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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땅을 바라보라 (창13:10-18)

by 【고동엽】 2022. 8. 27.

약속의 땅을 바라보라  (창13:10-18)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는 촌에서 일하는 한 여인이 땅을 지키려는, 빼앗긴 땅을 찾으려는 고투가 생생히 그려져 있습니다. 이 소설을 집필하는데만 26년이 걸렸고 3만매가 넘는 대서사시입니다. 여기서 토지는 삶의 터전으로 목숨과도 같은 것입니다.

모든 식물은 땅에 뿌리를 내려야 살 수 있습니다. 모든 동물도 땅은 생존의 바탕이 됩니다. 여기엔 사람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전쟁은 땅을 빼앗으려는 땅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갈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땅은 생활 습관, 문화, 감정과 정서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추운 북극지방에 사는 사람과 더운 적도지방에 사는 사람은 주거, 의상, 문화, 모든 것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 사는 식물도 다르고 똑같은 식물이지만 맺는 열매도 다릅니다.

우리나라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 놓인 땅입니다. 바로 그 지정학적인 위치가 우리민족의 역사를 만들어 왔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과 롯 가족안에서 땅 때문에 생긴 갈등, 그 갈등을 해결하는 이야기, 그 갈등을 멋지게 해결했을 때에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그려가고 있습니다.

본문 10절에서 “롯이 눈을 들어 땅을 보았다”고 기록했고, 14절에서는 “아브람이 눈을 들어 땅을 보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땅을 보느냐? 어떤 땅을 얻느냐 여하에 따라 축복의 사람이 되기도 하고 저주의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땅을 얻어야 합니다.

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의 땅을 얻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입니다.” 말씀했을 때 - 여기 땅은 하나님이 주시는 분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우리가 누려야될 영광의 땅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내 주변에 사람들을 보내서 사람을 얻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환경과 공동체를 얻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에 약속된 모든 삶의 능력이 내 것이 되는 축복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땅만 보고 사는 사람은 땅의 사람입니다. 영원한 땅을 보고 하늘의 땅을 보고 살아가는 사람은 하늘의 사람입니다.

여기 “본다”는 것은 비전이요 가치관입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위해 사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영적인 수준입니다. 믿음입니다. 가치관입니다. 인생관입니다.

은혜의 영성 시리즈를 마치고 복의 근원 시리즈 그 두 번째 시간입니다.

첫 번째 시간에 「복의 근원이 되리라!」는 말씀을 상고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약속의 땅을 바라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아브람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땅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을 때에 아브람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고 니가 좌하면 내가 우하리라.” 너 좋은 대로 선택하라는 이야기겠지요.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땅 문제 때문에 깊은 갈등을 겪었던 아브람 가족, 특별히 이런 넉넉한 여유를 누릴 수 있었던 말입니까?

우선 생각해 보면, 네가 잘되는 것이 내가 잘되는 것이고 내가 너를 사랑하니 너에게 양보하겠다는 이야기 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축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목초지를 양보한다고 하는 것은 생명을 내어놓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흔쾌히 목초지를 양보합니다. 이토록 놀라운 여유가 어디서 나왔단 얘기일까요?

이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람은 이렇게 더 큰 것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작은 것에 있어서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햇빛아래 살아가는 사람은 촛불 정도는 쉽게 양보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주시겠다는 약속의 땅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았지만 아브람은 알고 있었습니다. 조카와 갈등을 겪으며 빼앗는 땅 정도는 아닐 것이다. 이 세상에서 싸움에서 얻는 정도의 땅은 아닐 것이다. 내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내가 꿈도 꿀 수 없는 굉장한 것이고 어마어마한 것이라는 사실을 아브람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작은 것에서는 양보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말씀과 믿음에 바탕을 두고 긍정적으로 문제를 해결한 아브람에 반해 믿음이 없었던 롯은 하나님을 선택하기보다는 땅의 욕심을 선택했습니다. 물질을 선택했습니다. 세상적인 행복을 추구해 갔습니다.

