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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뒤에 오시는 그 이를 보라 (요1:19-28)

by 【고동엽】 2022.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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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뒤에 오시는 그 이를 보라   (요1:19-28)

우리는 3s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이 3s는 시대마다 다르게 사용되어데 산업화 시대의 3s는 Standard(표준화), Simple(단순화), Speedy(스피드)였는데 전두환 정권에서 새로운 3s 용어가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Sex(섹스), Screen(영화), Sports(스포츠)였습니다. 그런데 인터넷 시대의 3s는 Sex(섹스), Stock(주식), Starcraft(스타크래프트)입니다. 스타크래프트란 Blizzard(미국의 게임 개발사)에서 만들어 낸 게임산업 발전에 엄청난 자극제를 준 게임입니다. 정보인프라, PC방 문화를 정착시킨 장본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스피드 시대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동시에 인스턴트 시대입니다. 광속의 시대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문화는 조급증에 시달리게 되었고 기다림의 아름다움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외국에서 대한민국의 문화를 한마디로 ‘빨리빨리 문화’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식당에 가도 빨리 빨리, 밥을 시켜 놓고 기다리지 못합니다. ‘빨리요!!’라는 말을 빼지 않습니다. 음식은 즐기는 것이라는데 . . 프랑스사람들은 2시간동안 먹으면서 토론을 한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을 때도 기다림이 훈련되지 못하다 보니 엎드려 커피가 내려오는 것을 들여다보는 사람, 기다리지 못해서 손 집어 넣고 손데는 사람. . .
휴대폰에 문자를 보냈을 때 답장이 빨리 오지 않으면 짜증을 냅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문이 자동으로 닫히는 시간을 못 참고 닫힘 버튼을 누릅니다.
에스컬레이터가 자동으로 올라가지만 그 위에서 뜁니다.
택배에서도 나타납니다. 1분 1초라도 더 빠른 것에 목말라하는 사람들 덕에 택배 시장도 급격히 성장했습니다. 퀵서비스가 재미를 보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GPS 시스템까지 도입하여 하루만에 물건이 도착하는 빠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도 느리다며 불평하는 사람들의 전화는 계속됩니다.
사진도 ‘빨리빨리’ 문화에 젖어 7분 인화가 눈길을 끌고, 어떤 피자 가게에서는 주문 후 20분이 지나면 무료라는 광고도 있으며, 그러다 보니 교회 예배 문화도 설교가 짧아야 명 설교라는 희한한 논리가 정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무조건 짧아냐만 좋은 것입니까? 그래서 “설교를 짧게 하는 목사는 복이 있나니 다음에 또 초청을 받을 것이요”라고 농담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심리학에 ‘충동 조절 장애’란 것이 있습니다. 화를 참지 못하고 순간 남을 해치고 고통 주는 사람들의 병적 심리를 말합니다. 이 같은 ‘홧김 범죄’ 때문에 사회가 불안해지고 걱정스럽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길 가던 사람이 힐끗 쳐다보았다고 해서 달려들어 두들겨 패기도 하고, 집에 외상값 받으러 온 사람을 예고도 없이 망치로 때려 죽게 하는 일도 있습니다. 이런 홧김 범죄자들은 뇌관만 건드리면 터지게 되는 인간폭탄이라 볼 수 있습니다. 두려운 것은 우리 주변에 홧김 범죄자들이 점점 많아져 간다는 사실입니다. 언제. 어디서. 누가. 나를 해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불안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것이 빨리 빨리 문화와 무관하지 않는 것입니다.
빨리빨리 덕분에 1등을 빨리 할 수도 있고 오늘의 경제성장도 이룰 수 있었지만, 황우석 스캔들과 같은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기다릴 줄 아는 자세 또한 필요합니다.
1. 믿음은 기다림입니다.
믿음은 기다림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기다림이 부족해서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음으로써 가문의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작가 사무엘 벡케트는 “인간은 본래적으로 기다리는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어릴 때에는 어른이 되기를 기다리고 학교에 들어가면 졸업하기를 기다립니다. 처녀, 총각 시절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고, 결혼한 다음에는 아이를 기다립니다. 문제가 있는 사람은 그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다리고, 이해할 수 없는 문제에 시달리는 사람은 그 사건의 의미가 깨달아 지기를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대강절(待降節)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쁨으로 기다리는 절기를 뜻합니다.
대강절은 다음 3 가지의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인류 구원을 위해 오실 메시아의 대망입니다.
둘째는 임마누엘의 주님과의 만남을 대망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재림하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 신앙과 삶이 바로 기다림의 은총입니다.
