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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설교[1,404편]〓/사순절 설교

시편 103:8-14 /누가복음 7:36-42

by 【고동엽】 2022. 8. 18.

시편 103:8-14
누가복음 7:36-42  


당신은 나를 보십니다.
독일의 시인이며 목사인 외르크 찡크(Jorg Zink)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의 시 한편을 제가 번역하여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제목은 ‘당신은 나를 보십니다’입니다.

<당신은 나를 보십니다.>
        ? J. 찡크 (Jorg Zink) ?
하나님 아버지!
나는 당신으로부터 나왔습니다.
나는 당신으로 충만합니다.
당신은 내가 사는 집입니다.
내가 다가가는 목적입니다.

이 세상에서 진리가 진리인 것은 당신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는 생명이 생명인 것은 당신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것은 영원한 아름다움인 당신을 통해서입니다.

모든 것이 어둡고, 내가 내 운명을 이해하지 못할 때에도

당신은 어둠 속에서 나를 바라보십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 분으로 나를 바라보십니다.

내가 당신의 빛을 반사할 때

내 얼굴은 밝아집니다.

나의 전 존재는 당신 안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당신으로부터 나는 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어두움에서 있을 때, 이 세상에서는 나 혼자만 있다고 생각될 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합니까? 누구를 생각합니까?

여행자가 여행을 하지만, 돌아갈 집이 없다면 그는 더 이상 행복한 여행자가 아닙니다. 아이가 놀이터에서 즐겁게 놀지만 그에게 돌아갈 어머니와 아버지의 품이 없다면 그 아이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으면 든든합니다. 우리는 안길 품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혼자서 성공의 길을 걸어갈 때보다는 도리어 실패와 죄와 절망 중에 있을 때, 안길 품이 필요합니다. 비록 못난 모습이지만 나를 용납해 주실 분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항상 품어주시는 분, 한 분 하나님이 계십니다. 찡크 시인의 고백처럼, 모든 것이 어둡고 내가 내 운명을 이해하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은 어둠 속에서 나를 바라보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는 분으로 나를 바라보십니다. 나의 전 존재는 하나님 안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기에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더 알기 원하고, 오직 주님의 품에 기대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주 내 소망은 주 더 알기 원합니다>

주 내 소망은 주 더 알기 원합니다.

이전보다 더 가까이 가기원합니다.

오 주의 품에 기대기만 원합니다.

주의 사랑으로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오, 주님 품에 기대를 원합니다.’ 주님을 향한 여러분 모두의 간절한 기도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시몬과 부정한 여인

예수님께서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진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의 일입니다. 스캔들이 될 수 있는 매우 난처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시대의 식탁 관습에 따르면 식탁 앞에서 비스듬히 발을 뻗고 반쯤 눕는 자세를 취합니다. 이렇게 식사를 하고 계시는데 한 여인이 예수님의 발 뒤로 다가왔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발치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흐느낍니다. 이 여인이 너무 심하게 울면서 눈물을 흘리자 예수님의 발이 금방 젖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난처한 일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더 보기 힘든 광경이 뒤따르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당황하여 자기의 머리를 풀고 그 머리카락으로 예수의 발에 있는 눈물을 닦아내고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곧 이어서 이 여인은 특별한 존경의 표시로서 자신의 값비싼 옥합을 깨뜨려서 머리에 붓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 또한 문젯거리였습니다. 이 여인은 방정치 못한 품행 때문에 온 시내에서 죄인으로 낙인 찍힌 여인이었습니다. 성경에는 그냥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전통적인 해석은 이 여인의 직업을 창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자가 공개석상에서 머리카락을 푸는 행동은 예나 지금이나 방정치 못하고 경멸 받을 일인 것입니다. 더구나 부정한 여인이라고 알려진 여인이 예수님과 신체 접촉을 함으로써 그녀는 예수님까지 ‘부정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그 일을 전혀 멈추려 하지 않았습니다(45절). 누군가가 제지하지 않으면 한없이 그 일을 계속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만찬은 더 이상 진전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왜냐 하면 이 여인의 이 행위는 그 식사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마찬가지로 부정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과 그 잔치의 참석자들을 모두 난처하게 만드는 사건이었습니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 상상도 못했던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성경이 아니고는 이런 일을 읽은 적도 없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바리새인 시몬