그래서 본문 10절에 보면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여기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 땅이 어떤 땅인지 ① 물이 넉넉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양을 먹이기에는 안성맞춤이라고 판단했겠지요. 물이 많으니 풀이 많았을터이고, 넉넉한 목초지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② 여호와의 동산과 같았다. 마치 에덴동산을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는 땅이었습니다. ③ 애굽 땅과 같았다. 아브람을 따라 애굽에 내려갔을 때에 라일 강변에 펼쳐진 도시의 화려함을 보았던 터이라 이 정도 땅이면 도시 문명의 화려한 꽃을 피우고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땅이 어떤 땅이었습니까? 소돔과 고모라! 역사적으로 가장 무서운 심판을 받았던 땅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화려하고 매력 있는 도시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없었습니다. 단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행복을 약속해 줄 것 같은 착각을 주는 도시일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유혹이 롯에게만 있을까요? 우리가 주거지를 선택할 때 세상 사람들과 다른 어떤 판단의 기준이 있습니다. 집 값이 오를만 하기 때문에, 또 학군이 좋기 때문에, 이것이 유일한 기준이라고 하면 여러분은 세상사람들과 어떤 면에서 다릅니까?

일전에 싱가폴에 들렸을 때에, 한 젊은이는 내가 어디에 가면 복음을 마음껏 전할 수 있을 것인가? 어디에 가면 우리의 셀이 부흥할 수 있을 것인가? 어디에 가면 셀을 개척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유일한 그의 가치관이었고 주택을 선택하는 판단하는 기준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직업을 선택하고 직장을 선택하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제가 졸업한 거창고등학교에서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들려주는 직업 선택 10계명이라고 하는게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내용들이 나옵니다. 월급이 적은 쪽을 선택해라. 월급이 많고 적음이 내 인생을 가늠해서는 안되겠다는 얘기겠지요. 왕관이 아니라 십자가가 있는 곳, 단두대가 있는 곳으로 가거라. 소명을 따라 살라는 얘기겠지요. 네 아내가 한사코 말리면 틀림없다. 그곳으로 가거라.

결혼을 위해서 배우자를 선택할 때에 또 우리의 집안에 자녀들을 결혼시킬 때에 세상사람들과 다른 어떤 기준이 있습니까? 가치관이 있습니까? 어떤 면에서 당신은 세상 사람들과 다릅니까?

롯의 실수는 잘못된 가치관으로 잘못된 땅을 보았고 잘못된 땅을 찾아간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롯의 비극은 아브람을 떠난데서부터 시작이 되어졌습니다. 롯은 아브람을 떠나면서 세상을 선택해 달려갔습니다. 왜 아브람을 떠난 것이 그의 비극이 되는 것입니까? 아브람은 복의 근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복 덩어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브람은 축복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축복의 사람을 만나는 것, 기도의 사람을 얻는 것, 믿음의 사람을 얻는 것, 이것이 내 축복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내가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복되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에 두 사람의 갈림길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아브람이 끝까지 거주한 땅은 바로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외로운 땅이었으며 기근이 있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그 곳 약속이 있는 그 땅을 붙들었습니다. 그런데 롯은 어떠했습니까? 롯은 세상과 물질을 따라갔습니다. 인간적인 행복을 추구해 갔습니다.

성경에 재미있는 한 표현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습니다. “소돔까지 갔더라” 소돔까지 가려는 마음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요. 물질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소돔까지 가고 말더란 얘기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망할 때까지 가더라는 얘기입니다. 자기가 가는 길이 망하는 줄 모르고 가더라고 하는 것이지요.

아브람은 분명히 한 가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세상사람들 눈에는 척박해 보이는 땅이었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 거기 복이 있으리라. 믿음으로 아브람은 약속의 땅을 붙들었습니다. 그 땅을 떠나지 아니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오셨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는 좋은 길을 선택했느니라.

