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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사역에 관한 신학적 소고 P3 마8:1~13
예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영생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길면 1백년인 현세 밖에 못 보죠.
그래서 예수님은, 현세의 질병을 고치시는 것도 중요시 여기셨지만
언제나 영생의 관점에서, 사람들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그들이 고통 받는 질병에서 뿐만 '구원'이 아니라
그 치유사역을 통해서, 그들을 영원히 '구원'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1. 나병환자를 고치신 기적
마5~7장에서 산상수훈이 끝났습니다.
산상수훈이 끝나자마자
마태는, 마8:1절부터,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치유하신 이야기를 바로 연결시킵니다.
마태복음이 어떤 역사적 순서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마태는 어떤 의도를 갖고서, 산상수훈에 이어서 즉시, 이 기적을 연결시키고 있다고 보는데요.
산상수훈의 주제는,
천국을 소유한 자로서, <천국시민의 삶>을 구체적으로 그려주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 즉 천국 시민은
'장차 미래 천국에서, 또한 현재 지상천국에서 이렇게 산다'를 설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갖고 오신 천국 앞에 서있는,
인간의 현재 실제모습은 어떤 모습이냐?
-모든 사람은.. 다 나병환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야 되는데
다 나병에 걸려서, 그 나라와, 그 천국과 격리되어 있는 상태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져오신 천국에 들어오려면, 산상수훈 적인 삶을 살아가려면
먼저 ‘나병 걸린 죄인이 치료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마5~7장에 산상수훈을 배치하고
이어지는 8장에 즉시로 연결해서 '나병환자를 치유하신 기적'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나병환자를.. 정상적인 사람으로 복귀시키셨습니다.
여러분, 나병환자는
나병이라고 판정되자마자 *한센병
짐 싸 가지고 정든 가족을 다 등 뒤로 하고
삶과 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 되어서
나병환자들만 모여 있는 곳으로 보내졌습니다.
예루살렘은 도시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그 골짜기에 다 버렸습니다.
그야말로 쓰레기더미 속에서 먹고 살던 인생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치신 다음에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정한 예물을 드림으로써, 네가 나병으로부터 나았다는 것을 확증 받아라!’ 8:4
이렇게 제사장에게 보이고 모세가 정한 예물을 드림을 통하여
그 나병환자를 다시 그 삶의 현장으로 복귀시켰습니다.
그 의미는,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셔서
삶이 죽은 자에게, 쓰레기 더미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에게,
예수님은 고치시고, 새로운 삶을 주시고, 천국 공동체로 회복시킨다는 겁니다.
이것이 나병환자의 치료, 이것도 중요합니다만
그 배경에 감추어진 '영적인 의도'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에 대한 신학적 해석입니다.
그렇게 나병이 기적적으로 치료된 사람도,
만약 영적인 치료가 없었다면, 건강하게 살다가 나중에 지옥에 갈 수 있습니다.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마5:29~30, 18:19
(건강하게 살다가도 지옥 갈 수 있다는 뜻)
사람은, 그 누구라도.. 영적으로 나병에 걸려서 살아갑니다.
죽을 때까지 필사적으로 돈을 좇는 사람, 명예와 권세를 좇기 위해 남을 해치고 밟고 올라가는 사람 등
심지어 자기 출세를 위해, 사랑하는 가족까지 내팽개치고 희생시키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겉으로는 양복/양장 입고 다니고, 근사한 자동차를 몰고 다니니까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보여도, 속으로는 곪아터진 나병환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 상태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예수님이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없고,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나병환자 이다', 또는 '내가 과거에는 나병환자이었다'를 깨닫는 것입니다.
마치 20년 동안 한 번도 열지 않았던 하수구, 복개천 뚜껑을 열었을 때
그 안에 보이는 시커먼 것들이.. 바로 믿기 이전 자기 영혼의 실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그 영적으로 시커멓고 냄새나고 말할 수 없이 부패한
우리의 나병을, 나의 문둥병을.. 예수 피로 씻으시고 깨끗게 하셔서
다시 하나님의 나라로 돌려보낸다, 정상적으로 복귀시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후에도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지요. 요5:14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행하신 치유시역, 신유사역은
단순히 육신의 질병의 치료만 목적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행해지는 치유사역도
단순한 육신적 질병의 치료, 그 너머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죠.
