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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삶에 대해 P2@ 계2:1~5

by 【고동엽】 2022.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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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삶에 대해 P2    계2:1~5           P1           

그 '궁극적인 사랑'(계2:4의 '처음 사랑'의 원어적 의미)을 깨달았을 때가 
우리가 예수를 영접했을 때 였습니다. 

그 '궁극적인 사랑'(아가펜 프로텐)을 깨달았을 때가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리라 결심하고, 새 발을 딛기 시작했을 때입니다. 

내가 내 의지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내게 궁극적인 사랑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그 궁극적인 사랑을 힘입어서, 새로운 삶이 수반될 수 있었던 겁니다. 


◑5절을 보면, 그런데 이 궁극적인 사랑을 우리가 멀리 지금 차버렸고, 
잊어버리고 사는 것, 그걸 주님께서 묵과할 수 없다는 겁니다. 
수용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5a절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해라' 
많은 분들이 이 성경 구절을 읽으면서 이 성경의 진의를 잘못 받아들여요. 

흔히들 '그러므로 어디서 처음 사랑을 떨어뜨렸는지 생각해 봐라' 
그렇게 쓰여진 책도 굉장히 많습니다. 

여러분 잘 보십시오. '어디서 떨어졌는지' 
떨어지다 동사가 타동사가 아니라 자동차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핍토

이 동사의 주어는 '너'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서 핍토했는지 생각해라' 

핍토는,  떨어지다는 의미도 되지만 
'실종하다. 빗나가다. 벗어났다' 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서 빗나갔는가, 어디서 벗어 났는가 생각해 봐라' 입니다. 

▲여러분 죄를 하마르티아 그러잖아요. 
과녁에서 벗어난 것을 뜻합니다. 
과녁을 정조준하고 과녁으로 가야 되는데, 이 과녁에서 벗어난 게 죄지요. 

그럼 과녁판이 잘못 됐습니까? 아니에요. 
제 조준이 잘못된 거예요. 
제가 조준을 다른데로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음 삼위일체 하나님을 과녁판으로 삼아야 해요. 
그런데 이 과녁판에서 벗어나면서, 즉 내가 조준을 엉뚱한 데 해서 
'처음 사랑(궁극의 사랑)'을 소멸해버리고, 상실해버린 거예요.  계2:4

이런 얘기하고 똑같습니다. 
오늘 시애틀의 태양이 얼마나 아름다웠습니까? 
태양의 아름다우니까 창문을 통해서 밝은 햇볕과 따뜻한 열기가 창문을 통해서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창에다가 검은 암막을 쳐버립니다. 그럼 태양하고 관계가 단절되지요. 
암막을 침과 동시에 태양의 열과 빛도 사라져버립니다. 

내가 하나님을 과녁판 삼지 않으면 
이건 태양과 나 사이에 암막을 친 것과 똑같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던 아가펜 프로텐(처음 사랑)이 없어져버리는 거죠. 
그 아가펜 프로텐이 없어지니까, 
그 아가펜 프로텐을 동력으로 살던 새로운 삶도 증발하는 것이죠.

그래서 '네가 어디에서 하나님을 과녁판으로 삼는 삶을 벗어났는지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계2:5 '네가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하라'

여기서 '생각하라'는 동사는   *므네모뉴오
주의깊고 면밀하게 관찰하고 들여다보다.. 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2:5a

우리가 처음 예수님의 궁극의 사랑(처음 사랑)에 감격해서 살다가 
언제 어디서 하나님의 과녁판을 스스로 내팽겨쳤는지 
네 인생의 전반에 걸쳐서 면밀하게 되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개입하셨는가, 그걸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의 문제, 내가 오늘 고민하는 모든 상황에 대한 답이 
사실은 그 속에 다 들어 있는 거거든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아가펜 프로텐'으로 
그 400년에 걸친 죄와 사망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되고 
감격해서 새로운 땅, 가나안을 향해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언제 그 하나님을 등졌는가? 그걸 살펴보면 
바로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등지는지 바로 판박이로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크게 두 경우에 하나님을 등졌습니다. 

첫번째 경우는, 자기 목전에 자기가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인생의 위기,
인생의 장애물을 만났을 때.. 그들은 서슴없이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들이 출애굽을 하고 나서, 홍해 앞에 진을 쳤을 때 
변심만 파라오가 이집트의 전 군대를 이끌고 추격해 오지 않습니까? 

