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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 나아가십시오//고린도전서 4장 14-21

by 【고동엽】 2022. 8. 30.

사랑으로 나아가십시오// 20010722

2001-12-08 17:30:37 read : 148

 

주일 낮예배// 고린도전서 414-21

 

< 아비의 심정을 가진다는 것의 의미 >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로부터 복음을 받고 그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였지만

바울이 떠나면서 바울을 비난하고 자기들이 바울보다 더 낫다고 여겼습니다.

오늘 본문 20절 말씀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말만 많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후서를 목회자의 입장에서 읽어보면 가끔 눈물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그토록 교인들을 섬겨주는데 왜 그들은 저렇게 속을 썩였을까?

그들도 교회를 잘 섬기고, 목회자를 잘 섬길 수 있었는데 왜 그랬을까?"

물론 일부 교인들만 그런 행동을 했지만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말은 무성하지만 실천이 뛰따르지 못하는 교회였고,

은사를 과시하지만 십자가의 능력이 없는 참으로 안타까운 교회였습니다.

우리는 그런 교회가 되지 말아야 하고, 그런 성도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너무 말만 앞세웁니다. 말은 청산유수요 말은 천사의 말입니다.

그러나 실천을 하지 않는다면 그 천사의 말에 오히려 시험이 들지 않겠습니까?

너무 그러니까 한번은 어떤 친구가 와서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말해서 유익을 주기보다 말을 안해서 유익을 주는 방법도 생각해 보게."

 

말이 많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말한 것을 이루는 능력입니다.

고린도교회는 화려한 신앙생활은 있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이 너무 높았습니다.

그처럼 고린도 교회가 여러 문제와 여러 말로 사도 바울을 마음 아프게 했지만

사도 바울은 변함없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사랑하는 자녀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본문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왜 사도 바울이 그렇게 인내하며 사랑합니까? 아비의 심정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본문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복음으로 낳았다고 하니까 끝까지 부모의 사랑을 가지고 참을 수 있었습니다.

 

< 사랑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

 

1997, 저는 분당으로 목회지를 옮기는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비슷한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하던 아내가 이런 꿈을 꿨습니다.

그 꿈속에서 제가 분당의 어느 장소에서 교회를 개척해 설교하는데

먹을 것을 먹지 못해서 비쩍 말라 뼈밖에 남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 의자에 앉아

해골처럼 뻥 뚫린 눈으로 저를 애 타는 마음으로 쳐다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의 설교를 듣고 그 해골 같은 얼굴에 미소가 피어오르더라는 것입니다.

그 꿈을 꾸고 "분당에서도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구나!"하는 생각으로

아내는 목회지를 옮기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내는 그 당시에는 저에게 한 마디도 꿈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얘기로 저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그 당시 제가 40일 동안 철야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해서 내린 결정이 자신의 꿈보다 훨씬 소중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분당에 오고 나서야 아내는 비로소 그 꿈 얘기를 해주었는데

저는 그 꿈이 하나님이 주신 꿈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꿈 얘기를 듣고 저에게 성도를 향한 엄청난 사랑이 솟아났기 때문입니다.

 

그 꿈이 하나님이 주신 꿈이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꿈으로 인해 제가 사랑을 도전 받고, 격려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개척 후 지난 2년 반 동안 비교적 견고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일차적으로 우리 성도들이 훌륭했고, 착했고, 겸손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이유는 쑥스럽지만 저의 사랑이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가끔 저도 실망이 되는 장면을 많이 보고 겪게 됩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사랑했고, 항상 기대했습니다.

사랑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들은 다시 해골로 돌아가게 될 텐데 그럴 수 없습니다.

해골 같은 심령에 미소를 피어오르게 하는 것이 이곳에서의 저의 사명인데,

누구 좋으라고 제가 사랑을 포기합니까? 그래서 사랑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목회자에게 미움이 생기면 교회에 미소는 사라지고 다시 해골들만 남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느 한 성도라도 미워할 수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을 포기할 수 없고, 기대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갈등과 문제가 많은 개척교회의 증후군을 겪지 않고 견고한 이유는

성도들이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고, 저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회의 문제점을 듣고 있었지만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복음으로 그들을 낳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15).

