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스승의 길 (막 12:13-17)

by 【고동엽】 2022. 8. 20.
처음 목차 돌아가기
 
 

스승의 길  (막 12:13-17)

1. 스승의 주일에

스승의 날은 1958년에 청소년 적십자 단원들이 세계적십자의 날을 맞아 병중에 있거나 퇴직한 교사들을 위문하기 시작하면서 비롯되었던 것을, 1982년에 이르러 "세종대왕 탄신일"인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공적으로 스승의 주일을 세운 적은 없지만, 주일학교 교사들을 위로하며 영적 말씀의 스승들을 존중하여 복음전도와 신앙교육을 더욱 고양하고자 우리교회에서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위기는 그 동안 우리 사회를 지탱해왔던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의 권위가 무너지는데서 클로즈업되고 있는 듯합니다. 선생님이나 부모님이나 임금님 섬기는 마음으로 존경을 다해왔습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곧 임금이었고, 가정에서는 아버지가 곧 임금님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임금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면서 도미노 현상을 빗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탄핵을 당하고,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자타에 의하여 지식노동자로 전락하였고, 가정에서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를 이끄는 것은 신뢰와 존경을 바탕으로 한 권위가 아니라, 다수의 표나 아니면 물리적 힘이나 혹은 돈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잠시 멈추어 서서 생각해야 합니다. 이대로 가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야 합니다. 얼마 전 영국 과학자 한 분이 2100년 이 되면 지구 전체가 다시 물에 잠길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하루 속히 서방 선진국가들이 세계를 염려하며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각종 연료에서 뿜어내는 일산화탄소가 지금 대로 증가해간다면 지구는 급속히 온난화 되어서 남극 빙하 대륙을 제외한 모든 대륙이 물에 잠기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무너진 신뢰와 존경을 되살리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야만 사회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물론 권위주의적 사회로 회귀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은 강제적 권위자의 옹립이 아니라 자발적 존경을 담아 그를 뒤 좇아갈 수 있는 모범을 세우자는 것입니다. 그를 위하여 비난보다는 이해와 신뢰를 보내며 격려하고 존중하는 사회적 풍토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더욱 영글어져 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회적 상식과 문화로 꽃피워지게 될 것입니다.

저는 신뢰와 존경을 고양키 위해서는 먼저 간단한 말부터 바꾸어야 한다고 봅니다. ‘선생’이 아니라 ‘선생님’으로 부릅시다. 교회에서도 ‘목사’ ‘장로’ ‘집사’가 아니라 꼭 ‘~ 님’을 붙여 부릅시다.    

2. 모두가 스승이 됩시다

스승의 날 노래 말을 봅시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우러러 볼 수록 높아만 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주신
스승은 마음의 어버이시다

옛적은 학교 교육이 지식교육만이 아니라 인성 교육까지 대부분 감당했었습니다. 그래서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시는 분이 곧 학교 선생님들이셨습니다. 이유는 당시 대부분의 부모님들의 학력이 낮았었고, 그래서 인성 교육을 가정에서 시킬 만한 부모님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가정의 부모님은 낳아주시고 길러주시는 담당이셨고, 나머지는 학교 선생님들이 인간이 되도록 가르치시고 바로 잡아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젠 가정과 학교 그리고 사회가 함께 이 인성 교육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부모님들의 수준이 매우 높아졌습니다. 사회도 매우 발전되었습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의 선생님이 되셔야 합니다. 사회가 이젠 자라는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을 사는 것에만 급급해하지 말고 내일을 위한 교육에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시간과 물질을 투자해야 합니다.  

가정이 식당이나 여관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삶의 연수원이 되어야 합니다. 사회가 시장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사회가 곧 삶의 수련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스승이 되어야 합니다.

3. 스승의 길 - 참 선생이신 예수님

오늘 성경 본문은 선생님으로써의 예수님에 대하여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 최고의 지성인들 중 하나인 바리새인과 헤롯당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선생님이여”하고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보탠 말  속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14a)

첫째로 예수님은 참된 선생님이란 인정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은 아무도 꺼리지 않는, 즉 아무도 싫어하지 않는 선생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예수님은 사람을 그 외모로 판단치 않으시는 선생님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 세 가지는 ‘참되다’는 말속에 다 들어가는 연관된 것입니다. 참된 선생님은 사람을 꺼리지 않으시고 모두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까닭은 참된 선생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 누가 이런 참된 선생님이 있겠습니까?

우리에겐 저마다 꺼려지는 싫은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부분에서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참 부끄러운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참 선생’은 한 분뿐이라고 한 것 같습니다 -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마 23:8)

선생 된 자들이 사람이 꺼려지지 않고 외모로 사람됨을 구분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참 스승일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자녀를 대하는 부모에게, 제자들을 대하는 선생님들에게, 교인을 대하는 목회자들에게, 그리고 사회 제도와 법규가 그렇게 개혁되어진다면 곧 하나님의 나라의 모델이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이런 선생님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가치를 그가 지닌 능력으로 평가하지 않고, 그 존재만으로 가치를 담아 주어야 합니다. 그가 남자든 여자든 노인이든 연소자이든, 그가 장애인이든 건장한 청년이든, 그가 재능이 남달리 뛰어나든 평법하든, 그가 몸짱이든 몸치이든, 그에게 과거 허물이 있든 없든 오직 사람이란 것으로 사랑하고 가르치고 키워준다면 세상은 천국과 같아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바로 그런 사랑의 선생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학교가 있다면 아마 문제 학생은 한 명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모두 명문대학은 못 갈지라도, 모두가 유명인은 못될 지라도, 모두가 고관은 못될 지라도, 그들은 모두가 행복한 사람들은 될 것입니다.

4.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으로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본심은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어려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14b-15a)

이에 예수님께서 답변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화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15b-17a)
이 부분의 묵상은 일전에 전한 적이 있습니다만, 예수님의 답변의 뜻은

‘가이사의 화상이 세겨진 돈은 가이사에게 주지만,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은 하나님께 드려라’

고 한 뜻으로 봅니다(돈 더즈, 「예수 그 낯선 분」, 분도 출판사, 1989).

이 말씀을 붙잡고 교육을 생각해본다면, 즉 스승의 길을 생각해본다면, 선생님은 제자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 하나님의 나라인 의와 희락과 화평이 가득한 사회를 만드는 일군들이 되도록 키워야 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세상의 일군이 아닙니다. 단순한 교회의 일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곧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는 사람으로 키워야 합니다.

신앙 교육의 승패는 하나님께 드려진 헌신자로 키우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 일을 우리 성도의 가정에서 먼저 시작하고, 우리 교회 주일학교에서 또 이어 가고, 그래서 우리 사회가 이런 선생님들로 가득한 사회가 된다면 . . . 이렇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출처/장영일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