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성도답게 사는 길 (벧전3:13-22)
어느 날, 한 사람이 탄광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갱 입구로 들어설 때 온통 석탄가루로 뒤덮인 그곳에 아름답고 흰 꽃이 핀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안내자에게 물었습니다. “이런 시커먼 광산에서 어떻게 이렇게 순결하고 깨끗한 꽃이 필 수 있지요?” 안내자가 말했습니다. “한번 땅에 있는 석탄 가루를 집어 그 꽃에 뿌려보세요.”
그 말대로 하자 그가 뿌린 검정색 석탄가루가 흰 꽃잎 아래로 미끄러져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꽃은 여전히 깨끗하고 흰 모습을 했습니다. 알고 보니까 꽃의 표면이 너무 부드러워 검정색 석탄가루가 달라붙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성도는 그 꽃처럼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죄악 많은 세상이지만 예배하는 삶과 하나님의 은혜만 있으면 얼마든지 이 세상에서도 자신을 지키고 깨끗하게 살 수 있습니다.
< 세상에서 성도답게 사는 길 >
지금 세상은 성도를 무섭게 반대합니다. 인터넷을 보면 기독교 안티들이 활개를 칩니다. 마귀는 교회와 성도의 나쁜 점을 들추고 선전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 시대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이런 때에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 열심히 선을 행해야 합니다.
본문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물론 선을 행해도 항상 좋은 일만 있지 않고 때로는 어려움도 당하지만 최종적으로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선을 행해야 합니다. 게으름은 악마의 일터입니다. 특히 선에 대한 열정이 사라진 영적 게으름은 더욱 큰 문제입니다.
어느 날, 한 교회에서 누나와 동생이 예배를 드리는데 동생이 예배 중에 자꾸 딴 짓을 했습니다. 결국 누나가 말했습니다. “야! 예배 좀 잘 드려라.” 동생이 말했습니다. “누나! 너무 지루해!” 그러자 누나가 동생을 달래며 말했습니다. “원래 교회가 지루한 곳이잖아. 조금만 더 참아!”
지금 그처럼 예배를 지루해하고 전도와 선교에 무관심한 교인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더욱 예배와 기도와 선행에 대한 열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신앙인은 행위에 관심이 없고 자기만 구원받으면 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인은 내 행위를 지켜보는 사람의 구원에도 관심을 둡니다. 그래서 “나를 통해 주님을 인식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행동합니다.
어느 날, 한 교회에서 큰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교인들끼리 서로 심하게 욕하고 저주하며 싸웠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그 교회의 케빈이란 소년이 크게 실망했습니다. 얼마 후 케빈은 교회봉사에 열심인 한 집사님이 술집에 드나드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결국 케빈은 믿음생활에 회의를 느껴 교회 다니기를 포기했습니다.
그 후 케빈은 가정을 이루고 10년이 넘어 다시 회개하고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회개하게 된 계기는 ‘크리스천’은 좋지 않아도 ‘그리스도’는 좋은 분이라는 인식과 함께 ‘그리스도’와 ‘크리스천’을 분리해 생각하는 지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회개한 후, 케빈은 항상 누군가 자신을 지켜본다고 생각하고 성도답게 살려고 애썼다고 합니다. 그처럼 성도는 항상 교회 안에서의 말과 교회 밖에서의 행동이 일치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2.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베드로는 이제 곧 있을 박해를 염두에 두고 의를 위해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라고 여기고 두려워하거나 불안에 떨지 말라고 했습니다. 두려움은 자신의 능력과 가능성을 크게 약화시켜 마귀에게 당하게 만듭니다.
미국에 블랙 바트(Black Bart)는 유명한 도둑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전 미국을 벌벌 떨게 했습니다. 그는 1875년부터 1883년까지 29번이나 역마차를 털었지만 한번도 총을 쏘지 않은 상태에서 역마차를 털고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그가 나중에 붙잡혔을 때, 누군가 그에게 “어떻게 총 한번 쏘지 않고 역마차를 털었느냐?”고 묻자 그는 사람들의 공포감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그는 도둑질을 할 때 항상 두건을 썼습니다. 그리고 공포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무서운 말을 해서 사람들을 두렵게 했습니다. 결국 그가 나타나서 말 몇 마디만 해도 가장 용감한 역마차 경호원들까지 벌벌 떨었기에 마음껏 역마차를 털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사단은 블랙 바트처럼 성도들의 마음에 공포를 심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아무리 힘든 상황을 만나도 하나님은 선하시고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진리를 기억하고 결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환경은 변해도 3M은 변하지 않습니다. 즉 주님(Master)은 변하지 않고, 말씀(Message)도 변하지 않고, 사명(Mission)도 변하지 않습니다.
