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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네 가지 마음 (눅 15:11-32)

by 【고동엽】 2022.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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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의 네 가지 마음 (눅 15:11-32)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특히 자식들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절을 보면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려 가까이 나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해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모습을 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원망했습니다.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조상의 유전이나 율법에 기초한 수많은 규칙들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간주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세리와 죄인들이었습니다. 죄인들은 주로 창녀와 같이 비도덕적인 사람으로 낙인이 찍힌 여자를 가리킵니다. 이들에게는 공민권을 박탈하고 법적 증인으로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죄인을 멀리하고 상종치 않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죄인들을 사회에서 철저히 왕따를 시켰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그 사회의 outcast 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환영하고 크신 사랑으로 품어주셨습니다. 아무도 상종치 않은 세리 마태를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하루 밤을 지내시며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의 회개를 기뻐하시고,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많은 창녀들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동네에서 소문난 여자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이런 모습들은 당시 전통 사회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1절에서처럼 이제는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왔습니다. 가까이 왔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함께 식사하고 대화를 나누시는 자리로 '죄인'들이 계속해서 모여들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이면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소외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왔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하고 대화하는데 세리와 죄인들이 계속 모여드니 율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찬 바리새인들이 감당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원망했습니다. 계속적으로 수군거리며 쉴새없이 불평불만을 터뜨렸음을 말해 줍니다.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이 사람은 더 이상 랍비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다. 그러니 그를 추종하지 말라는 말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은 이런 바리새인들에게 주신 세 가지 비유의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10절에는 두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어깨에 메고 돌아와 벗과 이웃을 불러 함께 잔치를 벌이는 목자의 비유입니다. 두 번째 비유는 잃어버린 열 드라크마를 찾은 여자가 이웃을 불러 기쁨을 나누는 비유입니다. 이 두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는 1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죄인 한 사람의 회개는 개인의 기쁨일 뿐만 아니라 온 우주의 기쁨이 됩니다.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삼위의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여러 천사들이 동참하기 때문에 죄인 한 사람의 회개는 우주적인 기쁨으로 연결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들려주신 세 번째 비유의 말씀입니다. 이 세 비유는 소외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들의 회개를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도 죄인들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들이 회개를 기뻐하고 함께 참여해 줄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들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기쁨을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살림을 나눠주는 아버지의 마음(12)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떤 요구를 했습니까? 12를 보십시오.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둘째 아들에게 돌아갈 분깃은 상속 재산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의 상속법에 의하면 장자에게는 두 몫을 주고, 차자에게는 한 몫을 주도록 되어 있습니다(신 21:17). 둘째 아들은 이 법을 근거로 자기의 몫을 미리 달라고 떼를 썼습니다. 상속이란 아버지가 임종이 가까웠을 때 자발적으로 자식들에게 나눠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버젓이 살아 계시는데 자기에게 상속될 재산을 나누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불효막심한 요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둘째 아들이 왜 이런 무례한 요구를 했을까요? 그는 아버지 집에서 아버지의 교육을 받으며 사는 것이 불만스러웠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서 많은 요구를 했을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라, 매일아침 큐티를 해라. 도적질하지 말라, 이방 여인을 사귀지 말아라, 간음하지 마라. 부모를 공경하라, 탐내지 말라는 등 부지런히 계명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의 머리가 좀 굵어지자 아버지의 간섭이 싫어졌습니다. 그런 모든 계명들이 무거운 멍에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버지 집에 사는 것이 감옥처럼 여겨졌습니다. 아버지 때문에 자기가 불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 품만 떠나면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자 아버지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이 부담스럽고 하루라도 빨리 집구석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재산 중에서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여러분이 아버지라면 이런 아들의 요구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이 아버지는 어떠했습니까?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12b) 두 아들에게 상속법대로 미리 살림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맏아들에게 두 몫을 주고 둘째 아들에게 한 몫을 주었습니다. 살림을 나누어주어도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 재산을 임의대로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동의를 구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13a에 보면 며칠이 못 되어 둘째 아들은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버렸습니다. 재물을 다 현찰로 바꾸어 가지고 아버지 간섭이 없는 먼 나라로 떠나 버렸습니다.

