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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3권 <구원받은 자는 이렇게 산다> 151쪽에 있는 글입니다.
43. 교회 안에서 왜 분쟁이 일어나는가?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로마서 14장 1-4절
교회를 일컬어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수님의 몸의 지체가 되어서 아름다운 영적 공동체를 이룬 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가끔 대두되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내적인 분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 간에 분쟁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 의견 대립이 생긴 후에 당이 갈리고 나중에는 교회가 두셋으로 나누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사를 연구한 어느 학자는 해방 후 50년밖에 안 되는 한국 교회의 역사를 '교회 분열사' 라고 요약하여 표현하였습니다. 한국 교회가 왜 분열했느냐 하는 것을 연구하면 해방 후 반세기의 역사를 거의 다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지금도 열 교회 중에 다섯, 여섯은 성도끼리 알력과 편당의 낌새를 보이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만나면 겉으로는 웃고 인사를 하지만 마음은 돌아서 있습니다. 왜 우리나라 교회들이 이 모양인지 정말 답답합니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초대 교회들을 보면 여기저기 분열의 상처를 안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교회가 고린도교회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성령의 역사가 두드러지게 나타난 교회였습니다. 방언을 하는 교인들이 태반이고 병 고치는 역사가 일어나고 예언을 하는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교회 안에 분쟁이 생겼습니다. 지도자 문제가 발단이 되어 싸우다가 편당이 생기고 결국 서로 고소하는 사태까지 갔습니다. 교회가 크면 지도자가 여러 사람 있을 수 있는데, 말하자면 이런 식으로 해서 알력이 시작된 것입니다. "나는 베드로한테 세례받았다. 너는 누구한테 세례받았느냐?" "나는 바울이 시무할 때 전도받고 말씀을 배웠다. 너를 지도한 교역자는 누구냐?" 이런 식으로 서로를 확인하다가 편이 갈리게 되고 싸움이 벌어진 것입니다. 얼마나 추태입니까?
한편 갈라디아교회는 신학적인 문제 때문에 내분이 일어났습니다. 율법을 지켜야 되느냐, 안 지켜도 되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서로 물고 뜯는 사태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빌립보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은혜가 많은 교회로 소문이 나 있던 빌립보교회도 결국 화목이 깨어져 버렸습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라고 하는 똑똑한 여인 두 사람이 서로 반목하는 바람에 분쟁이 생긴 것입니다. 그 당시 교회가 크면 얼마나 컸겠습니까? 작은 공동체 안에서 영향력 있는 여인 두 사람이 반목을 하니 결국 교회가 두 갈래로 나누어진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골로새교회와 에베소교회에서도 약간의 분열의 낌새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로마교회의 상황은 어떠했을까요? 로마교회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서로 화합하지 못하는 두 부류가 교회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두 부류 사이에는 분쟁이 생겨서 골이 점점 깊어지고 있다는 소문을 들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은혜롭게 다루기 위해 그는 14장, 15장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로마교회를 위시해서 초대 교회가 화목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아름다운 초창기의 교회들이 왜 반목과 분열의 상처를 주고받는 어려움을 당해야 했습니까? 그것은 교회에 들어와 있던 성도들의 배경을 살펴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
당시에는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가 함께 모이는 교회가 대부분이었는데, 유대인 신자는 유대교에 몸담고 있다가 바울의 전도를 받고 신자가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 신자는 유대교의 배경이 전혀 없이 예수 믿게 된 비유대인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너무나 상이한 두 그룹의 사람들이 한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충돌하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는 겉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내면으로 보면 흰색과 검은색이 다르듯이 완전히 대조가 되는 신분들이었습니다. 가령 일본 사람들이 예수 믿고 사랑의교회에 등록했다고 합시다. 한 교회 안에서 한국인과 일본인처럼 너무나 이질적인 두 부류의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오래 같이 하다 보면 충돌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서로 조화가 되기 어려운 민족적, 문화적 요소들이, 믿는다고 해서 하루 아침에 다 씻겨져버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가 이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어릴 때부터 율법을 엄하게 지키면서 성장합니다. 예수를 믿은 다음에도 엄한 율법주의를 고수하던 옛날 버릇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 로마교회 안에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음식을 가려먹는 습관을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정한 음식, 부정한 음식을 어려서부터 가려먹었기 때문에 예수를 믿은 다음에도 종교적 관습을 쉽사리 버리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로마교회 안에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이전의 관습을 고집하는 유대인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기를 먹는 것은 죄다. 경건하게 살려면 채식을 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내세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고기를 먹는 신자들을 노골적으로 비난했습니다.