하나님이 그리울 때에 하나님 찾아와 주셨습니다. 아브람에게 확신이 필요할 때에 말씀이 필요할 때에 말씀을 주셨습니다. 새로운 꿈이 필요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새로운 꿈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브람에게 있어서 복이 무엇입니까?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4절 말씀에 보면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 남북을 바라보라”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찾아오셨습니다. 아브람이라고 왜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과연 이 땅을 양보해야 할 것인가? 또 자기를 흔쾌히 버리고 떠나는 롯을 바라볼 때에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요?

‘나를 떠나라고 얘기할 때에 한켠에서는 삼촌 나는 삼촌을 떠날 수 없어요. 하나님이 삼촌과 함께 하는 것을 나는 보았어요. 삼촌은 복의 근원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삼촌을 떠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약속을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축복을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삼촌을 떠날 수 없어요.’ 매달리기를 기대했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훌쩍 조카 롯이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받은 비전이 가장 가까운 롯에게까지 인정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에, 소중하게 여겼던 가족에게조차 용납 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에 얼마나 상심이 컸을까요?

믿음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꿈이 송두리째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내일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땅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땅을 바라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이 좋아진다는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시야가 넓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믿고 은혜 받으면 사람이 변화됩니다.

변화되면 사소한 일에 집착하던 사람이 큰 일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땅만 보고 살던 사람이 하늘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가까운 것만 보고 살던 사람이 먼 곳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외소하던 사람의 믿음이 마음이 커지는 것입니다. 생각이 커지는 것입니다. 눈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꿈이 커지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한번도 보지 못한 세계, 들어보지 못한 세계, 꿈꾸지 못한 세계를 향하여 마음과 눈이 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일이라고 하는게 대게 보면 너무나 뻔한 것입니다. 신기루 같은 것입니다. 붙들지만 마지막에는 한줌 재로 남아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펼쳐질는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끝나는 날이 있습니다. 이게 세상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열고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가 보이게끔 되는 것입니다.

롯을 떠나보낸 아브람에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 남북을 바라보라” 동서 남북 새로운 세계를 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세계를 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히브리인이었습니다. 유대인을 사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된 것입니다. 지옥의 불쏘시개나 개처럼 취급처럼 이방인들에 대한 새로운 꿈을 꾸게 된 것입니다. 오고 오는 세대에 서울에서 동경에서 워싱톤에서 아프리카 오대양 육대주에서 펼쳐갈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방인의 사도로 나서게 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를 당했습니다. 버려진 땅 밧모섬에서 그는 죽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눈이 열려져 하늘을 보게 된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는 기록했습니다. 요한 계시록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영원히 살 새로운 세계의 꿈을 우리 모두에게 나눠주고 있습니다.

마포 삼열 박사는 미국의 부통령으로 지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기도하는 가운데에 한반도를 보았습니다. 예수 없이 죽어 가는 한민족을 보았습니다. 한국 땅에 와 장로회 신학대학을 세우고 한국최대의 교단인 장로교를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와 칼빈은 카톨릭이라는 우물안에 갇혀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가운데 새로운 눈이 열려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기를 원하시는 교회는 바로 이런 교회가 아니다. 주님이 기뻐하는 교회는 이런 교회가 아니다.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을 보았습니다. 스터드라는 젊은이는 아프리카를 보았습니다. 윌리암 캐리는 인도를 보았습니다.

구 소련은 알래스카를 얼음덩이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존슨 대통령은 알래스카를 보물창고로 보았습니다. 단 720만불에 미국 본토에 1/5이 넘는 알래스카를 사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는 군사기지였고 거기는 무궁무진한 석유와 보물들이 가득히 숨겨져 있었습니다.

L.A.는 끊임없이 펼쳐진 사막에 불과했습니다. 서울에 10배가 넘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꿈을 가진 사람들은 400km 500km 밖에서 물을 끌어다가 나무를 심고 도시를 건설합니다. 거미줄처럼 고속도로를 도시 가운데 건설하고 전세계 수많은 인종들이 모여 함께 행복한 도시를 건설해 가고 있습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 남북을 바라보라! 먼저 눈을 들라고 얘기했습니다. 눈을 깔고 땅을 보라의 반대말로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는 말이 아니고 눈을 크게 뜨라는 얘기입니다. 롯은 눈을 크게 떴을 때에 소돔과 고모라가 망하는 땅인줄 모르고 그 길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약속의 땅이 보여졌습니다.

