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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에 의한 생활 (갈 5:24-26)

by 【고동엽】 2022. 8. 25.

성령에 의한 생활   (갈 5:24-26)

신앙인의 삶은 영적삶입니다. 신앙생활은 성령의 인도와 안내와 돌봄의 은혜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인도하시되 도덕적으로, 인격적으로, 성경적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천국을 소망하고 사모하고 기다리며 목적삼고 살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성령은 내가 주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순간부터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은 나와 함께 동행하며 나를 성령의 생각대로 인도하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고 또 하나님이 뜻대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나로 하여금 성령의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요구하십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참 엄청난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그런 삶이 이 세상에 어디에서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신앙 안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성령은 나로 하여금 의롭게 하시고 성결하게 하셔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로,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때 나는 나 자신의 본성과 의지와 생각과 뜻을 포기하고 성령의 생각에 이끌려 살아가게 됩니다. 그 삶이 신앙의 삶입니다.

나는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입고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은혜의 삶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내가 먼저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일입니다. 그 인정받는 삶이 내가 주안에서 의로워지는 일입니다. 내가 의로워진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의와 은혜와 자비하심으로 죄로부터 용서받고 구원받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에서는 무엇보다도 내가 구원받았음이 확실해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나의 신앙이 성장하게 되고 성결한 삶이 시작되고 의로운 삶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내가 주안에서 의로워집니까.  

율법, 금욕, 행위가 아님

내가 주안에서 의롭게 되는 일은 금식하고 금욕하고 절제하고 절식하고 수도원에서 살아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그런 조건들로 의로워진다면 수도원에서 수도하는 분들은 모두 의로워져야 합니다. 그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예부터 신앙 안에서 수도하고 금욕하고 고행하는 일은 있어 왔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목욕재개하기도 하고 한겨울에 얼음을 깨고 들어가 자신을 시험하는 일로 구원받아 보려는 모습들도 있었습니다. 또 봉사와 나눔과 수고를 해서 뭔가 이루려는 몸부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일로 구원받아 보려고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하고 하루 세 번씩 기도하고 안식일이면 숨 막힐 정도로 철저하게 지키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무엇인가 신앙의 선을 이루어 보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런데 내가 신앙 안에서 의로워지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또 그것은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이 나를 변화시키시고 의롭게 하시고 깨끗하게 하시고 구원하십니다. 내가 아무리 절제하고 금욕하고 채식하고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킨다고 해서 내가 구원받고 의로워지고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틴 루터가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하다가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루터가 수도원에서 수도를 하다가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은 아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이렇게 산속에서 수도하고 명상하고 금욕하는 것이 아니다“ 하고 나와 버렸습니다. 사람이 의로워지고 거룩해지고 성결해지는 것은 이렇게 수도하고 금욕하는 것으로 되지 않습니다.

흉내로도 아님  

사람이 좋은 영적습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신앙인들이 절도 있는 습관을 가지고 거룩한 모습을 하고 살아가는 것은 좋은 습관입니다. 고상하고 조용히 묵상하며 살아가는 삶도 좋은 습관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의로워지고 성결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 거룩함을 흉내는 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함이나 성결은 흉내로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천천히 걷고 고무신을 신고 두루마기를 입고 다닌다고 거룩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감리교 부흥사였던 이용도라는 분은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고전을 읽고 이제부터 나도 그렇게 예수님처럼 모방하여 살겠다고 다짐하고 그때부터 검은 고무신을 신고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지만 그렇게 흉내 낸다고 사람이 거룩해지고 성결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이용도도 끝내 말년에 가서는 실패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단들이 처음에 그렇게 거룩함을 흉내 내고 모방하는 삶을 살았지만 하나같이 모두 이단으로 빠져버렸습니다. 그렇게 사람이 거룩함을 흉내 낸다고 모두 거룩해지고 성결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주안에서 의로워지는 일은 흉내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를 비우고 내 안에 성령이 나를 온전히 변화시키도록 내 삶을 내 맡기는 삶

그래서 본문에서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하고 말씀합니다. 그 말은 내가 주를 알고 결심하는 순간 “나는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때 나는 마음으로 죽고 입으로 시인하고 그 증거로서 세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안에서 꿈틀대는 정욕도 탐심도 죽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는 내가 죽는 일이 참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는 그리스도시고 살아계신 하사님의 아들입니다”하고 고백할 때 그 순간 “나는 죽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어야 성령이 내안에 임재하십니다. 내 안에 충만하게 개입하시고 나를 주관하시고 나를 활용하십니다. 그때 신앙생활에 깊이가 있어지고 뜻이 나타나게 되고 내용이 만들어지고 헌신이 뒤따르고 순종의 동기가 주어지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례 받는 날 죽어야 합니다. 세례의 뜻이 죽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는 죽고 성령의 은혜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때 나는 옛길을 버리고 또 옛 습관도 과감히 버리고 성령이 인도하시는 주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죽지 않으면 전혀 달라지는 것이 없게 됩니다.

