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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7월 04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요 9:1~12)

by 【고동엽】 2022. 8. 18.

[2021년 07월 04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요 9:1~12) - 곽선희 목사님
https://www.youtube.com/watch?v=J0A_Ec6QKEg

오늘 아침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9장 1절로 12절 말씀입니다. 신약성경 160면입니다. 160면 요한복음 9장 1절부터 봉독하게 됩니다. 이 거룩한 말씀을 봉독할 때 다 같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라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의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내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때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내심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이웃 사람들이 전에 그가 거지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그들이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아멘. 심리 상담 학자인 스캇 펙은 그의 저서 유명한 **'아직 가보지 않은 길(The Road Less Traveled)'**이라고 하는 책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충고의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늘 선택하며 살아간다. 선택의 여지, 선택할 수 있는 능력,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때때로 '이 길밖에 없다', '다른 길은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신앙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도전입니다. 아닐 것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언제나 선택의 여지는 있습니다.

마치 이제 동산에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주셨습니다. 자, 그런데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자, 이 말은 뭡니까?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 순간에 우리 인간들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선택은 없었다'라고 변명합니다.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것이 타락성입니다. 책임감과 굴종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됩니다. 책임감을 가지고 하느냐 주도적으로, 아니면 굴종하며 할 수 없이 하는 일이냐. 그것이 선택입니다. 또 감사와 허무 사이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도 있고 아니 모든 것은 다 헛되다.

허무주의에 와서 가는 선택 사이에 있습니다. 불행을 축복의 또 다른 모습으로 여기는 믿음. 이것은 귀한 선택입니다. 행운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겸손, 그리스도인의 믿음입니다. 역경을 기회라고 생각하는 긍정적인 세계관,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선택입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 보면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이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시각 장애자입니다. 아마도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사람의 육체에 가장 귀한 지체가 좀 눈이라면 눈이 천 냥이라고. 그만큼 눈은 시각은 중요합니다.

우리 모든 기능이 시각과 함께 오는데 이 사람은 시각 장애자입니다. 그것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앞에 놓고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누구의 때문입니까?' 이런 때마다 도덕성을 물어봅니다. 과거를 물어봅니다. 본인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본인의 죄라면 나기 전에 무슨 죄가 있습니까? 부모의 죄라면 본인은 또 억울합니다. 참 풀 수 없는 도덕적 수수께끼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높은 차원에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해서 이 같은 사건을 여기 두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하고 수용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하나의 조건, 그리스도를 만나야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됩니다. 예수님 말씀을 들어야 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예수님을 따르고 있지만은 여러분 성경 보시는 대로 진짜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딱 한 사람입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본다고 만난 게 아니에요. 같이 있다고 만난 게 아니에요. 함께 산다고 만난 게 아니에요. 일대일로, 면대면, 절대적 관계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한 사람뿐입니다. 이 사람은

많은 군중 속에 있으니 어찌 생각하면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 속에 이 사람만 시각 장애자입니다. 근데 그 사람이 주님을 만납니다. 아니 주님께서 그를 만나 주셨습니다. 고난 속에서만 절대적 관계가 형성됩니다. 절박한 고난, 여러분 죄송합니다만은 절박성 그것이 없이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절박함이 없이는 하나님을 똑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음성도 들려지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야곱이라는 사람이 형의 낯을 피해 하란으로 갔다가 돌아옵니다. 형님이 군사 400명을 그리고 자기를 만나러 온다는 말을 듣고 얍복강

건너편에서 이제는 재산도 필요 없고 가족도 필요 없고 다 보내 버렸습니다. 형님을 어떻게 만나느냐가 중요합니다. 얍복강 나루에서 그는 기도합니다. 밤새 홀로 고통받습니다. 홀로 남았습니다. 홀로 물리적으로만 홀로가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홀로 하나님과 면대면 합니다. 거기서 그는 이스라엘의 축복을 받습니다. 여러분 이래서 해야 됩니다. 이 시각 장애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바로 그런 순간에 주님만이 사람을 만납니다. 고난 속에서 만납니다. 절박성 속에서 만납니다.

