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중심 (학1장 1-11)
하나님께서 인간 역사에 개입하실 때 거기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습니다.
ㅇ 먼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인간 역사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ㅇ 말씀은 일정한 때와 상황 안으로 들어 오십니다.
ㅇ 말씀이 한 개인 또는 공동체에 들려집니다.
ㅇ 들려진 말씀은 구체적인 사건을 만듭니다.
주전 520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 이년 여섯째 달, 그 달 초하루에 예언자 학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학개라는 사람은 유다 백성이 바벨론 포로로부터 귀환 후 가장 먼저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그가 예언자로 활동하게 된 것은 그 개인의 신념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언자 학개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예언 활동을 하던 시대적 상황은 새로운 국제 정치 질서로 나라를 잃은 유다 백성에게는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희망의 지평이 열렸던 시기였습니다.
유다 백성을 포로로 잡아갔던 바벨론 제국은 페르시아왕 고레스에 의해 대 제국의 운명이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가 주전 537년 경이었습니다. 바벨론을 점령한 고레스 왕은 조서를 내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건축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고레스는 정복된 주변 국가들에게 자치제를 허락하여 정치적, 종교적 자유를 주었습니다. 바벨론의 포로였던 유다인들도 고레스왕의 그러한 정책에 의해 본국으로 귀환해서 성전을 건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레스 왕의 칙령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유다인들은 주전 536년경에 성전 기초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치게 되었습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사마리아인들과 주변 민족들은 성전 완성이 지니는 정치적, 종교적 의미를 두려워하여 적극적으로 그 계획에 훼방을 놓았습니다.
고레스 왕 당시에는 그들의 계획이 성공하지 못하다가 고레스 다음 캄비세스에 시작해서 스메르디스에게 와서 성곽 재건 공사를 진행시키지 못하게 하는 칙령을 받아 내게 되었습니다. 그 후 성전 재건 공사는 14년 동안 중단 상태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 후 새로 왕위에 오른 다리우스 1세는 그가 통치하는 제국내의 종교에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의 재위 2년 주전520년에 학개가 예언 활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학개는 성전공사의 지연이 대적자들 보다는 유대인 스스로의 태만과 직무유기 때문임을 지적하였습니다.
그 당시 포로 생활로부터 귀환한 유다인들의 생활상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들의 지도자 스룹 바벨과 여호수아 만이 그래도 제대로 된 집에서 살았고, 나머지 유다인들의 생활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본문 10-11에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산위에도, 곡물과 새 포도주 위에도, 사람과 짐승위에도 한재(가뭄)가 들었다."고 했습니다. 가뭄으로 인해 경작하는 일과 가축 사육이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극도의 굶주림 가운데서 고통하게 되었습니다.
예언자 학개는 그렇게 그들의 생활이 피폐하게 된 근본 원인이 성전 건축 중단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속히 성전 재건 공사를 시작할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8절에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하였습니다.
표면적으로 생각하면 유다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해서 곤궁과 핍절 가운데서 살게 된 것이 성전을 짓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셨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유다 백성이 어렵게 된 것은 아닙니다.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성전 건축은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70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포로생활을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유다 백성에게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예루살렘을 다시 세우는 일은 하나님의 약속이 현실적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과 함께 그들 선조에게 약속한 내용을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은 하나님의 그러한 약속 보다는 오히려 변방에 있는 사마리아 사람들과 이방 민족의 훼방을 더욱 크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의 훼방에 유다 백성은 의기소침해지고,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있는 그들의 새로운 미래를 생각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예언자 학개는 그러한 뜻에서 성전 재건을 재촉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가진 백성은 그 약속하신 분을 믿고 그 약속의 내용대로 모험을 해 가지 않으면 그들의 현실은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그들이 원하는 현실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들의 현실은 황폐한 예루살렘 그대로 남아있게 됩니다. 유다 백성의 번영은 하나님의 약속의 실현 가운데 있습니다.
