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엡5:15-25

by 【고동엽】 2022. 8. 27.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5:15-25

2001-12-06 16:07:15 read : 843

 

솔로몬이 모리아 산에 성전을 봉헌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했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왕상 8:10-11)

 

여기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한 것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성경은 구원받은 우리의 몸이 성전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한 것은

우리의 몸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역사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흔히 "성령충만"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를 추구하고 소망해야 합니다.

 

성령충만한 삶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문제에 대답하기 전에 먼저 한가지 전제를 꼭 두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을

마치 초인적인 그리스도인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상상을 지우라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말합니다.

그러한 삶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정상적인 삶입니다.

성령충만한 삶을 어떤 초자연적인 역사로 볼 때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와 잘못된 결과들이 많이 생겨나게 됩니다.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의 기도를 보면 대개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초자연적인 역사를 구하는 기도가 있고,

또 하나는 자연적인 역사를 구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문제가 기적적으로 풀리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과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해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자기는 빠지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만을 구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그 일에 저도 동참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자연적인 역사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항상 초자연적인 역사만을 구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하나님! 돈이 뚝 떨어지기를 원합니다!"라는 식의 기도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상습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성과 눈물과 땀이 의미 있는 것이 되게 해 달라고 하는

그런 자연적인 역사를 구하는 기도를 더욱 즐겨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경우에만 초자연적인 역사를 구해야 합니다.

자기는 불한당(不汗黨)처럼 땀을 흘리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만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돈이 뚝 떨어지기를 원하는 기도보다

돈을 잘 벌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고,

그리고 돈을 번 후 잘 쓸 수 있는 행복함이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돈이 뚝 떨어지는 원하는 기도는 자신은 땀을 흘리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만을 바라는 기도이지만,

돈을 잘 벌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하는 기도는

땀을 흘리겠다는 각오 위에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기도를 더 기뻐하시고, 더 응답하기를 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땀을 흘리겠다는 "우리의 땀과 헌신"을 전제로 한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초자연적인 것만을 구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성령충만한 삶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충만한 삶이란 어떤 초자연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령충만한 삶은 그것이 아닙니다.

성령충만한 삶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야 하는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첫째, 성경에서 성령충만을 명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5:18)

 

오늘 본문은 술 취하지 말라고 합니다. 방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게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를 취하게 하는 그 잘못된 술을 끊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잘못된 성격, 단점, 눈으로 범죄하고, 입술로 범죄하는 것,

그리고 세상의 유혹에 빠지는 것들을 끊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런 것들을 끊어야 하나님의 은혜가 막히지 않고 쭉 빨려 들어오며,

영혼의 어둠과 구름이 사라지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술들을 끊은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한 술들을 끊기 위해서는 오직 성령 충만을 받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행복과 축복을 위해 그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2. 둘째,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교회생활에서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교인의 향기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결혼생활에서도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교인의 향기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5:22)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는 이런 삶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능력이 없어서, 열등해서 아내들에게 복종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의 질서를 위해서 아내들에게 넓은 마음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이 없다면 진정한 복종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진정한 복종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면

복종은 겉으로는 열등한 것처럼 보여도 영적으로는 위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더 열린 사람에게 복종을 요구합니다.

 

남성은 머리가 되어 이끕니다.

반면에 여성은 복종하며 이끕니다.

더 위대한 것은 복종하며 이끄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모든 사람은 다 복종하며 이끌어야 합니다.

 

그래서 복종은 아내들에게만 요구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5:21)

아내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복종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아내의 입장에서 취해야 할 한가지 태도로 강조하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여성해방운동가들이 싫어하는 이 바울의 명령은 일방적인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남편에게도 명령하고 있습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5:25)

 

이 구절을 있는 그대로 실천하고자 하면

여성의 희생보다 남성의 희생이 훨씬 더 크게 요구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어떻게 사랑했습니까?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희생적 역사를 통해서 교회를 세우셨고

동일한 희생적 사랑으로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그와 같이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려면

남편은 아내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더 많은 희생을 치루었습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더 많은 희생을 치루었습니까?

교회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 복종적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보다 더 크겠습니까?

 

그러므로 아내에게 요구되는 희생보다 남편에게 요구되는 희생이

더 많고 큰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도 성령충만한 삶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직장생활에서도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빛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성경은 얼마나 어려운 요구를 우리들에게 하고 있습니까?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눈가림만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6:5-6)

 

직장 상사의 말을 그리스도의 말처럼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통 순교자적 정신이 없으면 보통 어려운 명령이 아닙니다.

이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령충만한 삶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려면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3. 셋째, 성령충만은 우리의 기회를 살려주는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하지 않기 때문에 황금같은 기회들이 사라져버리는 것을

우리는 너무 많이 목격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충만에 대한 관점에서 치명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충만을 즐거움의 원천으로만 보지 일의 원동력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은사는 집에서 갖고 노는 노리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는 효과적인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충만하면 기회와 일에 대해 몸과 마음을 쏟게 됩니다.

그래서 기회가 살아나게 됩니다. 그리고 일이 생명력이 넘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성령충만함은 꼭 축복과 행복과 성공을 수반합니다.

 

여러분! 진정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 보십시오.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축복이 덧입혀지게 됨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축복의 비결은 성령충만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된 삶이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