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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지평 P2
나는 생명용품, 장례용품? 에 계속 이어지는 설교문(나머지 절반)
◑나오미 가정의 자기 비움
▶역사의 지평을 뒤흔드는 생명용품이 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자기를 비워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나오미와 룻이, 우연히 역사의 지평을 뒤흔들게 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남편 두 아들들이 죽은 뒤에, 시어머니 나오미가 자기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두 자부를 가라고 한 게 아닙니다.
집을 나설 때는 분명히 두 자부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 당시의 관습으로 볼 때 한번 우리집에 시집오면 죽을때까지 내 집 사람이야.
내가 내 고국으로 가도 너희들은 비록 외국인이라도 나 따라와야 돼.
그런데 데리고 길을 걸어가다가 시어머니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집을 떠나 길을 걸어가다가 나오미가 마음이 바뀐 까닭은
하나님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습니다.
나를 생각하면 이 두 젊은 자부, 데리고 가는 것이 편합니다.
‘그런데 두 자부에게 얘들아 집으로 돌아가거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해 주시기를 원한다.’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생각해보니, 내 일신의 안일을 위해서
이 젊은 두 여인을 평생 내 삶의 그늘에 멍에를 씌우고 머물게 한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자기를 비웠습니다. ‘너는 가라’는 말은 뭐죠?
자기를 비웠습니다.
그랬더니 오르바와 룻이 울면서 ‘안 됩니다 시어머니.
우리는 어머니 따라가겠습니다.’ 두 자부도 자기를 비웠습니다.
시어머니가 다시 자기를 비웠습니다.
‘아니다 얘들아. 나를 따라와봐야 소망이 없다. 가거라.’ 두 번째로 자기를 비웠습니다.
오르바는 그 길로 자기 길을 찾아갔습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꼭 붙잡고 쫓아갔습니다. 자기를 또 비웠습니다.
시어머니가 세 번째로 자기를 비웠습니다.
‘룻아, 그러지 마라. 너 가거라. 너 행복해져야 한다.’ 아까 우리가 봤죠?
룻이 뭐라고 자기를 비워요?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룻이 세번째로 자기를 또 비웠습니다.
할 수 없이 나오미가 젊은 며느리를 데리고 고향 땅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며느리에게 수발을 요구하지 않고, 룻을 개가시켰습니다.
그건 자기 "쑡º 일을 스스로 하겠다는 거죠. 네번째로 자기를 비웠습니다.
룻이 개가해서 보아스의 사이에서 오벳을 얻었죠.
여러분 여기에서 아이를 키워보신 어머니 다 아시지 않습니까.
내 몸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얼마나 사랑스럽습니까.
내가 몸이 아프지 않고 내가 정상적인 건강을 지니고 있는데
그 사랑하는 아이를 내 품에서 키우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룻은 그 사랑하는 아이 키우는 기쁨을 시어머니께 드렸습니다.
시어머니가 품에 품고 키우게 했습니다. 룻 역시 네번씩 자기를 비웠습니다.
시어머니 네번, 며느리 네번만 비웠다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날마다 자기 자신을 비우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보아스 역시 자기를 비운 사람입니다.
보아스는 룻을 계대 결혼으로 자기 아내로 삼아주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에는 계대 결혼이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이을 계자에 세 대자. 이를테면 남자 형제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형제중에 한사람이 죽어요.
그럼 남아있는 형제가 형님 혹은 동생의 아내를 자기의 아내로 삼아
자식을 낳아서 형제의 대를 잇게 해주는 게 계대 결혼입니다.
그런데 이 계대 결혼은 여자에게 굉장히 좋은 관습이죠. 보호자가 생기거든요.
그러나 계대 결혼을 당하는 남자에게는 책임과 의무만 있고 권리는 없는
아주 불리한 결혼입니다.
왜냐하면 아이를 낳아서 양육하고 교육하고 결혼시키고 유산도 줘야 하는데
내 자식이 아닙니다. 죽은 자의 자식이 되는 겁니다. 그 사람 대를 잇는 거죠.
그러므로 계대 결혼을 해야 할 당사자들은 원치 않는 겁니다.
창세기 38장에 보면 유다의 아들 엘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유다가 바로 밑에 동생 오난에게 유다의 아내 형수 다말을 데리고
계대 결혼해라 했습니다.
그런데 오난이 뭘 할려고 안하죠? 형수 데리고 자면서 아이를 낳을려고 안합니다.
출산을 하면 책임만 있을 뿐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거부하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당하는 이야기가 나오죠.
룻기를 이제 서서히 읽어보십시오. 룻기를 보면 이 룻이라는 여자를 위해서도
계대 결혼의 의무가 있는 남자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 남자가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보아스가 자신이 첫번째 의무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을 데리고 평생 의무를 다했습니다.
