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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설교[1,404편]〓/스승 주일설교

좋은 것을 함께하는 스승과 제자 (갈 6:6)

by 【고동엽】 2022.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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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것을 함께하는 스승과 제자  (갈 6:6)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는 만남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우리 일생이 결정된다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모, 친구, 선생님, 그리고 우리 삶의 동료와 주변 사람들, 그들과 어떻게 만나 어떤 일을 도모하며 어떤 길을 가느냐 하는 것이 우리 삶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더불어 나누는 모든 행위는 결코 어떤 행위가 되었건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집니다. 그 관계가 부모와 자식이 되었건, 선생과 제자가 되었건, 친구와 주변의 동료가 되었건, 수직적이건 수평적이건, 가르침이 되었건, 나눔이 되었건, 모방이 되었건, 결국은 교육의 모습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교육의 형태 중에서도 비교적 가장 많은 것을, 우리는 가르치고 배우는 선생과 제자의 관계에서 습득하고 영향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삶의 배움에는 일정한 틀이 없이 습득되는 것도 여럿 있으나 가장 기본적인 틀은 역시 교육이라고 하는 테두리 안에서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것이 의미 없는 일이라면 우리 인생들에게 교육이라는 말이나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모든 구조는 이 지상에서 벌써 소멸됐을 것입니다.

더욱이 교육이란 지식의 전달만이 아니라 인격의 전달과 교류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는 절대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우리 삶의 행복이란 기능에 의해서 습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심정의 느낌과 정서적 수용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봅니다. 즉, 어떤 기능을 얼마나 가져서 내가 행복하다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마음이 따뜻하고 바르고 감사함을 알고 참된 삶에 대한 애틋함이 있을 때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격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교육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오늘 교사주일로 지내게 됩니다. 교회는 주일학교 교사를 비롯하여 우리 구역장, 부부구역장, 목사님, 전도사님 등 많은 말씀을 가르치는 분들이 계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 분들을 바른 마음과 자세로 대할 것인가 하는 것을 오늘 말씀 속에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하신 말씀은 가르침을 받는 자는 가르치는 자와 좋은 것을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이 말씀 가지고 잠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 말씀 속에 우리가 먼저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첫 번째로 교육의 주체자인 선생의 중요성입니다.
우리에게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은 더 말하지 않아도 누구든지 인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교육의 3가지 요소가 되는 교사, 그리고 학생, 교재를 포함한 교육과정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교육의 주체자인 선생님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이 문제를 생각해 보며 이스라엘 역사의 한 단면을 잠시 살펴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기록된 역사를 보면 훌륭한 스승 밑에 훌륭한 왕이 있었고 그 왕이 다스릴 때는 나라가 평안하고 기쁨이 넘쳤던 것을 봅니다. 역대하 24장을 보면 일곱 살의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오른 요아스 라는 왕이 나오게 됩니다. 요아스는 안타깝게도 그가 어린 때에 그의 아버지가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그의 모친은 자신의 아들들까지 다 죽여가면서 자기가 왕위에 오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고모가 그 왕자를 몰래 숨김으로 말미암아 일곱 살까지 길렀고 일곱 살이 되었을 때 대제사장 여호야다를 중심으로 하여서 요아스를 왕위에 추대하게 됩니다.
역대하 24:2을 보면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요아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며’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이 요아스가 어린 왕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제사장 여호야다가 그를 잘 가르치고 보필하고 그에게 지도를 줌으로 말미암아 이 요아스가 잘 성장하였고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법과 말씀에 합당한 판단으로 그 나라를 치리하였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여호야다가 나이 많고 늙어서 죽으니’ 라고 24:15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뭔가 좋지 않은 느낌이 다가옵니다. 요아스 왕이 여호야다가 살았을 때 그에게 가르침을 받고 여호와 앞에 정직히 살았는데, 여호야다가 나이 일 백 삼십 살이 되어 늙어 죽게 되었을 때 이 요아스의 마음이 달라진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침 받음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도전되지 아니하고,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도 없게 되며, 그는 또 다른 스승을 모시지 못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어둠의 그림자가 닥쳐오게 됩니다. 17절 이하를 보니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며 무엇인가를 말합니다. 그리고 왕이 판단력 없이 그 말을 그냥 믿게 됩니다. 결과 18절에 이르기를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긴 고로 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아스 왕이 여호야다에게 가르침을 받고 가르침대로 하나님을 섬길 때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 평안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를 세웠던 스승이 세상을 떠나고 새로운 좋은 스승을 만나지 못할 때, 그릇된 무리의 말을 제대로 판단할 수 없음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그릇된 결정을 내려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가끔 가다 우리 성도님들의 기도 제목을 바라볼 때 이런 제목이 있음을 봅니다. ‘우리 아이가 학교에 새로 입학했는데 좋은 선생님 만나게 해 주십시오. 새 학년이 바뀌었는데 좋은 선생님 만나게 해 주십시오. 좋은 친구들 만나게 해 주십시오. 좋은 주일학교 선생님 만나 믿음이 아름답게 자라게 해 주십시오.’ 하는 기도제목을 봅니다. 함께 기도하며 ‘참 지혜로운 분들이다.’ 라는 생각을 합니다. 어쩌면 아이들은 부모님과 더불어 그들의 신앙을 지도하는, 그리고 그들의 삶의 지식을 지도하는 선생님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물론 부모 자체가 생활의 교사가 되어야 하고 성경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 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을 위하여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듭니다. 아직 저희 교회는 그런 분들이 없는 줄 알기에 이렇게 편안하게 말씀드립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자녀들 보는데서 괜히 교회를 비난한다거나, 목사를 비난한다거나, 아니면 선생님들, 혹은 교회 장로님이나 집사님들을 비난하는 말을 무심결에 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만약에 그 아이들이 그런 얘기를 들을 때 어떻게 은혜를 받고 믿음 안에 충실한 은혜의 백성이 되겠습니까? 아니 교회의 훌륭한 어른들로 알았는데 그렇게 비난받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어떻게 그들의 믿음이 바르게 자랄 수 있겠습니까?