여러분, 이 아버지가 왜 아들에게 큰 재산을 나누어 주었을까요? 아버지의 권위로 아들을 책망하고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재산을 못 나누어 준다고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살림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살림을 나누어 주면 살림을 팔아서 집을 나갈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버지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분, 만일 아들이 계속 상속을 물려달라고 요구하는데 아버지가 거절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했을까요? 계속하여 둘째 아들이 요구하는 것을 거절한다면 아들과의 관계성은 점점 더 악화될 것입니다. 급기야는 아버지를 살해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얼마 전에는 카드 빚은 갚아야 하겠고, 아버지의 유산은 받을 수 없고 하니까, 유산을 빨리 물려받기 위해서 아버지를 살해한 끔직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그 많은 재산을 관리할 능력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아버지는 아들의 청을 들어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돈을 움켜쥐고 아들과 원수되는 것보다는 돈을 다 잃더라도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성을 더 중요시했기 때문입니다. 재물은 다 잃더라도 아들과의 사랑의 관계성은 잃지 않고자 했습니다.

요즘 돈 때문에 자식과의 인연을 끊는 부모도 있습니다. 돈 때문에 부모를 버리는 자식들도 있습니다. 돈보다 사랑의 관계성이 중요합니다. 돈은 있다가 없어질 수도 있고, 노력하면 얼마든지 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관계성은 파괴되면 좀처럼 회복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아주머니는 보험을 타기 위해서 남편을 살해하고, 두 번째 결혼한 남편도 그렇게 살해하다가 체포되었습니다. 부모와 자식간에도 그렇고 형제간에도 상속 문제로 얼마나 많은 갈등을 겪습니까? 그러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아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셨습니다. 아들이 재산을 다 탕진하더라도 언젠가는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고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열린 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본문에 나오는 아버지와 같은 분을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본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유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자유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길 수도 있고 섬기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입니다. 그런 자유로운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섬길 때 가장 기뻐하십니다. 억지로 가두어놓고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면 아버지와의 관계는 율법적인 관계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이는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가 아니라 주인과 종의 관계입니다.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는 우리의 마음과 성품을 힘을 다하여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자발적인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예물을 드릴 때 가장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떠나기를 간절히 원할 때 여러 가지로 만류하시지만 계속 고집을 부리면 허락해주십니다.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 허락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젠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마음으로 보내 주시는 것입니다.

실재로 21-22절에 보면 둘째 아들은 아버지 집에 돌아와서 모든 관계성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온 마음으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게 되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아버지를 사랑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사는 그 자체가 얼마나 큰 행복이며 축복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바로 그런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도 바로 그런 관계성입니다.

II.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13-20)

