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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삶에 대해 P1 계2:1~5 P2
먼저 여러분께 세 가지 질문을 드림으로써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첫번째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왜 교회에 다니십니까?
여러분이 교회에 다니시는 궁극적인 목적이, 지금 현재 무엇입니까?
오래전에 남가주에 있는 한 대형교회가 특별새벽기도회를 개최하면서
대형 플래카드를 내세웠는데, 그 플래카드에 쓰여진 특별새벽기도회의
슬로건 내용이 이러했습니다.
부모의 새벽기도, 자녀의 평생축복!
자녀의 새벽기도, 부모의 노후대책!
아내의 새벽기도, 남편의 영적성공!
운율까지도 딱딱 맞췄습니다.
여러분이 교회 다니시는 궁극적인 목적이 이런데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자녀들의 평생 축복과
부모의 노후대책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까?
교회에 다니는 목적이 만약 이런 것이라면,
무당의 굿당을 찾는 것과, 불교 사찰을 찾는 것과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굳이 우리가 교회에 다녀야 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무당 굿당도 가고, 불교 사찰을 가도
아무런 차이가 없지 않겠습니까?
▲두 번째 질문입니다. 여러분에게 믿음은 무엇입니까?
주일이 되면 교회에 나가고, 예배시간에 헌금드리고
돌아가면서 봉사에 참여하고, 그것이 여러분의 믿음입니까?
그것도 참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믿음의 참됨 여부는
종교행위에 의해서 판가름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믿는 믿음의 대상에 의해서 판가름납니다.
여러분 무당을 찾아가서 굿을 하는 사람을 보십시오.
한국에서 용한 무당을 찾아가서 굿 한번 하면 수천만 원이 든다고 그래요.
교회에 다니면서 수천만 원씩 헌금하는 사람은 드물지 않습니까?
무당이 굿하는 동안에 그분들이 무당 뒤에 서서 손을 비비면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하얀 한복을 입고, 밥도 먹지 않고, 밤을 새워서 손을 비비면서 기도 합니다.
그 종교행위 자체는 우리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열성적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들을 가리켜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고
미신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의 믿음의 대상이, 고작 죽은 돼지머리나 좋아하는 잡신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음의 참됨 여부는, 우리 믿음의 대상에 의해 판결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내 믿음의 대상을 잘못 알거나, 내 믿음의 대상을 잘못 선택한다면
내 믿음의 행위가 아무리 열성적이라도
그 믿음이 참된 믿음, 성경적인 믿음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세번째 마지막 질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길을 좇는다는 것은
그 이전과는 확연하게 구별되는 전혀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생각과 마음과 뜻이 달라지고
결과적으로 그 삶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은 주님을 영접하기 이전에 비해서
얼마나 삶이 새로워졌습니까?
만약 새로워지고 있지 못하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또는 내가 주님을 영접하고 기쁨에 겨워서 새로운 삶을 살고,
새로운 삶의 감격을 누구 못지않게 깊이 누렸는데,
어느샌가 내 삶이 옛날 삶으로 회귀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겠는가요?
오늘 우리가 이 세 가지 질문을 토대로 본문을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계2: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여기에서 '일곱 금촛대'는 지금 터키 대륙 중부지역을 일컫는
2천 년 전 이름으로 소위 아시아에 있던 7 교회를 '일곱 금촛대'라고 합니다.
그리고 7 별은, 그 한 교회 한 교회를 지키는 사자,
계시록 1:20절에 의하면 그 각 교회를 지키는 우리말로 굳이 번역하자면
'천사, 사자'가 되겠죠. 그 사자messenger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아시아에 있는 일곱 별을 당신의 장중에 붙잡고 계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세워진 교회를, 그냥 내팽개쳐 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 사이를 언제든지 거니시면서 보고 계시는 분이시라는 거에요.
그런데 지금 본문내용은, 그 일곱 교회 가운데
지금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의 보내시는 본문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주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촛대'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당신의 교회는 빛의 통로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빛의 통로인 교회가 주님보시기에 얼마나 중요하고 아름다우면
주님께서 그냥 촛대가 아니라 '금촛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의 힘은 예배당의 크기나, 헌금의 액수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교회의 힘은 얼마나 진리의 빛을 발하는가?
그것은 세상과 구별된 거룩에서만 나옵니다.
그때 교회는 금촛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교회를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몸담고 있는 내 교회가 금촛대인가? 늘 질문해야 합니다.
