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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출발 (히 12:1-3)

by 【고동엽】 2022. 9. 5.

새로운 출발  (히 12:1-3)

이제 부활주일이 지났습니다. 부활절은 신앙과 삶의 분수령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전과 부활 이후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부활 전에는 제자들의 모습만 보아도 구태의연, 낡은 사고, 구습과 무능, 두려움의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제자들의 모습은 새 질서, 새 삶, 새 영광, 새 능력이 주어지는 삶을 살았습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새 삶, 새 능력을 입고 삶을 다시 시작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신앙의 삶은 마치 경주와 같습니다. 사도바울은 신앙의 삶을 경주에 비유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가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의의면류관이 주어질 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끝까지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마침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다”고 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온갖 어려움과 박해와 핍박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런 어려움을 당하던 신앙인들은 하나님이 모른척하고 무관심하고 침묵하신다고 불평했습니다. 그 결과 실망자도 나타나고 탈락자도 나타나고 배교자도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본서를 쓰게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끝까지 참으사 마침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1. 신앙의 삶은 마라톤

신앙뿐 아니고 인생도 경주와 비슷합니다. 어떤 분은 인생을 축구경기와 같다고 했습니다. 25세까지는 연습기간이고 50세까지는 전반전이고 75세까지는 후반전이고 100세까지는 연장전이라고 했습니다. 결승골은 반드시 전반전 후반전에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 연장전에서도 골이 터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생을 축구경기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신앙의 경주는 달리는 마라톤과 비유하기도 합니다. 마라톤을 하다 보면 도중에 주저앉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먼 길을 뛰다 보면 숫한 장애물이 오고 유혹이 찾아오고 지치게 되고 마침내는 탈진되어 도중에 넘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힘차게 출발을 하지만 소수만 완주하게 됩니다. 완주 자들에게는 몇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인내입니다. 뛰는 동안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과 탈진과 당장 주저앉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인내하며 계속 뜁니다. 그런 인내가 없으면 오늘 이 세상에서는 한 가지도 해 낼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격려”입니다. 뛸 때에는 주위에서 사람들이 격려를 합니다. 가족들이 보고 자식들이 보고 격려를 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포기할 수 있습니까. 또 하나는 “상”입니다. 앞에 있는 상 때문에 뛸 수 있습니다. 상이 사람으로 하여금 분발하게 하고 더 뛰게 만듭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직후 금메달을 딴 선수들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끝까지 인내할 수 있었습니까” 그랬더니 선수들이 한결같이 대답한 내용은 “상”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하나는 “자존심”입니다. 도중에 주저앉으면 창피하고 부끄럽습니다. 고국의 부모들에게, 아는 사람들에게, 국민에게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그러니까 입을 악물고 뛰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경주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 하다보면 온갖 장애물이 오고 유혹이 오고 지치게 하는 요소들이 찾아옵니다. 피곤하고 탈진해서 탈락도 하고 배교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의 경주는 마치 마라톤과 같다고 말합니다.  

2.  신앙의 경기 잘 하는 법

1) 허다한 증인들

1절을 보면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싸인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라고 했습니다. 그 증인들이 11장에 나와 있습니다. 4절부터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에녹은, 노아는, 아브라함은, 이삭은 , 야곱은 …….”하고 말씀하고 32절을 보면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 하리 로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의 선조들입니다. 이분들은 모두 신앙의 경주를 잘 하고 하나님 옆에 가 있는 믿음의 선진들입니다. 나만 혼자 어려움을 당하는 것으로 알지만 그들도 다 그 어려움을 겪었고 끝내 승리했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 너희도 끝까지 뛰어 승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만 믿음의 길에서 고생하고 핍박받는 것 같이 생각되지만 아닙니다. 심지어는 예수님 까지도 그런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많은 믿음의 선진들도 다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고난당할 때 주님은 보고 계시다고 했습니다. 스데반이 고난당할 때 주님이 일어서서 보셨다고 했습니다. 고로 끝까지 뛰어 승리하라고 합니다.  