저도 쑥스럽지만 여러분들을 복음으로 낳은 이상으로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사도 바울처럼 한 마디 꼭 하고 싶습니다.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

 

저도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저에게 좋은 것이 있으면 본 받으십시오.

제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장점은 있지 않습니까?

특별히 저는 인내와 사랑, 겸손과 협력, 긍정과 대범한 용기를 좋아합니다.

여러분들도 조금 더 인내하시고, 조금 더 사랑하시고, 조금 더 겸손하십시오.

공동체에 최선을 다해 협조하시고, 부정보다는 긍정을 말하는 분들이 되십시오.

조그만 문제로 흔들리고, 염려하고, 침체되고, 좌절하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사실상 저는 본 받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을 본 받는 것은 기본이고, 그 외에 누구든지 좋은 사람을 본 받으십시오.

"당연히 좋은 사람을 본 받지 나쁜 사람을 본 받겠느냐?"고 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사람은 나쁜 사람을 본 받는 경우도 많습니다. 오히려 더 잘 본 받습니다.

누구를 미워해 보세요. 나중에 보면 그 사람의 행동이 자기에게도 그대로 나옵니다.

 

우리는 가끔 이런 얘기를 듣습니다.

누구를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잉태했는데 나중에 낳고 보니까

자기 아이가 그 미워하는 사람을 닮았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나쁜 사람을 밉다고 하면서 계속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닮게 됩니다.

 

그러므로 행복하길 원하면 나쁜 일은 잊어버리시고, 나쁜 사람은 용서하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이 나를 살리는 길이고, 내 가정과 내 자녀를 살리는 길입니다.

여러분! 어떠한 것이든지 나쁜 것은 생각하지도 마시고 닮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 사랑으로 대응하십시오 >

 

이번에 텍사스에 가서 제가 가장 가깝게 지내는 목사님 교회에 들렸습니다.

그 목사님은 신학교 동기인데 최고의 호인이자 정말 선하고 훌륭한 분입니다.

저는 그 목사님을 생각할 때마다 교인들이 큰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선하고 인격적인 목사님과 지내니 하나님이 성도들도 축복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번에 가 보니까 그런 목사님에게도 어려움을 끼치는 분이 있더군요.

목사님의 인격적이고 목자다운 성품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기보다

그 목사님으로부터 더 화려한 무엇을 요구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화려함보다 진실과 사랑을 더 평가하실 것입니다.

 

그분과 대화를 하면서 제가 무심결에 엉뚱한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개는 사람이 따를 수 없는 충성심을 발휘해서 사랑 받는 동물인데

왜 가장 나쁘고 가장 흔한 욕을 쓸 때에도 개OO라는 욕을 쓰게 되었을까요?"

 

그냥 대화하다가 나온 엉뚱한 질문인데 그 목사님은 우문현답을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개는 주인에게 충성하긴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주인 말만 듣고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채 무조건 앞서서 공격대상을 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공동체에서도 뒤에서 부정적 말을 만들고 조종하는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조종하는 사람의 말만 듣고

맹목적으로 공격 대상을 향해서 제일 앞에서 문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왜 무나?" 하고 추적하면 꼭 물게 만들고 지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숨어있으면 모를 줄 압니다. 그러나 대부분 알려집니다.

아무리 이중 삼중으로 자기를 감추어도 거의 대부분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제직회에서도 잘 얘기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분히 얘기할 수 있는데

"의장!"이라고 하며 감정부터 앞세워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드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분이 지혜는 부족해도 오히려 순수해서 크게 위험하지 않습니다.

위험한 분은 그 사람이 그런 발언을 하도록 조종하고 분위기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장!" 하고 말하며 앞에 나서서 막무가내로 무는 사람은

그 모습이 개의 모습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욕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개의 충성심은 본 받을만하지만 나쁜 것에도 맹목적인 것은 개의 단점입니다.

 

그러면서 그 목사님이 형사 콜롬보에서 봤던 내용을 일러주었습니다.

어느 날 미지의 살인사건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단서가 잡히지 않았습니다.

