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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 되는 말이 믿음이다. (눅 7;11-17)

by 【고동엽】 2022. 8. 27.

  말도 안 되는 말이 믿음이다.  (눅 7;11-17)

   사람들의 한계는 분명하여 정상적인 것만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정상 이하나 이상을 받아드릴 수 없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직도 잡지 못 하였을 것입니다.
눈이 그렇습니다.
너무 멀거나 너무 가까운 것은 볼 수 없습니다. 손가락을 눈에 될 수 있는 대로 가까이 가지고 가 보십시요. 눈에 닿을 정도가 되면 손가락이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십리 밖에 있는 손가락도 보이지 않습니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너무 멀어도 너무 가까워도 볼 수 없습니다.

귀도 그렇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적당한 소리만 들을 수 있지 너무 작은 소리나 너무 큰 소리는 들을 수 없습니다. 지금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를 상상을 초월한 큰 소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커서 들리지 않습니다. 반대로 너무 작은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정상적인 것만 봅니다. 정상적인 것만 듣습니다. 정상적인 것만 받아드리고 정상적인 것만 인정하게 됩니다. 정상적이지 않은 것에는 거부감을 느끼거나 받아 드리지 못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이상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말도 안 되는 말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보면 말되는 말보다 말도 안 되는 말은 모두 말도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말이기 때문에 말인 데 말같지 않게 들린 것이었습니다.

그중에 가장 작은 이야기 하나를 골라 보았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난 이야기입니다. 나인성은 갈릴리 호수 옆에 있습니다. 다볼산과 길보아산 사이에 모레산이라는 작은 산이 있는 이 있는 그 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잘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셨던 곳이라 예수님을 몇 년전에 한번 들렀습니다. 지금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한 명도 없고 아랍 사람들만 120가구 약 600명이 살고 있었습니다. 중세기에 프란체스코 계통에서 교회 하나를 세운 것이 흔적 전부였습니다.
사람들이 오기에 문이 잠겨져 있었습니다. 옆 집 여인에게 돈을 얼마 주었더니 얼른 열어 주어서 그 교회를 구경한 적이 있습니다. 산 기슭에 있기에 올라는 길에서 일어난 2000년전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수많은 사람들이 나인이라는 동네로 들어가는 중이었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따라가는 생명의 행렬이었습니다.
그 때 나인성으로부터 나오는 행렬이 있었습니다. 과부 아들이 죽었습니다. 외아들이었습니다. 과부에 외아들입니다. 왜그런지 서글퍼집니다. 남편의 죽음을 보고 아들의 죽음까지 보는 기구한 여자 생각이 눈물이 날 정도입니다. 나인성 동네에서 장례 행렬이 나오다가 예수님의 행렬과 마주쳤습니다.
우리는 듣기만 하여도 슬픈 데 예수님은 직접 보셨으니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겠습니까? 예수님은 울고 오고 있는 여인을 보고 말했습니다.

<울지 말라.>

그리고 관으로 가서 관위에 손을 댔습니다. 관을 멘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가 말하노니 일어나라.>

  죽었던 아들이 일어나 관위에 앉아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이라고 말했을 가요? 성경은 무슨 말했는 지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나는 설교 준비를 하다가 내 옆에 걸려 있는 예수님 초상화를 보면서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님! 예수님이 직접 일으키신 기적인 데 그 때 그 청년이 관위에 앉아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던가요?>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 말하지 말고 설교 준비나 잘 해!>
그래서 나는 다시 컴퓨터로 시선을 옮겼습니다.
이 소문이 갈릴리 전 동네에 났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려워 하는 전기가 되었습니다.
정말 예수님은 말같지 않은 말을 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가 말하노니 일어나라.>

이 말을 할 때에 생명의 행렬속에 있는 사람들이, 장례 행렬에 있던 사람들이나 모두 하나같이 쑤근거렸을 것입니다. 요즈음 말로 이랬을 것입니다.
<놀고 있네.>
<잘난 척 하네.>
<미쳤네.>
<챙피당하겠네.>
  그러나 정말 놀고 있는 말이었을 가요?
정말 잘난 척하는 말이었을 가요?
정말 미친 사람의 말이었을 가요?
정말 챙피당하였나요?
그 청년은 일어났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가 말하노니 일어나라.>

이 말은 한 마디로 말하면 말같지 않은 말입니다. 왜 그럴가요? 믿음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말은 모두 하나같이 말같지 말같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봅니다.