▲지금 이 내용은, 아시아 일곱 교회가운데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했습니다.
당시 에베소는 로마 제국 수도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과 더불어서
로마 제국의 4대 도시였습니다.
동양과 서양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상업, 문화, 경제 중심지입니다.
게다가 고대 사회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데미 신전이 있었습니다.
동서각지에서 매일 그 아데미 신전을 참배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자 그 참배객들에게 기념품을 만들어서 판매하는 사람들의 가게가 있죠.
그 사람들에게 밥을 파는 식당이 있지요.
그 사람들 잠 재워주는 숙박업체가 있지요.
그러니까 에베소 사람들 거의 시민들 전부 다가
직/ 간접적으로 에베소의 아데미 신전으로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데미 신전은 시민들의 풍요로움에 큰 역할을 차지했습니다.
게다가 그 아데미 신전 속에 있는 여자 사제 천오백명은
모두 합법적인 종교 매춘부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에베소는 돈과 유흥과 쾌락이 넘쳐나는 도시인데
더욱이 이 도시 한 가운데는 황제를 신으로 모시는 황제의 신전이 있습니다.
로마 황제는 살아있는 신이었습니다. 인간의 경배를 받습니다.
그러니까 아데미 신전과 로마 황제의 신전이 인간을 압도하고
돈과 쾌락과 유흥이 난무하는 에베소에서
황제와 우상의 길이 아니라, 예수의 길을 좇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얼마나 숭고한 사람들입니까!
▲그 숭고한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계2:2~3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여기 '안다'는 동사가 두 번 나왔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한국어 어순상,
'안다'는 말이 문장의 중간에, 그리고 맨 뒤에 나옵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전 상으로는 '안다'는 동사가 제일 먼저 나옵니다.
'내가 안다~'로 시작하는 겁니다.
누가? 주님께서 아신다는 거예요.
이 '안다'는 동사가 헬라말로 '에이도'인데, to see
즉 '내가 본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오늘도 내가 무엇을 하든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신다는 것만 여러분들이 잊지 않으시면
여러분은 평생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걸 잊어버립니다. 그분은 시공을 초월하십니다.
오늘도 우리 일거수, 일투족을 다 보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 그 교인들을 다 보시고, 다 알고 계십니다.
무엇을 아시는가요? 첫째로 그들의 행위를 아십니다.
행위는 헬라어로 '에르곤'입니다.
이 말은, 어떤 한 개별적인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삶 전체를 말합니다.
에베소 교회 교인 너희들이
황제의 길과 우상의 길을 좇지 않고
그 어려움속에서도 생명과 진리의 길을 좇은 너희들의 삶 전체,
그 전반을 내가 다 보고,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로 '내가 네 수고를 안다'에서
이 수고(헬. 코포스)는 반드시 손과 발이 동원된 노동을 통한 수고를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갈릴리 해변을 거니시다가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를 보시고
'얘들아 나를 따라와라. 내가 너희들을 사람을 남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라고 마4:1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는 것은
내가 너희들을 이제부터 전도자 삼겠다, 내 제자 삼겠다,
사도의 삶을 살게 해주겠다..는 말인데요.
그런데 그들을 주님께서 '사람을 낚는 어부'라고 표현하셨는데
그것은 명백한 오역입니다.
헬라어 원문상 주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하면, 누가 무엇을 낚든지
무언가를 낚는 사람은, 그 낚는 이유가 자기의 유익을 위한 거에요.
여러분 전도자, 목사, 예수의 제자가
사람을 낚는 사람이 되면
그건 자기 이익을 위해서 낚는거예요.
교인이 많아지면 내가 유익을 보는 겁니다.
내가 전도 많이 하면, 내가 뭔가 덕을 보는 거예요.
그게 사람을 낚는 여부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원문에는 '낚는' 이라는 형용사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알레에이스 안드로폰'이라고 얘기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들을 사람의 어부로 만들거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아니라
그냥 <사람의 어부>입니다. fishers of men
*한글 성경이 이해를 돕기 위해 풀어서 썼는데, 이게 오히려 오해를 가져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는, 자기 유익을 위해서 사람을 낚지만
'사람의 어부'가 되는 건, 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어부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 철학은 머리로 할 수 있습니다.
설교는 입으로 공기를 진동시켜서 할 수 있습니다.
어부는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 전신의 세포를 움직이지 않으면
어부는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없습니다.