할머니 부흥사 코리 텐 붐은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두려운 일이 생길 때, 레슬링을 하지 않고 네슬링을 합니다(In my times of fear I don't wrestle, I nestle!).” 즉 두려운 일이 생기면 두려움과 싸우지 않고 더욱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 안에 깃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은 반드시 피난처가 되어주십니다.
영국의 위대한 감리교 목사 중에 윌리암 생스터(William Sangster)란 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분은 근육 무력증으로 죽을 것이란 진단을 받고 곧 4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첫째, “나는 결코 불평하지 않는다(I will never complain).” 둘째, “나는 가정을 밝게 만들겠다(I will keep the home bright).” 셋째, “나는 축복을 세며 살겠다(I will count my blessings).” 넷째, “나는 고통을 유익으로 바꾸려고 노력하겠다(I will try to turn it to gain).”
살다보면 때로 두려운 일도 생기지만 그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때 미소를 잃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과 내일의 축복을 생각하며 더 감사하십시오. 두려움은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인 경우가 많습니다. 공포영화를 보면 그 전까지는 없었던 공포감이 생깁니다. 즉 공포란 생각에 따라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공포감을 가지면 공포는 진짜처럼 내 삶을 위협하지만 공포감을 버리면 공포는 곧 신기루처럼 사라집니다.
3.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성도가 고난 중에도 흔들리지 않으면 사람들은 궁금해서 물을 것입니다. “그런 어려움을 당하고도 어떻게 그렇게 태연해요?” 그때 전도하려고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말입니다. 그처럼 성도는 항상 전도에 최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어느 날, 미국의 한 이발사가 부흥집회에서 전도의 사명을 도전받았습니다. 다음 날부터 그는 매일 저녁 교회 전도교실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2주 동안 열심히 강의를 듣고, 전도와 관련된 성경구절과 질문도 익혀 마침내 모든 과정을 끝낸 패를 받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그는 이발소 벽에 그 패를 달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오늘 저 문으로 들어오는 첫 번째 손님을 전도하게 하소서.” 바로 그때 몸에 문신을 하고 머리를 빡빡 깎은 건장한 남자가 가게로 들어왔습니다. 그는 그 손님에게 전도하려고 했지만 전도와 관련된 로마서 말씀과 질문이 입에서만 맴돌았습니다. 만약 그 손님에게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당신은 죽을 준비가 됐습니까?”라고 말하면 꼭 맞아죽을 것 같았습니다.
결국 이발을 다 마칠 때까지 전도하지 못하고 그 손님은 이발소를 나갔습니다. 그날 오후까지 그는 아무도 전도하지 못했습니다. 그날따라 이상하게 손님도 없었습니다. 오후 5시쯤 되자 그는 마음이 상해서 울먹이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님!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면 정말 이번에는 전도를 잘하겠습니다.”
바로 그때 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깔끔한 한 신사가 들어왔습니다. 그 신사는 그에게 미소를 지으며 늦게 온 것에 대해 사과하고 이발의자에 앉았습니다. 그는 손님의 몸에 천을 덮으며 전도교실에서 배운 성경구절과 질문을 떠올렸습니다. 그런데 잘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이발하는 내내 잘 기억나지 않았고, 이발 후 면도를 하려고 신사의 얼굴에 면도용 크림을 바를 때까지도 여전히 잘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마음은 초조해지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그는 면도하려고 면도날을 혁지에 갈면서도 성경구절과 질문을 떠올렸지만 여전히 잘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신사의 얼굴에 막 면도날을 대며 생각나는 대로 신사에게 소리쳤습니다. “ARE YOU PREPARED TO DIE?(당신! 죽을 준비 됐어?)”
요새 전도가 참 힘듭니다. 그래서 수많은 전도방법이 개발됩니다. 그러나 사실상 전도방법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주님의 본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가졌던 가치관과 우선순위를 따라 살면 전도는 자연적으로 됩니다. 전도는 라이프스타일이지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우리는 관심을 프로젝트에 두지 말고 사람에게 두어야 합니다. 그처럼 관심을 가지고 계속 사랑을 베풀면 전도는 이루어집니다.
마가복음 10장에는 바디매오 얘기가 나옵니다. 그때 바디매오는 예수님께 소리쳤습니다. “다윗의 아들 예수여! 저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때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조용하라고 꾸짖었지만 예수님은 그를 부르시고 그를 치료해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바디매오를 하찮은 거지로 봤지만 예수님은 바디매오도 소중하게 보셨습니다.
그처럼 사람들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가치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도 시간을 내고 관심을 주십시오. 전도는 관심입니다. 전도는 경작과 같습니다. 열매를 얻으려면 씨를 뿌리고, 매일 물을 주고, 이틀에 한번씩 잡초를 뽑아주어야 합니다. 그처럼 전도는 어려운 일이지만 성도는 전도라는 최대 사명에 몸과 마음과 물질과 시간을 다 걸어야 합니다.