목사나 선생님들을 위해서 식탁에서 식사할 때마다 식사기도를 하는 것처럼 같이 날마다 기도해드려야 합니다. 식사 기도할 때마다 ‘우리 목사님, 그리고 선생님이 이 시간 함께 은혜를 받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은혜로 산다면 내 입에 들어가는 음식과 더불어 내게 영혼의 양식을 먹여주시는 목사님과 선생님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이 말입니다. 그것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권위를 세우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받을 마음의 상태를 만들어 가는 것이기에 너무나 귀한 것입니다. 더욱이 올바른 교육은 우리의 생명의 샘을 이루며 우리의 삶을 최고의 가치로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생님들은 귀하게 여겨져야 합니다.

역대기하 26장 5절을 보면 웃시야 왕에 대한 기사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하나님을 구하였고 저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웃시야 왕에게는 선지자 스가랴가 선생님의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스가랴의 지도를 받아서 하나님의 은혜 앞에 지내게 되었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구하고 여호와께 구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웃시야 왕의 일을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8절에 기록하기를 웃시야가 심히 강성하여 이름이 애굽 변방까지 퍼졌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스가랴가 이제 마침내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서 그 수를 마치게 되는 때가 옵니다. 16절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스가랴가 세상에 없어지고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를 가르치던 스가랴 선지자가 없어지고 이제 아무에게도 가르침을 받는 것이 없고 새로운 스승도 모시지 못한 상태에서 그만큼 마음이 교만하여져 하나님 앞에 범죄하게 되었더라 이 말입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세상에 없는 때에 그를 더 이상 어거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이 말입니다.

그는 심지어 여호와의 전에 들어갈 때 향단에 분향하는 제사장의 권위까지 침탈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웃시야가 손에 향로를 가지고 향단에 분향하려고 할 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여서 그의 이마에 문둥병이 발하게 되었습니다. 평생 문둥병으로 고생하다가 그 병든 상태로 세상을 종말하게 됩니다. 훌륭한 스승 밑에 바른 교육을 받고 그대로 하나님을 섬길 때 승하였지만 변방까지 이름을 떨쳤던 그 웃시야가 이제 그 삶이 몰락되는 것을 봅니다.