자 앞에는 폭 32킬로미터의 홍해, 
뒤에는 당시 세계 최강의 이집트 전 군대, 이건 독안에 든 쥐입니다. 죽은 거예요.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원망합니다. 

출14:11~12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홍해라는 인생의 장애물 앞에서, 하나님은 그들의 삶 속에 자리 잡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과녁판으로 삼는 믿음의 삶에서 실족해 버린 거죠. 

'아니 이런 하나님이라면, 우리는 차라리 이집트에서 노예살이하다 죽을래!' 

가데스 바네아에 갔을 때, 모세가 12 명의 정탐꾼들을 가나안 땅에 보내어서 
지형을 살피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40일 동안 정탐을 하고 와서, 열 명이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 원주민들이 얼마나 장대한 거인들인지, 그 앞에 서니까 
우리는 메뚜기 같더라. 절대 못 이긴다. 들어가면 안 된다! 

민14:1~4절이 그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그 가데스 바네아에서 또 하나님이 없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거죠. 

여러분 애굽에 가면 자기네들 저택이 있습니까? 적금 들어놓은 거 있습니까? 
아닙니다. 죽음의 노예살이 하게 됩니다. 그런데 거기로 가자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과녁판을 잃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살자'하면 
그 결과 뭡니까? 애굽의 공동묘지입니다. 

거기로 가겠다는.. 
그리고는 우리를 이렇게 죽게 만드는 하나님이라는 그분이 세운 모세를
지도자로 인정할 수 없어. 우리가 새 리더를 뽑자. 
그리고 그 리더의 인솔하에 우리가 이집트로 돌아가자. 

이렇게 인간들은 자기 인생의 앞길에 
자기가 계산하지 않았던 장애물이 생기거나, 뜻하지 않은 위기를 만나는 순간 
하나님의 과녁판을 던져버립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가펜 프로텐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서 
우리가 당신을 좇아 걷는 우리 인생의 여정에, 왜 장애물을 두십니까? 
왜 우리 인생이 위기에 처하게 아십니까? 

우리 인생이 장애물을 만나야 
우리 인생이 위기를 당해보아야 
그 장애물과 위기 속에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하나님의 더 크신 능력을 내 온 삶으로 체험하고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위기를 더 많이 당한 사람이 
자기 믿음의 경지가 더 깊어지고 넓어지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여러분 다윗이 지은 시23:4 '내가 사망의 음치만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여러분 이런 구절을 읽으면 당장 질문이 생기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하시면 
차라리 아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니게 하지 말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면, 내 육체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데려가시지 말지.. 
하나님께서 나를 예뻐하신다면, 내가 경제적으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헤매게 하시지 말지... 

왜 헤매게 하시지? 왜 병 주시고 약 주시지? 

'사망의 음침만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즉 내가 어떤 상황을 당할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동행하시며 
당신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지키시는 그 하나님을 내가 경험하려면 
사망의 골짜기에 안 가보면 못 합니다. 

사망의 골짜기를 가본 사람만 
이론적으로가 아니라, 삶의 고백으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분의 막대기와 지팡이'를 고백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골짜기로 끌어가시는 거에요. 

그런데도 인간들은 그 장애물만 만나면 하나님을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왜 홍해앞으로 데리고 가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군대가 세계에서 가장 강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 폭 32킬로 되는 강을 가르시고 

그 강에 애굽 군대를 수장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확인시켜주시는 은혜의 체험장으로는 
홍해보다 더 좋은 장소가 없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인간은 자기 욕망에 사로잡힐 때 하나님을 버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면서 나오면서 
양식도 들고 나오고, 가축도 데리고 나왔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양식이 다 떨어졌지요. 먹을 것이 없어졌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매일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시지 않습니까. 
여러분 한번 그 광경을 생각해보십시오. 
시내 광야에 가보신 분은 아시겠습니다만, 풀 한 포기, 물 한 방울도 없습니다. 

거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사십년을 살아남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매일 만나를 내려 주셨기 때문인데 
그 매일 하늘에서 만나가 떨어질 때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그런데 다베라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민11:4~6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매일 만나를 먹다가 불평분자들이 부추기니까 
'만나 이거 지겨워서 못 먹겠네, 더 좀 맛있는거 먹어야 되겠다, 고기 먹어야 되겠다.' 
거기에 하나님이 없어졌습니다. 

