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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적인 자녀교육은@ 삼상17:12~19, 빌4:11~13

by 【고동엽】 2022.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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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적인 자녀교육은       삼상17:12~19, 빌4:11~13       2021.11.19. 출처

 

사경회 첫째날,        둘째날       셋째날 (현재 페이지)                   


오늘은 <신앙적인 자녀 교육>에 대해서 우리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하는 데요. 
'자녀교육'은 크게 세 범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교회 교육, 둘째 가정교육, 셋째 학교 교육입니다. 

저는 학교 교육에 대해서 논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오늘 이 시간에는, 교회 교육과 가정 교육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미 자녀들이 장성한 어르신들께서는, 손자나 손녀를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먼저 <교회 교육>에 대해 우리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 주일학교는 기로에 서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쇠퇴함과 맞물려서, 교회 학교도 쇠퇴 일로에 있습니다. 

우리 세대는, 한국교회 주일학교가 몰락하는 것을 바라보는 증인이 될 수도 있고,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는 한국 교회학교를 다시 중흥시키는 구원투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녹록지 않습니다. 

2017년에 예장 합동 교단이 산하 2천 교회를 상대로 
'주일학교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습니다. 

그 설문조사를 위해서 동원한 사람들의 숫자를 보면, 입이 떡 벌어집니다. 
담임목사 126명, 부교역자 582명, 
주일학교 교사 1842명, 학부모 1341명, 
미취학 아동 971명, 초등학생 1472명, 
중고등부 학생 1885명, 청년대학생 1608명, 
일반 국민 1천명, 총신대 신대원생 974명 
총 11,801 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 였습니다. 

합동측 주장대로 한국교회에서 전무후무한 이런 매머드급 설문조사는 없었습니다. 
통합 측에서 이런 매머드 설문조사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 합동측 이 설문조사 결과를 인용해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합동측에서 조사한 이 문제점이 
한국 교회의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설문조사를 보면 크게 세 가지 문제가 나타나 있습니다.

▲1. 첫 번째 <주일학교의 존립 문제>입니다. 

설문 조사에 응한 교회 10개 중에 3교회가 아예 주일학교가 없었습니다.
이유는 주일학교 학생이 한 명도 없는 겁니다. 

몇 해 전에 기독공보(통합측 교단 신문) 를 통해서 
통합측 교회 가운데에서도 주일학교가 없는 교회가 상당한 %에 이른다는 기사를 
제가 본 적이 있습니다. 

지금 이 합동측의 설문조사는 
아이들이 한 명도 없어서 주일학교가 아예 없는 교회가 10회 교회 중에 3교회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린이 두 명 있는 교회학교, 
어린이 열 명 있는 교회학교, 
그런 교회학교는 다 '교회학교가 있다'고 하는 7할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실상 유명무실한 교회학교까지 다 포함한다면 
상당수의 교회에, 교회학교가 아예 없다고 봐야 합니다. 

큰 교회들 가운데에서도, 예전에 아이들이 바글바글 했는데 
큰 교회 교회학교도, 몇몇 교회를 제외하고는 아이들이 줄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어떻게 해서 교회학교를 활성화 할 것인가?' 연구합니다. 
근데 제가 보기에는 늘 헛다리를 짚습니다. 

여러분 한국 교회에서, 왜 교회학교 아이들이 없어졌습니까? 
교회학교 아이들은 옛날과 달라서, 자발적으로 교회를 선택하지 못 합니다. 

옛날에는 한 동네에 교회가 하나 있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다 그냥 놀러 가면, 교회에 가는 겁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동네 교회든지, 저 동네 마을 교회가 아니라,

큰 지역 교회로 재편되고 있습니다. 
혹은 서울 전체를 상대로 하는 큰 교회들도 많지요. 

그러니까 다 부모님들이 지하철, 자동차를 타거나 해서 교회를 옵니다.
그러니 어릴 때부터 아이들은 교회 선택권이 없어요. 그저 부모 따라 오는 겁니다.
영아들은 엄마 품에 안겨서, 유치원생들은 부모 손 잡고...  

 

그 아이들이 다 없어졌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주일 학교에 다닐 연령 아이들의 부모 세대가 교회를 떠났다는 겁니다. 

어떻게 주일학교 다시 중흥 시킬 것인가?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교회를 떠나간 30~40대를 돌아오게 하면 됩니다

△왜 30~40대가 교회를 떠났을까요? 

여러분, 연세 드신 분들은 다 30~ 40대를 거쳐 오지 않았습니까? 
30~ 40대가 어떤 세대입니까? 