훌륭한 선생님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우리들이 훌륭하게 되는 은혜의 길입니다. 교육이란 이와 같이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인도하여 윤택하고 최고의 가치로 만들어 가는 겁니다.
여러분 지나간 때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처음 믿을 때, 혹은 어떤 곳에 이사 가셔서 내가 어떤 교회를 출석할 것인가를 정할 때, 어떤 기준에서 교회를 정하셨습니까? 교회 건물이 좋아서, 아니면 내 이웃이 다녀서, 아마 제가 생각하기에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말씀이 내 생활에 유익을 주고 생명의 기쁨을 주고 소망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한다고 믿었기에 교회를 정하셨고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섭리가 계셨지만 그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 자체가 이런 경로를 통하여 우리에게 임한다 이 말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어떤 교육 프로그램을 가졌을까?, 내 자녀를 잘 교육시킬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기준이 아니겠습니까? 전에 목회 잡지를 보니 성도들이 교회를 선정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역시 전달되는 메시지에 대부분의 퍼센트가 주어져 있는 것을 봅니다. 그 다음이 ‘나와 내 자녀들을 바르게 교육시킬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있어서 자녀를 위하고 또 나를 위한다면, 자녀를 가르치고 나를 가르치는, 말씀을 가르치시는 선생님에게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마음으로 함께하며 기도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내가 음식을 먹듯이 말씀을 먹는 것을 생각한다면 내가 음식을 먹을 때마다 기도하듯이 내 생활 속에 언제나 영적인 양식을 제공해 주시는 선생님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며 두 번째 생각해 볼 것은 왜 오늘의 말씀처럼 우리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좋은 것을 함께해야 하나 하는 것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좋은 것을 같이 한다는 것은 일체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내게 있어서 가장 좋은 것이 있을 때 나누고 싶은 마음이 있는 일체감이 있어야 교육은 진실히 이루어지게 됩니다. 교육이란 일정한 것을 주고받는 거래행위가 아닙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것은 더욱더 그러합니다. 이것은 인격의 공유를 통한 사랑의 합성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좋은 것을 함께 한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관계 속에서 무엇이든 나누고 싶은 일체감이 있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훌륭한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바로 선생님은 사랑과 인격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은 그것이 옳다고 확신하고 사랑으로 느껴 배운 바대로 살겠다고 마음속에서 각오하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나눈다는 말은 일정한 목적을 위해서 인위적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진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러니 무엇인가 기쁨이 있을 때, 가슴 설레는 감동과 감사가 있을 때 그것을 함께하고 싶은 것입니다. 내게 있는 기쁨, 즐거움, 무엇인가 나를 감격시키는 것이 있을 때 도저히 나 혼자 누리지 못하고 나를 가르쳐 이와 같은 상태에 이르게 한 그러한 선생님께 나누고 싶은 마음, 그런 신뢰하는 마음입니다.

저는 이 자리를 빌려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아마 이 자리에 계신 분 중에서 저는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을 분과 은혜를 받지 못할 분은 다 결정되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이 은혜를 받습니까? ‘나는 우리 교회가 참 좋아. 나는 우리 목사님이 참 좋아. 그리고 오늘 무슨 말씀을 주실까?’ 하고 기대하는 분은 오늘 분명히 은혜를 받으실 거예요. 그런데 ‘나는 우리 교회 참 싫어. 나는 지금 옮기지 못해서 다니는 거야. 아, 나는 우리 목사님 말씀 들으면 이상하게 졸려. 그래도 예의상 눈 뜨고 있는 거야.’ 이런 분은 절대로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내 마음에 좋아하는 마음이 없고, 따르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그것이 내 마음에 와 닿겠습니까? 가끔 가다 맞는 말을 해도 ‘음, 논리적으로는 맞아.’ 이렇게 생각한다 말이에요.
좋은 것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내 마음에 겸허히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상태입니다. 적어도 아침에 일어나면 여러분 기도부터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지난밤에 하나님의 은혜로써 지켜 주시고 이 아침에 새롭게 기회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 모든 식구들 은혜 가운데 새로운 기쁨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하옵소서.’