만나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여러분 어제 까지만 하면 버려진 인간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선택된 인간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해서 그는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 시간은 가장 행복한 사람, 왜 주님께서 만나 주셨습니까? 많은 고난 속에서 말입니다. 만나 주셨습니다. 가장 저주스러운 생을 살아 왔습니다만 가장 큰 은총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주님을 만나는 가장 귀하고 복된 사람이 됩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아주 이해하기 어려운 순간이 있는데 잠깐 지나칩니다마는

그러나 머물러서 오래오래 생각해 보아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만나서 어떻게 했습니까? 보통대로 말하면 "눈을 떠라" 그래야 될 거 아니에요. 그것으로 족하지요. 근데 왜 오늘따라 이 사람에게 이상한 역지사지일까요? 땅에 침을 뱉어 가지고 진흙을 이어서 눈에다 바릅니다. 여러분 그 순간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시각 장애자의 눈은 눈이 아닙니까? 눈에 먼지만 들어가도 아픈데 어째서 이 시각 장애자가 당하는 고통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셨는지 말입니다. 예상과 아니더라도 더 순도 고통스럽게 하셨어요. 진흙을 이어서 눈에다 발라, 이게 말이 됩니까? 여러분 성격이 급한 여러분 아마 이런 정도 되면 "여보 이거 뭐 하는 짓이오"

"누구를 죽이려고 이거!"라고 하겠습니까? 아마 여기 계신 분들은 아마 이거 이거 이런 경우에 가만히 있을 사람이 별로 없을 겁니다. 어떻게 이걸 참아요? 시각 장애자의 눈에다가 땅에다 침을 뱉어서 그것을 눈에다 발라요. 나는 그 순간에 이 시각 장애자의 믿음이 너무나 부럽습니다. 이걸 참았어요. 이 말도 안 되는 일이 이것은 솔직히 말하면 그대로 "눈을 떠라" 라고 기대하고 있는 거지 보통으로. 그런데 오히려 고통을 더했습니다. 그렇잖아도 불편한데다가 시각 장애자의 눈에다가 진흙을 바르는 이러한 불편함, 불편이 아닌 고통을 이 사람은 잘 참았습니다.

"왜 그러냐"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뭐 하는 짓이냐"고 화내지도 않았습니다. 고작 짧은 순간이지만 굉장한 사건이 지나가는 겁니다. 기적적인 사건입니다. 이 사람이 이걸 잘 참아 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실로암은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예, 저도 한번 가봤습니다만은 여기서 예수님 말씀하신 데서부터 여기 까지 가려면은 보통 사람이 보통 걸음으로 가면 30분 걸릴 수 있겠지만 이 시각 장애자가 지팡이를 짚고 더듬더듬 가려면 2시간 걸립니다. 이 2시간 실로암을 향해 가는 이 사람의 모습을 한번 상상을 해 보세요. 그 2시간에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전 그렇게 생각해 봅니다. "참 재수 없는 날이다." "내가 어쩌다가 오늘 이런 일을 당했나." "이것도 기쁘지 않으셔야. 내가 지금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하면서도 그런 모든 의심을 억누르고 순종합니다. "이보다도 더 어려운 일도 하라면 해야 되는데 이게 무엇이 대수냐." 2시간 동안 어정어정 가는 그 모습을 가만히 상상해 보세요. 굉장한 믿음입니다. 높이 평가해야 됩니다. 믿고 순종합니다. 순종하고 실로암까지 가서 자기 손으로 물을 떠서 눈에 씻었더니 눈이 떠지니 희한한 일이 있습니까? 또 나온 얘기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든 불행의 원인을 과거에서 묻습니다. 그래서 과거에 잘못한 것 때문에 오늘 이런 일을

당했다. 과거에 뭐 누구 때문에 망했다. 못해서 조상 탓을 합니다. 전생에라는 이런 말까지 하게 됩니다. 과거로 우리는 돌립니다만은 기독교의 역사관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원인은 미래에 있습니다. 과거에 무슨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오늘 불행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하나님의 큰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이 사건은 오늘 있는 겁니다.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죄를 지어서 형무소에 가서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이건 과거에 지은 죄 때문에 오늘 고생을 하는 겁니다. 그러나 학생들이 공부할 때 공부는 수고 많이 합니다. 공부하는 아이들 내가 승강기에서 보니까 도시락을 세 개 싸 가지고 오더라고요. 하루 종일 먹으면서 공부한다고. 이 보통 일입니까? 지금 농담 얘기입니다만은 제가 프린스턴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저의 옆방

