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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날에 벌어질 일들/마태복음 24장 3-14절

by 【고동엽】 2022. 8. 25.

세상 끝날에 벌어질 일들// 20010916

2001-12-07 23:43:48 read : 316

 

주일 낮예배// 마태복음 243-14

 

< 테러 대 참사는 경고요 질책입니다 >

 

지난 한 주간은 테러 대 참사로 인류의 미래에 대해 절망했던 한 주간이었습니다.

기가 막힌 느낌이 들고, 실제로 이런 장면도 목격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큰 전쟁의 기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외면하고 싶고, 부인하고 싶은 현실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겠습니까? 마음을 수습하고 정신을 차려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전쟁과 재난과 지진, 그리고 각종 사건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줍니까?

믿음의 눈으로 보면 헛된 믿음을 버리고 참된 믿음을 가지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어려운 일을 만나 삶이 힘듭니까? 내게 어떤 사건이 터졌습니까? 왜일까요?

내가 못 믿을 것을 믿고 있고, 하나님을 잘못 믿고 있다는 싸인은 아니겠습니까?

우리에게 터지는 각종 사건은 때로 우리는 바른 믿음으로 인도하는 통로가 됩니다.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할 때 우리는 보다 철든 인생이 될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왜 멸망했을까요? 일차적인 이유는 극심한 타락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다 깊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죄를 짓더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 때문만으로 망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돔이 멸망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결국 의인 열 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악인의 수보다 의인의 수가 얼마나 있느냐를 더 보십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존재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악인을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의인을 기준으로 판단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주 작은 의라도 크게 보시고 그 의로 전체를 감싸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실수하고 범죄하는 대로 다 갚으시는 하나님이 아니시지만

우리의 선한 행위는 비록 적은 것이라도 잊지 않고 기억하시며 다 갚아주십니다.

 

어떤 큰 사건이 나면 세상이 어떻고 사회가 어떻고 누구누구의 책임이라고 합니다.

신문이나 방송을 보면 그들은 다 의인이고 완전한 사람같이 남을 질타하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논리적인 사람, 명석한 사람, 적절하게 비평할 줄 아는 사람,

책임을 추궁하는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의인을 찾고 계십니다.

나 하나 때문에 내가 속한 곳에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게 되는 그런 사람을 찾으십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어서 주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된다면

전쟁의 공포 중에서도 이 땅은 구원을 받고, 이 민족은 용서를 받게 될 것입니다.

 

< 끝날의 징조 >

 

지금 일어나는 여러 상황을 보면 "확실히 말세는 말세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흔히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사회적으로 혼란해지면 "말세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믿는 사람이든 아니든 누구나 할 것 없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모습은 이 세상의 종말이 다가왔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말세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어떤 징조가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말세의 징조를 묻는 제자들에게 그 징조를 말해줍니다.

종말의 때에는 어떤 징조가 있을까요? 본문을 통해 5가지 징조를 생각해보겠습니다.

 

1. 첫째, 거짓 선지자의 미혹이 있습니다.

 

본문 5절 말씀을 보십시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누가 거짓 선지자일까요? 거짓 선지자는 대개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봤다고 하고, 신비한 체험을 했다고 하고, 꿈과 환상을 강조합니다.

또한 주님 오실 날을 정확히 안다고 말하고, 자기 주관적인 생각과 체험을 강조하고

자기는 어떤 특별한 영적 능력이나 해석 능력이 있다고 하면서 자기를 신격화합니다.

그리고 가정을 중시하지 않으며, 언어가 거칠고, 비윤리적이고, 매우 공격적입니다.

 

그 중에서도 거짓 선지자에게 가장 공통적으로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기가 무슨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려고 하는 독선적인 모습입니다.

그래서 "다 썩었어! 다 죽었어! 다 엉터리야!"라고 비판하면서 불신을 조장합니다.

어떤 단체나 사람이 그런 모습을 취하면 그 사람을 지극히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정말 많이 썩었을지 모릅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정말 썩은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믿음을 가지도록 계도하고, 격려하고 이해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는 "교회가 썩었어! 예수가 없어!"라고 하면서 불신을 조장합니다.

왜 불신을 조장합니까? 자기만이 진짜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잘못입니다.

 

한 고목나무에 매가 둥지를 틀고 살고 있었고, 그 밑에는 멧돼지 가족이 살았습니다.