예수 믿고 변화를 받아도 어려서부터 몸에 밴 습관은 하루 아침에 버릴 수 없나 봅니다. 위대한 사도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수제자로 손꼽히는 사람이었지만 음식 먹는 문제에 있어서는 옛날 습관을 고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베드로가 본 환상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네 발 짐승, 곤충, 날짐승 등을 보자기에 담아 베드로 앞에 내려놓고 그것들을 잡아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보자기 안을 보니 먹어도 되는 것도 있지만 손을 댈 수 없는 부정한 것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행 10:14) 하고 거절했습니다. 그때 무슨 소리가 들렸습니까?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15).
베드로는 복음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음식을 놓고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고 따지는 옛 습관을 여전히 버리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로마교회 안에 있는 유대인 신자들도 율법에 매여서 종살이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음식을 가려먹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절기를 지키는 문제에 있어서도 율법에 매여 있었습니다. 안식일이나 유월절을 지키지 않으면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하는 유대인 신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로마교회 안에 있는 이방인 신자들은 그들과 완전히 반대가 되는 행동을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자유인이다. 음식을 먹느냐, 안 먹느냐를 가지고 구속당할 이유가 없다. 안식일은 유대인 당신들이나 지켜라. 우리는 어떤 날에 매이지 않는다.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천국에 가는데 왜 안식일에 매여 있어야 하는가?" 자연히 그들은 유대인들과 반목하는 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방인 신자들은 유대인 신자들을 멸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믿음이 좋은 줄 알았더니 율법에 매여 사는구먼." 한편 유대인들은 이방인 신자들을 보고 "저것들 저래도 경건생활 한다고? 입만 살아서 돌아다니는 것들이..." 하고 비판했습니다. 서로가 물고 뜯는 것입니다.
믿음이 강한 자와 믿음이 약한 자
바울은 이 두 부류의 사람을 놓고 재미있는 별명을 한 가지씩 붙여 주었습니다. 1절부터 4절에 나옵니다. 뭐라고 했습니까? '믿음이 연약한 자', '믿음이 강한 자'. 바울은 '옳은 자', '그른 자' 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다투는 문제는 죄냐, 죄가 아니냐에 걸리는 문제가 아니고 단순히 믿음이 좋으냐, 믿음이 약하냐에 따라 일어나는 문제라고 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냐, 비진리냐 하고 논할 문젯거리가 안된다는 말입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그들이 다투는 문제들은 본질적인 것이라기보다 부수적인 것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하나님이 하라고 명령하신 것을 하지 않으면 죄가 되고,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어기면 죄가 됩니다. 그러나 음식이나 절기 문제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 그림자처럼 잠깐 허락되었던 규례이므로 믿음으로 구원 얻는 새로운 길이 열린 지금에는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는 낡은 관습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림자 같은 제도에서 벗어나 자유할 수 있어야 하는데,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런 사람들을 일컬어서 '믿음이 약한 자' 라고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 안에서 날이니 음식이니 하는 것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함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즐기는 자들은 분명히 '믿음이 강한 자' 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과거의 습관을 못 버리는 믿음이니까 그 믿음은 약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지키고 안 지키고가 믿음보다 앞선다고 생각하므로 그 믿음은 약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들의 손에 들려 준 자유도 불안해서 잘 누리지를 못하므로 믿음이 약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놓고도 은혜로 풀지 못하고 자기 노력으로 풀려고 하는 사람들이므로 믿음이 약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를 앞세우기보다 자기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는가를 앞세우는 사람들이므로 그 믿음은 약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과는 정반대로 옛날의 규례, 법규, 전통, 습관에서 벗어나 자유할 수 있는 사람의 믿음은 강한 것입니다. 아무리 오랜 전통이라도, 그리고 나쁘지 않은 종교 행위라도 불필요한 것이면 과감하게 벗어던지고 오직 예수만을 높이는 자들은 분명히 믿음이 강한 사람입니다. 고기를 먹었다고 해서 가책을 받는 것도 없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지옥 가지 않을까 하고 불안해하지도 않고 자유스럽게 신앙생활하니까 믿음이 강한 사람입니다. 