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11:15-25
오늘 본문 말씀은 다윗의 생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시기에 일어났던 한 사건을 우리에
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다윗은 그 젊은 시절에 사울왕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박해를 받으면서 쫓기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사울왕이 죽고 다윗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유다 전체의 왕은 되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여기 다윗은 아둘람이라는 굴 속에서 인생의 가장 어두운 시기에 또한 색다른 역경과
시련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블레셋 군대와 대결하는 가운데 사면으로 포위되어서 둘러
싸인, 그래서 어두움의 굴 속에 숨어 있어야 하는 인생의 아픔의 기간이었습니다. 다윗도
유다 전체의 왕이 되기 전에는 이렇게 시련의 골짜기가 많았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승리의 영광을 주시기까지는 늘 고
통스럽고 아프고 험한 그런 골짜기를 걸어가야 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는 왕이 되었으
나 면류관없는 왕이었습니다. 아직 완전한 왕이 되진 못했습니다. 그는 보좌없는 왕이었고 쫓기고 있는 왕이었습니다.
더우기 다윗의 마음을 슬프게 했던 사실 가운데 하나는 그가 어렸을 적 자라났던 고향인 베들레헴이 바로 자기 눈 앞에, 목 전에 있는데 그만 블레셋 적진에게 점령당하여 아직 그 상태로 있는 사실이 그에게 색다른 고민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더 한 층 말할 수 없는 역경 앞에서 진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 다윗이 피신해있는 장소인 아둘람이라는 굴의 말뜻은 "심판"이라는 뜻입니다. 심판. 어쩌면 이 장소의 이름처럼 다윗은 자기 삶에 심판을 받는 것과 같이 위기와 실망을 겪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수 마일만 가면 어린 시절에 뛰어놀던 아름다운 꿈과 낭만이 있는 말할 수 없는 행복의 고향, 베들레헴이 자기 눈 앞에 있지만 지금 그는 이 아둘람굴 속에서 베들레헴을 바라보며 고통과 번민 속에 있던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눈앞에 보이는 자기 고향을 향해서 한 걸음도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적의 포위망으로 인해서 완전히 그의 길은 차단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둘람굴 속에서 갈 수 없는 베들레헴을 바라보면서 어린 시절의 향수를 다시 그 마음 속에 되새기고 있었습니다. 목동 시절의 추억과 그리고 우물가의 사연들이 주마등처럼 다윗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때는 추수기였습니다. 날씨는 덥고 갈증은 더욱 심해지는데 그는 갑자기 베들레헴의 우물
가에서 그가 어렸을 적에 마시던 시원한 상쾌한 물 생각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본
문 15절에 보면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이 사모하여 가로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
그 물을 마시고 싶다. 이것은 그 누군가를 향해서 구체적으로 자기의 어려움을 호소하
며 물 떠오라고 명령하는 말은 아닙니다. 이것은 독백같은 그의 영혼의 절규였을 것입니
다.
'누가 나로 저 베들레헴의 상쾌한 우물물을 다시 한 번 마시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마침 그 곁에서 이 다윗의 목마른 부르짖음을 듣고 서 있던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 세 사람을 용사, 세 용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세 용사는 이러한 다윗의 절규 소리를 듣고, 다윗을 돕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둘람굴 속에서 죽어가는 왕을 위해서 그들은 희생을 각오하고 모험을 결심했습니다. 희생적 헌신으로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포위하고 있는 적진을 뚫고 지나가서 상처를 입으면서까지 마침내 베들레헴에 이르러 그 우물물을 한 바가지 길어서 다윗에게로 가져왔습니다.
이 본문의 사건은 참 아름다운 구원의 사건을 우리에게 연상시켜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사랑이 오늘 우리를 향해서 다가오는 모습을 이 사건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 나타나 있는 다윗의 모습은 어쩌면 여러분과 저의 죄인된 모습을 연상시켜 주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던 하늘의 왕자가 아둘람굴 속에서 불안과 좌절과 목마름을 경험하고 있는 삶의 스토리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죄인들의 삶의 이야기와 어쩌면 그리도 흡사합니까?
땅을 정복하라, 만물을 다스리라, 이 우주를 정복할 하나님의 거룩한 왕자로 지음을 받
은 인간들이 죄로 말미암아 심판이라는 뜻의 이 아둘람, 어두운 굴 속에서 절망과 낙심과
목마름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다윗이 자기가 처한 어둠과 목마름 속에서 베들레헴의 우물물을 동경하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처한 죄악과 심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목마르게 사모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오라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오라 나와서 값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
성경의 메시지를, 이러한 메시지를 우리가 기억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옥은 물이
없다고 합니다. 그것은 영원한 목마름의, 갈증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도 목마름의
장소입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는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이 세상의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먹어도 먹어도 또 다시 목마르게 되는 이 세상의
물이 아니라 한번 먹으면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되는 영생의, 구원의 물일 것입니다. 하
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나의 갈증나는 영혼을 채워 주시는 진리의 성령인 것입니다.
여기 다윗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 피흘림을 무릅쓰고 적진으로 나아가 물을 길어
왔던 세 사람, 이 세 사람의 세 용사 이름을 살펴보면 참 흥미롭습니다.