천국과 영생, 그 영혼의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고 그 치료에 관심 가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 날 때부터 소경을 고치신 예수님
▲요9:1,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소경은 주님을 볼 수 없었고, 주님이 먼저 소경을 보셨습니다.
성경에서 ‘소경’은 죄인들을 총칭하는 단어로, 자주 쓰였습니다.
복음서에는, 주님의 많은 치유사건 중에
유독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사건’이 가장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인의 눈을 뜨게 하셔서 구세주를 보게 하신 사건’입니다.
복음서의 예수님의 치유사건을 종합해 보면,
귀먹은 벙어리를 고친 사건.. 1회
중풍병자 고친 사건.. 1회
열병 앓던 자를 고친 사건.. 1회
문둥병자를 고친 사건.. 2회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낸 사건.. 3회
반면에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사건.. 5회
이와 같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사건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소경의 상태를
영적으로 어두움 가운데 있는 죄인들의 상태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심으로써,
주님은 그런 어둠의 상태에 있는 죄인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을 광명한 빛으로 인도해 내시는 분, 즉 구원으로 이끄시는 분이심을
상징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요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그 소경을 통해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시는 일’은
지금까지 위해서 설명한 내용입니다.
우리 죄인들은 혼돈, 공허, 어둠 속에서
갈 길을 모르고 헤매며 살고 있었고,
성전 문 앞에서 구걸을 할 수밖에 없는 거지 소경 같은 존재였는데,
그것도 날 때부터..
구세주께서 주도적으로 찾아가시고,
은혜로 그의 눈을 뜨게 하셔서
영생과 구세주를 알아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태어날 때부터 ‘소경’(죄인)으로 태어나서,
‘거지’같은 인생을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중도실명자’가 아닌, ‘날 때부터 소경’을 택하여 고쳐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 성경의 기록목적 모두가
‘죄인의 구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의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요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위 말씀은, <거듭남>과 <보는 것>을 동격으로 설명합니다.
거듭남(다시 태어남)은
‘보는 눈’이 바뀌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눈’에서 ‘하나님 나라의 시각’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육신적 소경보다 더 끔찍한 것은 ‘영적인 소경’입니다.
육신적 소경도 참 삶이 힘들고 고달프지만, 그는 예수 믿고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일례로, 패니 크로스비 여사는 육신적 소경이지만,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업적을 하나님 나라에 남겼습니다. *찬송가 작사자
그런데 육신적으로는 눈이 건강하지만, 영적인 눈이 감긴 사람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저주 받는 인생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23:33
▲성경은 크게 ‘문자적 해석’과 ‘영적인 해석’이 있습니다.
신학적 해석은, 주로 ‘영적인 해석’입니다.
성경 해석의 일차적 원칙은 ‘문자적 해석’이 맞습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원칙을, 우리는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문자적 해석’과 아울러 ‘영적, 신학적 해석’도 필요합니다.
일례로 요한계시록이 그렇습니다. 문자적 해석만으론 절대 해석이 안 됩니다.
신유사역자들이, 성경에 나타난 문자적 해석 그대로
신유사역을 하는 것은 좋으나,
그 면만 있지 않다는 뜻이지요.
그 신유사역 이면에 감춰진,
영적/상징적/신학적인 뜻과 목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저개발국에 가면 신유사역의 문자적 의미가 활발합니다.
또한 많은 신유사역들이, 실제로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병원이 없고, 의사와 약국이 없는 오지에서는
어쩔 수 없이 신유사역이 문자적으로 많이 일어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대로 선진국에 가면, 신유사역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째서인지 사람들은 병이 나면, 병원과 의사에 의존해서 고치려고 합니다.
신유사역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우리는 두 측면을 무시하지 말고, 두 면을 다 고려하는 가운데
두 측면에 다 열린 가운데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를 따라야 하겠습니다.
◑3. 죽은 자를 살리신 기적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나사로나, 그 가족인 마리아, 마르다가 불쌍해서
한 번 선처, 호의를 베풀어 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것은, 죽은 자가 살아나고 영생한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여주신 것이, 그 원래 목적이었습니다.