더욱이 이 사건은 집 주인이며 잔치의 주인인 바리새인 시몬이 보기에 아주 불쾌하고 민망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이 배푼 식사를 모두 망쳐놓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엄청난 사건이 당신 발 위에서 진행되는데도 그 오랜 시간 동안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가만히 놓아두었습니다. 시몬의 눈에는 예수님이 어떻게 보면 방조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도리어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반응은 시몬의 눈에는 예수님이 확실히 예언자가 아님을 증명해 주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시몬의 눈에는 이 여인은 물론이고 예수님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시몬은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가 아니다.’



주님은 애통하는 죄인을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이 본문에서 시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바리새인 시몬은 여인을 향하여 죄인, 자신을 향하여 의인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대수롭지 않은 손님으로 여겼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시몬은 예수님께 어떤 가치를 드려야 할 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시몬은 예수님을 손님으로 청하고서도 예의를 갖추지 않았습니다. 처음 집에 들어갈 때 먼지 묻은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습니다. 손님이 오면 머리에 바르는 올리브유 몇방울을 주는데, 그까짓 싸구려 올리브유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고 그 발에 값비싼 향유를 부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옥합의 가격을 알려줍니다. 당시의 화폐로 300데나리온 이상의 가치였습니다. 노동자의 300일 임금입니다. 오늘날의 화폐 가치로 약 2,000~3,000만원 정도입니다. 노동자의 1년 소득을 말합니다. 요즘에도 3,000만원짜리 향수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제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3,000만원짜리 향수를 쓰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데 3,000만원짜리 향수를 예수님의 먼지 묻고 눈물로 닦은 발에 그냥 다 쏟아 부어버렸습니다. 여러분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왜 이 여인은 그토록 울며 그토록 비싼 향수를 낭비했습니까? 이것은 엄청난 사치와 낭비로 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물건의 가격을 말할 때 이 가격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가격은 그 물건의 가치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수를 붙는 것은 3,000만원 이상의 가치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가지 가장 가치있는 일을 위해서는 다른 가치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면 다른 어떤 것의 희생도 아깝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궁극적인 가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향하여 최고의 가치를 돌린다고 하면서 왜 이 사건의 여인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gs 5만원짜리 향수를 바치면 고개를 끄덕이고, 3,000만원 짜리 향수를 바치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사람들의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 가운데서 최고의 가치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말장난에 불과한 것 아닙니까? 최고의 가치는 자기가 생각하는 또 다른 기준, 자기가 생각한 소비 수준의 기준을 더 높은 가치 척도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최고의 가치는 공기로 가득 부풀은 풍선과 같이 바늘로 찌르면 풍선이 터지듯이 공허한 말장난인 것입니다. 신앙 생활은 취미 생활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자기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교양강좌를 듣기를 원합니다. 궁극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자극하고 요구하는 말을 들으면 부담스럽다고 합니다. 도무지 궁극적인 가치에 대해서 진지하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에만 진지합니다.

옥합을 깨는 신앙은 가장 중요한 것을 희생해서 주님께 드리는 신앙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사치와 낭비처럼 보였지만 가장 가치 있는 일을 위해서는 다른 모든 가치를 희생할 수 있는 것이 가치관입니다. 예수님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면 다른 어떤 것의 희생도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참된 가치관을 행동으로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은 당시에 다른 가치를 가진 많은 사람들을 흥분시켰던 사건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여러 제자들이 반감을 가졌고, 그 중에서 유다는 가장 많은 반감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여인의 가치있는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직 이 여인의 죄에만 초점을 맞추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이 왜 이런 행위를 했는지 그 원인을 말씀해 주십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여인은 죄 용서의 기쁨과 사랑을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

오늘날에도 사람과 사건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해결책’을 위해 고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모순된 현실을 이용해서 도리어 이득을 보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모순된 현실을 고치려고 헌신하는 사명자는 많지 않습니다. 문제를 해결책과 함께 생각하는 사람은 현실을 보는 눈이 다릅니다. 사람들은 죄문제를 보면 죄의 지적과 정죄에 치우칩니다.