한편 오랜 포로 생활을 한 유다 백성에게는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재건할 물질적 재원도 없었고, 비전도 없었고, 능력도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재건을 위해서 먼저 선행되어야 할 일이 폐허가 되어 있는 유다백성 자신을 재건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습니다. 유다 백성을 일으켜 세우는 데는 먼저 그들에게 그들의 삶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거룩한 중심이 있어야 하였습니다. 그 거룩한 중심은 피폐해진 유다 백성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생명의 근원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전입니다.
성전이 세워질 때 그곳으로부터 유다 백성은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확인하게 되고, 그 약속 가운데 있는 희망의 시간을 내다보게 되고, 약속을 성취해 갈 수 있는 힘을 부여받게 됩니다.
예언자 에스겔이 본 환상의 내용과 같이 골짜기에 흩어져 있는 마른 뼈들에게 힘줄이 생기고, 살이 입혀지고, 살갗으로 덮이고, 그것들에 생기가 들어가서 다시 살아나게 할 수 있는 부활의 능력은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겔37:4∼6)
예언자 학개가 본 유다 백성의 모습은 골짜기에 흩어져 있는 마른 뼈와 같았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폐허의 땅을 옥토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 메마른 폐허의 땅에는 그 어떤 것도 생산해 낼 수 있는 생명력이 없었습니다. 예언자 학개는 거룩한 중심이 세워지지 않으므로 인해 그 결과로 나타난 유다 백성의 현실의 비참성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성전이 이렇게 무너져 있는데, 지금 너희만 잘 꾸민 집에 살고 있을 때란 말이냐?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는 살아온 지난날을 곰곰히 돌이켜 보아라.
너희는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했으며,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품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난 주머니에 돈을 넣음이 되었다."(4-6)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너희는 먼저 그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입니다.
본문 7-8절의 내용을 의역한다면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는 지금까지의 너희의 살아온 삶을 돌이켜 보아라. 왜 너희는 너희에게 허락된 축복의 약속을 포기하느냐?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러면 너희가 새로운 영광의 날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 삶의 중점을 바르게 잡는 일입니다. 중점을 바르게 잡는 일은 천막을 치는 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큰 대형 천막을 세우려고 할 때 먼저 중심의 핀을 세우고 나서 가장자리의 핀들을 꽂아야합니다. 중심의 핀을 세우지 않고 가장자리의 핀을 꽂게 될 때 그 천막을 세울 수 없습니다.
윌리엄 바클레이는 인간의 삶에서 중점을 잘못 잡으면 모든 삶 전체가 잘못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바른 중점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한 나라에서 중점을 나라에 대해서가 아니라 정당에 두게 되면, 모든 것이 잘못되어 버린다. 한 국민이 서로 싸우는 계급, 서로 대립하는 사회 계층으로 보이는 한, 그 나라는 참된 의미에서 번영할 수는 없습니다. 나라의 일부 사람들의 이익만을 증대시키려는 정당이 있는 한 , 그 일부의 사람들이 누구이든지 간에 좋은 정치는 바랄 수가 없게 됩니다.