이처럼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 항상 감사하게 받는 말씀이 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5).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이와 같은 말씀들이 그들에게 삶의 지침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자유했기 때문에 믿음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믿음이 좋고 나쁘고에 의해서 일어나는 이 부수적인 문제로 인해서 교회가 갈등하는 것은 양쪽 모두에게 다 슬픈 일입니다. 차라리 죄냐 죄가 아니냐, 진리냐 진리냐 아니냐를 놓고 서로 분쟁을 한다면 싸울 가치가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순전히 믿음이 강하냐, 약하냐에 따라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형제끼리 서로가 물고 뜯는다는 것은 답답하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은 지금 이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회색지대에 속한 문제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성격의 문제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는 여러 가지 논쟁거리를 살펴보면, 정확히 옳다고도 말하기 어렵고 잘못되었다고도 말하기 어려운 회색지대에 있는 이야기들을 가지고 싸우는 예가 적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냐, 비진리냐를 놓고 따질 만한 문제가 아닌 것들을 놓고 싸우고, 죄가 되는 것도 아닌데 마치 죄가 되는 것처럼 싸운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들은 서로의 견해 차이에서 생긴 것들입니다. 아니면 과거 전통이나 습관에서 굳어진 것들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 회색지대에 속하는 것을 성경의 진리인 것처럼 들고 나오는 자들 때문에 교회가 분열되는 예가 많습니다.
자기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가, 어떤 교파, 어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느냐에 따라 똑같은 문제를 놓고도 의견을 달리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견해 차이 때문에 교회 안에 보수파와 진보파 혹은 강경파와 온건파가 생기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비교적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목소리를 크게 높이는 편입니다. 보수적이고 외곬으로 믿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믿음이 독실하다는 평을 듣습니다. 그러나 대개 보면 성경의 진리를 가지고 독실한 것보다는 자기의 견해, 입장, 오랜 관습 등을 강하게 내세우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 교회의 과거를 돌아보면 이런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중학교에 다닐 때 보았던 교회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은 성도들에게 이런 식으로 가르쳤습니다. "주일 아침에는 반드시 한 시간 이상 말씀 보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도 못하는 사람이 무슨 신자입니까?" 자연히 교회 안에서 성도들끼리 모이면 "오늘 몇 시간 성경 보았어요? 몇 시간 기도했어요?" 하고 묻곤 했습니다. 그러면 한 시간 이상 성경 보고 기도한 사람은 신이 나서 "나는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일곱 시까지 성경 보고 기도했는데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라고 말하고, 그렇게 못한 사람은 '나는 주일도 제대로 못 지키고 신앙생활도 바로 못하는구나' 하고 기가 죽어버립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계속 강단에서 소리 높여 외칩니다. "거룩한 주일에 한 시간도 성경 안 보고, 한 시간도 기도 못한 사람이 성가대에 앉아서 성가를 부를 수 있습니까?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자격이 있습니까?" 이렇게 혈기를 돋우어서 이야기합니다.
그러니 자연히 어떻게 됩니까? 교회 안에서 그 목사님의 견해대로 따라하는 사람은 잘 믿는 사람으로 부각되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못 따라오는 사람은 잘못 믿는 사람으로 낙인 찍혀버립니다. 이것이 결국은 서로 반목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소위 잘못 믿는다는 사람들은 "두 시간 기도하고 말씀 본다고 천당 가나?" 라고 상대를 비판하고, 소위 잘 믿는다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을 깔보는 듯한 말을 예사로 하면서 서로 헐뜯게 된 것입니다.
우리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성경 어디에 주일 아침에 한 시간 기도하고 한 시간 성경 보라는 데가 있나요? 그게 성경적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목사의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그래도 두 시간만 성경 보고 기도하라고 했기에 다행이지 열두 시간 하라고 했으면 큰일날 뻔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목사의 견해로, 강조할 수도 있고 안 할수도 있다는 차원에서 교회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내세우면 교회 안에서 분쟁이 일어나기 쉽습니다.