수사하면서 한 사람이 혐의는 있는데 그의 알리바이가 완벽했습니다.

그러다가 콜롬보는 그 사람이 기르는 개에게 혐의를 두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콜롬보는 수의사에게 찾아가 물었습니다.

"혹시 개가 주인의 명령에 따라 사람을 가려서 죽일 수도 있습니까?"

수의사가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그 대답을 듣고 콜롬보가 묻습니다.

"만약 주인이 살인 명령을 내릴 때 개가 살인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까?"

 

그러자 수의사가 말해줍니다.

"개는 주인의 명령대로 행동하지만 그 명령이 가짜라는 생각이 들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주인이 살인 명령을 내려도 공격받는 사람이 웃으면서 즐겁게 행동하면

개는 주인의 명령을 가짜로 알고 살인을 멈추게 됩니다."

 

수의사와 대화 후에 콜롬보는 개 주인에게 가서 전모를 하나씩 밝혀나갑니다.

그러자 개 주인은 자기의 살인 행위가 거의 드러난 것으로 판단합니다.

그래서 콜롬보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살인 명령어를 내립니다. "스트로우베리!"

그러자 개가 그 살인 암호에 따라 쏜 살 같이 콜롬보를 죽이려고 달려듭니다.

 

그러자 콜롬보는 개와 어우러지면서 즐거운 미소를 띄면서 말했습니다.

"워워. 괜찮아. 내가 잘 해 줄게. 사랑한다. 같이 어울리니까 즐겁지."

그렇게 하니까 개가 콜롬보에 대한 공격을 멈추고 더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 개 주인은 살인 혐의로 체포됩니다.

 

여러분! 사단의 조종을 받아 누가 나를 공격할지라도 침착함을 잃지 마십시오.

그때 침착함을 잃고 흥분하면서 호들갑을 떨면 더 어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사랑으로 대응하십시오. 괜찮다고 생각하십시오. 미소로 그를 맞이해 주십시오.

웃는 얼굴에 누가 침을 뱉겠습니까? 혹 침을 뱉으면 어떻습니까?

우리가 진정한 사랑으로 나갈 때 어느 누가 그 힘을 거슬려 이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뒤에서 우리를 조종하려고 하는 마귀에게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나쁜 것은 보지도 말고, 관심을 기울이지도 말고, 배우지도 말아야 합니다.

내가 배우기에 좋은 모델을 설정하고, 그를 존경하며 배워야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런 사실을 알기에 사도 바울은 애타는 마음으로 "나를 본 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 핑계를 일삼지 마십시오 >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말합니다. 20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무슨 말입니까? 말만 많이 하지 말고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무엇이 능력입니까? 마술적 힘이 능력이 아니고, 십자가의 사랑이 능력입니다.

 

그 십자가의 능력이 있을 때 무엇이 생깁니까? 책임의식과 충성이 생깁니다.

책임의식과 충성이란 말은 무엇입니까? 자기에게 성실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남에게는 관대하고 자기에게는 철저하면서 핑계대지 않는 삶을 삽니다.

그러나 능력이 없는 사람은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핑계가 많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은 기도를 못해도 핑계를 댑니다. 가끔 이런 분들이 있습니다.

전도사가 심방 가서 기도할 때 기도가 안된다고 엉뚱한 말을 합니다.

"이상하다! 기도가 안된다! 혹시 집에 무슨 잘못된 일이라도 있습니까?"

자기가 기도 잘 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남을 그렇게 깎아내려도 됩니까?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기도가 잘될 때도 있고 안될 때도 있습니다.

새벽에 기도하다 보면 기도가 잘되는 때도 있고 반대로 안되는 때도 있습니다.

어느 때에는 기도 소리가 힘차게 나오지만 어느 때에는 졸립기만 합니다.

저도 기도하는 분위기가 약간 가라앉은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분위기가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작 기도하는 사람은 그런 분위기를 극복하고 기도의 탑을 쌓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도한다고 하는 분이라면서 엉뚱하게 또 핑계를 댑니다.

