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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여전도회의 사명

by 【고동엽】 2022.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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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22:8-13)

   저는 오늘 결산총회로 모인 여전도회 회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제목의 말씀은 “교회를 위한 여전도회의 사명”입니다. 위인의 배후에는 다 위대한 어머니라는 여성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배후에는 그 어머니 요게벳이 있었습니다. 사무엘과 영적 암흑한 사사시대를 종식하고 새로운 세대를 열어가는 배후에는 기도하는 어머니 한나가 있었습니다. 디모데의 성공적인 목회 배후에는 그 어머니 유니게와 외할머니 로이스의 가르침과 기도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주님이 세운 교회와 주의 종들의 배후에 여러분들의 기도가 절실히 요구됩니다. 주님의 종들은 여러분의 기도를 먹고 사역합니다. 부흥하는 교회의 종들은 그 배후에 교회와 주의 종들을 위해 기도하는 여종들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중보사역을 위한 기도는 이처럼 위대한 힘을 발휘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숨겨진 한 여인의 헌신을 통하여 아들 마가가 사도적 반열에 오르게 되었으며, 그 동생 요셉은 초대교회 권위자인 바나바로 소문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마가의 어머니를 통해서 여전도회 회원의 사명이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유월절 성만찬 때 즐겨 사용하는 본문입니다. 주님은 구원사역 완성을 위해 유월절기가 다가오자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성으로 행하면서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서 먼저 성 안으로 들어가서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게 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이러한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명절에 성안에 많은 인파로 객실을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며, 양을 잡고 무교병을 굽고 쓴 나물로 유월절을 준비하려면 적지 않은 경비가 들것인데 ...... 평소 같으면 이러한 일은  재정을 맡은 가롯 유다가 할 일인데 주님이 부분하신 일이라 순종하는 마음으로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십니까?”(9)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의 들어가는 집으로 들어가서,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라 하시더라, 그리하면 저기 자리를 베푼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예비하라”(10-12) 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성내로 들어가니 물을 기르는 사람을 만났고 그를 따라 들어가니 그 집 주인에게 주님의 분부한 말씀을 아뢰니 이미 예비한 객실을 보이면서 유월절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집 주인은 마가 요한의 어머니였습니다. 이 마가 요한의 어머니가 어떤 분인가를 살펴봄으로서 여전도회 회원들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게될 줄로 믿습니다.

신실한 사명자
   이 여인은 주님의 신실한 사명자였습니다. 이 여인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 여인을 보았을 때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즐겨 찾았던 집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11절중에 베드로와 요한이 그 집 주인에게 한 말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라고 한 것을 보아서 주님은 이 사람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 여인 역시 주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단순히 주님이 열두 제자를 거느린 선생으로 아는 정도가 아니라 메시야 되심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 분을 전적으로 신뢰했습니다.
   어떤 조직과 공동체에 사명자가 되려면 전인적으로 자신을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을 주님은 감람산 벳바게에서 행하신 일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맞은 편 마을로 가서 매인 나귀와 나귀와 나귀 새끼를 풀어 오라고 했습니다. 그때 누가 무슨 말을 하면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마21:3) 고 했습니다. 바로 이들이 사명자입니다. 주님이 사용하시면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이 사명자 되심을 한번 검정해 보겠습니다. 유대 사회에 나귀는 사막을 여행하는 자들에게 중요한 교통수단입니다. 오늘 우리 같으면 자동차나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나귀 어미는 쾌 비싼 차에 속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귀 새끼를 탓으니 아주 검소하여 티코와 같은 소형을 탄 것으로 보면 됩니다.
   그러면 이제 사명자 임상실험으로 한번 해 보도록 해 보겠습니다. 만약 목사님이 여러분에게 아무런 이류를 설명하지 않고 500만원만 가져오시오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실 것이며 어떤 유형에 속할까 스스로 진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목사님 사례 받으시는데 무슨 돈이 필요합니까? 둘째, 목사님 어디에 쓰실려고요? 셋째, 목사님 준비했습니다 가져가세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날 것입니다. 첫째 부류의 사람은 아주 위험한 사람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목사님이 굶어 죽는다 해도 돌아보지 않을 사람입니다. 곧 가롯 유다의 반열입니다. 둘째, 계산적인 사람입니다. 설명을 들어 보고 타당하면 주고 그렇지 않으면 거부할 사람입니다. 평범한 그리스찬들입니다. 셋째, 진정한 사명자입니다. 본문의 마가의 어머니와 성경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 같은 자입니다. 여러분 조용히 스스로를 진단해 보세요 대부분의 교회에 3번에 속하는 성도가 얼마나 나올지 궁금합니다.