환경을 보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을 열고 보면 온 세상에 행복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내면세계를 보면 내가 나 자신을 들여다 보면 초라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내 안에 계신 예수를 바라보면 내가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나는 존귀한 존재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 있는 곳에서! 내가 있는 이 땅을 복된 땅으로 만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국에 어느 마을에 부모를 일찍이 여윈채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는 에드워드 윌리암 보크라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너무 너무 가난해서 하루 하루 살기도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꿈을 안고 어린 소년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보스톤에 자리를 잡고 거리에 신문가판대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항구를 떠날 때에 할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을 늘 기억했습니다. “너 있는 곳을 복되게 하라!”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기 시작했습니다. 남들보다 30분 일찍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30분 먼저 신문을 설치해 놓았습니다.

매일같이 그곳에서 신문을 사서 읽던 커티스란 출판사 사장이 보니까 너무나도 성실합니다. 신문사에 청소부로 취직해 주었습니다. 너무나도 성실하여 정식 사원으로 채용됩니다. 마침내 열심히 일한 그는 판매부장이 되었고, 경리부장으로 승진되었을 때에 그의 성실성과 근면성에 탄복한 커티스 사장은 그의 딸과 그를 결혼시켜 그의 사위로 삼습니다. 그리고 편집국장, 총지배인을 거쳐 마침내 거티스 출판사 사장이 되었고 미국 최고의 출판사로 만들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너 있는 곳을 항상 복되게 하라! 하나님의 말씀은 명령입니다.

약속의 땅을 붙들고 버틴 아브람을 하나님이 버리지 아니했습니다.
15절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6절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찐대 네 자손도 세리라”

역사를 바꾸는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될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축복은 무한하다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셀 수 없을 만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무한대로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국 여성 가운데 사회장의 영예를 누린 백씨 성을 가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조선말기와 일제초기를 지냈던 사람인데 어린나이에 결혼해서 일찍 남편을 여의고 16세에 혼자 사는 몸이 되었습니다. 입을 것 입지 못하고 먹을 것 먹지 못하고 모으고 모아서 200냥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시어른들과 남편의 무덤을 모시기 위하여 선산을 구입하는데 친척의 소개로 대동 강변에 한 산을 사게 되었습니다. 땅 문서를 손에 들고 이장을 하기 위해서 산에 올라가 보았더니 이장을 할 수 없는 돌로 가득찬 버려진 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예배당에 가서 하나님 앞에 울면서 감사 기도를 합니다. “나보다 힘없는 사람이 이 땅을 샀더라면 망하고 말았을 터인데 아직 내 몸 건강하고 재봉틀 한 대 있으니 다시 돈을 모으면 될 터인데 하나님 다른 사람 망하지 아니하고 내가 망하게 된 것 감사합니다.”

그 이후 일본 사람이 대동강에 다리를 놓으려고 계획하고 시멘트 공장을 세우려고 석회암 지질을 조사하던 중 대동강변에 있는 석회암으로 쌓인 한 산을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백씨 아주머니의 땅이었습니다. 기업주 오노단은 소개를 넣어서 300냥에 산을 팔라고 합니다. 거절하지요. 1천냥? 5천냥? 깨끗이 거절합니다. 1만? 2만냥을 주겠다고 그래도 거절합니다. 도지사를 통하여 이 사람이 교회 다니는 사람인줄 알고 목사님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나라를 위해서 산을 팔 수 있도록 설득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목사님이 이 사람을 만났더니 “목사님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200냥에 사서 마을 사람들이 나보고 망했다고 하는데 2만냥에 사간다면 그 사람이 망하는 꼴을 내가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믿는 내 양심으로 나 혼자 망하고 말아야지 다른 사람 망하는 것은 볼 수 없습니다.” 목사님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2만냥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받고 이 산을 팝니다. 그 돈으로 교회를 지었습니다. 학교를 세웠습니다. 기독교회관 건물을 지었습니다. 장로회 신학대학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평양신학대학교 제단을 설립하게 되었고 후에 이 사람의 믿음을 기려서 나라에서는 그 사람의 이름을 선행이라 이름지어 “백선행”이란 인물로 오늘 기독교사에 전해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은 내가 보지 못하는 땅입니다. 내가 꿈꾸지 못하는 땅입니다. 내가 땀흘려서 만든 땅이 아닙니다. 내가 가꾼 땅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땅은 영원한 땅입니다. 이제 남은 생애 우리는 의미 있는 일을 찾아야 합니다. 눈을 들어 동서 남북을 바라보라! 네가 보지 못했던 새로운 땅을 새로운 세계를 보라는 것이지요.