이처럼 자기를 비워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의 지평은 새로워졌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내 중심의 삶을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버리지 않고 나를 비우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생명이 내게 채워질 수 있겠습니까.
내가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의 이기적인 중심을 버리지 않고 내가 어떻게 더불어가는 마음을 지닐 수가 있겠습니까.
비우지 않으면 채움이 없습니다.
요즈음은 모든 관들이 PVC나 동관 이렇습니다.
그런데 아주 예전에는 모든 수도 파이프들이 다 쇠파이프죠.
그래서 오래된 집을 수리할 때 쇠파이프니까 몇년마다 갈아야죠.
녹물이 나오니까. 그때마다 파이프를 본 기억이 어떻습니까.
파이프가 밖에만 녹슬어있습니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 속이 온통 녹물이 굳어진 것투성이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생수가 흐를 도리가 없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의 자기 비움이라는 이 명제를 생각할 때마다 예전에 보았던
쇠 파이프가 생각이 납니다.
우리의 속이 결국 그럴 거라는 것. 우리의 속에 뭐가 있습니까.
그 더러운 것들을 비우지 않고 어떻게 생명이 채워지겠습니까.
▶제 아이 중에 금년 2월달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아이가 있습니다.
졸업식에 갔습니다. 정해진 시간보다 졸업식이 한시간 늦게 시작되었습니다.
이유는 학생들이 안 오는거에요. 그래서 한 시간 늦게 시작되었습니다.
요즘 졸업식장은 장터 아닙니까.
아무도 이 강단위에서 말하는 사람들 이야기 안 듣죠. 다 자기네들끼리 떠들어요.
한 학급에서 자기가 원하는 대학교에 들어가는 학생들이 불과 두 세명밖에 안되는
이 체제에서 다 떨어진 아이 뿐인데.
그 학생들 앉혀놓고 경건한 졸업식을 하자. 그 제도적으로 무리겠죠.
그 졸업식장도 계속 시끄러워요.
그런데도 강단위에 선 분들은 엄숙하게 계속 진행하는 겁니다.
여러분을 또 다시 보내자니 마음 허전함을 메울 길이 없습니다.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 중에 나온 말입니다.
동창회는 여러분의 든든한 후원자가 될 것입니다.
아무 걱정말고 교문을 나서십시오. 백발이 허연 동창회 회장님 격려사입니다.
이제 내일이면 형님들이 없겠거니 생각하니 왠지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재학생 송사지요. 존경하는 선생님, 사랑하는 후배, 정든 교정을 영영 떠나야 한다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습니다.
졸업생 답사입니다. 아무도 안 들어요. 저만 들은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지금 이 이야기를 듣고 웃으셨습니까. 이유는 하나지요.
이게 거짓말이기 때문에 우리는 웃었습니다. 진심이 안 담겨있거든요.
어느 졸업생이 가슴이 미어져요. 어느 재학생이 눈물을 앞을 가려요.
이거 다 거짓말입니다. 그러니 아무도 믿지도 않고 떠드는 거에요.
저는 그날 졸업식장에 앉아서 그 가슴 아픈 현장을 목격하면서
이 졸업식장이 오늘날 교회와 같겠다...
여러분 교회에서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가 선포됩니까.
여러분들 신자들끼리 얼마나 진리의 공부를 열심히 합니까.
그런데 여러분 과연 그 말을 믿고 있습니까. 믿으시면 나가서 그렇게 사셔야죠.
안 사시면서. 살 의사는 추호도 없으면서 너는 살지만
나는 살려고 하는 생각이 전혀 없으면서. 그 이야기만 서로 그럴듯하게 한다면.
우리가 이 졸업식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듣고 웃듯이 하나님도 웃으시겠죠.
세상 사람들이 비웃겠죠. 비워야 합니다.
내가 비우지 않으면 그 말씀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내가 비우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이런 집회를 일년에 몇번을 해도
교회 밖에서 여러분의 삶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이번 이라크 전쟁 보셨죠. 4월 9일 바그다드가 함락되면서
중앙에 있던 후세인 동상이 무너졌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약탈이 자행되었어요.
이라크 국민들은 백퍼센트 이슬람 교도들입니다
이라크 국민뿐만 아니라 이슬람 회교도들은 참으로 신앙심이 대단합니다.
제가 터키를 갔을 때 2주간 여행했는데 제가 여행할 때
그 운전하던 기사분이 터키분인데 가다가 기도시간이 되죠?
이분이 나가서 기도 해요. 그럼 저는 그분이 기도 끝날 때까지 기다려요.
어쩔 때는 한번 들어가면 한 시간씩 있어요.