"기도의 영이 막혔어! 기도가 잘 안돼!"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진짜 기도하는 분은 그런 말을 안합니다.

 

기도가 안되는 것까지 분위기 탓, 환경 탓, 남 탓으로 돌리면 됩니까?

끝까지 자기를 영적으로 보이기 위해서 그런 언어를 구사하는 것을 보면

왜 저렇게까지 자기가 영적으로 보이려고 안달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처럼 환경에 핑계를 대는 말만 많고 능력 없는 사람이 교회에 있으면

그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한 사람 때문에 교회도 힘들어지게 됩니다.

못하면 못하는 대로 겸손히 인정할 때 오히려 사람들의 인정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 핑계하지 마십시오. 핑계하는 삶과 언어는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핑계가 분명한데 핑계가 아니라는 것을 슬쩍 포장하기 위해서

남의 단점을 내세우고, 교회의 단점을 내세우는 부끄러운 모습이 없길 바랍니다.

 

< 말한 것을 먼저 실천하십시오 >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이 있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말로 요구만 하지 말고, 먼저 실천으로 능력을 보여주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남에게 단호히 무엇인가 요구할 결심만을 하지 말고

단호히 내가 먼저 십자가를 실천할 결심을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결심대로 실천하며 사는 것이 구원받은 믿음을 가진 사람의 삶입니다.

 

당연히 그런 삶을 살아야지요. 실천보다 요구가 많다면 정상입니까?

예를 들어, 어느 교회에 전도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전도하는 사람이 전도하지 않는 사람에게 전도를 요구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고, 교회 부흥을 위한 좋은 자극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날 각 교회를 보면 거꾸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전도하는 사람에게 왜 더 전도하지 않느냐고 요구합니다.

아무리 봐도 별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영성이 어떻다"고 남을 판단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지 않는 사람이 "예수가 있네, 없네."라고 더 판단합니다.

말씀을 잘 모르는 사람이 말씀을 더 아는 사람에게 "말씀이 어떻다!"고 판단합니다.

글쎄요. 정말 논리에 안 맞고 아무리 봐도 엉뚱합니다. 그런 모습이 없어야지요.

연약한 인간인지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제는 남의 눈도 생각하고 살아야지요.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저 사람은 말로만 자기를 높인다"는 눈초리를 받지 말아야지요.

 

< 사랑으로 나아가십시오 >

 

이제는 말만 내세우지 말고, 말한 것은 행동으로 보여주고 실천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챤 휴머니스트인 마크 트웨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단점을 찾으면 사람이 짐승이 되지만, 사랑을 하면 사람이 진짜 사람이 된다.

상처를 오래 기억하면 짐승이 되지만 상처를 잊으려고 노력하면 사람이 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본문 21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여러분들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시기를 원합니까?

우리는 어떻게 나아가야 합니까? 서로 단점을 덮어주고 사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고민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읽을 때나 말씀을 들을 때는 새로운 다짐을 해봅니다. "이제 사랑해야지."

그런데 그 다짐이 하루도 못 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성도들은 누구나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의 정의에 감명을 받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그러면서 다짐합니다. "맞아! 이렇게 살아야지! 그러면 아름다운 세상이 될 거야."

 

그런데 그 결심이 얼마 못 갑니다. 여전히 미워하고 여전히 자기를 높입니다.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믿음입니까? 그러면서 삶은 믿음과 상관없다고 합니다.

'믿음 따로, 구원 따로, 생활 따로'라고 생각하고 고칠 생각은 안하고 지냅니다.

자기의 문제점을 모르면 할 수 없지만 알면서 고치지 않으면 교만이 아니겠습니까?

그처럼 알면서도 고치지 않는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있다고 합니다.

"다 그런 거지, 뭐 그런 거야. 다 그러길래 미안 미안해."

 

그러한 안타까운 모습이 더 이상 없도록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감정이 아닙니다. 경건한 감정을 가진 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감정은 거룩한 다짐으로 발전해야 하고, 사랑의 실천이 뒤따라야 합니다.

말로만 사랑하는 것은 악세사리지만 실천하는 사랑이야말로 진짜 보석입니다.

실천하는 사랑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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