매와 멧돼지는 서로 먹을 것을 나누며 사이좋게 서로 믿고 재미있게 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여우가 질투심이 생겨 이간질을 했습니다.

매에게 말합니다. "너 멧돼지 조심해! 네가 없을 때 나무를 흔들어 둥지를 깰 거야."

멧돼지에게도 말합니다. "너 매 조심해! 네가 없을 때 새끼를 잡아먹을 거야."

그 말에 매와 멧돼지는 서로 의심하다가 아무 데도 못 가고 굶어죽었다고 합니다.

마지막 때에는 이런 여우들이 많아져 불신이 커질 것입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2. 둘째, 난리와 전쟁이 있습니다.

 

본문 6-7절 말씀을 보십시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1차 세계대전에서 1천만 명이 죽었고, 2차 세계대전으로 7,800만이 죽었습니다.

3차 세계대전에서는 어떻게 될까요? 요한계시록 91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세 재앙 곧 저희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을 인하여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니라."

 

3차 세계 대전이 언제 일어날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주 무서운 전쟁이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918절에서 불은 미사일, 연기는 생화학무기, 유황은 핵무기를 상징합니다.

그 무기들로 인류의 삼분의 일, 즉 최소 20억 이상을 죽게 되는 전쟁이 될 것입니다.

한 기자가 아인슈타인에게 물었습니다. "박사님! 3차 세계대전에서 어떤 무기가 사용될까요?"

박사님이 말합니다. "나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4차 대전에서는 다시 돌멩이를 사용하겠죠."

 

우리는 얼마 전 소련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 평화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사상 분쟁보다 더 무서운 민족 분쟁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난리와 전쟁 소문은 끊이지 않고, 점점 아마겟돈의 큰 전쟁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3. 셋째, 곳곳에 지진과 기근이 있습니다.

 

7절 하반부와 8절 말씀을 보십시오.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지금까지도 지진은 있었지만 최근에 지진의 규모와 횟수가 잦아지고 커지고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자연을 괴롭힙니까? 지진과 기근은 자연의 신음이요 보복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 사람에게 있어서 기근보다 더 무서운 것은 영적인 기근입니다.

사람들이 감사할 줄 모릅니다. 감동할 줄 모릅니다. 남이 좋은 꼴을 보지 못합니다.

 

4. 넷째, 성도의 환난이 있습니다.

 

좋은 꼴을 보지 못하는 심리로 인해 마지막 때에는 믿는 사람들이 시련을 당합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그러나 우리는 어떤 환난을 만나도 요한복음 1633절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성도의 성도다움의 가장 분명한 표시는 환난 중에 담대함을 가지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환난은 고사하고 조그만 문제에도 흔들린다면 어찌 믿는다고 하겠습니까?

 

5. 다섯째, 사랑의 해체가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진정한 사랑이 식어지게 됩니다.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왜 사랑이 식어진다고 합니까? 불법이 성하기 때문이라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자세히 보십시오. 약속을 잘 깨고, 법을 잘 깨고, 규범을 잘 깨는 사람을 보십시오.

그런 분들 중에 성령 충만하고, 사랑이 넘치는 분은 별로 없음을 느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자기 중심적이어서 남을 헐뜯고 남이 잘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너무 적습니다. 서로 남을 밟으려고만 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원숭이 암수 한 쌍을 우리 속에 넣고 아주 고약한 실험을 했습니다.

우리 바닥에 전기코일을 깔아놓고 쇠창살과 바닥에 전기를 통했습니다.

그러자 원숭이들이 펄펄 뛰고 난리가 났습니다. 바로 그때 원숭이 새끼들을 넣었습니다.

그러자 어미 원숭이는 자기 새끼들을 번쩍 들어서 머리 위에 올려놓더랍니다.

자기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새끼들만이라도 살려보겠다고 머리에 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비 원숭이는 자기 새끼를 발 밑에 갈고 올라서 있었다고 합니다.

새끼는 밑에서 죽는다고 아우성인데 아비 원숭이는 자기만 살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런 아비 원숭이의 모습이 바로 종말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구체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 종말의 시대를 사는 우리의 삶의 원리 >

 

1. 첫째,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6절 말씀을 보십시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요?

바로 종말을 대하는 차이일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종말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종말이라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들뜨는 것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믿는 사람에게 종말은 구원의 완성이요 새 생명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두려워합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불신앙이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면 그 두려워하는 것이 정말로 찾아오게 됩니다.