안드레와 베드로에게 '내가 지금 너희들을 전도자로 만드는데
지금부터 너희들은 사람의 어부(사람들을 위한 어부)가 되어야 돼'
'지금부터 너희들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누군가 사람들을 위해서 너희들의 세포를 다 사용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돼!'
그게 전도자고, 그리스도인이에요.
그 수고를 에베소 교인들이 했고
주님께서 그걸 다 보셨다는 겁니다.
말로만 수고하는지, 지시로만 수고하는지,
앞에서만 수고하는지
아니면 누가 보던/ 보지 않던
사람의 어부로 자기의 전신과 손과 발을
사람 섬기는 도구로 쓰는지 주님께서 다 보신다(아신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너의 인내를 보셨다는 것입니다.
'인내'라고 말은,
~뭐 아래 라는 전치사 휘포와
머문다는 뜻의 모내가 합쳐진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인내'는 어디 어디 아래에 머무는 겁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성취되기까지
그 중간에 인간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언약은 '현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든 언약은 '약속어음'입니다.
그 언약은 그 약속어음이 떨어지는 기일이 있습니다.
그 기일은 내가 정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정하시는 거예요.
그 약속어음이 결재되는 기일이 도래할 때까지, 나는 인내해야 합니다.
그게 믿음이에요.
그 인내하는 동안에, 내 몸에 배어 있는 불필요한 근육이 없어지고
진리의 근육이, 생명의 호흡이 깊어지고
믿음의 사람으로 변모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인내 하냐?
우리는 언약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언약이 성취되기까지 그 말씀 밑에 거하면
그 말씀이 나를 끌어가는 거예요. 나를 견인해 가는 겁니다.
그 말씀이 나를 가다듬어 주고, 빚어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인내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 너희들이 언약의 성취가 될 때까지
말씀 아래에서 인내하고
믿음의 깊이를 더해가는 것을 내가 보았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네 번째로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는 것'을 주님께서 보셨다는 거죠.
우리 성경이 '악한 사람을 용납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만,
헬라어 원문에 적혀 있는 '카코스'은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것 모두를 통칭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에베소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거짓이든 불의든, 모함이든, 사기든
악한 것이라고 하면 그 어떤 형태든지 벗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걸 내가 보고 안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이걸 또 주님께서 보고 아셨다는 거예요.
여러분 참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됩니다.
2000년 전에, 가짜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가짜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가짜 사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가짜 복음을 전하면서, 자기 주머니를 불렸습니다.
요즘도 뭐 이런 일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런 가짜 복음, 가짜 설교자, 가짜 목사, 가짜 사도에게
빠지는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가 자기 욕망이고, 둘째가 무지입니다.
가짜 일수록 인간의 욕망(오복)을 부추깁니다.
자기 말만 들으면, 내가 욕망하는 것이
어떻게 되든 다 이루어 질 것처럼.. 욕망을 부추깁니다.
욕망에 사로잡힌 만큼, 말씀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말씀에 대해서 스스로 자립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에 대한 분별력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2천년 전에, 가짜 선지자들이, 이 교회 저 교회를 다니면서
가짜복음을 전파하고, 귀에 듣기 좋은 사탕발림을 이야기하면서
자기 주머니를 불리는데,
에베소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해서
저 사람들이 가짜를 전한다는 것을 분별해 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위대한 교인들입니까!
그런 교인들이 있으면, 이단이나 가짜가 발붙일 곳이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그걸 보고 아신다는 거예요.
▲여섯번째로 '너희들이 참은 것을 내가 안다'
아까 나온 '인내'와 똑같습니다. 휘포모네
이 하나님의 언약 아래서 인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주님께서 내가 너희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안다고 8가지를 말씀하셨는데
그 8가지 가운데 딱 '인내'만 연거푸 두 번 사용했습니다.
'너희들이 인내하는 것을 내가 또 안다'고 다시 강조하신 거죠.
▲일곱 번째로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딘 것을 내가 안다'
'내 이름을 위하여'에서 우리 말 '위하여' 라고 번역된 말은
헬라어로 '디아' 입니다.
'디아'는, '위하여' 라는 뜻도 되지만, '때문에' 입니다.
'예수 이름 때문에' 견뎠다는 거죠.