이성과 지성을 바탕으로, 이 세상에 대해서 
모든 것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는 세대들입니다. 

그 세대들이 있기 때문에 미래가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정말 귀중한 보배같은 세대들입니다.

그 이성과 지성으로 세상을 비판하는 세대가 없으면 
세상은 시간이 갈수록 낙후됩니다. 

이 보배로운 30~ 40대 젊은이들의 시각으로 볼 때 
교회가 교회다운가?  아닌 겁니다!

제가 만약에 지금 30~ 40대를 산다면, 
그리고 제가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니다가 30~ 40 때가 되었다고 한다면,   
아마 저도 심각하게 고민할 것 같습니다. '내가 굳이 교회 계속 다녀야 되는가?'

부패한 가톨릭 교회가 장악한 중세 유럽의 종교권력, 사회, 경제, 정치, 
그 모든 기득권을 장악한 가톨릭과 맞서서
왜곡된 세상과 교회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 프로테스트(반발) 한 사람들이 
개신교를 세웠습니다. 

세월이 흘러 가면서, 개신교회들은 
개 교회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이 21세기, 이 민주적인 시대에 
가장 비민주적이고, 가장 폐쇄적이고, 
가장 시대에 뒤떨어진 게토 ghetto 가 되었습니다. 
그냥 이게 용납되는 사람들 자기들끼리만 좋은 겁니다. 

제가 어제 장로와 권사, 안수집사, 서리집사 직분의 
권력화, 서열화의 폐해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사람들이 많이 얘기하지 않습니까. 
종교개혁 시대에 개신교는, '만인제사장 설'을 표방하면서 태동되었다고요. 

가톨릭은 지금도, 내가 죄를 지었는데 신부님을 찾아가서 고해성사를 해야 됩니다. 
내가 하나님한테 직접 회개하지 못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돌아가실 때,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대제사장만 1년에 한 번 들어갈 수 있던 그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짐으로써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 기도합니다. 
베드로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주일 예배시간에는 장로님들만 대표기도 합니다. 
이게 만인제사장 입니까?
젊은이들이 볼 때, 이런 이율배반이 어디에 있습니까? 

교회에서 가르치는 말씀의 핵심이
'하나님은 전지전능 하셔, 뭐든지 다 하셔! 
하나님은 무소부재 하셔' 

그러면서 헌금봉투에 자기 이름을 쓰라고 그럽니다.

여러분, 내가 헌금을 하면서 봉투에 이름 쓰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가 얼마 헌금 했는지 모르면, 그분이 전지전능 하십니까? 
무소부재 하십니까?
그런데 봉투에 자기 이름을 쓰라고 합니다. 

아무리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명분을 쌓아도 
누가 얼마 헌금 하는지를 알고 싶은 사람이, 그걸 알고 싶어서 쓰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젊은이들에게 이게 용납될까요?

초파일 즈음에 절에 가 보면, 사찰 천장에 걸려있는 연등들을 보고서, 
기독교인들은 속으로 다들 비웃잖아요.

돈 낸 크기만큼 연동 크기가 달라지기 때문이지요. 

거기에 다 시주한 사람의 이름이 쓰여있습니다. 
속으로 '아니 부처님은 이름 안 쓰면 모르시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자기네들도 교회에서 헌금낼 때, 
봉투에 이름을 써서 냅니다.

이런 모습을, 젊은이들은 아는 겁니다. 
여러분, 교회가 30대 40대를 몰아내었다면, 
우리는 그들을 교회에서 떠나게 한

모든 모순과 이율배반적인 제도를 철폐해야 합니다. 

그 젊은이들이 교회로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그 젊은이들이, 인간에 의해서 왜곡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날 것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들이 변화되는 경험을 하게 해 줘야 합니다. 

그래서 젊은 부모들이 들어오면, 그들의 자녀들은 그냥 따라오는 겁니다.
교회학교는 그냥 부흥하는 겁니다.

연동교회 여러분의 위임목사님은 젊습니다.
이런 젊은 목사님이 목회 하실 때, 30~ 40대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함께 고민하고 목사님을 도와드리십시오. 

▲2. 예장 합동 교단의 설문조사에 의해 드러난
교회학교의 두 번째 문제는,
교단에서 개발한 '공과교재'가 부실하다는 점입니다.   *주일학교 성경공부 교재
 
그래서 '교단이 사용하라고 한 공과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응답한 교회가 
41.3% 였습니다. 

교단이 만들어준 공과 교재를 사용한다고 응답한 58.7%의 교회도 
그 공과에 다 만족한다는 말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장로교 통합측도 거의 대동소이할 것입니다. 