여러분, 다 그렇게 기도하죠? 물론 마음이 찔리는 분도 있는 것을 제가 알기는 합니다. 그래도 대부분 아침에 일어나면 그런 기도 정도 하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중요한 것이 뭐냐면 ‘우리 식구들’이라는 개념에 여러분의 목사가 포함되어 있어야 돼요. 우리 식구라는 개념에 목사가 포함되어 있어야 돼요.
저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오늘 아침에 우리 모든 성도들이 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루 종일 주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고 인도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거든요. 왜 목사는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성도는 목사를 위해서 기도 안합니까? 안되는 거죠? 목사가 성도들을 위해 늘 기도하는 것처럼 성도는 또 목사를 위해서 늘 기도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이것이 일체감이요, 은혜요 좋은 것을 나누는 것이라 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좋은 것이 있을 때 항상 같이 말씀을 가르치는 자를 생각하며 그 기쁨을 전해 줄 수 있는 이와 같은 사랑의 관계가 된다 이 말입니다.

저희 교회도 이제 성도수가 점점 많아지다 보니까 점점 거리가 멀어진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저는 또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교회가 보니까 아이들까지 일만 삼천 명 정도의 재적이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일 대 일만 삼천 의 관계는 아니라고 늘 말씀드립니다. 일 대 일의 관계, 인격적인 관계가 일만 삼천 번 있는 것이지 결코 그것은 일 대 다중의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가끔 가다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 이런 분이 있어요. ‘목사님, 제 이름 아세요?’ 그런데 왜 목사를 시험에 빠지게 합니까? 그래요. ‘목사님, 제 이름 아세요?’ 그렇게 물어 보지 않고 ‘목사님, 저는 누구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라고 말씀드렸죠? 그래요. 우리가 서로를 알고 은혜를 나누고 서로의 이름도 알고 한다는 것은 매우 기뻐요. 그렇지만 우리는 그와 같은 기회를 가지기 위해서 서로가 더 기쁨과 은혜를 가지고 교제하고 사랑과 기쁨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이렇게 구역예배 갈 때요. 가서 꼭 한 분, 한 분 다 이렇게 일일이 기도를 해 드리는데요. 어떤 성도님이 이렇게 이야기 하셨어요. ‘아, 목사님, 한 사람 한사람 기도하려면 (요즘 지역 순회 예배드린다고 30명쯤 예배드리는 것 같아요. 지역별로 순회해도) 목사님, 목도 아프고 시간도 오래 걸리니까 한꺼번에 다 기도해 주세요.’ 아, 그런데요. 그것은 제게는 별로 좋지는 않은 것 같아요. 좀 시간도 길고, 또 목도 잠기곤 해도 다만 몇 마디라도 한 분 한 분 기도해 드릴 때 목사로서의 영적인 일체감과 마음의 기쁨이 있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목회라는 것은 인격적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목회뿐 아니라 모든 가르침의 관계도 인격적인 가르침입니다. 사랑으로 나누는 인격의 관계, 그러므로 좋은 것을 같이 하는 이와 같은 관계, 기도하는 관계가 바로 좋은 것을 함께 하는 관계입니다.