'견뎠다'는 바스타조, 감수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고 살아가면
예수 이름 때문에 맞지 않아도 될 비바람을 맞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에베소 교인들은 예수 이름 때문에 맞아야 될
온갖 세상의 비바람, 풍상, 시련, 도전을 감수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걸 다 보셨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이름 때문에, 도전과 시련을 맞딱뜨려 그 시련을 감수할 때
아무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가 주지 앉고, 야합하고, 타협하려 할 때가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다 보고 계신다는 겁니다.
네가 내 이름 때문에 네가 어떤 고통을 감수하는지 내가 다 안다는 거예요.
그 나 자신을 알고 계시는 주님을 생각함으로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떤 도전도 뚫고 나갈 수 있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안다'
여기 '게으르지 아니하다' 라고 번역되어 있으니까
태만하지 않게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한 것을 안다..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근데 주님께서 말씀하신 '코피아오'라는 단어는
'낙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네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아니한 것,
소망을 붙잡고 네가 나아간 것.. 내가 그거 안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데, 우리를 낙심케 하고 절망시키는 일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인간을 가장 절망시키는 일이 뭐예요? 결국 죽음 아닙니까?
죽음은 나를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듭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죽음보다 더 절망스러운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 죽음을 깨뜨리신 분이에요.
그 죽음을 깨뜨리고 영원히 사신 분이십니다.
그분을 내 주인으로 모셨는데, 세상에 뭐가 우리를 낙심케 하겠습니까?
'그 믿음을 내가 보고 안다'는 거예요.
여러분, 바로 이것이 예수를 믿고 예수를 좇아살던
에베소 교인들의 새로운 구체적인 삶의 내용이었습니다.
자기만을 위해 살던 손과 발을 내려놓고 섬김의 삶을 살고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 거하면서 인내하고
말씀으로 거짓 선지자의 거짓 됨을 분별해내고
세상의 온갖 도전과 시련을 예수 이름 때문에 기꺼이 감수하고
어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예수를 좇는 새로운 삶!
여러분 이것은 이 편안한 시애틀이나 서울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아닙니다.
그 우상의 도시, 황제의 도시, 예수를 믿으면 핍박하는 자들이 장악한 도시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얼마나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입니까!
◑그런데 4절에서 대반전이 일어납니다.
계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여기에서 '처음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방금 우리가 살폈던 2절, 3절에 언급되어 있는 새로운 삶,
그 놀라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끔 해 주었던 동력인
처음 사랑을 잊었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할 때 '버렸느니라' 이 동사가
'아피에미'인데 to send away 멀리 차버렸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걸 책망하시겠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말로 '책망하다' 라는 동사는 일회적인 동작의 동사입니다.
가령 내 아이가 있는데 학교숙제를 해야 되는데 안 합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게임을 합니다.
애가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를 가는데
'너 숙제했냐?' '안 했습니다' 그러면 아빠가 책망을 해요. 혼을 내요.
그렇다고 아빠가 그 아이 다시 안 봅니까? 숙제 안 하고 학교 갔는데
학교 갔다 오면 여전히 아이를 또 감싸줘요.
그런데 여기서 '책망하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원문에 이 '책망하다'는 단어는 '카타'로 쓰여 있는데
영어로 against, 반대한다, 수용하지 못한다, 절대로 동의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네가 처음 사랑을 버린 너의 삶을
나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로 수용하지 못한다!
일회적인게 아닙니다. 네가 그렇게 살아가는 한
네 삶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수긍할 수 없다.
▲여러분 여기에 있는 이 처음 사랑을,
설명한 여러 책들을 보면
대개 남녀간의 첫 사랑으로 설명한 책들이 참 내용들이 많습니다.
여기에 있는 처음 사랑은,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70억 명 인구가
저마다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경험할 수 있는 연인 간의 첫 사랑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처음 사랑이 원문에 '아가펜 프로텐'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형으로 하면 '아가페, 프로테스'이죠.
아가페는, 우리가 잘 아는 아가페 사랑을 의미합니다.
프로테스는, '처음 먼저'라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시간, 장소, 순서, 중요성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최상의 위치에 있는 것이라는 거죠.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거죠.
그러니까 그 말을 그대로 번역을 하면 '처음 사랑'이 아니고, '최상의 사랑'입니다.
그 '최상의 사랑'을, 성경의 켠텍스트에 더 맞게 번역을 하면 '궁극의 사랑'입니다.