이왕 먹고 마시는 문제가 나왔으니까 술, 담배 이야기를 좀 합시다. 우리 중에 술이라고 하는 것을 냄새만 맡아도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소리치는 분이 있으면 잘 들으세요. 들으면서 옥 목사가 혹시 살짝 돌지 않았나라고 생각하지는 마세요.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것이 좋으냐, 나쁘냐 하는 것은 얼마든지 논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것이 죄냐, 아니냐를 가지고 논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술 마시는 사람을 보고 죄를 범한 사람처럼 정죄하지 마세요. 담배를 피워 물고 다니는 사람을 보고 아예 신앙이 없는 사람을 대하듯 비판하지 마세요. 만약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면 스스로 형제를 정죄하는 것이 됩니다. 창세기 1장 1절부터 요한계시록 22장 마지막 절까지 다 뒤져 보세요. 담배 피우는 것을 죄라고 규정한 말씀이 어디 있고, 술 마시면 지옥 간다고 하는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성경에 없는 이야기예요. 그러므로 그것은 죄냐, 아니냐를 가지고 논할 문제도 아니고 진리냐, 비진리냐를 가지고 논쟁할 거리도 못 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술, 담배를 금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 시간에 이야기하겠습니다. 술, 담배를 아직 끊지 못하고 있는 형제를 보고 마치 지옥에 갈 사람처럼 대하지 마십시오. 여기 믿음 좋은 아내들에게 말씀드립니다. 남편이 어쩌다가 술 냄새를 풍기며 집에 들어왔다고 해서 "아이고, 당신 또 죄를 지었군요" 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사람 잡는 소리입니다. 또 피임약을 복용하는 것이 죄냐, 아니냐 하는 것도 굉장히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것도 회색 지대에 속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주일 밤 예배를 안 드리는데 그것을 가지고 죄냐, 아니냐 하고 따지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예배 시간에 성도들이 박수를 치면서 복음성가를 부르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옳으냐, 그르냐의 기준을 가지고 논할 거리가 못 됩니다. 그런데 가끔 보면 이 같은 부수적인 것들 때문에 교인들 간에 의견 대립이 생기고 서로 갈등을 합니다.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정한 주일 성수란?
날의 문제가 나왔으니까 주일 성수에 대해서도 한마디 합시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토요일에 지켜야 한다고 고집했습니다. 그들은 유월절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옛날의 그 관습을 못 고친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그런 것에서 자유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안식일이나 유월절과 같은 날의 문제는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일 성수 문제만은 한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예민한 영역입니다.
우리가 7일 주기로 하루를 구별해서 안식하고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라는 것은 성경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7일 주기로 쉬지 않으면 우리 몸이 배겨나지 못할 정도로 약하다는 것을 아시고 하루를 쉬도록 하셨고, 그날을 복되게 하셨습니다. 7일 주 하루를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안식하게 하신 그날을 기념해서 지키는 것이 주일입니다. 이 날이 바로 안식일 다음날인 일요일입니다.
