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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하는 자 (아가 2:8-13)

by 【고동엽】 2022. 8. 25.

내 사랑하는 자    (아가 2:8-13)

폴란드의 귀족 출신 캐서린은 스웨덴의 왕자 존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존 왕자는 왕위 계승을 놓고 형인 에릭 왕자와 경쟁관계에 있었습니다. 결국 형 에릭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고, 존은 형의 미움을 받아 평생토록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존의 부인 캐서린은 왕께 나아가 간청했습니다. “폐하, 저를 네 남편과 함께 감옥으로 보내주십시오.” 그러자 왕이 대답하기를 “캐서린, 그대의 남편은 평생동안 다시는 햇빛을 보지 못하게 될거요. 그대는 그것을 알고 간청하는 거요?” 그러자 캐서린은 “폐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무죄를 막론하고 그는 내 남편입니다. 평생동안 햇빛을 못본다해도 남편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왕은 측은한 눈빛으로 캐서린에게 말했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그대의 남편이 종신형을 받는 순간부터 그대는 결혼 서약에서 자유스러워졌다고 생각되는데....” 그러자 캐서린은 자신의 결혼 반지를 빼들고 말했습니다. “폐하, 부디 이 결혼 반지에 새겨진 문구를 읽어보아 주십시오.” 왕은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이란 문구를 읽은 후 캐서린을 설득시킬 수가 없어 그녀를 남편이 있는 감옥으로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캐서린은 국왕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남편과 함께 17년을 살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진정한 사랑을 가로막을 것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죽음 조차도 사랑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이런 저런 이유로 ‘사랑도 변한다’고 하는데, 다이아몬드가 결코 변하지 않듯이 사랑이란 변치 않는 것이 그 본질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아가서는 이러한 진정한 사랑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성도들 가운데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도 전혀 없이 연인에 대한 사랑 노래 일색인 이런 글이 어떻게 정경화 되었는지 이해가 안된다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글자 그대로 읽기보다는 영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영적인 눈으로 읽으면 ‘아가서’는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와, 성도를 사랑하는 주님의 사랑의 음성임을 알게 됩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를 향한 주의 깊은 사랑, 변치 않는 사랑을 깨닫고 주님을 향해 같은 사랑을 드리기를 바랍니다.

1. 우리는 주님을 최고로 사랑해야 합니다.

아가서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과의 사랑을 노래한 것으로, 주인공들의 독백과 대화, 회상으로 엮어져 있습니다. 서로의 사랑을 고백하며 사모의 일념을 불태우던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을 그리워한 나머지 병에 걸릴 지경이었습니다(5절). 솔로몬의 사랑 또한 그녀의 사랑에 못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여인이 자신의 연인을 가리켜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뭇 남자는 다 수풀과 같습니다. 전혀 도움이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과나무’는 다릅니다. 아무런 열매 없는 뭇 나무들 가운데 ‘사과’라는 과실을 맺은 열매는 유익한 나무를 상징합니다. 예수를 발견한 사람은 이처럼 이 세상의 수풀 속에서 사과나무를 만난 것과 같습니다. 예수 이외에는 이 땅에 값어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쓸데없는 나무에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사과나무를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전에 솔로몬도 “여자들 가운데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같다고 고백합니다(2절). 1절에서 술람미 여인은 자신을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처럼 평범하고 하잘 것 없는 여자로 낮추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가시 나무 가운데 핀 백합화’같이 고귀한 여인이라고 칭찬합니다.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은(약 4:6)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를 소중한 존재로 인정해 주십니다.
이 세상에서 여러분이 알아주는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사람들은 자기를 내세우려고만 하지 다른 사람들을 인정해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성도 여러분 하나하나를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고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귀하고 보배롭게 여깁니다. “하나님을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 당시 저의 가정은 6.25 사변으로 가산을 잃고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아버님은 결혼 후 빈손으로 상당한 전답을 모아 그런대로 살만 했는데, 전란 중에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전답을 비행장 부지로 징발 당하고 전혀 보상을 받지 못하고 쫓겨난 것입니다. 재산도 잃고, 고향에서도 쫓겨나다시피 떠나온 아버지께서는 큰 충격을 받고 급기야는 자리에 눕고 말았습니다. 가장이 자리에 눕게 되자 저희 가정은 도저히 살 길이 없이 막막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님이 전도부인의 인도로 교회를 나가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저는 교회에 처음 간 그날 바로 예수를 만났습니다. 이제 초등학교 4학년이었지만 교회에서 처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나서 저는 ‘이곳이 우리 가족이 살고, 내가 살 길이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오직 주님 만을 ‘나의 희망’이요, ‘나의 자랑’으로 삼고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세상에서 가장 보배롭고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바울은 예수를 발견하고, 세상의 모든 자랑, 곧 학문과 돈과 권력과 명예를 배설물로 여기고(빌 3:7-8), 오직 주님만을 자신의 자랑으로 삼았습니다. 이런 자세가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올바른 모습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자랑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자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교회는 총동원 50일을 선포하였습니다. 앞으로 11월 5일 총동원 주일까지 바울처럼 주님만을 자랑하는 강남교회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2. 우리는 주님과 함께 살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남녀의 공통된 마음은 헤어지기가 싫다는 것입니다. 하루종일 데이트하고 헤어져서도 집에 가면 전화기를 붙들고 몇 시간씩 통화합니다. 그리고는 “오늘 못다한 이야기는 내일 만나서 하자”고 합니다. 그러한 마음이 더 깊어져 결혼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와 같은 연인의 애타는 그리움과 사랑을 문학적으로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10절에서 14절까지는 봄을 맞이한 왕이 사랑하는 여인을 초대하는 노래입니다. 시각, 청각, 후각을 동원한 이 노래는 사랑에 빠진 모든 사람들의 공감대를 불러 일으킵니다. 우리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예전의 감정을 떠 올리면서..., 10절부터 14절까지 다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감정을 실어서)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사. 바위 틈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10-14절)