예를 들면 목사는 안수 받던 날 또 한 번 더 그렇게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때부터 하나님의 사람으로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사역자로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사역자의 길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삶이 성결한 삶이고 신앙의 삶이고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때 그렇게 죽으면 목회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목회하다 보면 숫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신자들도 여러 층이 있습니다. 그 속에는 별 사람들이 다 모여 있습니다. 그래도 목회자가 안수 받을 때 죽었으면 모든 문제들이 극복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죽어야 하는데 그때 죽지 않으면 목회하는 동안 온갖 부작용에 시달리게 됩니다. 우선 그때 죽지 않으면 살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재리에 관심 쏟게 되고 또 속에서 자존심이 꿈틀거리게 되고 목회를 직업으로 생각해서 더 편한 자리를 차지하려 하게 됩니다. 목사가 안수 받던 날 죽지 않으면 목회과정에서 그런 숫한 문제들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안수 받던 날 죽되 또 한 번 더 철저하게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골 골짝 빈들에도 가오리다”하고 찬송할 수가 있고 목회에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목회자가 죽으면 교회도 조용해집니다. 때로 교회가 시끄러운 것은 목회자들이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장로도 마찬가지 입니다. 장로도 장립식 날 완전히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장로노릇 할 수 있습니다. 장로는 지도자입니다. 그것도 영적인 지도자입니다. 죽지 않으면 그 직분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장로는 장립식 날 안수 받을 때 철저하게 죽어야 거기서 지도자다운 생각과 사고가 나오고 영적인 지도력이 나오고 자신을 최대한 배제할 수 있는 힘이 나옵니다. 그리고 교회를 돌보고 신자를 돌볼 수 있는 능력도 나옵니다. 그래야 장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죽어야 하는데 죽지 않으니까 교회에서 자꾸만 집사와 싸우고 자기이익을 챙기려 하고 온갖 인간적인 모습들이 다 나타나고 온갖 주장이 나타나서 불화를 일으키는 주인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죽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이것은 권사도 마찬가지이고 집사도 마찬가지 입니다. 임명받는 날 모두 죽어야 한다. 그러면 일등 집사 일등 권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나를 비우는 삶입니다. 그때 성령이 나의 빈 마음을 채우시고 나로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시고 인도하시고 활용하시는 것이고 그때 나는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모습으로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삶이 의로워지는 삶이고 부름 받은 삶이고 인도받는 삶이고 성결의 삶입니다. 그때 내가 욕망의 길로 가면 성령이 그 길을 막으십니다. 내 안에서 인간적인 욕망이 자꾸만 솟아 나와도 내안의 성령이 막아주시고 절제시키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의 인도를 받고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성령의 돌보시는 삶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그렇게 죽어야 하는데 죽지 않고 살아있어서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순종의 삶을 살 수가 없고 조그만 자존심이 꿈틀거려 욕망을 이기지 못해서 신앙의 길에서 이탈하게 되고 이웃을 원망하게 되고 불화를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성령의 인도를 받고 살아가고 있는가를 한번 알아보십시요. 내가 지금 성령의 인도를 받고 살아가고 있는가를 시험해 보려면 내가 지금 주안에서 죽었는가를 먼저 알아보면 됩니다. 내가 죽지 않았으면 성령의 전적인 인도를 받고 지배받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내 멋대로 행동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내 멋대로, 내 생각대로, 내가 좋은 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지금 내가 불순종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말은 지금 내가 성령이 안내하시는 궤도에서 이탈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것은 내가 지금 거듭나고 의로워지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마음을 비우면 내가 성령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 순종의 삶이 성령으로부터 인도받는 삶입니다. 그래서 본문 25절에서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한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한번 자신을 한번 측정해 보십시오. “지금 나의 삶에 주님이 얼마나 차지하고 계시는가”, “지금 내 관심과 내 마음과 내 생각 속에 주님이 얼마나 점령하고 계시는가”, “그리고 나는 지금 주님을 얼마나 나타내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그것을 측정하는데 연애할 때를 한번 기준해서 생각해 보십시요. 연애를 할 때는 “늘 마음과 생각 속에 그대뿐”입니다. 그래서 방금 전화하고도 10분 후에 또 전화합니다. 방금 헤어져서 집에 들어왔는데 또 전화해서 보고 싶다고 말합니다. 왜 그런 노래 있지 않습니까.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이라는 노래 말입니다. 그런 증상이 왜 나타나난 것입니까. 그것은 내 마음과 생각 속에 온통 그대 생각으로 꽉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내 마음과 내 생각과 내 생활을 그대가 완전히 나를 지배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 상태가 말하자면 충만한 상태입니다. 그 상태를 신앙적으로 말하자면 성령 충만한 상태입니다.