13절을 보십시오.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재산을 나누어 준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팔아 챙겨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이를 보면 둘째 아들은 고향에서 농사짓는 일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시골구석에 처박혀 사는 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는 시골에서 썩을 것이 아니라 큰 도시에 나가 큰 비즈니스에 종사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한편 그는 아버지 간섭이 못 미치는 먼 나라로 가서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었습니다. 자기 힘으로 열심히 일해서 성공하고 싶었습니다. 아버지 앞에 당당하게 서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어떤 생활을 했습니까? 그는 허랑 방탕하여 그 모든 재산을 다 허비해 버렸습니다. 허랑방탕을 NIV에서는 wild living 거칠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가 처음부터 허랑방탕하게 살려고 나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청운의 꿈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갔습니다. 그도 아버지처럼 근면하고 성실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남보라는 듯이 성공해서 금의환향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허랑방탕하게 되었고, 모든 재산을 허비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둘째 아들이 왜 허랑 방탕하게 되었겠습니까? 첫째로 그는 세상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돈이 많으면 유혹도 많습니다. 97년 IMF 이후에 벤처기업들이 한창 일어날 때 30대 청년 사장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많은 젊은이들이 세상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습니다. 온갖 비리에 연루되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돈을 쓰고 함부로 싶은 유혹도 많았고, 여자들에 대한 유혹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카지노에 가서 많은 돈을 잃기도 하고, 사기꾼들에게 속아서 많은 재산을 날리기도 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가 먼 나라로 떠나려고 하는 내면 깊은 곳에 허랑방탕하게 살아보고 깊은 욕망도 숨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에게는 청년이 피가 끓어올랐고, 많은 여자들이 유혹도 있었습니다. 그 내면에도 죄악된 욕망들이 꿈틀거렸습니다. 30절에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렸다는 맏아들의 말을 보면 그가 어떠한 생활을 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세상 유혹은 강하고 우리 인간은 연약합니다. 아무리 성실하게 살려고 해도 인간의 의지에 한계가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거룩한 삶을 살고자 결심해도 정욕에 무릎을 꿇기 쉽습니다. 우리 내면에는 늘 타락한 본성이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막 7:21,22). 여러분, 둘째 아들이 특별히 악하다거나, 불량끼를 타고 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 볼 때 똑 같은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인간의 내면에는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가 가득하다고 하셨습니다(막 7:22). 그래서 둘째 아들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품을 떠날 때 똑같이 허랑방탕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14절을 보십시오.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 기근은 단지 한 지역에만 국한 되었던 것이 아니고 그 나라 전체를 엄습했습니다. 이제까지 부족함이 없이 온갖 즐거움과 자유를 누렸던 그는 '비로소' 궁핍함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재물이 있을 때는 친구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친구들도 다 떠나갔습니다. 여자들도 다 떠나갔습니다.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을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15,16) 그는 이제 삶의 밑바닥에서 이방인에게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방인의 종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더부살이 할 곳이 없어서 유대인들이 가장 불결하게 여기는 돼지 치는 양돈업자에게 종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수치스러운 삶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돼지 먹는 쥐염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는 임금으로 최저 생계비조차도 보장받지 못하게 되었고, 주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간섭을 벗어나 마음껏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먼 이국땅으로 떠나갔지만 결국 종살이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한 때 돈을 뿌리며 호의호식할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몰려들어 함께 먹고 마시며 즐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빈털터리가 된 지금 그는 모든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집을 떠난 둘째 아들의 모습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비참한 모습과 같습니다. 파스칼은 인간의모든 불행과 비참함은 아버지 하나님의 품을 떠났기 때문이라고 간파했습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품속에 살았을 때 가장 행복했습니다. 그때 사단이 찾아와 유혹했습니다. 하나님의 간섭만 벗어나면 무한한 자유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케 하고,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교만을 심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었을 때 하나님과 같이 되기는커녕 낙원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가시와 엉겅퀴가 돋은 세상에서 땀을 흘려야 먹고 살게 되었습니다. 필경은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허무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진리가 없는 자유는 타락이요, 방종입니다. 로마서 1장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인간들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날 때 타락한 본성대로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둘째 아들은 이러한 인생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스스로 돌이켰다’는 말은 본래의 '제 정신을 차리다'(come to himself;RSV)는 뜻입니다. 이는 '회개했다‘는 히브리적 표현입니다(Jeremias,parables,P.130). 그는 그 동안 타락한 본성에 이끌려 자행자지하는 삶을 살다가 이제야 제 정신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은 자신의 참된 자아를 상실한 삶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인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는 자기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는 그때서야 아버지 집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양식이 풍족하다는 말은 빵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뜻입니다.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남아돌아갈 정도로 넉넉하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가 겪게 된 모든 어려움을 통해서 그는 새로운 안목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이 참 행복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이렇게 비참하게 된 것이 아버지를 떠났기 때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발견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자기가 잘못해서 망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재산을 허비하면서도 다음에는 더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열심히 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완전히 망하고 주려 죽게 된 상황 속에서 아버지를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품을 떠난 것이 모든 불행의 원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히브리인들은 종종 하나님 대신에 하늘이란 단어를 사용했었습니다. 그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늘에 얻은 죄란 자기의 몸으로 지은 모든 죄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허랑 방탕하게 살며 지은 모든 죄가 하나님 보실 때 얼마나 큰 죈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 아버지께 죄를 얻었다는 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불신하고, 아버지를 대적하고, 집을 떠나온 것입니다. 자기가 떠나올 때 안타깝게 이름을 부르며 만류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러한 자기의 행동이 얼마나 아버지를 슬프시게 한 죄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집을 떠났을 때는 아버지의 품을 벗어난 것이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그러나 재산을 탕진하고, 주리고, 돼지를 치면서 조금씩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상숭배하지 말라,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간음하지 말라, 이방 여인을 가까이 하지 말라, 탐심을 버리라는 말씀들이 얼마나 소중한 진리들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크신 사랑을 멸시하고, 아버지의 돈을 다 탕진해 버린 자신이 얼마나 비천한 인간이요, 교만하고 쓸모없는 죄인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도저히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품꾼의 하나로 보아달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아들로서도, 종으로서도 살 자격도 없고, 날품팔이하는 것으로도 족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20a절을 보십시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일어나서 돌아갔다는 말이 회개의 참 뜻입니다. 회개란 repent 인데 이는 turn again이라는 뜻입니다.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떠나왔던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참다운 회개입니다. 여기서 일어났다는 말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 대해서 죽은 자였는데 이제 아버지께 대하여 산 자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간 것은 그가 회심한 이후에 최초로 취해진 의지적인 결단이었습니다. 물론 그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고자 했을 때 마음에 많은 갈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당할 수치를 생각하면 도저히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평생 벌어 놓은 재산을 다 탕진해 버렸으니 아버지를 볼 면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버지께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그런 자기를 받아 주실 것이라는 실날같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에게 재산을 나눠주기까지 자기를 아끼고 사랑하시던 그 아버지의 사랑이 생각났습니다. 지금도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아버지를 생각할 때 용기를 내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가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20b절을 보십시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버지는 상거가 먼데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즉시 알아보았습니다. 아직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아들을 먼저 알아보았다는 사실은 아버지가 날마다 아들이 돌아올 것을 기대하며 먼 거리를 살펴보고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나간 그날부터 날마다 아들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날마다 문 열어 놓고,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멀리 아들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거지 중에도 상거지 모습으로 둘째 아들이 나타났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생각하니 너무나 불쌍하여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여러 번 거듭거듭 입 맞추었다는 뜻입니다. 돌아온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를 말해 줍니다. 아들은 죄를 자백하고 벌을 받고, 날품팔이로라도 살게 해 달라고 애원하러 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의 말도 듣기도 전에 이미 아들을 다 용서하고 뜨거운 사랑으로 영접해 주었습니다. 아버지의 용서는 아들이 와서 죄를 고백했기 때문에 한 것이 아닙니다. 아들이 돌아온 그 자체가 고맙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필요 없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용서입니다.