정치가 특권 계급의 특권 유지만을 겨냥한다든가, 사회의 밑바닥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서만 움직이게 된다든가 하면, 어느 경우에든, 그러한 움직임은 좋은 정치라고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좋은 정치는 중점이 부분이 아니라 전체에 놓였을 때에만 비로소 운영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중점이 영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에 놓이게 되면, 모든 일은 잘못되어 버리고 맙니다. 가정이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해서 생각하게 되고 이만한 수입이 있으면 이만한 것을 살 수가 있다거나 좀 더 수입이 있으면 좀더 향락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 가정에는 반드시 문제가 일어날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먼 옛날 히브리의 어진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슺니다.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언 15:17) 가정을 만들고 있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사랑임을 잊을 때, 그 가정은 위험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의 중점이 봉사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놓이게 될 때, 모든 것이 잘못되어 버리게 됩니다. 자기가 바라는 자리를 얻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또는 교회의 방침이 마음에 들지 않게 되었으므로, 현재의 임무를 벗게 해 달라는 경우가 흔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교회를 손상시키고, 하나님 나라를 훼손시키며, 예수 그리스도를 상처입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상처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결국 그러한 사람은 패배자로서 마칠 수 밖에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금년으로 우리가 8. 15를 맞이한 지 60년이 넘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많은 역사의 변천을 거쳐왔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변화를 경험해왔습니다. 지금의 시점에서 지나온 날들을 돌이켜보면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들을 우리들 끼리 싸우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소모시켜왔다고 생각됩니다. 오늘날 역시 그러한 삶의 형태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에 와서는 진보와 보수의 대결로 그 양상이 점점 축약되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의 우리의 갈등을 극복하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길은 중점을 바르게 잡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 중점을 "그 나라와 그 의에 두어야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모두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시점에서 어느 지역의 승리로, 어느 정당의 승리로는 우리가 바라는 희망의 미래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향한 생각은 심판과 저주가 아닙니다. 희망과 평강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거부하면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약속된 미래를 현실적 사건으로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중점을 바르게 잡아야 합니다.
헬라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음미되지 않는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평가되고 반성되지 않는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는 이 말은 사람은 부단히 자기 자신을 살펴야 하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자기 성찰과 자기 진단을 통해서만이 더욱 성장하고 성숙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지혜를 모아 놓은 [탈무드]에 보면 인간을 평가하는 세 가지 기준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세 가지란 히브리말로 '키소, 코소, 카소'입니다. 첫 번째 '키소'는 '돈을 넣는 주머니'를 뜻하는 말로 돈을 어떻게 벌고 쓰느냐가 그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코소'는 '술잔'을 뜻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인생의 즐거움을 의미합니다. '무엇을 즐기는 인생인가', ! '어디서 인생의 즐거움을 찾는가'를 보면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카소'는 '노여움'을 뜻하는 말로 인내력의 정도를 묻는 단어입니다. 얼마나 자기 감정을 잘 조절하며 살았는가로 그 사람을 평?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물질을 어떻게 쓰며, 무엇을 즐거워하며, 얼마나 자기 감정을 잘 조절하는가로 유대인들은 인생을 평가할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탈무드가 제시하는 세 가지 잣대로 오늘 우리 자신을 재어본다면 과연 나의 인생, 나의 삶의 질은 어떠하다고 생각되십니까? 잘 살고 있습니까, 못살고 있습니까? 풍성한 삶입니까, 빈궁한 삶입니까?...
학개는 지금 유다 공동체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심각한 징후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경외심의 사라져감이 지금 두 가지 점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오직 자신밖에 모르는 '철저한 이기주의'였습니다. 사람들은 바벨론에서 돌아온 후 자기들의 집을 다시 짓기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집을 사고, 집을 꾸미고, 새 가구를 들이기 위해서 시간외 근무도 하고 철야 작업도 마다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을 짓는 일을 최우선으로 하여 그 속에서 자신의 모든 삶의 의미와 구심점을 찾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저 사람들은 '아직 때가 아니라'며 고의적으로 성전 건축을 미루기만 할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 소홀히 여김 받는 성전과 더불어 하나님이 저들의 삶과 관심의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저들 삶의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이 아니라 여백이요, 중심이 아니라 변두리였습니다. 그리고 이것과 밀접한 또 다른 문제는 백성들이 시대의 표징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도 않았고 그 어떤 참회의 빛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 욕심에 충혈된 눈으로 세상을 보며 숨가쁘게 살았습니다. 그 상징이 바로 '황무한 하나님의 집'과 '판벽한 자신들의 집'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백성들의 신앙적 경솔성은 그렇게 단순하게 보아 넘길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학개는 유다 백성들에게 성전 재건을 독려하는 것입니다. 저들이 인정하지 않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다시 하나님을 자신들의 삶의 중심으로 모시는 행위가 바로 성전 건축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만족할 것이고 그것을 당신께 대한 경외심으로 인정하시겠다고 8절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그 당시 백성들의 처지는 어떠했을까요? 저들이 과연 레바논의 백향목과 잣나무로 대리석으로 그 옛날 화려했던 솔로몬 성전과 같은 성전을 재건할 수 있을까요? 당시 백성들은 대부분 극심한 빈곤을 겪었습니다. 성전 건축을 멈추고 살아온 16년 동안 손이 닳도록 애쓰고 노력했지만 모든 경제생활은 아무런 소득이 없었습니다. 열심히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김을 매었지만 가뭄으로 식량은 턱없이 부족하기만 했습니다. 먹걸이 농사가 흉작이니 의식주 등의 기본적인 생존권 전체가 위협을 받았습니다.
