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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예수의 오심은 (사9:6 눅2:12~14)

by 【고동엽】 2022.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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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예수의 오심은  (사9:6 눅2:12~14)


아기 예수의 오심을 맞이하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려오는 12월이다. 아기 예수의 오심은 성장된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시지 않고 아기의 모습으로 와서 이 세상에서 아기의 생활로 그의 삶의 자리를 둔다. 본문을 읽어 본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신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 이니라.’ 아기로 오신 예수의 표적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영광의 예수가 말구유 오시다니! 권력가로 재벌로 학자로도 올수 있었을 것을!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먼 길을 당나귀에 실린 채 만삭의 몸을 이끌고 온 어머니 마리아는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목적지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전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가 태어날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누추하고 보잘것없는 말구유 속에 첫 삶의 자리를 마련함 점에 유의한다. 이러한 구차스런 환경에서 예수는 가장 고귀한 아기로 오신다. 우리가 믿는 신앙은 하나님이 언제나 부와 힘을 소유한 특수층의 세계에 머무시는 것보다 가난에 시달리고 눈물 흘리는 사람들과 함께 하심을 믿는다. 하늘에서 천군 천사들의 찬양과 함께 땅에서 찾아 온 목자들의 축하와 동방박사들의 경배로 하늘 아버지는 이를 사랑으로 아기 예수께 땅의 평화를 이루는 곳을 찾아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아기 예수가 탄생하신 말구유의 그 자리는 위치가 별모양의 한복판이라고 한다. 예수의 탄생은 인류 역사상 기뻐해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그의 성육신은 인간들의 죄로부터 해방을 가져다주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사역 첫 시작이 어디인가라는 메시지를 알기 때문이다. 예수는 탄생에서부터 마땅한 방 한 칸이 없어 낮고 천한 말구유에 태어 나셨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정된 축하의 자리라는 점은 하늘로부터 천군천사들의 찬양이 있었음을 보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신앙인의 시인 J. M. 밸런티의 시(詩)를 소개해 본다.
   “아기로 오신 예수”라는 그의 시는 ‘영광의 주가 마구간에 나시다니/ 눈동자를 가진 아기야,/ 함박웃음을 웃는 귀여운 아기야,/ 교활한 생각에 아직 물들지 않고 천진하게 흘러넘치는 아름다움을 지녔구나! 꽃처럼 평화롭게 생명이 숨 쉬고 있구나,/ 나를 사랑하므로 항상 나를 사랑과 함께 살게 하는구나,/ 세파가 몰려오기 전/ 너를 통해 나의 영혼이/ 하나님께 가까워지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노라/’ 이 시는 아기로 예수가 오심에 대한 의미를 전해준다. 예수는 그의 공생애를 살면서 아이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막는 기존세대에 단호히 반대하심을 보게 된다.
   왜 예수는 어린이를 용납하였는가? 하는 이유를 알게 한다. 어린이의 성품은 정직한 마음, 솔직한 마음, 거짓이 없는 깨끗한 마음의 소유자이다. 어린이는 이유 없이 믿는 마음이다. 예수는 이러한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어린이를 생각 하면서 그의 제자들이 누가 더 큰 가에 대하여 말할 때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이가 천국에서 큰 이라’ 하셨음을 알게 한다. 어린이는 천진스럽기가 그지없다. 불평, 불만을 오래 두지 않는다. 거짓을 꾸밀 계획, 계략이 없음을 본다. 그리고 어린이의 마음은 평안한 마음 그대로이다.
   욕심, 교만이 없는 마음으로 그 마음이 평안하다. 그래서 예수는 전 생애를 어린이의 마음으로 평생을 사셨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모습 그대로 삶의 모델이 되시었다. 그러므로 어린이는 작은 어른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어린이를 통해 삶을 보아야 하고 사랑을 실현하고 겸손을 배워야 한다. 어린이의 삶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뤄가야 한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들의 것이다.’ ‘어린이와 같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어린이는 땅위의 천사이다.’는 이런 성구는 아기 예수의 오심에 대한 메시지인 것을 알게 한다. 