친구가 암에 걸렸다고 암을 걱정하면 그 두려움 때문에 암에 걸리게 된다고 합니다.

통계에 의하면, 환자의 90%는 두려움을 갖기 때문에 병이 쉽게 찾아온다고 합니다.

 

잠언 292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또한 시편 1215-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말세의 징조가 뚜렷해도, 큰 전쟁이 일어날 것 같아도 담대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2. 둘째,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말세에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진다는 말은 더 사랑해야 한다는 도전입니다.

그러므로 싫다고 사랑을 포기해도 안되고, 바쁘다고 사랑을 회피하면 안됩니다.

요새 바쁘다고 가정을 돌보지 못하는 분도 많습니다. 바람직하지 않은 자세입니다.

 

얼마 전, 어떤 목사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자기 아이가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아빠는 '나빠!'는 아니지만 '바빠!'지요?" 이 아이의 말은 무슨 말일까요?

아빠가 바쁜 것을 목사의 아들로 이해는 하지만 같이 더 있고 싶다는 말입니다.

저도 그 글을 읽고 힘들어도 아이들의 함께 해 달라는 요청을 들어주는 편입니다.

 

그 요청을 들어주면 그 다음날이 힘들어집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습니다.

부자간의 사랑, 부부간의 사랑은 노력해야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대개 노력의 대가요 투자의 대가입니다. 우리는 더 사랑해야 합니다.

신앙의 출발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완성은 사랑에서 이루어집니다.

 

사람이 왜 만납니까? 만남의 제일 목적은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은 모르는 사람을 만나게 하십니까? 서로 보충하며 살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모두 사랑에 굶주린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남편을 볼 때, "내 남편이 사랑에 굶주려 있구나!"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 남편에게 잔소리를 하고 짜증을 내면 어찌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습니까?

 

남편들도 아내를 '웬수 덩어리'로 보지 말고, 사랑에 굶주린 여인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 가련한 여인을 살릴 사람은 남편밖에는 없습니다. 힘써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그처럼 인간을 사랑에 굶주린 불쌍한 영혼으로 보는 눈이 바로 하나님의 눈입니다.

그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는 이 어려운 시절을 살아가며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3. 셋째, 끝까지 견디어야 합니다.

 

본문 13절은 말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인내하는 자에게는 큰 유익이 있다는 말입니다. 어렵다고 흔들리면 안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상황은 다 필요한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상황 속에서 끝까지 견디어야 합니다. 그러면 열매를 얻게 됩니다.

 

잘 심어놓은 나무도 흔들면 죽고 아무리 잘 박힌 못이라도 자꾸 흔들면 빠집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의 믿음과 영혼을 흔들려고 하는데 그때 흔들리면 안됩니다.

그럴수록 끝까지 견디고 인내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도망가지 말고 그 상황에서 인내해야 합니다.

무하마드 알리에게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시합하기 전에 두렵지 않습니까?"

알리가 말합니다. "두렵습니다. 시합 전날에는 몸이 떨리고 잠이 잘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좁은 사각의 링에서 어디로 피하겠습니까? 지더라도 맞서 싸워야지요."

 

지더라도 맞서 싸워야 합니다. 가야 할 길이라면 울면서라도 가야 합니다.

두려워서 피하면 두려움은 끝까지 우리를 따라와 우리를 노예로 만들 것입니다.

어려움을 참지 못해서 달아나면 성공적인 삶의 열매는 결코 주어지지 않습니다.

도망가고 싶은 때야말로 우리가 마주 서야 할 때이고 인내해야 할 때입니다.

 

종말 시대의 삶의 특징은 서두르고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인내가 필요합니다. 인내와 기다림은 종말 시대의 제일 성공 비결입니다.

농부들이 열매를 수확하기 위해서 기다리는 길밖에 다른 방도를 생각지 않습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기다립니다. 우리들도 그처럼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현재의 상황이 어렵고 답답해도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때가 차야 됩니다.

하나님의 때가 차기까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최선을 다하며 기다리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종종 "내 때가 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말합니다.

 

링컨 대통령도 어려울 때마다 "나는 기다릴 것입니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때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오해를 받고, 섭섭한 말을 들을 때도 있고,

견디기 어려운 모욕을 당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때로 간절한 기도의 응답이 더디다 할지라도 주님을 바라보며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여러분! 인격관계에서 먼저 절교 선언을 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복 받는 비결입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리더가 나를 내치지 않는 한, 나는 리더를 붙들어야 합니다.