사도바울이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그렇게 하나님을 나타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내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것이 성령이 이끄시는 삶입니다. 그것은 사도바울의 신앙의 뿌리가 그만큼 크고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에게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이 있었고 그 믿음에 뿌리가 깊었던 것입니다. 이 신앙의 삶에는 무엇보다도 뿌리가 깊고 튼튼해야 합니다. 신앙의 뿌리는 복음이고 십자가이고 부활이고 재림이고 심판이고 천국을 신뢰하는 깊이 입니다. 오늘 신앙인들에게 이 뿌리가 깊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신앙에 힘이 없고 용기가 없고 깊이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신앙인들 중에도 예수가 누구냐고 물으면 3대 성인중의 한 사람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거기 어디에서 힘이 나오고 용기가 나오고 위해서 죽을 믿음이 솟아  나오겠습니까. 신앙의 용기나 힘이나 동기는 순전히 신앙의 깊은 뿌리에서 나옵니다. 이 뿌리가 참 중요합니다.

일본이 분재에 조예가 깊은 나라입니다. 분재는 나무의 중심 뿌리를 잘라내고 가느다란 실뿌리만 남겨두는 식물 재배법입니다. 그러면 나무가 중심 뿌리가 없기 때문에 자라지를 못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밑동은 굵어지지만 키는 그대로 있는 것이 분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중심 뿌리를 잘라내서 그렇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 잔인한 식물 학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잘 자라는 식물을 갖다가 중심뿌리를 잘라내서 아주 기형적으로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즐거워하는 것은 아주 잔인한 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람도 때로 식물인간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 상태가 생명의 뿌리가 잘린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는 핏줄과 신경만 살아있기 때문에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상태는 사람이 살아 있으나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식물인간입니다. 그래서 요즘 식물인간을 놓고 그 상태가 살아 있다고 보아야 하느냐 죽은 것으로 보아야 하느냐를 놓고 논란을 벌리는 것입니다.

신앙도 식물신앙이 있습니다. 식물신앙은 아는 것은 많습니다. 그런데 그 아는 것이 대부분 잡 지식 입니다. 그래서 그 잡 지식 때문에 깊은 신앙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살아가는 동안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사안에 따라 흔들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깊은 중심 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 신앙의 깊은 지식이 있다면 그렇게 가볍고 얕고 흔들리는 신앙의 차원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생각할 때에는 믿음의 깊이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평소에는 내 믿음이 좋은 것 같았는데 어느 날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니까 마구 흔들립니다. 그때 찾아오는 생각이 뭔가 하면 “그동안 내가 무엇을 믿었는가” 하는 믿음의 허상을 발견하고 당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큰 병을 얻게 되고 사고를 당하여 재산을 잃고 명예를 잃게 되면 믿음은 간데없고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 같은 절망감만 가까이 다가오게 됩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식물신앙인 것입니다.

그래서 분문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 신앙인의 삶은 주안에서 죽고 다시 태어나는 삶을 말합니다. 신앙 안에서 내가 죽는다는 것은 내 마음을 비운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비운 다음 나는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가 다시 태어나면 성령이 나를 지도하시고 인도하시고 주관하시게 됩니다. 그 삶이 가장 편안한 삶이고 행복한 삶이고 은혜의 삶이고 주를 따르는 신앙인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 삶이 가장 힘이 있는 삶이고 용기와 능력이 주어지는 삶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은 그렇게 내 마음과 생각과 삶에 주님으로 가득 채워진 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성령으로부터 인도받는 삶입니다. 그때 주님의 인도는 나로 하여금 잘 조성된 하나님의 형상에 가장 가깝게 그리고 아주 성숙한 인격의 신앙의 길로 나를 인도하시고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삶이 영적 신앙의 삶인 것입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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