4. 온유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본문 15절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이 구절에서 ‘온유’는 ‘하나님의 뜻에 잘 길들여진 것’을 뜻하고, ‘두려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겸손한 마음’을 뜻합니다. 즉 전도를 잘하려면 겸손하고 온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5절 말씀을 보면 주님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강한 자, 꾀가 많은 자, 변화무쌍한 자가 성공한다고 생각하지만 주님은 온유한 자가 성공한다고 말합니다. 결국 진짜 강한 것은 온유한 것이고, 진짜 능력 있는 사람은 온유한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은 겉으로는 강한 이미지를 가졌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당시 백성들은 세례 요한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누구보다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 말씀하면서 “그분은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나는 그분의 길을 예비하는 광야의 목소리일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 겸손한 자세가 있었기에 그는 수많은 사람을 회개시킬 수 있었습니다.
요새 교회 크기와 설교와 간증으로 뜨는 교계의 슈퍼스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뜰수록 주님이 나타날 여지는 적어집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쓰십니다. 왜 다윗이 쓰임을 받았습니까? 그는 자신이 지은 수많은 시편에서 골리앗을 물리친 엄청난 간증을 한 구절도 언급하지 않을 정도로 겸손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간증도 조심해야 합니다. 잘못하면 간증이 자기자랑이 될 수도 있고, 또한 돈 벌고 사람 끄는 장사 밑천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한 기독교 대기업 회장은 성공한 기독인 사업가로서 간증을 많이 다닙니다. 그 간증을 강남의 유명 목사님들이 인용해서 띄우고, 기독교 매스컴도 크게 탔습니다. 결국 그 기업은 앞에서는 세금 잘 내는 기업, 정직한 기업, 사회에 기부 많이 하는 기업으로 소문났지만 뒤에서는 그 기업에 대한 부정적인 소리가 끊임없이 들립니다. 그래서 지금 그 기업은 기독교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주는 대표적인 기업으로 불신자들 사이에 유명합니다.
결국 간증이 장사 밑천이 된 셈입니다. 그처럼 간증의 변질을 지극히 주의해야 합니다. 성도는 어떤 놀라운 체험을 해도 자신이 무엇이 된 것처럼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하게 살라는 것은 산신령처럼 살라는 말도 아니고, 환상적인 슈퍼스타가 되라는 말도 아닙니다. 오히려 성령 충만할수록 정상적인 보통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고(딤전 1:15), 야고보는 엘리야를 우리와 성정이 같은 보통 사람이라고 했습니다(약 5:17). 신자들은 정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요새 예수님 이름으로 행해지는 기괴한 신앙행위들이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신기하다고 따라가는 것은 환난과 시험을 부르고 점차 헐벗게 되는 길입니다.
신학교에 가면 제일 많이 듣는 소리가 “설교자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라!”는 소리입니다. 성도는 성도 이전에 사람부터 되고, 거만한 모습으로 설교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말을 직설적으로 위협하듯이 하지 말고 언제나 겸손한 마음으로 전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슈퍼스타나 세일즈맨으로 부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온유하고 겸손하게 이루어가는 신실한 전도자로 부르셨습니다.
5.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은 까닭 없이 어떤 비방을 받아도 양심이 떳떳하다면 선한 양심을 따라 묵묵히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진리가 드러나 욕하는 자들이 오히려 부끄럽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찐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구절은 선을 행해도 고난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때도 선한 양심을 따라 살면 반드시 좋은 일이 생깁니다. 그런 소망을 전하려고 베드로는 다시 한번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 사역을 강조합니다.
본문 18-19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이 구절은 아주 난해한 구절이지만 베드로가 이 말을 한 의도는 분명합니다. 즉 주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셨지만 성령으로 다시 오셔서 더 많은 영혼을 주님 품으로 이끄셨다는 뜻입니다.