반대로 아랫사람에 나를 버리지 않는 한, 나는 아랫사람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렵고 힘들어도 먼저 절교 선언을 하지 않는 사람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4. 넷째, 주님 앞에 설 날을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성수대교가 무너진 후, 한 동안 차안에 망치를 놓아두고,

자동차가 다리를 건널 때마다 안전띠를 풀고 다녔다고 합니다.

여차 해서 다리가 무너지면 망치로 창문을 깨고 잽싸게 차 밖으로 나오려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준비가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주님 앞에 설 날을 준비해야 합니다.

아무 준비 없이 분주하게 살다가 죽음을 맞이할 때 당황하는 분이 참 많습니다.

누구도 주님 재림하시는 날, 자신이 죽는 날을 모르기에 철저히 준비해야 합니다.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감리교 창설자인 요한 웨슬레는 마지막 때 주님 앞에서

특별히 세 가지, 즉 시간, 자녀, 물질을 어떻게 썼는지 대답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떳떳이 대답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습니까?

우리는 내가 가진 것을 가지고 내 배와 내 유익만을 위해서 살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주께서 맡겨 주신 것이니 잘 관리한다는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제발 바라건대 재산이 있으시면 절대로 자녀들에게 남겨두지 마십시오.

살아생전에 좋은 일에 쓰셔야 합니다. 자녀의 영혼을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자녀들은 재산을 물려주는 부모보다 그런 부모를 더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하신 말은 무슨 말일까요?

아마 천국에도 이 세상과는 다른 차원으로 부와 가난이 있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좋은 일을 하지 못하면 마음이 가난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목사의 고민이 생깁니다. 그 원리를 알면서도 헌금설교를 잘 못합니다.

헌금 설교 안하면 우리 목사님은 '헌금 강조 안하는 멋있는 목사님!'은 될지 몰라도

나중에 교인들이 천국에 가서 무엇인가 아쉬운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차원에서의 천국의 부요함을 추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사람을 기쁘게 하기보다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설 때 잘 했다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를 준비하면서 무엇보다 복음 전파와 선교를 위해 힘써야 합니다.

본문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주님이 오시는 때는 언제입니까? 그 때는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복음전파의 사명이 완수되는 바로 그 때에 주님께서 재림하신다고 합니다.

전쟁 때문에 끝이 오는 게 아니고, 천지 개벽 때문에 끝이 오는 게 아닙니다.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고 나서야 끝이 옵니다. 이 말씀은 결국 무슨 말입니까?

복음 전파하는 것은 성도의 최후의 사명이고, 우리 인생의 결론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가 보다 분명해져야 합니다.

누가 목표가 뭐냐고 묻거든 즉시 '복음 전파'라고 대답하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 하나님의 기대주로서 사십시오 >

 

요즘 시절이 수상합니다. 곳곳에서 사고와 사건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끝은 아닙니다. 불안해하지 말고 삶의 현장에서 열심히 내일을 준비해야 합니다.

준비가 없는 재림 신앙! 그 신앙의 결말이 얼마나 허무한 모습이 되겠습니까?

 

어느 분은 자기는 예수님이 오시기를 너무나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유를 알아보니까, 빚을 져서 갚을 길이 없으니까 예수님 오셨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예수님이나 오셨으면 좋겠다!"고 하지 말고 먼저 빚을 갚으려고 해야 합니다.

열심히 사는 것이 잘 준비하는 것이고, 잘 믿고 잘 회개하는 것이 잘 준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영혼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시고 큰 기대를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한번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하나님은 누구 때문에 살 맛 나십니까?"

그러면 우리는 이런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바로 너 때문에 살맛 난단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희망이요 하나님의 기대주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혹시 지금 많이 어렵더라도 절대 기죽지 마십시오.

지금 이 순간은 아니더라도 하나님이 여러분을 귀히 쓰실 순간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희망이요, 기대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열려야 할 영적 눈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기대주임을 깨닫는 눈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기대주로서 세상 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처럼 살아야합니다.

내 목숨도 얼마 남지 않은 것처럼 살아야 인생을 낭비하는 시간이 줄어들 것입니다.

내 목숨이 3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면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열심히 살지 않겠습니까?

그처럼 언제나 세상 끝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매일을 끝날인 줄 알고 살아야 합니다.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나를 향한 부르심에 응답하며 사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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