시몬은 이 여인의 ‘죄’는 보았으나 ‘용서’를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를 돌아 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7:44) 하고 질문하셨습니다. 이 질문은 광학적으로 보고 있느냐는 질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너는 그 여자를 올바로 보고 있느냐? 이 여자를 이해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녀의 태도를 잘 이해해라. 그녀에 대해서 올바른 태도를 가져라’ 하고 요청합니다.

예수님은 죄 문제의 해결책을 회개와 용서에서 보았습니다.



애통은 우리 인간 현존의 기본형태

예수님은 애통하는 사람을 그냥 보지 않으십니다.

야고보는 말합니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약4:9).

애통은 우리 인간 현존의 기본형태입니다.

애통은 이렇게 인간 현존의 기본형태이므로 우리는 자주 우리가 왜 슬퍼하고 있는지 이유를 댈 수 없을 정도로 슬픈 존재입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나의 한계에 대해서, 고통스런 경험에 대해서, 나의 거절에 대해서, 나의 부족에 대해서 왜 슬퍼하고 있습니까?

나는 죄에 대한 애통이 있습니다. 삶의 짐이 무거운 고통이 있습니다. 병으로 인한 눈물이 있습니다. 실패와 상실이 가져다 주는 애통이 있습니다. 이별로 인한 상처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현재 모습에 대해서 슬퍼하는 애통이 있고, 이 세상의 비참함을 슬퍼하는 애통이 있고, 이 세상 전체 또는 많은 개인들에게 닥친 불행에 대한 애통이 있고, 변화를 갈망하는 애통이 있습니다. 그리고 네 어깨에 주어진, 하나님께서 나에게 메어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고통과 애통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비통한 형태의 애통은 사람들이 더 이상 슬퍼하지 못하는 애통입니다. 슬퍼하지 못하는 애통에 대해서 애통합니다. 아직 슬픔의 눈물을 흘릴 정도로 정말로 슬퍼할 수 있는 사람은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복음서에는 원래 예수님께서 웃으셨다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물에 대해서는 여러 번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도무지 주님의 뜻과 하나님의 계획을 알지 못하는 예루살렘에 대해서 우셨습니다(눅19:41). 예수님은 당신의 친구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요11:35).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슬퍼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마26:38). 마지막 헌신을 결단하고 역시 이 세상의 모든 슬픔이 그의 어깨 위에 떨어지는 이 두려움의 시간에 사람들이 슬퍼할 수 있는 모든 슬픔이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주님은 슬퍼하는 사람들과, 우는 사람들과, 인간의 눈물을 받아주셨습니다.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신 여자 죄인을(눅7:36-50) 예수님은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용납했고, 도와 주었고, 그녀의 한계를 인정하셨고, 그녀의 죄를 인정하시며 그녀에게 죄로부터 자유함을 선포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눅7:50).

예수님을 부인하고, 자기 자신과 자신의 존재를 부인하고 눈물 흘리는 베드로에게(마26:75) 나중에 부활하신 후에 다가가셔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주셨습니다. 그의 사랑의 고백을 받아내셨습니다. “예, 주님.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요21:15-18). 예수님을 부인하고 통곡하던 베드로에게 다가오셔서 새 삶을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울지 말라!” 나인성에서 아들을 잃고 눈물 흘리는 의지할 데 없는 과부 어머니에게 예수님은 ‘울지 말라’ 위로하셨습니다(눅7:13). 딸을 잃고 눈물 흘리는 회당장 야이로에게 ‘울지 말라’고 위로하셨습니다(막5:35-52).