또한 그 부활은
<저 천국>에서의 영원한 부활 뿐만 아니라
지금 <이 현실>에서의 부활, 즉 영생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참된 부활신앙인 것입니다.
저는 죽음을 앞둔 분들, 불치병을 앓고 있는 분들이
정말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나 자신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부활을 목격하고도 무기력했던 제자들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진정한 부활신앙이 없는 것입니다!
부활의 증거가, 오늘날 우리 얼굴에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 신자들의 얼굴빛에서, 죽음을 초월한 부활신앙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에 나타난 부활 사건을 접하는 우리의 사명이라 봅니다.
'나의 부활 신앙'이 정말 내 얼굴에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죠!
내가 불치병이나, 중환자실에 누워있더라도 말입니다.
▲마르다의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만에 장례식장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때 마르다가 예수님께 하소연하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요11:21
그러자 주님은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합니다.
마르다는 이 말씀을 한참 후에 있을 부활의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우리가 믿는 부활도, 다들 마르다처럼,
<죽어서 영원히 사는 부활>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을 미래로 넘겨버리는
이런 마르다의 이런 신앙을 책망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11:25~26
부활은 "현재"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 표징으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부활이 ‘죽어서, 죽은 후에’ 일어나는 것이라면,
예수님이 굳이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필요가 없습니다.
가만 놔둬도, 부활 될 게 아닙니까! 죽은 사람들은 다 부활하니까요!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죽은 자를 살리는 소생의 기적’이 아닙니다.
‘부활의 기적’입니다.
그리고 그 ‘부활’은 현재부터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죽은 후부터가 아니라요!
이 말씀은 부활을 먼 미래의 사건으로 미루지 말고
이미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현재의 부활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죽음 앞에서 외치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
이것이 현재의 부활을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 죽음이 절망이나 두려움이 아닙니다.
부활 생명으로 인하여 그는 기쁘고 생명력 있고 담대한 삶을 삽니다.
죽음의 우울이나 어두움이 그를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장차 주어질 부활이 너무나 명백하기에 그 부활의 빛이 현재를 가득 비추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예수의 부활을 과학에서 찾기보다는, 우리들의 얼굴에서 찾기를 원합니다.
동일하게 세상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고 죽음의 그림자 앞에 두려워하는 우리를 보며
죽음이 주는 압도적인 위력 앞에 현대인들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신앙인들도 여전히 마르다처럼, 제자들처럼 어찌할 바를 몰라 합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 신자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현재적 부활의 모습>을, 우리 삶 가운데 보여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성경에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기적’의
영적/신학적/상징적 의미입니다.
▲마치는 말
신앙은 ‘현재’가 정말 중요합니다.
누가 장차 ‘천국’에 들어갈 것입니까?
‘현재’ 천국적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누가 천국에서 ‘영원한 치유’를 맛보며, 눈물 없이, 아픔과 질병 없이 살 것입니까?
현재 그렇게 예수님의 치유를 누리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치유사역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인데,
(과학적인 말은 아니지만, 영적인 말입니다.)
보통의 경우, 깨끗이 회개하지 않고
또한 마귀의 공격에 일부 노출된 사람들은
몸에 작은 질병이 있거나, 몸이 더럽고, 또한 냄새가 납니다.
반대로 말하면, 늘 회개하고 마귀의 공격에서 자유한 사람은
예전도 앓던, 더럽던 몸이.. 차츰 차츰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신적으로 주시는 질병이 있습니다. 그건 제외하고요.
잔병치레.. 작은 질병들이
예수님을 진실로 믿으면서, 하나 둘씩 차츰 치료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위장병, 무좀, 구취, 피부병, 관절염 등 (노환 제외)
오늘 우리가 영혼의 문둥병에서 치유받고
오늘 우리가 영적 소경에서 눈을 뜨고
오늘 우리가 죽었다가 살아나야..
장차 천국에 들어갈 것입니다.
오늘 그런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예수를 믿는다고 착각할지라도 (지식적 믿음입니다.)
장차 천국에서 영원한 치유를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출처 : https://rfcdrfcd.tistory.com/15976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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