뿐 만 아니라 선생님을 섬기는 것은 그 자체가 배움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저는 집에서 나올 때 아이들 있으면 꼭 문 앞에 나와서 이렇게 배웅해서 인사하도록 합니다. 제가 뭐 꼭 인사를 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이들 그렇게 가르쳐야 아이들이 바로 배우고 평생 동안 예의 있게 자랄 것 같아서 그럴 뿐 입니다. 바로 너희는 좋은 것을 같이 하라는 것도 이런 의미라 이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4:1을 보면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 찌어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목사나 우리를 가르치는 선생님을 섬기는 것은 그 뒤에 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곧 하나님 앞에 자기의 모습을 살펴보게 되는 것입니다.
선교사님 이야기 많이 듣죠? 처음에는 선교지에 가면 일방적으로 베풀 수밖에 없어요. 그 다음에 그들이 스스로 그 일을 하도록 그 다음 단계로 만들어 갑니다. 그 다음에 그들이 뭐라도 조그마한 거라도 준비해서 선교사님께 대접하려는 수준까지 만들죠. 그것은 그들에게 무엇을 대접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들의 영적인 상태가 자라서 그 수준까지 되면 ‘아 이젠 되었다.’는 마음의 기쁨을 느끼시는 거죠.

에베소서 6:19을 봅니다. 좋은 것 중에 가장 기쁜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좋은 것을 나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받는 것 보다 주는 것이 더욱 더 성숙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무엇입니까? 이와 같이 복음의 비밀을 바로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 드리는 것이라 이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사도바울이 이 얘기랑 갈라디아 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갈라디아서 2:16을 보면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한 가장 첫 번째 목적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뭐라고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말은 갈라디아 교회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사실을 아직 잘 모르는 연약한 교회에요. 그러니까, 믿음으로 구원 받는 사실을 구지 알려주려고 갈라디아서를 썼다 이 말입니다. 이러한 초보적인 교회에 사도 바울은 가르칩니다. ‘너희 말씀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좋은 것을 함께하라.’이것이 그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와 같이 믿음의 진보를 위해서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일방적인 주는 행위도, 받는 행위도 아니며 서로의 교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님들이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좋은 것을 함께 해야 할 이유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내용입니다. 구체적으로 그럼 좋은 것을 함께 해야 되는데 구체적으로 좋은 게 무엇이냐 이 말입니다.
오늘 이 말씀 듣고, ‘옳지, 이제 다음 주일에 선물하나 마련해서 목사님께 드려 되겠다.’ 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늘 설교를 잘 못 들은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좋은 것의 개념을 설정 해 드립니다. 좋은 것, 나눠드려야 할 가장 좋은 것은 그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겁니다.

먼저 말씀을 가르치는 자를 기쁘게 해 드려야 합니다. 젖소가 기분이 좋아야 젖이 잘 나온다고 하죠. 그래서 음악도 틀어주고 깨끗이 목욕도 시켜 주고 한다고 그래요. 말씀을 가르치는 분도 기분이 좋고 은혜롭고 마음이 기뻐야 좋은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저는 늘 목사가 행복해야 그 성도들이 행복한 말씀을 듣고 행복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늘 이런 말씀 자주 드리잖아요. 저는 제 스스로 늘 생각하는 것이 있어요. 첫째, 제가 목사로서 행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행복하지 않고 어떻게 행복한 말씀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제가 너무너무 괴로워 봐요. 그러면 여러분에게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고요. 괴로운 내용을 이야기 할 수밖에 없어요. ‘여러분, 인생이라는 것은 이렇게 괴로운 겁니다.’ 이런 이야기 삼십 번만 들으면 여러분도 다른 사람에게 ‘여러분, 인생은 괴로워요.’ 이렇게 이야기 한다 이 말입니다.

여러분, 교회 오시는 분 중, 이런 분 있을지 모르겠어요. 교회 예배 참석하면 ‘반은 졸고 반은 자고’ 이런 분이 계실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러한 분들도 밖에 나가면 목사가 한 이야기 많이 해요. 여러분, 가만히 보세요. 여러분, 다른 사람하고 이야기 할 때 설교시간에 들은 이야기 많이 하세요, 안 하세요? 많이 하세요. 내가 하는 지 안 하는지도 모르는 것은 여러분이 이미 동화되었기 때문이에요. 이미 동화되었기 때문에 못 느끼는 거지 실제로 여러분들이 설교 중에 들은 말씀을 생활 속에서도 많이 이야기도 하고 그대로 여러분 실행도 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동화되어서 잘 못 느낀 거예요, 벌써 영향력을 이미 받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행복하면 우리 성도들이 행복한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괴로우면 또 우리 성도님들도 괴로운 영향을 받게 되는 거예요. 제 스스로 ‘마음의 기쁨을 가지자. 행복한 마음을 가지자. 행복하자.’ 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 히브리서 13:17을 보면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警醒)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처럼 한다.’고 말씀합니다.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그러니까 말씀을 가르치는 자가 늘 근심하면서 말씀을 가르칠 수밖에 없게 만들면 유익이 없다 이 말입니다.
우리 옆에 계신 분에게 인사로 한 번 같이 물어 봅시다. ‘나는 고민거립니까? 기쁨거리입니까?’ 정말 내가 우리 목사님께 고민거리가 되고 있나, 아니면 기쁨거리가 되고 있나 한 번 여러분 생각해 보셔야 돼요.