그러므로 7일 중에 하루를 주일로 택해서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하고 예배드리는 것은 너무나 의미가 깊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확실한 근거가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테르가 프랑스 국왕에게 "기독교를 말살하려면 주일을 폐지하십시오" 라고 건의한 것은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주일을 지키느냐, 폐지하느냐 하는 것은 기독교의 사활이 걸려 있는 문제입니다. 그 좋은 예로, 북한에서 주일을 없애버리자 기독교가 말살되지 않았습니까? 그만큰 주일 성수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일 성수에 대해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주일 성수' 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꼭 한 가지 견해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성수'가 무슨 뜻입니까? 사전을 찾아보니 '성수' 라는 말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아주 큰 사전에는 그 단어가 있기는 하지만 뜻이 전혀 다른 말입니다. 이것은 한국 교회가 만들어낸 용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일을 끝까지 해낸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거룩하게 지킨다는 의미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원리는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 세칙을 만들어 놓은 것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한국 교회는 이 문제를 가지고 마치 유대인들처럼 많은 사람들을 정죄해 왔습니다. 본의 아니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실족하게 만들고 불행하게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왜 제가 이렇게 과격한 말을 하는가 하면 저 자신이 그런 문제로 인해서 많이 시달렸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가 지금까지 "주일을 이렇게 지켜야 한다" 하고 가르친 내용 가운데 성경적이라고 말하기에는 떳떳하지 못한 것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교단이나 개 교회가 채택한 하나의 규칙으로서, 경건 생활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람의 양심을 구속하고 정죄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특별히 어느 날을 고집하는 것이 주일 성수냐 하는 것도 우리가 다시 한 번 검토해 봐야 합니다. 어떤 날을 고집하고 그날에다 사람을 묶어 놓으려고 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11월 15일은 주일입니다. 1992년에는 주일이 되었지만 다른 해에는 토요일이 될 수 있고 월요일도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구촌에 살고 있습니다. 15일 주일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지만 똑같은 시간에 미국에서는 신나게 즐기는 토요일이 되는 것입니다. 중동 건설 현장에 우리 형제들이 많이 가서 일하고 있습니다. 거기는 주일이 없습니다. 대신 금요일에 쉰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일을 1년 내내 지키지 않고 보낼 수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주일 성수를 고집하다가는 회사가 그곳 일을 포기하고 철수해야 하는 심각한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금요일을 거룩히 구별하여 예배 드려야 합니다. 중동에서 금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그들을 아무도 정죄할 수 없습니다. 7일 주기로 금요일을 택해서 노동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주 잘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절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메리 슬레소라고 하는 여 선교사는 아프리카인지 남미인지 잘 모르지만 정글에 사는 부족을 찾아가서 3년간 선교를 했습니다. 그는 선교 활동을 벌이는 동안 달력이 없어서 간혹 주일을 혼동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은 분명히 주일인 줄 알고 모여서 예배를 드렸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월요일이었다고 합니다. 또 한 번은 월요일인 줄 알고 지붕에 올라가서 도끼를 가지고 지붕을 고쳤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주일이었다고 합니다. 그 여 선교사가 잘못했습니까? 죄를 지었습니까? 아무도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영적 자유는 어떤 날이 우상이 되어 그날에 매여 종살이를 하는 자유에서 우리를 해방시킨 자유입니다. 기독교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일을 특별히 기념하여 모이던 초대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은 정말 값진 유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날을 지킬 수 없다면 우리가 어느 날을 지켜도 무방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날에 매여서 끌려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일을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리되 그 주일을 우상으로 받들면 안 됩니다. 만약에 감옥에 들어간 신자에게 간수가 주일에 절대 성경도 보지 못하게 하고 기도도 못하게 한다면 그는 토요일이나 월요일, 아니면 다른 어느 날을 택해서 하나님 앞에 예배 드려야 합니다. 날에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일날을 위한 순교자가 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주일 성수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라는 식으로 법을 만들어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법규를 만들어서 그것을 잘 실천하면 주일을 거룩하게 지켰다 하고, 그것을 범하면 주일을 어겼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일마다 금식을 하는 분이 있다고 합시다. 그가 금식을 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주일 금식을 한다고 해서 그렇지 못한 형제를 깔보거나 비판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금식하지 말고 겸손하고 화목하는 편이 더 좋습니다. 성경에 주일 아침에 금식하라고 하는 데가 어디 있습니까? 자기가 은혜받으려고 안 먹고 안 마시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주일은 가족과 함께 휴식하는 날이라 별스럽게 만찬을 준비하여 즐겁게 먹고 마신다고 해서 이런 사람을 보고 경건하지 못하다고 비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어린 시절에 저는 "주일에는 차를 타면 안 된다", "다른 책을 읽으면 안 된다. 꼭 성경만을 읽어야 한다" 하는 것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릅니다. 주일에 다른 책을 못 보게 하니까 왜 그렇게 답답한지요. '대학만 가면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이런 식으로 은근히 반발이 생기곤 했습니다. 성경 어디에 주일에 성경만 보라는 데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로마교회 성도들이 신앙생활 하던 당시에는 기록된 성경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일에 모여서 들은 말씀을 항상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지금은 성경을 책으로 만들어 가지고 있으니까 읽으라는 것이지 꼭 주일에 성경만 보라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주일에는 텔레비전을 보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주일에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그러나 본다고 해서 잘못은 아닙니다. 텔레비전을 보는 아들놈을 끌어다가 "너, 주일에 텔레비전 보면 지옥 가, 이 자식아." 이런 식으로 호되게 나무란다면 그것이 신앙 교육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주일 성수에 관한 한, 자기의 자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재려고 하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제를 포용하라
과거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주일에 부산항에 큰 여객선 한 척이 정박해 있었습니다. 그 배에는 안식년을 맞아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는 어느 선교사가 타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어떤 목사님이 그분을 떠나 보내면서 배 안에서 환송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주일에 교회에서 예배 드리지 않고 배 안에서 예배 드렸다고 그 목사님을 교단에서 쫓아내고 말았습니다. 출교를 시킨 것입니다. 이것이 잘한 일입니까? 대단히 잘못된 일입니다.