가치 있는 인간
   영향력을 주는 가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지고 배운 것으로 실력행사를 하려고 하는데 많이 배우고 가졌다고 다 영향력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이 없어도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 많이 봅니다. 짜장 박사로 소문난 박권용 집사는 초등학교 졸업도 못하고 중국집을 경영하는 사람이지만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을 하면서 많은 영향력을 미치는지 모릅니다.
   마가의 어머니는 바로 그러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선한 일에 부요한 자입니다. 주님과 그의 제자들이 언제나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집이 바로 이 집입니다. 중동지역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사막길 먼지가 많은 곳이므로 손님을 안방이나 다락으로 모시려면 먼저 발을 씻겨야 하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그 뿐 아니라 예루살렘을 찾는 성도이라면 누구든지 그 집을 찾았던 것 같습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했을 때 그들은 자연스럽게 이 집에 모였습니다(행1:4; 13). 어떤 공동체가 한 개인의 집에 부담 없이 출입한 다는 것은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어린 젖먹이 유아들도 있을 것이고, 말씀 꾸러기 아이들과 청소년들 그리고 몸이 불편한 노약자들도 있습니다(행1:14-15).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오순절에 일어났습니다. 오순절에 강림한 성령으로 그곳은 인류의 구원역사를 이루는 초대교회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인류역사상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이는 곧 솔로몬이 세운 성전보다 더 귀하며 모세가 받은 성막의 본체입니다.
   저는 사택과 교회당이 붙어있습니다. 제 서재를 도서관으로 이용하고, 제 목양실은 당회원, 재정부원들이 즐겨 사용하고, 누구나 쉽게 들어올 수 있습니다. 금고 키도 재정위원은 누구나 열고 닫고 합니다. 사택 중 방 하나는 교육관으,로 사용합니다. 그리고 거실도 교육관이나 친교용으로 사용됩니다. 부엌은 새가족 접대실로 사용되기도 하고, 화장실은 들어오면 누구나 부담 없이 사용합니다. 제 안방을 비롯하여 공개되지 않은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출입이 제에게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다 열어 놓고 자유하면서 사니 부담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매일처럼 찾아오고 어떤 때는 하루에는 수차례나 찾아오는 걸인들이 있습니다. 이들 중에는 건강한 자들이 놀면서 구걸하는 것을 보면 화가나기도 하고 해서 얼굴을 붉힐 때가 간혹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더 좋은 모습으로 대하지 못한 것이 송구스럽게 여겨집니다. 여러분들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임상적인 진단을 각자가 해 보시기 바랍니다.