구약시대에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해방되어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모든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영원한 왕국을 땅위에 건설하고 영원히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으리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꿈과 기대와는 달리 그들의 현실은 더욱 어렵고 비참해 지기만 했습니다. 유대나라는 거대한 제국들의 말 발굽아래 밟히고 또 밟혔으며 마침내 로마라는 제국의 식민지가 되어 견디기 어려운 나날을 보내는 가련한 민족으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구약의 말라기가 끝나고 세례요한이 출현하기 까지 400년동안 하나님의 선지자는 나타나지 않았고 하나님의 계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이 400년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400년동안 강대국의 속국으로 억눌려 사회적으로 혼란과 영적인 암흑 속에서 살았습니다. 정치적으로 주권을 빼앗겼고, 경제적으로 피폐해져 가뭄에 메마른 땅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령은 갈급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침묵하시는 중에 백성들은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버리셨는가? 우리를 떠나셨는가? 생각했습니다. 옛날 선지자들을 통하여 분명히 예언한 말씀들을 기억하면서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왕을 보내 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이 통치하시던 그 옛날의 영광을 회복하기를 기다렸습니다. 하루속히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되고 싶었습니다.
이러한 오랜 침묵 시간 가운데 어느 날 유대 광야에 선지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요단강이 흐르는 광야에 살면서 옷은 약대 털옷이고, 음식은 석청과 메뚜기를 먹으면서 지내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세례요한입니다.
2. 준비된 사람, 세례요한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 6개월 전에 나타난 세례요한의 이야기입니다.
희망이 사라지고, 지도자도 없던 암흑의 시기에 세례요한이 나타나 회개를 외치며 세례를 주며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고 세례요한에 대해 궁금증이 더해가기 시작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누군지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조금도 거리낌 없이 자신은 결코 그 분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19절에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활동하던 요한에 대해 여러 가지 얘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 분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 .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었습니다.
사실, 요한은 그 출생에서 그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제사장인 사갸라와 경건한 어머니 엘리사벳으로부터 났습니다.
누가복음1장에는 요한의 부모님은 나이 많아 늙도록 자식을 낳을 수 없었는데 신앙심이 깊은 제사장 아버지 사가랴와 어머니 엘리사벳 사이에서 하나님의 특별하신 역사 속에서 잉태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이 많아 임신하지 못하는 제사장 사가랴가 제사장 당번이 되어 성소에서 분향하고 있는 동안에 천사가 사가랴에게 나타났습니다. 사가랴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사가랴야 놀라지 말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어 주셨다.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요한이라하라. . . .그가 주님 앞에서 많은 사람의 기쁨이 될 것이다. 이 아이는 포도주나 독주를 입에 대지 않을 것이다. 이 아이는 태중에 있을 때부터 성령으로 충만 할 것이다. 이 사람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 올 것이다. 이 사람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역사하심으로, 특별한 목적 특별한 방법으로 출생한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요한은 외모로 볼 때, 약대털옷을 입고 석청을 먹으며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또 광야에서 외치는 그의 설교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의 설교를 들을 때, 듣는 사람마다 회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렸고 세례를 받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세례요한에게 끌리는 것이 세례요한의 외적인 어떤 복장이나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서 지내는 그의 생활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외치는 선포 때문이었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유대인들을 대표해서 ‘도대체 광야에서 세례를 주며 회개를 외치고 있는 이 사람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고자 그에게 찾아 온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누구냐? . . . 네가 정말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가 맞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적어도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세례요한이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인 것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궁금한 것은 ‘네가 정말 그리스도냐?, 네가 정말 메시야냐?’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 때 세례요한은 둘러대지 않았습니다. 20절에 단도직입적으로 말합니다.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라고 했습니다.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시 요한은 인기도 대단했고, 영향력도 대단했습니다. 그의 영향력은 엄청난 파워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의 말 한마디에 사람들이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의 말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가슴을 찢고 통회하며 자신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그의 말 때문에 악한 자들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추종자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말 한마디에 어쩌면 죽는시늉까지 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경우에 대개의 많은 사람들은 갈등합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을려고 합니다. 신적인 냄새를 풍깁니다. 그리고 대단한 사람인양 흉내를 냅니다. 우물쭈물 하면서 인기몰이를 합니다. 그런 것에 재미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좀 특별한 사람을 찾습니다. 좀 능력 있게 보이는 사람을 찾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이상한 사이비들이 날뛰고 이상한 흉내도 내고 자기가 마치 신인 양 쇼를 하는 것입니다. 인기에 빠지면 사람들이 벗어나지 못한다고 합니다. 마치도 마약에 중독 된 것 같이 그것을 지킬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는 것입니다.
사실 세례요한은 이 당시 잘 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세례요한은 인기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의 관심은 자신이 증거해야 할 그 분에 대해 있었습니다. 자기가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참 멋있는 사람입니다.
그러자 또 다시 그들의 질문이 이어집니다. 21절에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아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그들은 그리스도가 아니면 엘리아라도 되는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성경에는 메시야가 나타나기 전, 엘리야가 오기로 예언되어져 있었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말4:5-6)
그들은 자기들 시대에 메시야가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엘리야가 된다면 메시야가 올 것이기 때문에 엘리야였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3. 광야의 소리일 뿐
그런데 세례요한의 대답은 이번에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그칩니다.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22)
요한은 또 다시 질문하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23)고 했습니다.