어떻게 예수님께서 슬퍼하는 사람들과 대면하셨는지를 알면서 우리 자신의 슬픔을 바라봅시다. 우리 자신에 대한 슬픔, 항상 반복하여 고통스럽게 경험하는 한계에 대하여, 실망과 채워지지 않은 기대들 속에서 우리 자신의 슬픔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 슬픔을 어떻게 보실까 하는 눈으로 내 슬픔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설명되지 않는 슬픔일지라도 우리는 이 슬픔에 참여하는 예수님과 함께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고통을 가지고 주님께 나갑니다. 주님 자신이 슬픔을 아셨고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주님 앞에 있는 모든 슬픔을 희망으로 변화시키셨고, 죽음의 슬픔을 부활의 기쁨으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 속에 내적인 부활을 허락하셨습니다. 다시 살리는 위로자인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슬퍼하는 자는 위로자의 선물, 성령님의 선물을 받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들은 두려움 없이 우리의 슬픔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 슬픔을 통하여 삶의 심층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슬픔은 삶의 심층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슬퍼할 줄 모르는 자는 삶의 깊이를 존재의 깊이를 경험할 줄 모릅니다. 우리가 슬퍼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심령 깊은 곳에서부터 말할 수 있습니다. “주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인생의 깊이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애통은 결코 비참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자만에 빠져있는것 보다는 진실을 바로 알고 애통하는 것은 축복인 것입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세상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위로를 찾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슬픔은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고, 슬퍼하지 못하는 자를 위해서 슬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의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어떤 긍휼입니까?

1. 하나님의 긍휼은 연약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입니다”(사 42:3).

예수님은 상한 갈대와 같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셔서 친히 상한 갈대와 같이 되셨습니다. 꺼져가는 등불과 같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셔서 꺼져가는 등불과 같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상한 갈대와 같이 상한 사람, 꺼져가는 등불과 같이 연약하여 애통하는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2. 하나님의 긍휼은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입니다.

우리 인간은 가난을 물리치기가 어렵습니다. 제아무리 노력을 해도 가난에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사건이 생깁니다. 건강에 문제가 생깁니다. 사회의 구조걱인 문제가 있습니다. 전쟁, 불황, 공황 등 역사의 재앙이 일어납니다. 자연재해가 발생합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지만 가난 속에서 애통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3. 하나님의 긍휼은 회개하는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윗은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시편 51:1).

하나님은 범죄하고 눈물 흘리며 애통하는 다윗의 통회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통회하는 죄인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애통해 하는 세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4. 하나님 긍휼은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는 은혜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는 그분이 우리의 고통을 없애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무엇보다도 우리와 함께 고통을 나누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거룩한 결속의지로부터 새로운 삶이 나온다.”

예수님은 고통받는 자들의 고통을 긍휼히 여기시기 위해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희생하는 고통을 경험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고통받는 자들과 함께 고통을 받으십니다.



긍휼의 복

그러므로 애통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받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사모하는 까닭은 하나님의 긍휼이 임할 때 풍성한 축복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기를 원해야 하는 것은 긍휼을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예수님을 통해서 애통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얻는 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능력으로, 스스로의 자격으로는 도저히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습니다. 애통의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지만 예수님의 공로로 자격 없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습니다. 탕자에게는 돌아갈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눈물로 회개하며 빌 수 있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애통하는 우리를 구원합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인데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시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애통하는 우리를 용서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를 죄를 따라 그대로 갚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느니라” (시 103:10-13)

애통과 눈물과 기도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여러분, 병 중에 있습니까? 사업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가정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과거의 실수가 가시가 되어 여러분을 찌르고 있습니까? 사는 것 자체가 힘들고, 우울하고 슬픔이 있습니까? 삶의 짐이 너무 무거워 견디기 어렵습니까? 주님께서 주신 사명의 짐을 지고 휘청거립니까? 세상의 정의를 위해서 애통해 합니까?

그 짐을 주님께 가지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 고통을 그대로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오십시오. 그 눈물을 그대로 가지고 주님께 나오시기 바랍니다. 울어도 주님 앞에서 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를 입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눈물을 기쁨의 웃음으로 바꾸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출처/홍문수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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