이와 같이 사회의 가장 기초 단위인 가정의 구성원들이 서로 신뢰하고 믿음으로 희망을 살기 위하여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정직하고 솔직하게 서로를 이해할 때 그 가정이 작은 천국을 이루며 그러한 가정이 늘어나므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확장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건전한 인성을 형성한 어린이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교만하지 않으며 자신을 긍정하면서도 과신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순간순간 삶에 최선을 다하며 자신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이웃을 긍정하며 자연스럽게 살아간다. 겸손, 의지하는 마음인 어린이의 심성은 어른이 되어서도 보존해야 할 품성인 것을 알아야 한다. 즉 어린이다움은 어른이라 할지라도 어린이에게 배워야 할 신앙의 표본이며 모범이 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어린이 시절과 어린이다움’을 잃어버린 시대에서 살아가고 있다.
   사회적으로는 어린이 학대, 폭력적 놀이문화, 상업적 문화의 피해, 경쟁적 교육문제의 피해자로 전락하고 있어 어린이다움을 상실하고 있다. ‘아기 예수의 오심은’ 이 메시지는 어린이다움을 회복해야한다. 어린이는 구원을 받아야 하는 죄인이면서 동시에 순수함과 순전함을 가진 무구(無垢)한 존재이다. 그래서 예수는 천국 비유를 들어 말할 때 아이를 들어 말씀하심에 유의하는 것이다. 어린이다움은 어른이라 할지라도 어린이에게 배워야 할 신앙의 표본이며 모범이 된 것이다. 어린이는 어른들과 구별되는 독자적 성장과 발달을 가진 독립적 존재인 동시에 부모에게 일차적으로 보살핌을 받고 신앙공동체의 일원으로 보호와 지원을 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적 성장, 학습, 발견, 창조의 능력이 이미 고갈되어 버린 완제품이 아님을 절대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하루하루가 새로운 가능성과 새로운 약속으로 가는 신선한 선물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어린이는 더욱 그러함을 알아야 한다. 어린이의 삶으로 바르게 살지 못하면 어른이 되어 그 삶은 죄((惡)가 된다는 이치를 터득해야 한다. 영어에 ‘살다’라는 live 단어문자를 거꾸로 써 내려 보면 evil이 된다. 바르게 살지 못하면 악이 즉 죄가 되는 것임을 알게 한다. 예수가 탄생하신 첫 번 크리스마스 날 밤은 ‘어둠에 묻힌 밤’이 아니라 ‘어둠이 물러간 밤’ 환한 밤인 것을 알아야 한다.
   아기예수가 이 밤에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시기 때문이다. 이 생각을 모아서 ‘고요한 밤’ 캐럴은 불러지고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말로 불러진 찬송은 우리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이라고 잘못 부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어둠에 묻힌 밤이 아니라 우리 찬송가에 <Silent Night>은 본래 요셉 모르(Joseph Mohr, 1792-1848)가 1818년에 노랫말을 짓고 같은 해에 프란츠 그뤼버(Franz Grueber)가 곡을 부친 것이라고 한다. 이 원문을 살피면 1절 본문 ‘Silent night, holy night, All is calm, all is bright. Round you virgin mother and child, Holy infant so tender and mild, Sleep in heavenly peace, sleep in heavenly peace.' 번역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조용하고 밝은 밤> 처녀 어머니 품에 안긴 거룩하고 착한아기, 잘 자거라, 아기야! 하늘 평화 누리며’ 임을 알게 한다.
   에드워드 홀은 시간의 사용법에 대해 두 가지로 구분한다. 모노크로닉 시간은 스케줄, 분절화, 신속성을 강조한다. 반면에 폴리크로닉(polychronic)시간 이해는 몇 가지 일이 동시에 발생하며 이 체계속의 사람들은 계획을 세워 지키기보다는 사람들끼리의 관계를 강조한다. 이 사람들은 한꺼번에 여러 사람과 교제하며 끊임없이 간섭한다. 학연, 지연 등 연줄이 중요하며 외부에 대해 배타적이다. 오늘을 사는 현대 사회의 어린이들은 모노크로닉(monochronic)시간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다고 한다. 모노크로닉 시간에서는 항상 정해진 스케줄을 따라 움직이는 계획성 있는 생활이 지배한다.
   사회의 총체적 아동학대는 구도적으로 만연해 어린이다움의 피해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최근 국제아동보호단체인 유니세프의 ‘부유국 어린이 상해사망보고서’ 2001년도에 OECD가입한 26개중 우리나라 어린이의 상해 사망률이 제일 높다고 한다. 어린이의 안전한 놀이 공간 부족과 어린이 보호환경과 어린이다움으로 살아가야 할 교육, 문화, 사회가 어린이의 인성을 지니고 살만한 곳이 없다는 것과 물질적 가치와 자녀에 대한 기대 압박 심리로 어린이의 심성을 잃어 가고 있음을 보는 것이다. 이러한 처절한 시대에 ‘아기 예수의 오심은’ 어찌 기쁘기만 하겠는가? ‘아기 예수 오심은’ 우리의 표적이요 그 구원은 삶의 표본이요 사람의 모범임을 알게 한다.
   아기 같은 예수, 아기 같은 사람, 아기 같은 사회전반이 아쉽기만 한 시대임을 아는 것이다.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의 표적이 되리라. 아멘.


출처/배성산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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