에 이제 잘 아는 친구 하나 있었어요. 아, 이 몸이 좀 약해요. 공부를 해야죠, 숙제는 많죠. 그러니까 힘들어서 힘들어서 늘 만날 때마다 밥 먹을 때 꼭 그 말을 해요. "아, 목사님, 왜 우리들은 전생에 무슨 죄가 많아서 이 고생을 합니까?" 그래서 "저희가 많은가 보지" 그리고 말하기 힘들다만은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공부하는 사람이 고생하는 거 전생에 죄가 많아서 당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이거 미래를 위해서, 앞에 있는 영광된 미래를 위해서 오늘 고생하는 거예요. 고생의 의미가 다 전혀 다릅니다. 이거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성경이 말씀하는 메시지입니다. 이 사람이 시각 장애자가 됐어요. 40년을 못 보았으니까 시간까지 불행한 생을 살았어요. 그러나 이 불행한 생은 과거 그 어떤 저주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하고자

하심이라는 그 한 말씀입니다. 이 고난의 원인이 미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순교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이 순교합니다. 순교하면서 내 죄 때문이라고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미래에 있는 하나님 앞에 가서 영광을 누리기 위하여 순교, 수많은 고난 중에서 영광 누리기 위하여 올 고난 당할 것이죠. 결정적으로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고난의 원인이 미래에 있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슨 고난을 당하더라도 "무슨 잘못 때문에", "무엇 때문에" 그건 다 예수님께서 이미 사해 주신 것입니다. 이미 긍휼히 여기신 것입니다. 용서한 겁니다. 확신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의 원인은 미래에 있습니다. 영원 지향하는 미래에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을 통해서 가장 큰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40년 동안 깜깜함 속에서 산 사람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 이를 키웠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이 고난 속에서 만나 주심으로 고난을 통해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가장 불행한 고난을 통해서 가장 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냈더라는 날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또 다른 방법으로 말씀하십니다. "실로암에 가서 씻어라." 여러분 혹 믿음이 가지 않더라도 순종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걸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확신만 말합니다만은 확신보다 중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혹 의심이 가고 혹 흔들려도

겸허함으로 기도하며 순종할 것입니다. 아마 사람도 그런 생각했을 거예요. 실로암까지 가면서 별 생각 다 했을 거예요. 그러나 순종 하나만 완성했습니다. 실로암에 가서 씻는 그 사건 하나를 완성할 것입니다. 그거로 그는 눈을 떴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사건 때문에 물어보았습니다. "네 눈을 뜨게 했느냐?"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가 안식이 일인데 이게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냐 아니냐?" 뭐 시비가 많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 나가다 보면 재미있는 말 한마디가 있어요. "내가 아는 것 한 가지." "난 아무것도 몰라요. 그 사람이 예수라는 사람이 날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다. 그 한 마디만 난 알어.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난 예수님을 만나 보지도 못했고 다 모른다만은 한 가지 예수님이 내 눈을 뜨게 하셨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얘기입니다. 키에르케고르라고 하는 신학자의 기도문이 있어서 한 말씀 드립니다. "지성인에게는 한 가지를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감성인에게는 받아들일 수 있는 성실함을 주시옵소서. 의지에는 오직 한 가지만을 따를 수 있는 성실을 주시옵소서. 정신이 산만할 때에는 한 가지만 원하는 집중력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고통을 당할 때에는

한 가지만을 바라보며 참을 수 있는 인내를 주시옵소서." 여러분, 이 시각 장애자는 주님의 말만 듣고 주님의 음성만 듣고 주님께만 순종했습니다. 여러 가지로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있지만 아닙니다. 모든 의심은, 불필요한 비판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는 묵묵히 순종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이루어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완성했습니다. 이 어려운 시대를 살아갑니다. 이 속에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경륜이 있습니다. 알고 듣고 믿고 순종하여

그 귀한 증거를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귀한 아침 주님 앞에 나와 예배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많은 문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아니, 선택의 자유를 잃어버린 것처럼 허우적거릴 때가 많습니다. 흔들리는 믿음을 용서하시고 [음악] 우왕좌왕했던 지난날도 용서하시고 주여 이 시간 많은 확실함보다 주의 음성을 직선적으로 듣고 종국적으로 응답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게 주시는 음성을 내가 듣고 오늘 이 시간 순종함으로 주님의 뜻을 이루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그 일을 꼭 오늘 이룰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말씀과 교훈 상세 요약

제공해 주신 글은 요한복음 9장 1-12절 말씀을 본문으로 하여, 고난의 의미와 그리스도인의 선택, 그리고 순종의 중요성에 대해 심리 상담 학자의 견해와 성경적 해석을 결합하여 설명하는 설교 또는 강연의 내용입니다.


