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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과 서두름 (출 12:1-14 )

by 【고동엽】 2022.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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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림과 서두름  (출 12:1-14 )

대강절 둘째 주일입니다. 대강절은 문자 그대로 기다림의 계절입니다. 초대 교회는 바로 이 “기다림의 공동체”였습니다. “주여, 오시옵소서!”란 말인 “마라타나!”란 말을 초대교회 공동체는 모일 때마다 외침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그들의 자세를 늘 확인하였습니다. 이러한 주님을 기다리고자 한 자세가 초대교회를 지탱할 수 있게 해 준 밑바탕이 된 신앙의 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다림에 대해서 그저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다림에 집착하면 기다림의 의미를 상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초대 교회의 성도들 중에도 이러한 기다림의 의미를 상실한 채 예수님의 강림을 기다렸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이러한  (크게 어지럽히게 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이제 얼마 안 있어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모든 것이 끝나는데 구태여 우리가 우리의 생활에 얽매여 살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사도 바울은 경고를 합니다.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않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먹으라 하노라”(살후 5:11-12).

이렇게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림에 있어 기다림의 의미를 상실한 기다림은 결국 공동체에 해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재림이 지난 2000년 동안 기다려도 오지 않았는데 기다릴 필요가 무엇이냐 하면서 기다림 자체를 거부해 버린다면 이러한 모습 역시 결국 세상에 빠져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기다리면서도 기다림의 의미를 상실하지 않고 기다리고자 하는 자세를 우리는 “기다림과 서두름”이라는 용어로 표현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저는 이러한 “기다림과 서두름”의 모델을 오늘 본문인 출 12장의 유월절 사건에서 발견하고 싶습니다. 이와 덧붙여서 저는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이 지키는 크리스마스 역시 이러한 유월절의 성격을 띨 수 있는 모습이 된다면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상실하지 않고 크리스마스라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가장 큰 절기를 바르게 지킬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제까지 이 유월절을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사건과 결부시켜서 생각해 온 것은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탈출하던 날 밤, 자기들 집의 문설주에 발랐던 어린양의 피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는 우리를 구해주는 ‘구원의 피’라고 하는 의미에서 그러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 이 유월절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그들의 삶과 신앙의 처음 시작이라고 하는 점을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2절,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유월절은 오늘날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있어서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 주님의 성탄과도 깊은 연관이 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증거하고 있는 이 유월절 예식을 생각해 봄으로 우리의 기다림의 자세 뿐 아니라 우리가 성탄절을 어떻게 맞이하고 지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찾아볼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 스스로 느끼는 성탄절은 그 고유한 의미가 상실된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지켜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어떻게 보면 기다림의 의미를 상실한 채 기다림이란 말을 사용하는 모습과 다른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이 유월절 예식은 히브리 민족이 애굽에서 탈출하던 날 밤에 있었던 사건에서 비롯된 예식입니다. 그날 밤,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하나의 기이한 일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 기이한 일이란 애굽 땅에 있는 사람이나 모든 동식물의 첫 번째 자손-사람이면 장남, 동물이면 처음 새끼, 식물이면 처음 난 싹을 말하는데-이러한 처음 자손을 다 죽이시겠다고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히브리 민족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 히브리 민족에겐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흠이 없고 일 년 된 양이나 염소를 잡아 죽여서 그 양이나 염소의 피를 대문의 문설주에 바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피를 하나님이 보시고 그 집은 건너 뛰어(pass over, 逾越) 그 집의 모든 맏배는 죽음을 당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유월절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양의 피를 바른 그 문의 집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모습이 8-11절의 말씀입니다.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이스트를 넣지 않은 빵)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다 소화하라 (불에 태우라).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여기서 특히 11절의 말씀은 하나님의 기이하신 일을 기다리면서 해야 할 일과 자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곧 “서둘러서 먹으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어떤 조급함을 의미하는 말씀이 아니라 긴박함을 이야기하는 표현입니다. 특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지팡이를 잡고’ 라는 표현은 금방 어디를 향하여 갈 채비를 갖춘 모습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예기치 않은 일을 기다리면서 다른 한편으론 음식을 급히 먹는 이러한 모습은 한마디로 “기다림과 서두름”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기다림의 공동체로서 이 기다림 속에 채워 넣어야 할 내용을 바로 이렇게 서두르는 모습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무엇을 향한 서두름입니까?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고 보면 그것은 그동안 종살이하던 애굽땅을 탈출하는 일과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가나안 땅을 향하여 나아가기 위한 서두름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향하여 나아가되 서둘러 나아갈 수 있는 그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러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예기치 않은 일을 기다리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향하여 나아가고자 하는 그러한 움직임 없이 기다리는 유월절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죄와 죽음의 권세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위하여 서두르는 모습이 없이 주님을 기다리겠다고 하는 자세나, 또 그러한 모습으로 성탄절을 맞이하겠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교회의 사치요 게으름이요 나아가서는 안일한 하나의 행사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운동성을 지닌 가운데 우리는 기다린다는 정체성 속에 머물러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각 신앙인이나 교회가 하나님의 생명력 안에서 생존할 수 있는 길인 것입니다. 따라서 서두름이 없는 기다림은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을 막연한 것으로 만드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서두름을 지닌 기다림은 히브리 민족에게 있어서 유월절의 사건이 그들로 하여금 종살이 하던 애굽을 탈출함과 동시에 가나안 땅을 향한 출발의 원동력이 된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는 죄의 권세를 뿌리침과 동시에 하나님의 의의 도구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게 하는 강한 추진력이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는 우리가 기다림의 모습으로 지녀야 할 서두름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를 그날 밤 히브리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급히 (서둘러) 먹으라’ 한 데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다 소화하라.”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5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1. 피를 문에 바른 그 양의 고기를 먹되 날로나 삶아 먹지 말고 반드시 태워 먹으라.