2) 벗으라

1절을 보면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라”고 했습니다. 경주자는 가볍게 입고 뛰어야 합니다. 몇 가지 벗을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만”입니다. 이 자만이 신앙의 길에서 넘어지게 하고 탈락하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자만은 인생의 길에도 전혀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또 “지나친 애착과 집착”입니다. 이 애착이나 집착이 얼마나 우리를 얽어매는지 모릅니다. 연속극에 애착만 있어도 저녁예배에 나올 수가 없습니다. 어떤 교회 할머니는 감사헌금을 드렸는데 소원을 기록한 것을 보니까 “주몽을 죽지 않게 해 주세요”하고 헌금을 드렸다고 합니다. 그러니 주몽 연속극이 있는 날 교회에 가겠습니까. 어느 부흥사는 밤에 설교를 일찍 끝내고 들어갔다고 합니다. 연속극 보려고 말입니다. 지나친 집착이나 애착은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옭아맵니다. 그래서 벗어던져야 합니다. 구습도, 죄도, 구태의연함도, 원수맺음도, 원망들도 다 벗어 던져야 홀가분하게 신앙의 경주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무거운 짐을 벗으라고 했습니다. 무거운 짐이 죄이고 구태의연함이고 구습입니다. 이것들을 지고서는 자유롭게 뛸 수가 없습니다. 신앙의 삶은 정신이 복잡하고 마음이 산란하면 못합니다. 그래서 무거운 것을 벗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벗는 것만 가지고도 부족합니다. 연단도 필요하고 훈련도 필요합니다. 목표를 향해 가려면 반드시 훈련이 필요합니다. 신앙인이 가야할 길은 아스팔트길이 아니고 때로 전쟁터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재림할 때까지 달려야 합니다. 그 길이 너무 길고 멉니다. 훈련이 없으면 도중에 포기하게 되고 좌절하게 됩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때 히틀러가 나치정신으로 무장한 선수들로 모든 종목을 제패하려는 야망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 계획을 망쳐놓은 사람은 미국의 육상선수 제시 오웬스였습니다. 이 선수가 육상 100m, 200m, 멀리 뛰기, 400m을 모두 제패했습니다. 그때 미국이 흥분했고 히틀러는 격분했습니다. 올림픽이 끝나고 100m 결승전 소감을 물었을 때 그 선수가 대답하기를 “나는 10초를 위해서 평생 훈련했다”고 했습니다. 단 100m 그 짧은 레이스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수년간 헌신하고 훈련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의 길, 신앙의 길은 그 보다 훨씬 더 깁니다. 고로 연습이 필요합니다.

3) 주를 바라보라

이 말씀은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본문을 보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2)고 했습니다. 예수는 믿음의 목표이고 목적이고 중심입니다. 신앙의 삶에서 이점이 분명해야 합니다. 이점이 분명하지 않으면 도중에 탈락하게 됩니다. 여러분, 신앙의 길에서 목표가 분명하지 못해서 도중에 탈락하고 넘어진 사람들이 한두 사람입니까.

어느 교회에서 1,500명이 모였는데 목사님이 청중들에게 물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주세요, 여러분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독교에 대한 생각이나 반감이나 의심이나 모두를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그랬더니 “그리스도인은 위선적인 사람들입니다. 말과 행동이 다릅니다.”하고 말했습니다. 또 “목사가 소명대로 살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좋지 않은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하고 말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알겠습니다, 모두 사실입니다, 신자들이 위선자 일 수 있습니다, 목사가 소명대로 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여러분들의 말을 듣고 솔직히 느끼는 점은 여러분 중에 한 사람도 예수에 대해서 말씀하는 분이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발견해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니고, 사람의 모습이 어떤 것이냐가 아니고 교회 안에서 찾을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일입니다“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말은 목표가 잘못되었다는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 목표가 잘못되니까 예수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보고 발견해서 결국 엉뚱한 것에 시험 들고 불평하다가 스스로 시험이 되어 낙오하고 탈락하고 넘어지는 사람들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신앙의 길에서 예수가 목적이고 목표이고 예수가 나의 중심입니다.

3. 구비할 장비

1) 성경

성경은 인생의 가이드이고 안내자이고 나침판입니다. 성경 속에 길이 나타나 있고 목표가 주어져 있습니다. 군인에게 나침판이 필요하듯, 비행기에서, 배에서, 광야에서, 사막에서 나침판이 필요하듯이 신앙인의 길에도 말씀을 묵상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날그날 묵상하고 섭취하는 말씀이 양식이 되고 자양분이 됩니다. 어떤 분은 매일 아침 기도가 끝난 후에는 성경을 펼쳐서 눈에 보이는 말씀을 그날 하루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지침으로 알고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주어진 그 말씀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이 그렇게 행복하다고 고백합니다. 그 삶이 성숙해서 그렇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가까이 하고 묵상하고 살아가도 것도 축복입니다.