1. 📖 본문 말씀 요약 (요한복음 9장 1-12절)

  • 맹인의 고난의 이유 (1-3절):
    •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셨을 때, 제자들은 이 맹인이 누구의 죄로 인해 그렇게 되었는지(본인 혹은 부모) 물었습니다.
    • 예수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 (4-5절):
    • 예수님은 아직 낮이므로 자신을 보내신 이(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며, 밤이 오면 아무도 일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 치유의 과정 (6-7절):
    •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맹인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 이어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하셨습니다.
    • 맹인이 순종하여 가서 씻었더니 밝은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 (참고: 실로암은 '보내심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 사람들의 반응 (8-12절):
    • 이웃 사람들은 그가 전에 구걸하던 거지였음을 알고 놀라며 그가 맞는지 아닌지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 맹인은 자신이 그 사람이라고 증언했으며, 예수님이라는 분이 진흙을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해서 순종했더니 보게 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
    • 사람들이 예수님이 어디 계신지 물었으나 맹인은 알지 못한다고 답했습니다.

2. 💡 강연/설교의 주요 교훈

A. 선택의 중요성 (스캇 펙의 '아직 가보지 않은 길' 인용)

  • 일상 속 선택: 우리는 늘 선택하며 살아가며, 선택할 수 있는 능력과 기회를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 죄의 근원: "이 길밖에 없다", "선택은 없었다"고 변명하는 것은 죄와 타락성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주신 것은 먹을 수도, 안 먹을 수도 있는 선택의 여지를 주신 것입니다.
  • 책임감 vs. 굴종: 주도적으로 책임감을 가지고 할 것인지, 아니면 어쩔 수 없이 굴종하며 할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 감사 vs. 허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것인지, 모든 것이 헛되다는 허무주의에 빠질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 믿음의 선택: 불행을 축복의 다른 모습으로 여기는 믿음, 행운을 당연시하지 않는 겸손, 역경을 기회로 보는 긍정적인 세계관을 가져야 합니다.

B. 고난의 목적 (죄의 결과 vs. 하나님의 일을 나타냄)

  • 도덕적 수수께끼: 사람들은 고난 앞에서 '누구의 죄 때문인가?'라며 과거의 도덕성을 묻습니다. (본인의 죄, 부모의 죄)
  • 예수님의 차원 높은 대답: 예수님은 맹인의 고난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고난의 원인은 미래에: 기독교적 역사관은 모든 불행의 원인을 미래에, 즉 하나님의 큰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이 사건이 오늘 있다고 봅니다. (예: 죄인이 형무소 가는 것과 학생들이 미래를 위해 고생하는 것의 의미 차이)
  • 가장 불행한 자 → 가장 행복한 자: 맹인은 가장 불행한 사람이었으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가장 큰 은총의 역사를 경험한 가장 복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C. 그리스도와의 만남과 순종

  • 절대적 관계: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며, 이 만남은 고난과 절박성 속에서 일대일, 면대면의 절대적 관계를 통해 형성됩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만난 예시)
  • 이해하기 어려운 명령에 대한 순종:
    1. 진흙 바르기: 예수님은 "눈을 떠라" 대신 땅에 침 뱉은 진흙을 눈에 바르셨습니다. 이는 맹인에게 더 큰 고통과 불편을 주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었습니다.
    2. 맹인의 믿음: 맹인은 "왜 그러냐", "뭐 하는 짓이냐"고 묻거나 화내지 않고 그 고통스러운 행위를 참아냈습니다.
    3. 실로암까지의 여정: 예수님은 멀리 떨어진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령하셨고, 맹인은 2시간이나 걸리는 길을 의심을 억누르고 묵묵히 순종했습니다.
  • 순종의 완성: 이 맹인은 의심이 가고 흔들렸을지라도 실로암에 가서 씻는 순종 하나만을 완성하여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 단 하나의 간증: 맹인은 복잡한 신학적 시비나 확실함(확신)보다 **"내가 아는 것 한 가지는, 예수님이 내 눈을 뜨게 하셨다"**는 단순하고 강력한 순종의 간증을 했습니다. (키에르케고르의 기도문 인용: 한 가지만 따를 수 있는 성실, 한 가지만 바라보는 인내)

📢 결론적인 메시지

우리는 이해되지 않는 많은 문제와 선택의 자유를 잃은 듯한 상황에 시달리지만, 그리스도인은 모든 고난의 원인이 미래에 있는 하나님의 큰 경륜을 이루기 위함임을 믿고, 확실함보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겸허히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귀한 일을 완성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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