에베소 교인들이 그 궁극의 사랑을 얻음으로써
그 궁극의 사랑을 힘입어서
아까 2~3절에 언급되어 있는 것과 같은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궁극의 사랑'을 소멸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새로운 삶 자체도 없어져버린 거예요.
그와 같은 네 존재, 네 삶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수긍하지 않겠다.
받아들이시지 않겠다! '책망하노니'
▲그러면 이 궁극적인 사랑,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궁극적인 사랑이
도대체 성경에서 어떻게 인간에게 주어졌는가요?
우리가 한번 성경을 찾아보고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백 년 동안 이집트에서 노예살이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일제의 36년 식민통치를 받았는데, 그때 우리는 그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연세 드신 분들은 생생이 기억하십니다.
그런데 노예살이로 무려 4백년이면 여러분 어떻겠습니까? 상상이 되십니까?
이 성경에서 이집트의 4백년 노예살이는, 죽음과 죄의 소굴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거기에서 이스라엘이 해방을 얻었습니다. 그 해방을 어떻게 얻었습니까?
그들이 띠 매고, 구호를 외치고, 칼 들고, 투쟁을 해서 얻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그 죄와 죽음의 노예살이 구렁텅이에서 빼내시기 위해서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서 먼저 9번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가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 줄 듯, 줄 듯 하면서
9개의 재앙을 맞을 때까지 해방시켜주지 않았습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당시에 남자 장정만 60 만명 아닙니까. 그 남자 장정은 가장 이니까 적어도 아내가 있지 않습니까.
부부만 따지면 120만명이죠. 그들에게 부모 한 분이 계시거나,
아니면 자식들중에 장성한 자식이 한 명이 함께 살면,
한 집에 뭐 3 명만 따져도 일을 할 수 있는 노동력을 가진 사람이 180 만명 아닙니까.
옛날 그 시대의 노예는 국부의 원천이잖아요. 그 노예가 국가의 기간산업입니다.
그 노예를 통해서 모든 농작물이 다 생산되는데, 이거 하루아침에 해방시킨다?
국가경제를 포기하는 것 아닙니까. 바보가 아니고 파라오가 내보내겠습니까?
주님께서 드디어 마지막 재앙을 내리십니다. 마지막 재앙은 이집트 파라오부터
이집트에 있는 모든 집안의 장자와, 모든 짐승의 첫 새끼를 주님께서 치시는 겁니다. 죽이는 겁니다.
그런데 그 죽음의 재앙, 죽음의 심판속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은 구원해 주십니다.
지키십니다. 어떻게 지키시는가요?
출12:23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현관문과, 두 기둥과, 위 크로스바에 어린 양의 피를 발라두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 피를 하나님이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어가시고, 첫 새끼와 장자를 죽이시는 하나님의 재앙이 그 집을 넘어갔습니다.
히브리말로 파사흐 입니다. 넘어간다.
영어로 pass over 입니다. 그야말로 넘어 가는 겁니다.
한자로 번역하니까 넘을 유, 넘을 월.. 유월이 됩니다.
하나님의 재앙이 넘어가고,
그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생명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자 지금 그 집안에 도덕적인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내가 패스 오버할 거야
그 집안에 윤리적인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 집안에 연봉 얼마 이상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 학력이 좋은 인텔리들이 있기 때문에 내가 넘어갈 거야.. 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속에 도둑놈이 있든지, 비윤리적인 사람이 있든지
피부 색깔이 검던지 희든지 아무 상관없이
그 피가 발라져 있는 문 속에만 있으면
주님께서 넘어 가심으로써, 그 집 안에 있는 사람은 다 살아날거야!
지금 이집트에 있는 모든 집에서 곡성이 터집니다. 장자들이 죽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안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아주 오래된 옛날 영화지만 찰턴 헤스턴이 주연했던 <십계>라는 영화가
이 장면을 아주 드라마틱하게 연출해 내었죠.
그 마지막 날 밤에, 하나님의 그 재앙의 심판이 마치 안개처럼 땅에 쫘악 깔려 들어오지 않습니까.
모세의 이 예언을 듣고, 이집트의 모든 사람들이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안개와 같은 그 재앙이, 걸어 잠근 문밑으로 스며 들어가죠.
들어감과 동시에 그 집에서 곡이 터집니다.
장자가 죽은 거죠.