아들 그 자체를 영접해 주는 것이 용서입니다. 재산을 어떻게 낭비했냐, 창기와 함께 날아났냐? 그런 것 따지고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용서는 그 고백 이전에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인간은 천천히 하나님께 다가가지만 회개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는 급히 달려 오셔서 그의 은혜를 베푸신다고 했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사는 분이 있다면 돌이켜 아버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 동안 어떤 죄를 지었든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현재 겪는 고통과 모든 불행이 아버지의 품을 떠났기 때문임을 깨닫고 돌이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뜨거운 사랑으로 우리를 영접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한 발자국 다가가가면 하나님께서는 열 발자국 달려오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아버지 품을 떠난 자식들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III. 큰 잔치를 벌이며 즐거워하는 아버지의 마음(21-24)

21-23절을 보십시오.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둘째 아들은 자기를 보고 달려나와 얼싸안고 입맞추고 기뻐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용서의 사랑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는 너무나 큰 죄인이어서 감히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면목이 없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온 그 자체로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혀 주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가장 좋은 옷을 입혔다고 하는 것은 아들의 죄를 탕감해 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아들로서의 모든 권리가 있음을 공포하는 행위였습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웠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표시입니다. 또 신을 신겼습니다. 당시 종들은 동시에 종들은 맨발로 다녔습니다. 아들만이 신을 수 있었습니다. 이 세 가지 옷, 가락지, 신는 필요성 때문에 제공된 것이라기보다는 아들을 존귀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조건 없이 아들로서의 모든 권리를 다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들로서 모든 특권을 다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돼지 먹는 주염 열매도 먹지 못하고 주려 죽게 된 자가 황태자와 같은 대우를 받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아버지 집에 있으면서 불평불만이 가득했습니다. 좋은 옷을 입혀 주고, 신을 신고서도 기쁨이 없었습니다. 감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다 은혜입니다. 아버지 집에 머물게 된 그 자체가 아버지의 은혜입니다. 신을 신겨 주고, 가락지를 끼워주고, 옷을 입혀 주는 것 모두 다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아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감사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아들은 이제 아버지를 마음으로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아버지의 말씀을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도 기쁨으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발적으로 아버지를 사랑하고 큰 기쁨으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고 했습니다. 원어에는 그 살진 송아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귀한 손님이 올 경우와 같은 특별한 때에는 자신이 키우던 짐승들 가운데 가장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손님을 대접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면 잡아서 잔치를 베풀 송아지를 준비 해 놓고 있었습니다. 이는 아버지가 아들이 돌아오기를 얼마나 고대했으며, 아들이 돌아왔을 때 그 기쁨이 얼마나 큰가를 말해 줍니다.