인간의 뭔가 자기 기대가 이루어지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더 잘 믿겠다고 하다가도 

자기 욕망이 하나님보다 더 커지는 순간에 
하나님의 과녁판을 떼어 버립니다. 

여러분 광야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 종류의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한 종류의 만나는, 육체의 만나입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만나만 먹고 사십년을 견딜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오죽 영양가 있게 만나를 주셨겠습니까. 

또 하나의 만나는, 그들의 영혼의 만나입니다. 
창세기부터 신명기에 이르는 그 방대한 율법, 그 하나님의 말씀이 
전부 광야에서 하늘에서 모세를 통해서 내려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만나와 말씀, 두 종류의 만나를 내려 주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지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을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욕망에 사로잡히는 순간에 
썩어문드러지는 위해서 살겠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습니다. 

하나님이란 과녁판(목표, 지향점)을 떼버린 겁니다. 
이렇게 인간은 원치 않는 장애물과, 자기 욕망에 사로잡히는 순간에 
처음 사랑(아가펜 프로텐)을 소멸해버립니다. 

왜요? 하나님의 과녁판을 상실하니까 
결과적으로 아가페 프로텐은 절로 소멸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살아가면서 자기 스스로 원치 않는 장애물이나 
욕망에 사로잡힐 때, 하나님의 과녁판을 떼어버린다 라고 하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인간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교만하다는 단어가 '휘시오' 라고 기록돼 있는데 
그 원래 뜻은 부풀리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있는 자기보다 부풀려요. 
자기를 더 크게 여기고, 자기가 않아야 될 자리보다 더 높게 않습니다.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는 피조물의 자리인데 
하나님을 믿고 감격해서 따르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자기가 자기를 부풀려서 (휘시오)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갑니다. 

아까 이스라엘 백성을 보세요.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를 이리로 인도하는가?' 
내가 하나님 이라면 절대로 이곳으로 인도안 할 텐데, 
그러니까 차라리 이집트로 돌아가자. 저 하나님은 나보다 못 하네... 
그러니까 우리가 지도자를 세우고 이집트로 돌아가자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버리고 있습니다. 

▲계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라'
하나님의 과녁판을 어디서 상실하고 
어디서 스스로 교만해서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는지를 
깊이 주의깊게 관찰하고 성찰한 다음에 '회개하라'

여러분 회개하라는 것이 동사로 '메타노에오' 라는 것을 배우셨을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자복이 아닙니다. 

자복이라는 동사는 헬라어로 '엑소몰로게오'라고 합니다. 마3:6
자복은 처음부터 끝까지 입으로만 하는 겁니다. *confessing
'하나님 제가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그건 자복입니다. 

회개는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시작해서 행동으로 하는 것입니다. 
'메타노에오'라는 이 동사의 뜻은, 가던 길이 틀렸음을 알고 길을 바꾸는 것, 
가는 길이 틀렸음을 알고 180 도 돌아서는 것입니다.
먼저 생각을 변화시키고, 다음으로 행동까지 변화시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주님께서는 '네가 언제 나, 하나님의 과녁판에서 벗어나느냐? 
네 인생 전 과정을 면밀하게 돌아봐라. 그리고 찾았으면 회개하라!' 무슨 말입니까? 

'나한테로 돌아서라!, 
네가 앉아 있는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려와서 
나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네가 인정하라!' 그게 회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가 가로막혀 있는데 
'아니 하나님이 어찌해서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해서 죽게 해? 
이집트에는 매장지가 없냐? 그래서 하나님이 고작 우리를 광야에서 죽게 해서 
광야를 우리 매장지로 삼게하냐?' 그때는 그들이 하나님 이잖아요. 

그때 모세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출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무슨 말입니까? 
'너희들은 하나님이 아니다.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이 어떠신 분인지 지금부터 좀 봐라! 
가만히 보거라!'

시46:10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인간들이 얼마나 자기를 부풀려서 하나님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인척 하는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얘들아, 너희들은 좀 가만히 있어라' 
그리고 '너희들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인 것 좀 알아라!' 이게 믿음입니다. 