감동을 주는 인간
   사람에게는 세 가지 성품이 있습니다. 종교적인 영성과 자연이치를 분별하는 이성과 인간관계속에서 느낌을 통하여 가지는 감성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감성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종교적 영성과 합리적 이성을 잘 가춘 자라도 감성에 변화를 받지 못하면 기쁜 마음으로 주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 세 가지가 독자적으로 일어나기도 하지만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감성적 변화 역시 영성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영적으로 이성적으로도 변화가 일어나지만 특별히 사람은 감동을 받으면 변화가 잘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을 때 감성적인 존재로 지었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현실적으로 깊은 영성을 체험한 분들이 합리적으로 이해를 하면서도 감성적으로 변화되지 않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성령은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여 감동을 줍니다.
   이 여인은 그 주변의 혈육의 지체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첫째, 동생 바나바입니다. 바나바의 헌신이 우연히 발생한 것은 아닙니다. 그도 누구의 영향을 받아 그러한 경지에 이렇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영향을 제일 많이 겠는가? 아마 마가의 어머니 그 누나였을 것입니다(행4:36-37). 둘째, 그의 아들입니다. 아들 마가 요한은 그 어머니의 영향으로 주님의 제자들이 함께하는 사도의 반열에 참여하게 되어 마가복음을 기록하게 되었으며,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서 이방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도 했습니다. 셋째, 예루살렘 성도들입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이라면 남녀노소를 무론하고 마가의 어머니 집에 신세를 지지 않 은자가 없으리라고 봅니다. 오순절이 이르기까지 120명이나 되는 무리가 합숙을 하는 사건은 놀라운 일입니다(행1:15; 2:1). 헤롯이 사도들을 협박하여 죽이고 베드로를 옥에 가두었을 때도 예루살렘 성도들은 마가 요한의 어머니 집 다락에 모여서 기도했습니다(행12:12). 그들이 모였으니 숙식문제를 포함한 모든 것을 감당하는 보이지 않는 헌신이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넷째, 주님과 그 제자들을 위한 헌신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와 요한으로 하여금 유월절 객실을 준비하라고 한 것을 보면 평소에얼마나 많은 헌신적인 삶을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사람의 힘으로 불가능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만 가능합니다. 다윗이 사무엘에게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신에 감동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삼상16:13) 오순절에 성령 강림으로 인하여 성령 충만을 받은 사도들은 이전에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복음전하는 담대한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ㅇ르 말하지 않을 수 없다”(행4:19-2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또 한 가지 더 사례를 들면 헤롯이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고 베드로까지 죽이려고 잡아 옥에 가두었을 때 예루살렘 성도들은 또 다시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그 모인 곳이 어디인가? 누가 그 집의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행12:12) 그 집은 마가 요한의 어머니의 집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 당시 120명이 들어갈 수 있는 큰 다락을 가졌으며, 게집 종 하인을 거느리고 있을 정도임을 보아서 부유한 집안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그러한 부유한 삶을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고 섬기는 삶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마가는 바나바의 생질이라는 사실입니다(골4:10) 바나바는 초대교회에 너무도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주님의 사도들을 가장 많이 도왔던 분이 바나바입니다. 그는 구브로 출신의 유대인으로서 레위족이었습니다. 그 본명은 요셉인데 사도들을 도와서 약하고 어려운 자들을 잘 돌아보고 권고하고 위하여 그에게 바나바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바나바란 말의 뜻이 권위자(Son of Encouragement)란 말입니다. 사도들의 들어난 사역의 저변에는 숨은 바나바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사실 바나바 같은 헌신적인 사역이 없으면 바울 같은 사도가 나올 수 없었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사도로 키운 멘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도들이 예수의 부활을 증거할 때에 은혜를 받아 자기의 밭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습니다. 이 바나바가 바로 마가 요한의 어머니 동생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바나바의 멘토는 바로 마가 요한의 어머니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에게 이러한 누나가 없었다면 그에게 이러한 헌신이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승천 직전에 제자들에게 당부하기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한 것을 기다리라”(행1:4)고 했을 때 어디 누구 집에서 모이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연스럽게 수많은 무리들이 약속이나 한듯이 동일한 장소에 모였습니다. 그들이 모였던 “저희 유하는 다락”(행1:12)은 주님의 만찬을 베풀었던 큰 다락임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때 모인 무리수가 “한 일백 이십 명”(about a hundred and twenty) 정도라고 했으니 큰 다락임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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