모세에게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어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모두 물을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출 17;6)

모세는 지팡이로 반석을 쳤습니다. 얼마나 물이 많이 나왔는 지 200만명이 충분히 마실 수 있는 물이 아니라 그 날부터 살 수 있는 물이 나왔습니다. 수도국이 지팡이 한번에 만들어졌다는 말입니다.

<반석을 쳐서 물을 내라.>

· <샘을 파라.>
이것이 말같은 말입니다.

다시 한 이야기만 더 들어 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내려다 보니 너무 악하였습니다. 멸망시키려고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홍수로 멸망시키시려고 작정하셨습니다. 노아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노아야! 산위에 배를 만들어라. 배에 이 세상에 모든 동물들을 하나도 빠지지 말고 한 쌍식 뫃아 집어 넣어라. 그리고 일년 먹을 양식을 준비하라. 내가 이 세상을 모두 물로 덮어 모두 죽게 할 것이다.>
말같은 말입니까?
지금까지 산꼭대기에 배를 만든 사람이 있나요? 맞나요? 그리고 1000명 동물학자들을 뫃아놓고 이 세상 동물들을 한 쌍씩 모두 모으라고 하면 가능하다고 할가요?  물이 온 세상을 덮는다는 말이 말같은 말인가요?
그런데 나중에 지나놓고 보니 이런 말들이 정말 말같이 않은 말이었던가요? 말같지 않은 말이 참 말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성경 내내 찾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성경 구구 절절이 말같지 않은 말인지도 모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되어 요한 계시록 22장 21절까지 모두가 말같지 않은 말일 것입니다.
나는 한 마디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믿음의 말은 말같지 않은 말같이 들립니다.>

믿음의 말은 처음에는 말같지 않은 말같이 들리지만 나중에 보면 놀랍게 이루어졌습니다.
어째서 믿음의 말은 말같지 않은 말로 들리는 것일가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너무 높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말은 높은 말입니다. 공중의 말이 아닙니다. 하늘의 말이 아닙니다. 하늘중에 하늘 산층천의 말입니다. 삼층천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높은 말이기에 정상적인 사람들에게는 말같지 않은 말처럼 들립니다.
<청년아! 내가 네가 말하노니 일어나라.>

예수님이 관속에 죽어 누워 있는 청년을 향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단 한 명도 말같지 않게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이었습니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너무 높은 말을 믿지 못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반석을 쳐서 물을 내라.>
<산위에 배를 만들어라.>

이런 말들은 높은 말들이니다. 말같지 않은 말이었지만 다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인간의 말은 상식이요 하나님의 말은 믿음입니다.
이런 말씀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들은 처음에는 말같지 않게 들립니다. 그러나 말같지 않은 말을 그대로 들으면 큰 축복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6.25 때 물밀듯이 북한에서 피난나올 때였습니다. 으슥한 산기슭에 공산당들이 진을 치고 대열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한 명 한 명 조사하여 공산당에 반대하는 반동분자들은 죽일 때였습니다. 목사님도 붙잡혔습니다. 목사라고 말하면 10%% 그 자리에서 즉결 총살입니다. 한 명 한 명 물으며 별 볼일 없는 사람은 남으로 보냈습니다. 드디어 목사님 차례가 되었습니다.
<넌 뭐하던 놈이냐?>
공산당이 거드럭 거리며 물었습니다. 순간적으로 하나님게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무어라고 할가요?>
<하나님도 순간적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사실대로 말해라.>
<그러면 죽는 데요.>
그 때 공산당이 소리를 질렀습니.
<넌 뭐하던 놈이냐고?>
목사님은 순간적으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네 목삽니다.> 그랬더니 공산당이 껄껄 웃으며 말했습니다.
<목수라고? 알았어. 가!>

하나님의 말은 말같지 않지만 나중에 보면 참말입니다.