사55:8~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하나님과 내 생각이 같으면, 왜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나하고 똑같은 생각을 가진 분을, 내가 왜 주일마다 가서 예배드리겠습니까.
그런데도 이 기본적인 생각을 우리는 잊어버려요.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이 '길'은 일을 처리하는 방법, 수단, 해결하는 여러 가지 아이디어 입니다.
이것이 완전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늘이 땅보다 얼마나 높습니까. 측량 불가능합니다.
그만큼 내 생각은 너희들 생각보다 높고 
내가 일을 처리하는 방법과 수단은 너희들 길보다 높아! 

근데 왜 너희들은 나와 너희들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니? 
그 차이를 인정하는 것! 그게 회개입니다. 돌아서 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져라' :5
처음 행위는 아까 본문이 2~3절에서 본 그 구체적인 삶이었지요.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처음 행위를 가져라! 

요14: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계2:2~3절에 나타나 있는 그 새로운 모든 구체적인 삶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주님의 말씀대로 살았더니, 그런 모양의 삶의 된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리 종교적인 열성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우리 믿음의 대상이신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그것은 믿음일 수 없다..는 그 말이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내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5 

너희들이 계속 교만하게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너희들이 너희들의 욕망 자체를 너희 인생의 과녁판으로 삼는다면, 
내가 가서 촛대를 옮길 것이다... 

왜요? 그런 교회는 하나님의 빛의 통로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무슨 말입니까? 

'너희들이 하나님을 과녁판으로 삼고 
하나님의 아가펜 프로텐 (처음 사랑)속에서 바른 삶으로 응답을 계속 하기만 하면 
너희들은 계속해서 나의 빛의 통로, 금촛대로 쓰임받게 될 것이야! 

너희들의 학력, 재산정도가 문제가 아니라 
너희들을 구원한 나의 아가펜 프로텐에 의해서 그렇게 될 거야!' 그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이 약속의 말씀이, 성경안에서 다 성취되는 걸 봅니다. 

◑성경에 룻 이라는 모압 여인이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 사람들을 짐승보다도 못한 존재로 여기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모압 여인이, 모압으로 이민온 유대인 가정에 결혼해서 
유대인의 며느리가 됩니다. 남편인 유대인의 아내가 되죠. *기룐 혹은 말론

그래서 룻은, 바로 그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그 여호와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입게 됩니다. 

시아버지 돌아가셨죠. 남편이 죽었죠. 시아주버니도 돌아가셨죠. 
그러니까 집에는 여자 셋만 남았습니다. 시어머니, 자기, 자기 동서(오르바)만 남았습니다. 

시어머니가 자기 고향 이스라엘 땅으로 되돌아가면서 
두 여인에게 '너희들의 고향 땅에서 새로 가정을 꾸리거라' 

동서 오르바는 사양하다가 자기 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룻은 뭐라고 해요?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고, 어머님이 죽는 곳에서 내가 죽겠습니다.' 

그 하나님의 아가펜 프로텐을 입고 나니까 
그 어머니를 따라가면, 홀시어머니 섬기고 고생문이 훤하지만 
그 하나님을 믿는다는 삶 자체가, 손과 발을 다해서 노동으로 섬기는 삶이고 
어떤 도전도 견디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시어머니를 따라가는 거예요. 

어머니 나오미가 그 효성에 감복해서 베들레땅으로 돌아가서 
시어머니가 주선시켜서 개가를 시켜주지 않습니까. 

그래서 보아스 라는 새 남편과 사이에서 아이를 얻었습니다. 
아이를 낳으면 그 산모에게는 
아이를 보호하고자 하는 동물적인 모성본능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룻은 홀시어머님, 아들도 죽고 남편도 죽은 그 홀시어머니가 
그 아이를 양육하는 그 희열을 맛보게끔 하기 위해서 
그 시어머니 품에 아이를 안기고 양육하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동네 사람들이 시어머니, 그 나오미가 아들을 얻었다. 
그 아들 이라는 히브리 단어는 손자라는 말도 됩니다. '손자를 얻었다' 그 말이죠. 

 

룻4: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여러분 이 구절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지금 태어난 아이는 오벳이라는 핏덩이 아이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의 시선을 어디로 끌고 가는가요?
'얘들아 잘 봐! 룻이 하나님을 과녁삼고 
그 하나님의 아가펜 프로텐 속에서 살았을 때 
그 하나님께서 룻으로 하여금 오벳을 낳게 했는데 
이 오벳이 자라서 이새를 낳고 
그 이새가 낳은 아들이 바로 이스라엘 역사를 새롭게 한 다윗이야!' 
이렇게 룻기가 끝납니다.