그런데 문과 문설주와 인방에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의 집은
그 죽음을 안개가 문설주와 인방을 타고 유월합니다. 다 살아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출12:40~4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
이날 그 이집트 모든 집집마다 곡성이 터지는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백 년에 걸친 노예살이 에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노력으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아가펜 프로텐.. 궁극적인 사랑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시므로 그들이 구원을 받아서
그 여호와의 심판의 밤, 그 날을 그들이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서 만든 절기가 유월절입니다
히브리 말로는 '파사흐' 동사에서 나와서 '페사흐'
영어로는 Passover 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온 이집트 땅에 곡성이 가득 찼는데
그 곡성 소리를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풀어주신 아가펜 프로텐(처음 사랑, 궁극의 사랑)으로
사백 년이 넘는 노예살이에서 그들이 해방이 될 때
그들이 그 사랑에 감격하면서, 모두들 가나안을 향한 새로운 삶을 살리라고 결심하지 않았겠습니까!
그 새로운 삶의 동인이 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궁극의 사랑(처음 사랑) 때문에
그들은 새로운 삶을 살리라고 다 노래하면서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 이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고전2: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여러분 신약성경의 4 분의 1을 바울 혼자서 썼습니다.
사복음서를 빼고 나면, 신약성경의 3 분의 1을 바울이 썼습니다.
그 바울의 문장이 얼마나 수려하고, 그의 논리가 얼마나 탁월한지
가히 바울을 가리켜 '문장의 귀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뭐라고 지금 얘기하는가요?
'나는 너희들에게 편지하고, 내가 예수를 믿고 예수를 전할 때에
나는 한 마디도 미사여구를 쓰지 않았다. 내 문장력을 뽐내려고 한 적이 없다.
내가 핵심을 둔 건 뭔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
내가 수많은 글을 썼다 할지라도, 그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다.'
왜 그게 복음의 핵심인가요?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모든 죄인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다 죽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 영원한 구원을 주었습니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을 가리켜 '유월절 어린양'이라고 성경이 부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출애굽기의 첫 유월절에 어린 양이라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여러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면서
'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자님처럼, 부처님처럼
좀 품위있게 고상하게 돌아가시지는 못했을까?' 질문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돌아가실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에 로마군인들이 조롱하기 위해서
팔레스타인의 가시를 엮어서 왕관이라고 머리에 씌워서 눌렀습니다.
여러분 팔레스타인 여행하시면서, 팔레스타인 가시나무를 보신 분은 아시겠습니다만
팔레스타인의 가시는 못보다 더 날카롭습니다.
그걸로 관을 엮어서 이마에 누르면, 그냥 찍힙니다. 피가 줄줄줄 흘러요.
왜 주님께서 머리에 피를 흘리시고, 고난을 당하셔야 합니까?
우리가 머리로 지은 죄를,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패스 오버 시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로마 군병의 채찍질을 가슴과 등에 당하셨습니다.
인류가 고안해낸 가장 잔인한 채찍이 로마 제국의 채찍입니다.
로마 제국의 채찍만, 그 끝에 쇠 추가 달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죄수의 허리에 채찍을 때리면,
그 채찍 끝에 있는 쇠 추의 무게로 채찍이 죄수의 몸에 감깁니다. 그러면서 살이 떨어져 나갑니다.
가장 잔인한 채찍에 예수님의 가슴과 등이 터지면서 피를 다 흘리셨습니다.
왜요? 우리가 마음으로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패스 오버 시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손이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우리가 손으로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를 패스오버 되게 해주시기 위해 합니다.
예수님의 발이 십자가가 못 박히셔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서는 안 될 곳을 돌아다니면서
우리가 두 발로 지은 죄값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패스오버 되게 해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는지, 안 돌아가셨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옆구리에 창을 찔러서, 주님은 마지막 피와 물 한 방울까지 다 흘리셨습니다.
우리가 썩어문드러질 이 몸뚱아리로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도 패스오버 시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그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까
바울은 그 예수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라'
그러니까 우리나라 말로는 '보라' 이런 이런 감탄사가, 번역을 해도 이게 마음에 안 와닿습니다.
근데 바울이 자기 몸을 보면서 감탄사를 외치는 겁니다.
왜냐면 과거에 자기 몸이,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몸이었는데,
아가펜 프로팬(궁극의 사랑, 첫 사랑)의 사랑이 바울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에게도 임한 겁니다.
그 하나님의 패스오버의 사랑이 우리를 살리신 겁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의 의지로, 우리가 잘 나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이었기 때문에?
아닙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롬5:7~8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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