아버지의 기쁨이 어떠합니까? 24절을 보십시오. “이 내 아들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 대해서는 죽은 자였고, 세상 죄에 대하여 산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세상에 대해 죽은 자가 되었고, 아버지께 대하여 산 자가 되었습니다. 죽었던 아들이 살아서 돌아왔으니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버지는 온 동네 사람들을 다 초청하여 큰 잔치를 베풀고 함께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한 영혼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의인 열명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하십니다. 죄인들이 자기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때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축복을 선물로 주십니다. 장차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물려주십니다. 이 모든 것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집니다.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왜 자신이 모든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잔치에 기쁨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길임을 확신하셨기 때문에 죽기까지 전도인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전도의 영성이 최고의 영성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신비한 체험을 많이 해도 전도에 열심을 내지 않은 영성은 참된 영성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가장 기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IV. 맏아들을 설득하는 아버지의 마음(25-32)

그런데 맏아들이 들에서 돌아왔습니다. 집에 가까이 왔을 때 집에서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종이 대답했습니다.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27) 그러자 맏아들이 노하여 집에 들어가기조차 싫어했습니다. 노했다는 말은 '콧구멍을 벌름거리다'는 뜻으로 그는 마음 깊이 쌓인 분노와 노여움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모습은 현재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서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바리새인의 원망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맏아들이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절하고 들어오지 않자 아버지가 직접 나와서 권했습니다.

그러나 맏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불평을 털어놓았습니다. 29,30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그는 그 동안 아버지를 잘 섬겼다는 의로운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는 의로운 마음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불평불만이 가득했습니다. 왜 죽도록 충성한 나에게는 염소 새끼라도 잡아 주지 않고, 창기와 함께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이 아들을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가? 여기서 이 아들이라는 말은 원어에는 ‘당신의 아들’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했습니다. 둘째 아들만 싸고도는 아버지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이 맏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아버지가 둘째 아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얼마나 애간장을 태우며 살아왔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날마다 문을 열어 놓고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아버지의 사랑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맏아들을 계속하여 권했습니다. 31,32절을 보십시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아버지는 맏아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셨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아버지는 맏아들이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이 얼마나 큰지 인식시켜 주었습니다. 또 맏아들은 “당신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아버지는 “네 동생”이라고 했습니다. 동생이 죽었다가 살았으며, 아버지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으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너는 네 동생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 돌아왔으니 반드시 환호하고 기뻐해야 하지 않느냐?‘ 책망의 말씀입니다.

이 맏아들의 문제는 곧 바리새인들의 문제입니다. 그들은 의로운 심정이 가득 차서 세리와 죄인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돌 던지고, 멀리 했습니다. 함께 식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시고, 함께 잡수시는 예수님을 원망하고, 판단했습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집 안에 있는 탕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영접한다고 원망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죄인들이 돌아옴을 기뻐해야 함을 말해 촉구하셨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회개하고 말씀을 들으러 나오는 것은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온 것으로 여기고 아버지의 심정으로 맞아들이도록 요청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인격적으로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품을 떠나는 그 순간부터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돌이킬 때 뜨거운 사랑으로 영접해 주십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갈 때 천국에서는 잔치가 벌어집니다. 우리 안에 바리새인과 같은 의로운 심정을 버리고 아버지의 마음으로 죄인들을 품고 섬기는 종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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