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누가복음 12:32~40)
누가 뭐라고 해도 생명은 귀한 것입니다.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말 그대로 존귀한 삶을 살 수도 있고 쓰레기처럼 추한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존귀한 삶을 살려고 노력합니다. 또 행복한 삶을 살려고 애쓰고 있지 않습니까? 때문에 부모들은 본인들은 물론이고 자녀들도 또한 가치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기 위해서 여러 모양으로 힘쓰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교육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자녀들을 잘 가르치려고 애쓰는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자녀 교육에 유난히 열심을 내는 어머니들을 비난하는 소리가 높은 것도 사실입니다.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많은 부작용을 낳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자녀들로 하여금 행복한 미래를 설계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이 어째서 나쁘다는 것입니까? 오히려 칭찬해야 할 일이 아닙니까? 때문에 어떤 사람은 하나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존귀한 인간을 아름답게 가꾸고 다듬는 그 일을 가리켜서 거룩하고 경건한 작업이라고 극찬하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12장 1절 말씀을 보면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모였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요즘 바쁘게 뛰는 대선 주자들 같으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를 알리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만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제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적은 무리라고 부르신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들은 과연 예수님의 그 명령에 순종하여 배와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바로 그 제자들을 예수님은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복되게, 그리고 존귀하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 12:32)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 나라는 이미 이 땅에 임하였습니다. 그리고 장차 완성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친히 진리와 공의로 다스리시는 그 나라가...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로 그 나라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하늘 아버지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그 나라에 대해서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합니까? 다가오는 그 나라를 간절히 기다리며 지금 여기서부터 그 나라의 백성답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마땅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다운 삶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들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존재들입니다. 주님 안에서 다시 태어난 새로운 피조물로서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며 그 나라를 이 땅 위에 건설하는 참으로 복된 존재들이라는 말입니다. 몸은 비록 여기 있지만 마음은 이미 그 나라에 가 있습니다. 그 나라는 우리의 마음의 고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나라는 환난 중에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 참된 위로이며 소망의 빛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소망의 빛에 비춰 볼 때 오늘 우리가 여기서 겪는 모든 것, 심지어 아픔과 슬픔까지도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 아내와 함께 오랫 동안 계획했던 지리산 등반을 위해서 기차를 타고 전남 구례로 갔습니다. 사실 보름 전 인터넷으로 대피소를 예약할 때 속이 많이 상했었습니다. 두 밤을 산 속에서 자야 하는데 우리 형편에 적당한 거리에 위치한 대피소 두 곳 다 예약에 실패했습니다. 할 수 없이 다른 두 곳을 예약하기는 했지만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예약한 대피소를 이용할 경우 전문적인 등산가들도 무리가 갈 정도로 먼 거리를 하루에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집중 호우가 몰아치는 바람에 지리산 입산이 전면적으로 통제되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예약한 노고단 대피소까지는 입산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비록 하룻밤이지만 우리는 지리산에 머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만난 청년이 알려 준 대로 그 다음 날 대구로 가서 소백산을 등반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십이 년 전 선친의 고향인 소백산 밑에 있는 풍기를 찾아보기로 약속했었지만 선친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시는 바람에 찾지 못했던 그 곳을 찾아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선친이 스스로 지은 호가 소죽인데 소백산 밑의 대나무처럼 옳고 바르게 살자는 뜻으로 호를 지으셨다고 했습니다. 몇 달 동안 지리산 등반을 위해서 준비했기 때문에 그리 쉬운 코스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많이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약 다섯 시간 동안 오른 결과 소백산 정상인 비로봉에 올랐을 때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돌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로 하여금 그 나라를 위해서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준비할 것을 권하셨습니다. 그 나라를 위해서 지금 여기서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매우 흐믓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나의 보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더욱 기쁘고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구제는 단순한 선행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위한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나의 보물을 하늘에 쌓는 일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 곳은 도둑이 결코 구멍을 뚫을 수 없는 곳입니다. 때문에 결코 후회할 일이 없습니다. 그 곳에 쌓은 보물의 가치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12장 31절 말씀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하실 것이라고 분명히 약속하시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장차 그 나라에서 받을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부르심의 상급을 위해서 달려간다고 확신을 가지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이 새롭게 깨어나기를 원하셨습니다. 왜냐 하면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눈으로는 하늘의 보물을 볼 수도 없고 따라서 거기에 보물을 쌓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늦은 시각 혼인 집에서 갑자기 돌아온 주인이 문을 두드리면 종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깨어 있다가 등불을 들고 주인을 반갑게 맞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사에 때가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 있어서 때를 분별하는 지혜는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농사를 짓는 농부가 때를 분별하지 못하면 어떻게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그 나라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특권임과 동시에 또한 책임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특징은 누가 뭐래도 종말론적인 것입니다. 그 날은 믿음으로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최후 승리의 날이요 손꼽아 기다릴 만큼 가슴 설레이는 날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 땅 위에서의 삶은 다만 그 날을 준비하는 과정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믿는 사람들까지도 이 세상이 전부이고, 오늘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문에 여유도 없고, 양보도 없으며, 안정된 마음도 없이 불안하고 초조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요지는 준비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열 처녀 비유도 참으로 실감이 나는 말씀입니다. 슬기 있는 다섯이나 미련한 다섯은 똑같이 신랑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다섯은 기름을 넉넉히 준비했고 다섯은 기름을 조금 준비했다가 신랑을 기다리는 동안에 그만 그 기름이 다 떨어졌습니다. 바로 그 차이가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것과 바깥 어두움에 쫓겨나는 것의 차이를 가져오지 않았습니까? 때문에 띠를 띠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진실하게, 그리고 충분히 준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믿음의 등불을 밝히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것 같으면 이 모든 노력과 수고가, 이 모든 구제와 봉사가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탄식하며 절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그렇게 준비하고 기다린 자들에게 놀랍게도 주님은 그들을 위해서 수고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주인과 종의 처지가 바뀐 것 같지 않습니까?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오히려 주인이 띠를 띠고 나아와 수종들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사랑의 주님을 만나 뵈옵는 것만으로 더할 나위 없이 감격스러운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풍성한 은혜와 복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 옛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얼마나 복된 존재들인가 하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또한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에 대해서도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더 이상 땅의 것에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마음은 오직 하나님 나라에 있어야 합니다. 또한 그 나라에 보물을 쌓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 나라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있을지라도 구원을 베푸시는 주님을 믿고 그 주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영광의 그 나라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가운데 보물을 하늘에 쌓는 신실한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강석공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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