6절은 그러한 저들의 당면 현실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군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노력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열정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도대체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뗩까요?
이렇게 극심한 빈곤을 겪고 있는 백성들에게 학개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찌니라'고 권고합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의 생활 태도와 현재 처한 곤경의 관계를 심사숙고하라는 촉구'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지금의 고난에 이르기까지 여태껏 살아온 나날들을 곰곰히 돌이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항로에서 암초를 만났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선 가던 길을 멈추어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7:4절에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고 한 것입니다. 학개 선지는 유다 백성들에게 숨가쁜 현실 속에서 잠시 멈추어 서서 자신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라고 권면합니다.
멈춤 표시에서는 멈추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 큰 사고를 초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 속도를 무시하고 교만과 욕심으로 과속질주를 멈추지 않아 수많은 인명을 수장시킨 타이타닉의 침몰은 멈춤 없는 인생의 말로를 대변합니다. 고난은 인간에게 반성문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저들은 반성문을 쓰질 않았습니다. 그럼으로써 그 열정적 삶에도 불구하고 공허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저들이 당면한 지금의 냉엄한 현실은 하나님을 밀쳐놓고 자신의 일에만 몰두했던 이기적 삶의 결론이었습니다. 포로지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 곧 성전 재건이라는 1차적 임무는 저버리고 자신의 일에만 몰두했던 그 삶의 결과가 바로 경제 파국이라는 판결로 내려졌던 것입니다.
학개는 지금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시간도 노력도 관심도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는 이 백성의 빗나간 열정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저들의 삶의 관심이 빗나갔다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주변적인 것을 중심에 끌어들이고 정작 중심적인 것을 주변으로 밀치는 불신앙적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성전에 관한 무관심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입니다.
학개는 지금 저들이 당면하고 있는 현실적 고난이 그들의 그러한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이 자초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합니다. 그 결과로 지금 총체적 위기에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이 거하시는 성전을 경시하거나 무시하는 백성들 앞에 심판자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의 성전의 현 상태를 묘사하는 '황무(荒蕪)'라는 단어와 하나님이 유다 백성을 심판하시는 '한재(旱災)'라는 단어의 히브리 어원이 같다는 것입니다. 황무는 '하레브'요 한재는 '호레브'입니다.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황무'가 자기 스스로에게 한재를 자초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본연의 임무에 태만한 백성이 방치한 성전의 황무함이 결국 그들 자신에게도 메아리가 되어 한재로 뒤덮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학개는 지금 성전과 백성은 공동운명체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전이 처한 상태가 곧 이 백성이 처해질 상태입니다. 성전을 황무한 상태로 방치함이 결국 자신들의 삶을 가뭄과 재앙으로 망치게 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주어지는 하루하루를 자신의 일에만 분주한 빗나간 열정적 삶은 아무런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별반 다를 바 없게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요구보다 자기의 요구를 앞세우고 갖은 노력을 다해 보아야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을 학개는 유다 백성에게 일깨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학개는 이러한 유다 백성에게 저들이 빈궁한 삶에서 풍성한 삶으로 전환할 수 있는 새로운 행동을 구체적으로 요구합니다. 8절 말씀을 보십시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이 학개의 권고를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학개는 저들에게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 鳴?전을 건축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솔로몬 성전의 기억을 한 번 더듬어보시기 바랍니다. 왕상 5:10절에 보면 과거의 솔로몬 성전은 레바논의 아름드리 백향목과 잣나무들을 주 재목으로 사용했었습니다. 