저는 이런 생각을 하는데요. 우리 분당 중앙교회는 세상에 있는 여러 교회 중에서 가장 편안한 교회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제가 담임하는 목사로서 정말 마음에 참 기뻐요. 귀한 우리 성도님들 모시고 정말 아름다운 우리 교회를 섬길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특별한 특징과 자랑거리가 없는 목사지만 그래도 우리 성도님과 더불어 이렇게 아름다운 교회를 섬길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늘 생각하는 것은 이 지상에서 제일 훌륭한 교회는 분당 중앙 교회인 것 같아요. 이 지상에서 제일 훌륭한 성도는 분당 중앙 교회 성도예요. 제가 여러분께 늘 말씀드리잖아요. 여러분, 이 지상에서 제일 좋은 교회가 어느 교회라고요? 대답 안 한 사람은 다음 주 나오지 마세요. 그런 대답도 못하면서 무슨 교회를 나오세요. 제가 늘 말씀드리잖아요.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목사님은 누구라고요? 제가 뭐 들으려고 그런 것이 아니고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려고 그런 거니까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목사가 ‘우리 성도들이 세상에서 최고야! 우리 교회가 최고야.’ 또 성도는 ‘우리 목사님이 최고야.’ 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 마음에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우리 마음속에 정말 교회 때문에 감사하고, 성도 때문에 감사하고, 또 목사 때문에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 있을 때 그 마음에 기쁨이 있고 그것을 통해서 영적인 유익과 은혜를 이루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적어도 내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가 세상에서 가장 은혜로운 교회가 될 때 우리는 날마다 은혜를 받고 축복을 받고 또 은총 속에 기뻐하며 지낼 수 있는 것이죠.

더욱이 중요한 것은 좋은 것을 함께 한다는 것은 힘과 용기를 주셔야 되는 거예요. 바로 좋은 것을 함께 한다는 것은 말씀을 가르치는 자에게 무엇인가 힘과 용기를 주는 거예요. 잘 할 때 칭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잘 못했을 때 위로하고 격려하는 겁니다. 사람이 잘 할 때는 본인도 알아요. 그렇지만 잘못했을 때, 낙심할 때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말입니다.
목사가 하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것이 설교죠. 설교가 어려운 것은 그것을 준비하는 과정도 어렵지만, 더 어려운 것은 뭐냐면 ‘과연 그 전하는 말씀대로 살고 있느냐?’에 대한 늘 자문이요 자답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있어서 늘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그리고 그 말씀을 지킬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날마다 그 말씀을 존중하며 말씀 전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입니다. 늘 목사에게 말씀을 전하는 선생님들에게 힘과 용기를 줘야 돼요.