진리도 아닌 것을 가지고 진리인 것처럼 들고 나와서 교회 안에서 강조하고 가르치면, 그것 때문에 나중에는 성도들 사이에 의견 대립이 생겨서 결국 서로 갈려버립니다. 그래서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진리가 아닌 의견을 가지고 서로가 맞지 않아 대립하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한다고 합니까?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1절).
서로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포용하라고 합니다. 비판하지 말고 다른 형제의 견해를 그대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주일에 담배를 호주머니에 넣고 예배당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름철에는 얇은 셔츠를 입기 때문에 호주머니에 넣은 담뱃갑이 환하게 비칩니다. 수십 년 전이면 그런 사람은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나가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런 형제를 비판하는 눈으로 보면 안 됩니다. 담뱃갑을 넣고 들어온 것은 죄의 여부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말할 수 있다면 그 형제의 믿음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형제의 영혼이지 담배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아내가 교회에 가자고 하도 조르니까 남편이 마지못해 따라나서기로 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는 교회에 나오기 전에 매일 하던 버릇으로 술을 한 잔 마셨습니다. 부인이 하도 기가 막혀 "여보, 술 냄새를 풍기며 어떻게 교회에 가요? 망신스럽게. 오지 말고 집에 있어요" 하고 짜증을 부린다면 그 남편이 언제 구원받겠습니까? 술 취해서 교회 들어왔다가 구원받은 사람들이 우리나라 교회 초창기에 참 많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형제의 영혼이 중요한 것이지 술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형제가 술을 마시는 것은 믿음이 약해서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술 마시는 것을 가지고 죄냐, 아니냐 하고 말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술 냄새를 풍기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포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들을 포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3절).
비록 술 냄새가 나는 형제라도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다면 그 형제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비록 담배를 끊지 못하고 있다 해도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으면 우리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일 하루 종일 텔레비전도 안 보고 다른 책도 안 보고 그저 하나님만 위해서 하루를 삽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러나 어떤 사람은 집에 돌아가기가 무섭게 신문을 찾아 읽거나 텔레비전을 켜기 바쁩니다. 그날 들은 설교 말씀은 10리 밖으로 도망가고 귀에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도 그 형제를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 사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받은 형제라면 우리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믿음이 약한 형제나 믿음이 강한 형제를 함께 포용해야 하는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4절).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내 옆에 있는 형제가 아무리 잘못하는 것이 눈에 보여도 내가 그 사람의 주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가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나하고 견해가 좀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그 형제를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만약 그 형제에게 잘못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형제에 대해서 내가 주인 노릇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인 노릇하지 않기 위해서는 서로 포용해야 합니다. 똑같은 형제 자매로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포용해야 합니다. 서로의 좋은 점을 배우고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이해해 주는 것이 믿는 자의 공동체입니다. 시편에 보면 재미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 몸이 되어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고 하는 것이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 일입니까? 이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진리도 아닌 어떤 의견을 가지고 깨뜨리고 해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요, 교회를 위해서도 슬픈 일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함께 포용합시다. 다른 형제를 받아 줍시다. 그리고 그 형제에게 주인 노릇 하지 맙시다. 그에게 무언가 좀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다 해도 그것이 죄와 관계가 없는 문제라면 그 형제의 약한 믿음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됩시다. 그리하면 우리는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형제가 서로 연합하여 동거하는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한평생 서로 화목을 유지하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출처] 43. 교회 안에서 왜 분쟁이 일어나는가?|작성자 나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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