어느 집사님이 그 이야기를 듣고 생각 해 보니 그럴듯했습니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해 보자 하고 성경을 펼치니까 마태복음27장5절이 눈에 띄었습니다. “유다가 스스로 목매달아 죽으니라” 그래서 다시 펼치니까 누가복음10장37절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너도 이같이 하라” 신앙의 삶은 흉내 내는 삶이 아니고 소유하는 삶이고 누리는 삶입니다. 신앙의 경주에서 이 말씀묵상 생활이 참 중요합니다. 그 말씀 속에 나의 길이, 목적이, 목표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 성경 속에 들어있는 목표와 목적들이 혼란에 빠지거나 길을 잘못 들은 사람들에게 그 길을, 방향을 새롭게 알려줍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나침반이고 길 안내자입니다.


2) 기도

기도는 비상연락망입니다. 배에는 비상구와 구명보트가 있듯이 비행기에는 낙하용품과 산소마스크가 있듯이 건물마다 화재를 대비해서 소화전을 비치하듯이 삶에도 위기관리를 위한 기구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내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파악하고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성령이 도우시고 인도하십니다. 그 삶이 신앙의 삶입니다.  

미국에서 어느 청년이 아주 철저한 어머니의 신앙생활에 반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집을 나갑니다. 아들이 집을 나가겠다고 하니까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아들아,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할 것이다, 무슨 일을 하다가 암담한 순간에 직면하거든 하나님께 기도하거라, 그러면 길이 열릴 것이다.” 아들은 집을 나가 자유분방하게 살며 죄를 짓고 어느 날 암담한 순간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살하려고 호텔방에 들어갔다가 테이블 위해 놓여있는 성경책을 발견하고 어머니가 생각나서 마지막으로 성경이나 읽어보자 하고 성경을 펼치는 순간 눈물이 흐르면서 어려움에 직면하거든 기도하라는 어머니의 부탁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기도한 것이 회심을 하게 되어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 젊은이가 후에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가 된 R, A 토레이 목사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을 길을 잃은 사람에게 나침반이고 길 안내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기도생활은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는 생활입니다. 사탄은 하나님과의 사이를 떼어 놓으려고 기도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기가 참 힘든 것입니다. 좀 기도하려고 하면 바쁜 일이 발생하고 잡념이 들어오게 하고 잠이 오게 하고 마음이 산란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무엘 타드워크라는 분은 “사탄의 오직 관심은 기도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사탄은 기도 없는 교회, 기도 없는 성경공부, 기도 없는 교회행사에 안심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기도할 때 떤다.”고 했습니다. 신앙의 경주에서 이 기도가 절대적입니다. 기도는 비상연락망과 같은 것입니다.


3) 성령임재

신앙의 길에서 이 성령의 인도를 받고 지원을 받는 일은 절대적입니다. 어린 아이는 부모가 곁에 있어주는 것이 절대적입니다. 미성년자에게는 보호자가 곁에 있어주는 것이 절대적입니다. 그런데 신앙인에게 있어서는 성령이 함께 하셔서 인도하시고 이끌어주시는 것이 절대적입니다. 성령은 우리 신앙인의 도우미입니다. 성령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도우려 오신 영이십니다.

인생의 길에는 악의 실제가 존재합니다. 그 악이 외부로부터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앞에 숫한 도전들이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 악이 나의 내부로부터 오기도 합니다. 분노, 갈등, 질투, 탐심, 유혹 등은 모두 나의 내부로부터 오는 장애물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앞에 실패도 고난도 질투심도 탐심도 옵니다. 오늘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이 아니고 설사가 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얼룩지고 상처가 자꾸만 도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가야할 길은 멉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실 때까지 이 길을 가야 합니다. 가는 동안 나와 하나님과의 사이를 떼어놓으려는 적대적인 압력들이 참 많습니다. 거센 물결이 몰려오면 강둑의 약한 부분이 터지듯이 우리의 약한 부분이 무너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하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신 이유가 그래서 입니다.  

인생은 경주와 같습니다. 예수님이 그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뛰어 승리하여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11장에서 믿음의 선진들도 그렇게 뛰었다고 일일이 열거하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렇게 뛰라고 권고합니다. 뛰다가 힘들 때는 성령이 도우미로 오셔서 인도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이제 새로운 부활의 은혜를 입어 새 출발하시는 축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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