요한은 자신에 대해 말하기를 자신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것처럼 주의 길을 곧게 하기 위해 외치는 광야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과거에 임금이 자기 백성들을 방문하려고 할 때 그 마을에서는 임금이 그 마을로 들어오는데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도록 길을 닦습니다. 요한은 자신은 임금이 들어가는데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도록 걸리적거리는 것을 모두 치우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정도에 불과 하다고 말합니다.
요한의 대답을 듣고 ‘그리스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닌대 어떻게 해서 세례를 주느냐?’고 화를 냅니다. 그들은 그렇게 세례를 주고 수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것을 봐서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다가 크게 실망을 합니다. 그냥 실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세례요한을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세례를 베풀고 있는 것에 대해서 아주 못 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은 ‘소리’에 불과하고 그분의 신 들메를 감당할 수도 없는 존재(26,27)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든 관심과 초점을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 맞추기 위해서입니다.
별빛은 태양이 떠오르면 그 빛을 잃게 마련입니다. 요한은 참된 증거자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요한은 빛이 아니라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증거자라고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요1:8)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살렘근처 애논에서 요한이 세례를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요한의 제자들에게 와서 예수의 세례가 더 낫다고 하는 바람에 그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요한에게 와서 말합니다. “선생님, 요단강 건너편에서는 선생님이 전에 증거하신 그 분이 세례를 주고 계시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리로 오지 않고 그리로 가고 있습니다.” 그때 요한이 말합니다. “하나님은 각자에게 맞는 일을 맡기신다. 내가 맡은 일은 그 모든 사람이 그분에게 갈 수 있도록 길을 준비하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보다 앞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너희에게 분명히 말하지 않았느냐?”
그러면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 참 멋진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까? 그것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나는 쇠하고 그리스도만이 증거되어야 세상이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내 이름을 내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신을 높이려는 것이 타락이며 이단입니다.
그리스도가 흥하게 되려면 내가 그리스도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에게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내가 죽어짐으로 그리스도가 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시기, 질투심을 이기지 못해 배가 아픕니다. 사촌이 논을 샀는데 뭔가 보태줄 것이 없어 미안해야 할 것인데 말입니다. 새로 산 논에 거름이라도 보태 줘야지 하는 맘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요한은 메시야가 영광을 받는 다면 자신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마냥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4. 회개만이 메시야를 기다리는 준비이다.
요한의 말은 자신을 겸손하게 표현하는 정도로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죄에 대한 회개의 촉구입니다. 메시야를 영접하려면 그 앞에 걸리적거리는 죄를 먼저 치우고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즉,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회개(repent)는 ‘후회하다’는 뜻과 ‘회개하다’는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후회하는 것과 회개하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흔히 사람들이 회개를 후회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잘못된 생각입니다.
후회는 단순히 과거만을 돌아보고 통탄하는 것인 반면, 회개는 미래에 대한 결단이 따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젊었을 때 좀 더 열심히 공부할 걸’, ‘일을 좀 더 열심히 할걸’ 많이 후회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후회가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해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회개는 후회를 포함하지만 결코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미래적으로 결단하고 그 자리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걸어오던 죄악의 길에서 발길을 돌려 하나님을 향하여 새롭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는 같이 주님을 배반했지만 유다는 후회만 하므로 스스로 멸망의 길을 가게 되었지만 베드로는 회개하므로 구원받고 초대교회에 귀중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후회하는 자가 아닌 회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3:19) 예수님은 회개한자, 깨끗한 자에게 오십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세는 다른 것이 있지 않습니다. 트리를 얼마나 멋지게 하느냐? 떡을 하느냐 안하느냐? 전야제 순서를 준비하느냐 안하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걸리적 거리는 죄를 청산하는데 있습니다. 히브리서에 말하듯이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거운 것, 얽매이기 쉬운 죄, 이런 것들을 벗어버리는 것이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준비입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3:11)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자신의 자백과 결단입니다. 그러나 그런 결단이 완벽한 해결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세례요한의 세례가 완벽한 죄의 해결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성령과 불의 세례가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과 불의 세례는 물세례를 받은 자에게 즉, 회개하고 결단한 성도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물세례 받은 후 즉시 비둘기 같은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마3:16)
물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고백하게 만들었지만 성령은 그들을 변화시킵니다. 부패한 우리의 심령을 치료하고 변화되어진 삶을 능력 있게 살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할렐루야! 그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 바로 자기 뒤에 오실 그분,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죄에 대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물세례입니다. 물세례만으로 사람이 새로워 질 수는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셔야 합니다.
요즘 무늬만 그리스도인인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에 출석하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 전혀 변화되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의 주인이 되어 주셔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다스리시고 우리의 행동을 다스리셔서 우리를 새롭게 하실 때 우리는 새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은 뒤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초점을 맞추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 분을 위해, 그 분의 유익을 위해, 그 분의 영광을 위해 . . 오늘 우리는 과연 그 분의 영광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희생할 마음과 믿음이 있는 요한과 같은 아름다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임경택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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