2. 무교병 (이스트를 넣지 않은 빵)을 먹으라.

3. 쓴 나물과 함께 먹으라.

4. 다 먹으라.

5. 혹 남은 것이 있으면 다 불에 태우라.


우리는 이러한 명령에 대한 몇 가지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특히 이러한 의미를 오늘날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는 자세에서 채워야 할 내용이라 할 수 있는 죄의 권세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고자 서두르는 모습에 결부시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우리의 주님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과 연관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이를 그의 삶을 통해 보여 주셨으며, 하나님의 나라는 장차 그의 오심으로 완성시키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 우리는 믿고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1. “피를 문에 바른 그 양의 고기를 먹되 날로나 삶아 먹지 말고 태워 먹으라.”


이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바른 이해를 지녀야 한다는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경험해야 합니다. 히브리 민족에게 그 양의 고기를 다 먹으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양의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곧 양이 죽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양을 먹듯이” 체험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먹는다는 그 체험적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저 다른 사람의 죽음처럼 눈으로 지켜보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그 죽음을 먹어 소화시키는 그러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체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을 좀 더 쉽게 표현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의 삶에 진정한 영양과 에너지를 가져다주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고후 4:16).우리들도 이처럼 나의 삶의 근본적 에너지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서 나오도록 하라는 이 점을 우리는 늘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를 날 것으로나 물에 삼지 말고 반드시 불에 태워 먹으라는 것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심판을 대신한 심판적 죽음이라는 사실을 간직하라는 의미입니다.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그 분이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달으라는 바로 그 사실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내 대신 죽으신 분은 내가 받아야 할 불의 심판을 대신 받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2. “누룩(이스트)를 넣어 부풀린 빵이 아니라 누룩을 넣지 않은 빵(무교병)을 먹으라.”