그러니까 아가펜 프로펜 속에서, 주님께 바른 삶으로 응답하는 사람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세상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촛대로 쓰여!
성경이 이렇게 우리에게 웅변하는 겁니다. 

이렇게 다 설명하고도 룻기가 한번 더 강조합니다. 
룻기의 제일 마지막 4:18~22절입니다. 

'베레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룻4:18~22

다윗에 의에 이스라엘 역사의 지평이 새로워 졌는데 
지금 룻기는 오벳을 보여주면서 
새로워지는 이스라엘 지평을 함께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존재라 할지라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과녁판으로 삼고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분의 아가펜 프로텐을 힘입어서 
우리가 바른 삶, 새로운 삶으로 응답하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을 떠나간 뒤에도 
우리의 삶의 족적으로 미래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설교 서두의 질문으로 되돌아 가십시다. 

1) 첫째 질문, 우리가 왜 교회에 다닙니까?
그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아가펜 프로텐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그 아가펜 프로텐을 힘입어서 
이 세상에서 아가펜 프로텐의 증인으로 살아갈 은혜를 
매번 힘입기 위해서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릴 때마다 
일주일의 한 고개를 아가펜 프로텐을 힘입어 넘어가면서 
그 세월의 연륜이 거듭되면 거듭 되어 갈수록 
우리의 삶은 점점 더 하나님의 믿음의 작품으로 승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2) 두 번째 질문, 우리에게 믿음은 무엇입니까? 
교회에 나가지 않던 사람이, 주일날 교회 나가는 것입니까? 
그것은 외형적인 변화죠. 

우리에게 있어서 믿음은, 본질적인 새로움의 변화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아가펜 프로펜(십자가 사랑)에, 바른 삶으로 응답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 믿음의 대상은, 죽은 돼지를 좋아하는 것과 같은 그런 잡신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십자가 제물로 내어놓으시고 
우리에게 먼저 아가펜 프로텐을 베풀어주신 은혜와 사랑에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 바르게 응답하는 삶을 사는 것이,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을 헬라어로 피스티스 라고 하는데, 
'신실'이라는 의미와 '입증'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헬라말에는 믿음과 신실이 구별되는 단어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믿음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 
신실로 바꿔서 읽으시면,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아실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그래서 여러분들은 '기도 하고 믿고 구했으니 다 주세요.' 그러잖아요. 

그게 아니고 '신실하고 구하면 다 받으리라' 입니다.
신실한(믿음의) 사람은 헛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신실한(믿음의) 사람은 바르게 살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런 기도는 언제든지 주님께서 응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피스티스는 입증입니다. 

내 믿음은 내가 입증하는 겁니다. 내 삶으로 입증하는 겁니다. 
미신을 믿는 사람은, 죽은 돼지 대가리에 손을 비비면서 자기 믿음을 입증합니다. 

내 믿음은 미신이라고!

우리의 믿음은 아가펜 프로텐의 새로워진 바른 삶으로 응답하는 것으로 
내 자신이 입증해야 되는 것입니다. 

3) 마지막 질문, 내가 주님을 믿으면서 새로운 삶을 살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뭔가요? 

예전에 처음 주님을 영접했을 때는 감격해서 새로운 삶을 살았는데 
어느 순간인가 내가 예전의 삶으로 회귀해서 아무런 감격도 없다면 
그 이야기는, 뭔가 내가 내 자신을 부풀려서 내가 하나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 상황에 매사 일이 생길 때마다 '어찌하여 당신이 이렇게 하시는지요.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괴롭히시나요?' 이건 내가 하나님이 되어 있는 거죠. 

여러분, 우리가 언제 하나님의 자리에 앉았는지 
우리 지난 인생의 전 여정을 면밀하게 들여다보고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십시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십시다. 

하나님을 내 인생의 과녁판으로 이제 변함없이 삼으십시다. 
그때부터 차단되었던 그분의 아가펜 프로텐이 다시 내게 임하게 될 것이고 
그 아가펜 프로텐을 힘입어 우리는 전혀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떠난 뒤에도 
우리의 삶의 족적을, 다가올 미래를 새롭게 하는 당신의 금촛대로 
주님께서 사용하실 것이라는 것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지 않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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