그것을 요즈음에 비긴다면 가장 최고로 치는 이탈리아산 원목과 이탈리아산 대리석에 해당되는 것들입니다. 또한 그 성전은 외국의 전문 기술자들이 총동원되어 건축된 것이었습니다. 왕상5:18절에 보면 '솔로몬의 건축자와 히람의 건축자와 그발 사람이 그 돌을 다듬고 전을 건축하기 위하여 재목과 돌들을 갖추었다'고 했습니다. 모든 면에 최고의 것을 사용한 것이 제1성전, 솔로몬 성전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학개를 무엇으로 성전을 지으라고 독려합니까? 잘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 언급된 것은 레바논의 백향목이 아닙니다.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로 지으라고 학개는 권고합니다. 게다가 돌도 언급되고 있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학개의 권고는 건축 전문가에게 한 것이 아니고 평범한 백성들에게 한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학개가 요구하는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처럼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이 하기 어려운 무리한 일을 요구하시지 않으십니다. 근처 산에 올라가 평범한 나무로 성전을 지으라는 것은 즉 당신을 향한 최소한의 정성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저들은 지금 레바논의 백향목이나 잣나무, 대리석으로 성전을 지을만한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하나님이 잘 아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현실을 핑계하며 주어진 사명을 외면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할 수 있는 일, 가능한 일을 독려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이제 두 가지 복이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한다'는 약속입니다. 여기 기뻐한다는 히브리어 '라짜'는 예배 때 사용되는 전문 용어로서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받아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최고급으로 치장하지 않은 성? 活繭?할지라도 합법적인 성전으로 인정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는 약속입니다. 이 표현은 문자적으로 '나는 나의 영광을 보이리라'입니다. 즉 당신의 임재와 능력과 자비를 베풀겠다는 뜻입니다. 2:9절의 구원과 번영, 2:19절의 복 그리고! 2:22절의 평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전 재건을 통해 저들에게 이런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학개는 지금 하나님이 당신 백성들에게 복을 베풀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 권고를 백성들에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작은 정성일지라도 그것이 진실될 때에 엄청난 축복을 불러오는 것을 알기에 저들에게 복된 길을 열어주려고 이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 학개의 권면에 유다 백성들은 어떻게 응답할까요? 12절에 보면 '모든 백성이 그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청종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백성이 다 여호와를 경외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14절에 보면 '하나님이 주시는 새 마음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여기 '흥분시켰다'는 말은 직역하면 '영을 일깨우셨다'는 말입니다. 저들은 이제 비로소 죽어있던 영이 되살아납니다. 퇴락한 영성이 회복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불경을 깨닫고 예언자의 지시에 순종하여 마침내 성전 재건에 착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올 한해를 풍성하게 사시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내 소원보다 하나님의 소원을 앞세우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주님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해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지나친 것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 처지에서 정성껏 당신을 섬기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황무케 하면 우리의 삶도 황무하게 되지만 우리가 그분을 윤택케 하면 우리의 삶도 윤택하게 되는 이 진리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도 이 풍성한 삶의 길을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유다 백성들처럼 청종하고 영의 일깨움을 받아 참으로 복된 한 해를 주 안에서 살아가시는 우리 영암의 권속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서정호 목사 설교 중에서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칭찬받는 청지기 (누가복음 16:1~13) (0) | 2022.08.27 |
---|---|
깃발 날린 사람 (출애굽기 17:8-16) (0) | 2022.08.27 |
말도 안 되는 말이 믿음이다. (눅 7;11-17) (0) | 2022.08.27 |
세상에서 성도답게 사는 길 (벧전3:13-22) (0) | 2022.08.27 |
바울의 믿음(2) (빌4:10-13) (0) | 2022.08.2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