이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로서 우리의 삶을 허황된 것으로 부풀려서 들뜬 삶을 살지 말고 순수하고 진실 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를 과장하여 사는 삶이 아니라 순수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과장해서 살게 되면, 결과적으로 남을 속이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어떤 사람이 자기의 삶을 과장해서 표현한다고 합시다. 그 사람의 모습을 본 다른 사람은 이러한 모습을 보고 “왜 나는 저러지 못할까?”라고 자기 자신을 한탄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닌데 과장되게 포장하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부담을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너희는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막 8:15).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렇게 과장되어 포장된 모습을 겁내지도 말고 우리 스스로 이러한 모습을 거절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 앞에 진실한 모습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모습은 그리스도의 희생 외에 다른 희생을 나타내려 하지도 말고 요구하지도 말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자신의 삶을 부풀리게 되면, 이러한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을 외식적인 사람이라고 꾸짖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10계명의 10가지 조항을 252개 조항으로 부풀려서 사람들을 무척이나 힘들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많은 조항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자기들 마음대로 부풀려서 사람들 앞에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나아가서 이러한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삶이 모습이 포장된 모습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할 때 속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신앙생활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얼마나 그럴듯하게 포장되기 쉽습니까? 우리는 이를 분별하고 또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쓴 나물과 함께 먹으라.”


이는 고난의 삶을 함께 지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이웃을 돌아보아 고난 받는 자가 없는지 염두에 두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두 가지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하나는 우리로 하여금 경건의 삶을 살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말씀한 것처럼 “참된 경건은 과부와 고아를 돌보며 자기를 지켜 세속에 빠지지 않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현대인들은 “행복이라는 병의 중독자들”이라고 유명한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Victor Frankle) 박사는 말했습니다. 이러한 행복이라는 병에 중독이 되었기 때문에 고난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현대인들은 ‘공허함(emptiness)’라는 더 심각한 병에 걸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난을 받아들일 때 우리의 인생의 귀한 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참된 경건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가져다주는 유익은 이러한 고난의 삶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난에 동참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은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높아지려 하는 삶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하지만 낮아지려 할 때에는 행복이 주어진다는 이 소박한 모습이 우리에게 요구됩니다.


4. “다 먹으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것으로 모든 것을 삼을 수 있도록 하라는 그리스도안에서의 철저한 삶을 당부하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모습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는 인생의 귀한 가치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으로 보충되기를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을 믿는 것 외에 다른 것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 속에는 우리의 구원을 향한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되겠습니다. 우리의 구원받음에 하나님 외에 다른 무엇이 게재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에 대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증거 하였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점을 잘 깨닫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만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살도록 애써야 하겠습니다.


5. “혹 남은 것이 있으면 다 불에 태우라.”

혹 우리가 미련을 두고 있는 것이 있다면 이 역시 다 심판의 대상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잠시 유보해 둔 것이 있지나 않은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때로는 우리는 하나님의 현재적 임재하심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내일로 미루거나 다른 날로 유보해 둘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체면 때문에, 우리의 게으름 때문에 기타 등등으로 우리는 현재적 결단을 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결단하지 못하여 남겨둔 것이 있다면 그 역시 불타는 심판의 재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고 말입니다(눅 17:32).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결단을 내일로 미루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이번 성탄절을 이러한 서두름 속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기다림의 공동체로서 우리의 주님을 기다리는 자세가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체험하기에 서둘러야 합니다.

순수하고도 단순한 삶을 서둘러야 합니다.

고난 받는 삶에 동참하기를, 낮아지는 삶에 힘쓰기를 서둘러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삶으로만 만족하기를 서둘러야 합니다.

그리고 남김없이 온전히 결단하기를 서둘러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여 서두르는 모습을 지닌 가운데 우리는 우리의 기다림을 온전케 해 나가도록 하십시다.


<기도> 우리들에게 독생자를 어린 양처럼 허락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은 대강절 둘째주일을 맞이하여 저희들의 기다림의 내용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시던 마지막 날 밤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의 기다림의 모습이 어떠함을 발견하고자 합니다. 우리를 위해 어린양처럼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의 모든 삶이 전개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체험할 수 있도록 우리들의 모든 자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함께 못 박게 하시옵고, 이러한 모습의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에 순수하게 나타날 수 있게 하시오며, 예수 그리스도의 그 고난의 모습을 간직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심으로 오직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고자 하는 가운데에서 늘 주님 안에서 자라가기를 애쓰는 주님의 자녀들과 저희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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