바그다드에서 약탈하던 사람들도 다 기도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있어 믿음은 뭘까요?
그 사람들이 모스크를 찾아서 그렇게 열심히 하루 세번씩 기도할 때
무엇을 기도하는 걸까요?
저는 그 화면을 보면서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도 저와 다를 바 있겠는가.
모두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지만.
삶의 현장에서 형태만 틀릴 뿐 만약 우리가 바그다드 사람처럼
내 욕망을 위해서 그처럼 뛰어다닌다면 역사의 미래는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작년에 청년 사역자들 중심으로 한국에서 고지론과 미답지론 논쟁이 있었던 것을
여러분들 알 것입니다.
어떤 그룹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높이 전파하기 위해서는
고지를 점령해야 한다. 무조건 정상을 차지해야 한다는 것이죠.
어떤 사람은 아니라는 거에요. 정상이 아니라 미답지론.
사람의 발걸음이 닿지 않은 곳을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맞습니까. 둘 다 틀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고지냐 미답지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너를 비우라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비우면 똑같은 시대 똑같은 곳에서 살던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처럼 고지에 올리십니다.
다니엘이 원해서 간 것 아닙니다. 비웠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올리셨습니다.
에스겔은 똑같은 시대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미답지로 보내셨습니다.
성 밖. 포로들이 있는 그 미답지에 보냈습니다.
고지나 미답지가 나의 목표가 될 때 나는 절대로 나를 비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 내 목적이 될 때 비울 수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마치 기사가 바둑돌을 운행하듯 우리를 운행시키시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우리가 생명의 용품이 되기 위해서는 마라를 피해서는 안됩니다.
나오미가 사랑하는 자부 룻을 데리고 고향 땅 베들레햄으로 갔습니다.
그랬더니 고향 땅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나오미를 보고 기뻐합니다.
그를 환영합니다. 그랬더니 나오미가 그 사랑하는 동네 사람들에게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1장 20절입니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나오미라는 이름의 뜻은 기쁨이라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나오미가 왔다, 나오미야 반갑다, 하니까
우리말로 기쁨이 왔다, 기쁨아 반갑다. 이런 뜻이잖아요.
그러니까 나오미가 얘들아, 나를 기쁨이라 하지 마라. 나를 마라라고 해라.
마라라는 뜻은 고통, 괴로움이라는 뜻입니다. 내 처지가 지금 마라다. 고통이다.
그러니까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 마라.
여러분 생각을 해보십시다. 오래 전에 나오미가 사랑하는 남편과 두 아들들을
데리고 모아 땅으로 이민을 갑니다. 청운의 꿈이 있었겠지요. 청사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민 끝에 실패를 하고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외국인 자부 한명만 달랑 데리고 역 이민,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바로 오래 전에 꿈을 품고 걸어갔던 그 길을 마라의 쓰디쓴 가슴으로 되돌아옵니다.
똑같은 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매일매일 똑같은 길을 걷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길을 걷는다고 해서 그 길의 의미가 날마다 똑같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제는 나오미지만 오늘은 마라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인생 앞에 마라의 길이 펼쳐졌을 때 피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나를 나오미라 하지마라 마라라 하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그 길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나오미가 그 마라의 길을 내가 남편 잃고 자식 잃고 자존심 상하는
이 몰골을 동네 사람에게 보여주기 싫었던들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을 겁니다.
어디 다른 곳을 가서 "막 일을 할지언정 그곳을 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자존심 상하는 그 마라의 길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룻도 그 늙은 시어머니 따라가는 것, 자신에게 무슨 낙이 있겠습니까.
육신적으로는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마라의 길을 룻도 피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마라의 길을 거침으로 그들은 진정한 나오미가 되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뒤에 사울 왕의 질투를 받지 않습니까?
사울 왕이 다윗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삼천 명의 특공대를 구성해서
온 이스라엘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죠.
다윗이 이스라엘 내에 숨을 곳이 없어서 바로 가드 왕에게 가서 자신을 의탁하다가
그 곳에서 자신을 경계하자 침을 질질 흘리면서 미친 시늉을 하고
겨우 살아서 나옵니다. 그리고 지은 시가 시편 34편입니다.
그 상황이라고 하면 하나님 원망해야죠.
그런데 시편 34편을 통해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곳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지금 침을 흘리고 미친 짓하며 생명이 경각에 달려있는데 부족함이 없다는 겁니다.
뭐죠? 지금 다윗을 둘러싸고 있는 인생의 정황은 마라입니다. 부족함 투성이에요.
그 마라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바로 세상의 부족함 때문에 그는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마라를 통해서 그는 결국 이스라엘 역사의 지평을 새롭게 하는 진정한 나오미가 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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