전에 제가 고등부 전도사를 할 땐데요. 아이들 수련회 데리고 갈 때 그냥 가는 애들만 데려가지 않고 언제나 안 가는 애들, 또 새로 나온 애들을 모아서 가곤 했는데요. 수련회 가면 애들이 여러 종류잖아요. 그리고 또 모아서 오니까 그러니까 또 수련회 가야죠. 예수 잘 믿는 아이들만 가면 무슨 수련회가 되겠습니까?
아, 그런데 별 아이들이 다 있잖아요? 애들이 많다 보니 일부 애들은 담배도 가지고 오는 아이들도 있더라고요. 또 어떤 애들은 수련회 가는데 텐트를 갖고 오는지 모르겠어요. 텐트를 가지고 와서 치고, 하여간 남들보다 유별난 행동을 하고 싶은 거죠. 그리고 어떤 애들은 저녁에 집회 시간 되면 기도 안 하고 밖에 나가서 화장실 가는 것처럼 나가서 한참 있다 오고 난 그 껌껌한 곳에 있는 것이 더 괴로울 텐데 기도하는 것 보다. 그 껌껌한 곳에 왜 있다가 오는지 잘 모르겠어요. 하여간 이상하게 말 안 듣는 아이가 몇 명은 늘 있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 고등학교 2학년 학생회장 아이인데 오더니 이러더라고요.‘전도사님, 걔네들 때문에 속상하죠?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걔네들 보고 너네 이러려면 내려가라고 했어요.’ 제가 그 아이를 보고 속으로 ‘야, 네가 고등학교 2학년이냐? ’어떻게 걔네들도 고등학교 2학년이고 너도 고등학교 2학년이냐? 즉 걔를 보니까 어떤 마음이 드느냐 하면 위대해 보여요. ‘야, 너 어떻게 고등학교 2학년이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냐?’ 아니, 걔네들 앞에 ‘너네 이렇게 엉터리로 하려면 내려가 버려라.’ 그렇게 이야기 했다고 그래요. 그리고 또 와서 ‘전도사님, 마음에 상심하지 마시고 또 제가 내려가라고 그랬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적어도 고등학교 2학년 아이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제가 일평생 동안 지켜 볼 텐데 그 아이는 분명히 훌륭한 사람이 될 줄로 믿어요. 정말 위로하고 힘을 주고 용기를 주고 소망을 주는 이와 같은 성도가 될 때 정말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위로자가 되고 격려자가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4:15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다.’ 고 이야기 합니다. 복음으로 낳은 자녀들이 그 부모를 기쁘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더욱이 우리는 선생님들을 위로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말씀을 받는 자체가 선생님에게 소망과 용기와 꿈을 줄 수 있어야 돼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 그 말씀을 받고, 이렇게 훌륭하게 사람이 바뀌고, 이렇게 훌륭하게 진보되고 이렇게 훌륭하게 역사되는구나.’ 하는 것을 보면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의 마음에는 큰 뿌듯함이 있다 이 말입니다.
정말 우리는 믿음 안에서 장성하고 훌륭한 믿음의 인격자가 되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갈 때 내가 잘 되는 것 뿐 아니라 말씀을 가르치는 자에게 큰 기쁨과 은혜와 역사가 됩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참 모든 일이 잘 되는 것 보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어요. 아주 아주 그렇게 기쁠 수가 없어요. 너무너무 기뻐요. 정말 가르치는 자에게 기쁨과 소망을 갖게 해 줘야 한다 이 말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정돈하고자 합니다.
일반적인 사회에서도 선생님이 존경을 받지 못하는 사회는 건강하지 못한 사회입니다. 건강한 사회는 그 사회를 유지시키는 사람을 키우고 가르치는 선생님이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도 건강한 사회를 위해 가르치는 직책에 있는 분들을 존중하고 배려하고 세워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도 성도들로 살면 일반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교에 계신 선생님들을 존중하고 존경하는 시민으로 우리는 살아가야 돼요. 왜냐하면 그 분들은 너무나도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르치는 분들도 그 영향의 중대함을 파악하여 감정대로가 아니라 앞으로 되어질 너무나 증차될 내일을 바라보며 오늘의 일을 이루셔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교회 안은 세상과는 달리 영적인 권위와 힘이 주어지지 않으면 모든 가르침의 구속력이 없어요.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과 존경, 진실한 배려와 아낌 속에 좋은 것을 함께 하는 애정의 심정으로 서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진실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관계가, 그리고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자도 행복하고, 배우는 자도 행복한 은혜의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리고 그 행복 속에 큰 은총의 백성의 축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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