2. 너무 멀리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높은 곳에서 그리고 너무나 먼 곳에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들을 귀가 없으면 들을 수가 없고, 볼 눈이 없으면 볼 수가 없습니다.
나인성 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가 말하노니 일어나라.>
이 말은 너무 멀리 있는 말입니다.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말입니다. 다시 일어나는 일은 멀고 먼 종말에나 있을 일입니다. 너무 먼 말씀을 예수님이 하시고 계셨습니다. 만일 내일이 주님이 오시는 날이고 죽었던 모든 사람들이 살아나 부활하는 날인 데 오늘 <청년아, 일어나라>고 하셨다면 어느 정도 말같은 말일 것입니다.
나와 너무 멀리에 있는 말은 말같지 않게 들립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보면서 아브라함은 질실로 믿음의 사람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하나밖에 없는 이삭을 통하여 민족을 이룰 것이다. 그리고 메시아가 오시게 될 것이다.> 그런데 얼마후 말씀하셨습니다.
<이삭을 죽여 내게 번제로 바쳐라.>
이 때 우리는 상식적으로, 논리적으로 이렇게 말하지 않을 가요?
<언제는 민족을 이룬다고 하시고 언제는 죽이라고 하십니까? 앞 뒤가 전혀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달랐습니다.
<먼저 하신 말씀도, 나중에 하신 말씀도 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삭을 통하여 민족을 이루실 것이다. 그런데 이삭을 죽으라고 하신 것은 죽이면 어떠냐? 도로 살리려서 그렇하실 텐데....>
이런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말슴드려 봅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리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 지라>(히 11;17-19)

아브라함은 다시 산다는 먼 훗날의 말도 말같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너무 먼 말은 듣지 못 합니다.

믿음의 말은 너무 멀리 있어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 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바라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믿음입니다. 바라는 것이 멀리 있으니 먼 곳에 있는 것을 끌어 당겨 말하면 말같지 않은 말로 들리는 것입니다.
비행기가 없던 시대에 라이트 형제가 우리가 하늘을 날라 다닐 수 있게 된다고 하였을 때 사람들은 너무 먼 이야기라 정신병자인 줄 알았습니다.
옆 사람들과와만 이야기를 나눌 때 먼 곳 사람과 말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든다고 알렉산더 그래햄이 말했더니 사람들은 정신병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멀어도 가까운 곳으로 끌어 드려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어느 중학교 교실에서 신학기에 있었던 일입니다. 선생님이 아이들을 서로 소개하느라고 가문의 자랑을 차례로 나와서 하라고 하였습니다. 모두 나와서 아버지 자랑, 할아버지 자랑, 조상 자랑이었습니다. 한 학생이 나와서 말했습니다.
<나는 전주 이씨 47대손입니다. 왕족입니다. 증조할아버지는 이조 판서였습니다. 할아버지는 교장선생님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대 기업의 과장입니다.>
다음 학생이 섰을 때 선생님은 순간적으로 앞이 노래졌습니다. 고아였습니다. 저 아이를 배려하지 못 하고 이런 일을 벌인 것을 가슴 아파하였습니다. 저 아이가 무엇이라 말할지 궁금하였습니다. 그 때 그 아이는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내 아버지는 하나님이십니다. 온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대통령보다 더 높으시고 못 할 것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모두가 숙연하여졌습니다.
당당한 믿음입니다.
멀리 계신 하나님을 옆에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3. 너무 깊이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높은 곳에서, 너무나 먼 곳에서 그리고 너무나 깊은 곳에서 들리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인 데 말같지 않게 들릴 때가 종종 있습니다.
예수님이 관속에 누워 있는 청년을 향하여 나인성 길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가 말하노니 일어나라.>

지금 나인성길에 서 있는 두 행렬의 사람들은 관속에 있는 청년이 다시 살아나리라고는 상상도 못 하고 있습니다. 날씨가 좋아서 장례 잘 치루고 오기는 것이 마음의 소원일 것입니다.
마주친 행렬이니 <장례 잘 치루세요> 이 정도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가 말하노니 일어나라.>