본문에 나와 있는 것처럼, 완연한 봄날에 사랑하는 남녀는 서로 얼굴을 보기 원하고, 목소리를 듣기를 원합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우리의 얼굴을 보기 원하시고, 우리의 소리를 듣기 원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4)
여러분도 주님의 얼굴을 보기 원하고, 주님의 음성을 듣기 원하십니까? 날마다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야말로 주님의 얼굴을 보고,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이렇게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고 교제할 때, 마치 부부는 서로 닮아가듯, 예수와 닮아갈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예수를 닮아 작은 예수로 살기를 바랍니다.

3. 우리는 주님께 소속되어야 합니다.

사랑에는 시련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본문에서도 11절의 ‘겨울’, ‘비’, 15절의 ‘여우’로 표현되는 사랑의 시련이 등장합니다. 일반적으로 ‘겨울’은 음울하고 추운 '시련의 때'를 암시합니다. 같은 절에 나오는 ‘비’도 ‘이른 비’나 ‘늦은 비’처럼 파종기나 추수기 때 내리는 유익한 비라기보다는, 겨울의 추위와 한기를 더해주는 을씨년스런 비를 말합니다. 이 또한 사람들을 움츠러들게 하는 비로서 '시련', '고난' 등을 암시합니다.
그 모든 시련의 때가 끝나고 화창한 봄이 찾아와 사랑의 결실을 맺으려고 할 때에, ‘여우’가 등장하여 훼방을 놓습니다. 이 여우는 포도원에 굴을 파고 서식하면서 봄철에 포도나무에 싹이 돋고 꽃이 필 무렵, 포도원을 돌아 다니면서 포도나무를 갉아먹거나 해칩니다. 주님과 성도 사이에도 이렇게 영적인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하는 세력들이 존재합니다. 15절에서는 그러한 세력을 “포도원을 허무는 작은 여우”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여우가 ‘우리’의 포도원을 허물지 못하도록 잡으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들은 주님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교회를 방해하는 세력, 곧 사단의 세력들을 대적하기 위해 항상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벧전 5:8-9).
사랑의 힘은 죽음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비록 사랑의 시련이 따르겠지만 진정한 사랑의 힘은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도 남을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모든 어려움을 이겨낸 여인은 이제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16절)
이는 상대방을 나의 것으로 소유한다는 권리의 의미이면서 동시에 상대방에게 자신을 내어준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둘은 각기 다른 남이 아니고 하나된 둘입니다. 따라서 서로가 서로를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삶으로써 ‘내’가 아니라 ‘우리’라는 공동체를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소속되어 있습니까? 가끔 사람들은 자신의 소속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에 소속되어 있습니까? 주님께 속하여 있습니까? 주님께 속한 사람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행복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항상 ‘나’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주님께 속한 사람은 어떻습니까? ‘내’가 아닌 ‘주님’께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는 사람을 ‘크리스천’이라고 합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7-8)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에도 신앙 생활은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그 열심히 오로지 ‘나’와 ‘내 가족’ 만을 위해서인 경우가 있습니다. ‘내 사업’ ‘내 직장’ ‘내 재산’ ‘내 자녀’ ‘내 가족’ 만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에게 소속되어 있는 몸이니만큼 이제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장하게 하며, 주님의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랑되신 예수님께서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는 주님의 지상명령은 우리가 가장 먼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11월 5일 총동원 주일을 준비하는 것은 단순한 행사가 아니라, 주님의 지상명령에 응답하는 것이며, 우리의 사명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입술로 고백하는 자들은 이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함으로써 그 사랑의 확증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지금 이 시간 우리의 사랑을 실천을 통해 확증하라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십니까? 주님은 지금도 여러분을 마치 ‘신부’처럼 사랑해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랑이신 예수님께 속한 자들입니다. 주님께 속한 자는 주님의 일을 하는 자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그 일을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전병금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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