다.
 바울의 찬양을 다시 들어 보십시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33절).
 
 할렐루야!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부요하고 그의 부요의 깊이는 아무도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그 깊은 지혜로부터 나온 그의 판단을 누가 헤아리며 누가 그의 길을 끝까지 추적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서 나온 진리일진대 하나님이 선명하게 보여 주시기 전에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비밀'에는 신비스럽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신비로움이 그 진리 안에 있는 이상 우리가 모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아직 하나님의 광대하신 품 속에 간직되어 있는 진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때가 되면 밝혀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34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34절).
 
 누가 감히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고 떠벌일 수 있겠습니까? 누가 하나님의 의논 상대가 될 수 있겠습니까? 누가 하나님과 마주앉아서 토론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35절).
 
 누가 하나님의 마음이 충족할 만큼 무엇인가를 드려서 인정받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 있다 한들 그의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절대로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찬양으로 마무리를 하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그의 계획이 얼마나 장엄하고 신비한가를 조금이나마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 알지 못하는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가 모르는 것이 있어도 찬양할 수 있는 것은 그 비밀이 만물의 시작이요, 끝이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바울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비밀이 만유의 주가 되시고 만유의 목적이 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믿을 때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찬양하라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가끔 만나는 큰 위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더 알고 싶다는 호기심을 절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호기심을 절제하지 못해 어려운 성경도 억지로 풀려고 덤비다가 잘못된 길에 빠져들게 됩니다. 또 경계해야 할 위험이 있습니다. '다 안다'고 하는 교만입니다. 이단의 특징 중의 하나가 '다 안다', '나만 안다'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주의하고 있으면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는 분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은 분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별을 잘 해야 합니다. 성령의 은사인지 마귀의 장난인지를 잘 살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들을 분별할 수 있는 방법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먼저 그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해 보십시오. "이 병이 나을 수 있을까요? 낫는다면 언제쯤 나을까요?" 하고 물어 보세요. "예, 꼭 낫습니다. 2주면 끝납니다"라고 시원하게 대답하는 사람은 가짜라고 해도 거의 틀림없습니다. 자기가 무엇이관데 다 압니까? 그는 하나님의 손에 쓰임받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병을 고쳐 주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을 꼭 낫게 하실지, 언제까지 고쳐 주실지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하면서 "기다려 봅시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진짜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도 가짜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다 안다고 하면 안 속을 것 같으니까 그렇게 연막전을 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1992년 10월 29일 새벽 1시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하던 '다미선교회' 추종자들은 재림에 관한 한 다 안다고 떠벌리던 사람들입니다. 그 단체에 소속된 어느 목사의 설교를 잠깐 인용하겠습니다. "요즘 목사들 몰라도 너무 몰라요. 환란 전에 휴거가 있다느니 후에 있다느니 하면서 야단들인데 말씀에 대해서 너무 연구를 하지 않아요.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른다고 하니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10월에 예수님이 재림하고 휴거하는 것은 성서적임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잠실 성회에 참석했을 때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렸습니다. 10월 29일 새벽 한 시에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들려 주셨습니다. 이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라고 나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진리입니다." 이런 식으로 마구 떠들어댑니다. 얼마나 허무맹랑합니까?
 칼뱅은 본문 33절을 가지고 참 의미 깊은 말을 했습니다. "'깊도다' 하는 이 말은 인간의 거만을 한 번에 때려눕히는 말이다. 우리의 이성이 미칠 수 없는 깊이에 관한 어떤 진리를 말할 때는 그때마다 우리의 생각과 혀에 재갈을 물려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만큼만 알고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찬양으로 끝을 맺어야 한다" 옳은 말입니다.
 바울이 어려운 문제를 다루다가 갑자기 붓을 던지고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하고 찬양하는 모습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그는 삼층천에 올라가서 신비스러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바울도 자기가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억지로 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그토록 겸손했다면 우리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건방진 호기심은 마귀의 화살입니다. 겸손한 찬양은 성령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안에 기록된 구원의 도리가 만물의 시작이요, 끝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피조물에게는 모든 것이 신비스러울 뿐입니다. 비록 잘 모르는 것이 있다 할지라도 찬양하십시오. 아직 드러나지 아니한 진리에 대해서도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기다리십시오.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도 우리는 지켜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베일을 열어 주시는 그 날까지 우리는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로마서를 강해하면서 제가 스스로 놀란 것이 있습니다. 강해하면 할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제가 설명할 수 없는 진리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36절 끝에 나오는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출처 : 나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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