이 말은 너무 깊은 말이라 사람들에게 말같지 않은 말로 들렸습니다. 사람은 얕은 웅덩이는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깊은 바다속은 들여다 볼 수 없습니다. 너무 깊은 말은 들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와 유대인들이 같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런 말 저런 말은 다 이해가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3일 만에 세우리라>(요 2;19)
유대인들이 말같지 않아서 물었습니다.
<이 성전은 46년 동안 지었거늘 네가 3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사람들이 말같이 여기지 않으니까 여기서 대화를 끝났습니다. 3년의 침묵이 흘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 가셨다가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 때서야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요 2;22)

깊은 말은 말같지 않게 들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나도 다른 사람이 깊이 이야기하는 것을 말같지 않게 여기다가 실수한 적이 있습니다. 전에 교회가 김 삼손 장로님 이름으로 등기되어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제게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이제 제 이름 빼시고 등기 이전 하세요.>
<왜요? 장로님을 못 믿으면 누구를 믿어요? 거냥 둬요.>
그러나 그는 재차 등기 이전하라고 하고 끊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건강하였던 분이라 누구도 예상하지 못 하였었습니다. 그는 이미 죽음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깊은 말을 나는 몰랐습니다.

탈무드 이야기입니다.
어느 부자가 종을 데리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멀리 갔을 때 병들어 길거리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부자에는 외아들 하나가 있었습니다. 보지도 못 하고 죽어가면서 종에게 유서를 써주었습니다.
<내 외아들에게는 내 재산중에 가지만 골라 가지라고 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종에게 준다.>
종은 너무나 기뻤습니다. 주인 장례를 잘 치루어 드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 친필 유서를 아들에게 내밀서 사정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한 가지만 골라 가지고 나가라고 하였습니다. 아들은 그 유서를 들고 혼자 몸부림치며 울었습니다.
<말같지 않은 말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어떻게 종에게 이 많은 재산을 다 주고 나에게는 하나만 가지라고 하셨나요?>
아들은 랍비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사정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랍비는 손을 턱에 대고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곰곰이 생각하더니 무릎을 치면서 말했습니다.
<당신 아버지는 보통 속이 싶은 분이 아닙니다. 이 유서는 깊은 말이 담긴 유서입니다. 당신은 재산을 실오라기 하나 잃지 않았습니다. 우리 법은 종의 재산은 주인의 재산입니다. 재산을 모두 종에게 주십시요. 그리고 모든 재산중에 종 하나만 선택하십시요. 당신 아버지의 깊은 의도는 이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말같은 말이 성경에 많지만 그런 말이 믿음의 말입니다. 그런데도 이해를 못 하는 이유가 분명합니다.
1. 너무 높기 때문입니다.
2. 너무 멀기 때문입니다.
3. 너무 깊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나는 씨없는 수박을 만들어서 세계적으로 유명하여진 우 장춘 박사 이야기를 드림으로 오늘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6살 때 부모가 다 돌아 가셨습니다. 가족이 일본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일본 고아원에서 민족적인 서러움을 당하며 자랐습니다. 민족적이 차별, 한국인에 대한 냉대속에서도 굳굳히 충실하게 살면서 동경제대를 일등으로 졸업하였습니다. 자랑스러운 한국인이 되었습니다. 일본사람이 한국 고아원에서 자라 서울대 일등으로 졸업하였다면 화제거리일 것입니다. 그의 책상위에 항상 써있는 글이 있었습니다.
<밟히면서도 피는 민들레>
그는 길거기를 걷다가 민들레가 수없이 밟히면서도 기어코 꽃을 피우고 마는 것을 보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수 백, 수 천, 아니 수 만명의 일본이 밟아도 기어코 꽃을 피우고 말았습니다.
우 장춘 박사는 <민들레 음성>을 듣고 승리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높아도, 너무 멀어도, 너무 깊어도 하나님의 말같지 않은 말을 들으며 나가면 승리의 월계관을 쓰는 날이 올 줄로 믿습니다.
한 마디로 외칩니다

출처/강문호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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