첫째로, 20절에 보니까 "아비새" 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아비새라는 사람. 이 아비새라는 사람의 이름은 아버지 은혜라는, 즉 은혜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또, 22절에 "브나야"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갑스엘 용사의 손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효용한 일을 행한 자라." 브나야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세번째 사람, 12절에 "엘르아살"이라는 사람입니다. 엘르아살의 뜻은 "하나님의 도우심" 입니다.
여기서 이 세명의 이름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세 용사의 이름
아비새는 은혜의 아버지요,
브나야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엘르아살은 도우시는 하나님입니다.
은혜의 아버지는 성부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아들은 성자요, 도우시는 하나님, 즉 성령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바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모습을 이 세 용사들의 헌신을 통해서 보여 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심판이라는 뜻의 아둘람 굴에 갖혀 있는 하나님의 자녀 다윗을 위해서, 목마른 다윗을 위해서 물을 길어다 주고 자기의 피를 흘려 줍니다. 세 용사는 적진을 뚫고 갑니다. 상처를 입고 피를 흘렸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것은 그들이 흘렸던 피라."고 합니다. 곧 그들이 떠온 물은 그들이 흘린 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물물이 있는 곳은 바로 베들레헴, 예수님의 탄생지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지에서 물을 길어 옵니다.
베들레헴은 떡집이라는 뜻입니다. 그 베들레헴에서 물을 떠와서 아둘람 굴 속에 갖혀 절망하고 있는 다윗에게 갖다 준 것입니다. 이것은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께서 친히 심판 속에 처해 있는 우리들을 위하여 피를 흘려 주시고, 목마른 자에게 이 새로운 생수를 부어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예고하는 사건입니다.
이것을 보자 다윗은 너무너무 감격했습니다. 감동되었습니다. 세 용사가 다윗에게 물을 갖다 주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포위망을 뚫고 나가서 상처를 입고서 피를 흘리면서 물을 떠 왔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피가 있었고 그들의 몸에는 칼자국이 있었습니다. 피를 흘리면서 물을 떠왔어요. 그러니 그 물을 받는 다윗이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다윗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 모습에 다 감동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들이 길어온 물,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라고 고백하면서 그 몰을 하나님께 부어드립니다.
18절,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고 가로되 내 하나님이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를 어찌 마시리이까』라고 고백합니다.
이 세상에 살다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너무나도 송구스러운 일이 있습니다. 몸둘 바를 모르는 일이 있습니다. 결단코 해서는 안 될 일이 있습니다. 방금과 같은 일입니다.
그러나 결단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을 하나님께서는 하셔 버린겁니다. 자기의 피를 쏟아서 심판의 굴에 처해있는 우리 인간을 구원해 주신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요, 너무나도 송구스러운 일이요, 다윗이 그 모습을 보고 감격했던 것처럼 이 세상, 전 일류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한 엄청난 일이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피흘려 돌아가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십니다. "독생자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라." 아브라함에게는 아들 하나밖에 없습니다. 딸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갔습니다. 가서 자기 아들, 독생자를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서 재단 위에 올려놓고 칼을 듭니다. 참으로 엄청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아들 이삭에게 손을 대지 말라." 고 하셨습니다. 왜요?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해서 아껴 주셨던 것입니다. 정지시켰습니다. 금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은 금하지 않고 행하셨습니다. 자기 아들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는 똑같은 아브라함의 심정인데, 하나님이 금하지 아니하시고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내버려두셨습니다. 이것은 곧 자기자신을 주시는 것입니다. 자기자신을 희생해 주신 것입니다.
삼위의 하나님, 아비새, 브나야, 엘르아살, 이 세 사람으로 표현되는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께서 자기 희생을 감내하면서 심판에 처한 인간에게 물을 길어다 주고 피를 갖다 주신 사건입니다. 너무나도 가혹한 희생의 일이기에 아브라함에게는 금하셨고 다윗도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않으리라고 했지만 하나님은 하셨던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교회당에서 하루는 통곡하고 울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내가 물었습니다.
"왜, 당신, 목사님 그렇게 울부짖습니까? 왜 서럽게 웁니까?"
그랬더니
"여보, 내가 왜 우는지 아시오? 내가 오늘따라 십자가를 보는데도 내 마음 속에 감격이 오지를 않아. 우리 인간을 위하여 자기자신의 피를 흘려 주면서 우리에게 물을 공급해 주시고, 피를 공급해 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있는데도 내 마음에 전혀 감동이 오질 않아. 그래서 너무 서러워서 지금 통곡하면서 운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들려오는 충격적인 뉴스도 많지만 특별히 사순절 기간에 날 위하여 적진을 뚫고 갔다온 세 용사, 그와 같은 우리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의 자신의 피흘리심을잊지 말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3장 1절에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이 세 사람, 세 용사들을 평생 잊지 못합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라고 했습니다.
사순절 때는 주님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사순절 때는 십자가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심을 때 심고 거둘 때 거두는 것이 순리입니다. 이 순리는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 순리대로 사는 것입니다. 심을 때는 심어야 되고, 거둘 때는 거둬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사순절 기간때에는 특히 주님 생각하며 살아야 됩니다. 사순절 기간 때는 날 위하여 피흘리신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을 생각하며 살아야 됩니다. 이것이 순리입니다. 이것이 진리대로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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