계속해서 본문 20-21절 말씀에서 베드로는 노아의 홍수 때를 언급하며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노아 때 홍수심판에 대한 경고를 외면한 사람들은 다 죽고 오직 8명만 살았습니다. 그때 물 심판은 세례 의식을 뜻하는데, 세례는 몸을 씻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씻고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해 찾아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육체적인 승리보다 선한 양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결국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본문 22절 말씀을 보면 주님은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고 모든 만물이 주님께 순복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말은 고난을 당해도 선한 양심을 계속 가지면 결국 큰 영광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결론적으로 본문 18-22절은 전체적으로는 조금 난해한 구절이지만 쉽게 말하면 우리는 주님의 피로 구원받아서 과거의 우리는 세례를 통해 수장되고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기 때문에 주님이 부활 승천하신 것처럼 성도도 최종 승리가 보장된 존재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라는 뜻입니다. 성도는 항상 “내가 누구인가? 내가 왜 이곳에 있는가?”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선한 양심을 가지고 최종 승리를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지난 6월 아프간의 이영동 선교사님을 잠깐 만났을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미국 기독교 선교연맹에서 100여년 선교하면서 축적된 노하우가 한국선교에도 절실히 필요합니다. 선교는 열정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몇몇 선교사역을 도울 평신도가 있는데 그들을 잘 훈련할 선교사 훈련학교를 하루라도 빨리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교제를 통해서 오랫동안 품었던 선교사 훈련학교의 비전을 새롭게 하고 이번에 미국에 가서 교단 동료 목사님들과 그 비전을 나누었습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비전에는 공감했지만 구체적인 후원약속은 받지 못했습니다. 선교사 훈련학교를 하려면 이제 곧 스포츠 센터에 6500만원의 보증금을 내주어야 하는데 현재까지 축적된 재정은 20%도 안 됩니다. 날짜는 다가오고 비전은 약화되는데 며칠 전에 이영동 선교사님의 이메일을 받고 다시 큰 힘을 얻었습니다.
이번에 아프간 피랍사태로 아프간 한인 선교사들이 속속 철수했습니다. 이영동 선교사님은 미국 시민권자이기에 철수할 필요가 없지만 혼자 남으니까 너무 외롭다고 합니다. 그런 처지에서도 이런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목사님! 이번 사건으로 선교사 훈련학교의 필요성이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그 이메일을 받고 나서 비전을 붙잡고 다시 한번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 뜻이라면 이루게 하소서!”
어떻게 비전을 끝까지 붙들고 나갈 수 있습니까? “내가 누구인가? 내가 왜 이곳에 있는가?”에 대한 뚜렷한 인식을 가지면 됩니다. 그런 인식이 이영동 선교사님을 아프간에 계속 남아 비전을 달려갈 수 있는 힘을 주었고, 우리에게도 비전을 향해 달려가고,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답게 사는 힘을 주게 될 것입니다.
< 내가 누구인지를 기억하십시오 >
미국의 제프 스트라이트(Jeff Strite)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그분이 어릴 때 그분의 아버지는 호수가 딸린 20에이커에 달하는 트레일러 공원을 소유했습니다. 그 공원 안에는 100개 이상의 트레일러가 있었고, 그 트레일러에는 자신과 같은 또래의 아이들을 가진 여러 가정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11살 때, 아버지는 그를 붙잡고 말했습니다. “제프! 너는 네가 이 트레일러 공원 소유자의 아들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그 말은 거만한 마음을 가지라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그는 아버지의 말뜻을 알아차렸습니다. 자신의 삶은 결국 아버지의 삶을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그가 잘못 행동하고, 골목대장처럼 트레일러에 세 들어 사는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면 그것은 아버지도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트레일러 공원도 나쁜 곳으로 만드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높은 삶의 기준을 요구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그런 높은 삶의 기준을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만약 우리가 잘못된 행동하면 예수님의 이미지는 왜곡되고,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항상 최선을 다해 성도답게 행동하고, 삶에서 예수님이 나타나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축복의 문도 활짝 열리고, 전도의 문도 활짝 열리게 될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사위가 장인에게 교회에 가자고 했습니다. 장인이 말했습니다. “나는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 교회에는 위선자들밖에 없잖아.” 그 말을 듣고 사위의 입에서 무심코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아버님! 그러면 저와 아내도 위선자인가요?” 그 말을 듣고 장인이 사위를 생각해보니까 사위는 누구보다 진실했습니다. 결국 장인은 얼마 후에 교회에 나왔습니다. 교인인 사위가 위선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그 장인을 교회로 이끈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한 사람을 보면 다른 사람도 그럴 것이라는 편견을 가지기 쉽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때 사람들은 잘못된 편견을 깨고 우리를 통해 주님을 새롭게 보고 주님 앞에 나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내가 누구인가?”를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윌리엄 윌리먼(William Willimon)이란 사람이 고등학교 때 겪었던 일입니다. 그는 거의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 밤에 데이트를 하러 집을 떠났습니다. 그러면 그때마다 어머니가 문 앞에서 잘 갔다 오라고 말씀하시면서 꼭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얘야! 너는 네가 누구인지 항상 잊지 말아라.”
엄마의 말은 아들의 기억력이 나쁘니까 이름과 집 주소를 잘 기억하라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엄마는 아들이 데이트를 할 때, 혹은 파티 중에 자신의 고귀한 가치를 잊고 잘못된 행동을 할 것을 염려해서 그런 얘기를 한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도 들려주시는 말입니다. “김 집사야! 이 집사야! 네가 누구인지 잊지 말라!” 항상 그 음성을 기억하며 성도답게 주님의 빛을 드러내며 사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출처/이한규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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