결혼하여 자식 낳아서 자식의 기저귀를 빨면서 나는 이 아이를 모세를 키운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미 이 여인은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공사판에서 땀흘리며 일하는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나는 많은 돈 벌지 못했지만 이 돈으로 아무데나 쓸 수 없다. 세계를 변화시키는데 이 돈을 쓰리라. 나는 이 돈으로 죽은 영혼을 살리는데 이 돈을 쓰리라. 이 인물은 새로운 세계를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하늘의 존재로 이미 살아가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천국을 막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땅입니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구체적이고 더 실제적인 땅입니다. 생생한 땅입니다. 여기에는 거짓스러운 것도 많고 진실하지 않은 것도 많습니다. 가상적인 현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드는 영원한 천국은 우리가 누려야 될 영원한 천국입니다. 이제는 그곳을 우리가 바라보고 살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그 천국을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유대인들은 천국에 가는 것을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땅, 영원한 가치, 세계를 바꾸는 땅, 하나님께서 나 혼자 잘먹고 잘살라고 이 땅에 보내 주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생명의 기간에는 분명한 의미가 있고 목적이 있고 경륜이 있고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발견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약속의 땅을 얻는 사람입니다.

한소망교회가 꿈을 펼칠 그 땅을 약속의 땅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만평쯤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거기서 민족의 운명을 바꾸고 세계를 바꾸는 꿈을 펼쳐갈 것이기 때문에 그 땅을 약속이라 꿈땅이라 부르는 것이지요. 이미 그곳은 이 세상에 있는 땅이 아닙니다. 천국으로 이어질 땅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입니다. 우리 자손들에게 주실 땅입니다. 그래서 그 땅은 꿈땅이요 약속의 땅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영원으로 이어질 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깊은 산속에 사는 멧돼지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먹이를 찾아서 어슬렁 거리다가 뜻밖에 도토리 나무 밑을 지나다 이곳 저곳 도토리가 널려져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눈에 띄는 도토리를 다 주워 먹었지만 배가 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랑잎을 코로 헤치고 주둥이로 땅을 파니까 땅속에서 도토리가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맷돼지는 혼자 생각하는 것입니다. 땅속에서 도토리가 나오는 것이라구. 그래서 ‘이것 보라. 내가 얼마나 지혜로운 존재이냐. 아무도 이걸 모를 거야.’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팠더니 또 도토리가 하나 나옵니다. 이것 봐. 이것 나 혼자만 발견한 거야. 그래서 계속해서 땅을 파헤치는 가운데 상수리나무가 서 있을 수 없을 만큼 사방에 땅을 파헤치고 말았습니다. 상수리가 넘어지는 바람에 상수리나무에 이 멧돼지는 깔려서 죽었더랍니다.

여러분 땅이나 파며 사시겠습니까? 약속의 땅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하여 준비한 축복의 땅을 바라보십시오. 의미 있고 보람찬 일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께 펼쳐질 미래에 여러분을 향한 영광스런 계획을 보십시오. 믿음의 눈을 열고 여러분의 내일을 바라보십시오. 준비한 땅을 바라보십시오. 주께서 여러분의 역사를 새롭게 펼쳐 주실 것입니다.

출처/류영모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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