왜 의식 있는 사람들이 볼 때, 공과를 만족할 수 없는가요? 
저는 그 이유를 확실히 압니다. 

제가 사회 생활을 하다가 37살 때 신대원에 들어갔습니다. 
신대원에 들어가서 1학년이 되었습니다.

근데 제가 입학하고 얼마 있지 않아서 
총회 공과 교재를 개발하는 부서에서 저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올해 여름성경학교 교재와 내년도 공과를 만드는데 
저를 위원으로 참여해 달라는 겁니다.

이유는, 제가 신대원에 들어가기 전에, 출판사를 경영했다는 경력, 
그게 다 였습니다. 

저는 신대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성경도 한번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신학교에 들어가서 비로소 성경을 제대로 한 번씩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요, '어 저기 출판사 사장하던 사람이 신대원에 들어왔네, 
당신 총회 교육부에 들어와요. 같이 교재 만듭시다.' 

저는 사양했습니다. 저는 그럴 자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작년 12월 경에 아주 젊은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랬더니 그 젊은 목사님도, 신대원 다닐 때 저하고 똑같은 제의를 
총회 교육부로부터 받았더라고요. 

그분도 신대원에 들어가기 전에 출판 관련 일을 했던 분이었던 겁니다. 
여러분 공과 교재를 이렇게 (대충) 만듭니다. 

여러분,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는가?
이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 이렇게 비전문가들을 불러 모아서 공과 교재를 만듭니다. 
그래서 그 교재를 보면요. 
성경이 이야기 하고자 하는 말씀의 깊은 뜻은 없고, 
전설적인 영웅담이나, 우상들의 이야기가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중략

△제가 한 가지 예를 들어볼게요. 
공과에 나오는 모세의 그림을 보면, 
전부 다 옛날 <십계>영화의 찰턴 헤스턴이 가지고 다녔던 지팡이 같은, 
크고 신비스런 지팡이를 짚고 있는 그림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런 신비스러운 지팡이로 홍해를 향해 내미니까 
홍해가 쫙 갈라지는 겁니다. 지팡이가 아주 요술지팡이 처럼 보이는 겁니다.

그 신비스러운 지팡이로 반석을 치니까, 반석에서 강이 터지지 않습니까. 
모든 공과의 그림에는 다 모세가 그런 지팡이 들고 있습니다. 
만화 영화도 물론입니다. 

가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터키 이스탄불에 가면 톱카프 궁전이 박물관 있습니다. 
그 이스탄불이 1453년 오스만 투르크에 망하기 전까지는 
바로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이었죠.

그 동로마 제국은, 당시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 그때부터 
성물을 많이 모으기 시작했읍니다. 

그래서 그 박물관에 가면, 믿거나 말거나 세례요한의 팔 뼈도 있고,
별게 다 있습니다. 
근데 왜 그걸, 이슬람 국가가 그 나라 주인이 되고도 그대로 놔두느냐면
코란에 아브라함도 나오고, 모세도 다 나오거든요.
그리고 세례요한 같은 선지자 이름도 코란에 다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이슬람국가인 터키도, 동로마 제국이 모았던 성물을
그대로 다 유물로 보관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가면 '모세의 지팡이'가 있습니다. 
모세가 홍해를 갈랐던 지팡이, 반석을 쳤던 지팡이라고 하는 지팡이가 
유물로 보관, 전시되어 있습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그런데 그 지팡이의 길이가 어느 정도 되는지 아십니까? 
1미터도 안 됩니다. 

제가 우리 자녀들과 함께, 방학 때 터키 그 박물관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아이가 제게 물었습니다. '아빠, 이게 모세 할아버지의 지팡이가 진짜 맞아요?'

'글쎄, 이게 진짜 모세 할아버지가 손에 쥐고 있던 그 지팡이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어,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모세 할아버지 시대에 목동 들이 쥐고 있던 막대기가 
이와 같았다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있어!' 

여러분 모세가 40년 동안 양치기 하던 시내반도에는, 
일단 그런 신비스럽고 큰 나무가 없습니다. 

거기에서 구할 수 있는 나무 중에서 가장 긴 게 1미터가 안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큰 지팡이를 어디서 수입해 왔다 해도, 
목동이 양을 칠 때, 실제로 사용하기에는.. 큰 지팡이는 너무 불편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도 터키나 중동지방에 가시면,
지금도 목자들은 1미터 정도의 막대기를 들고 있습니다. 

일단 큰 나무들이 그곳엔 자라지 않으니까, 
목자들이 크고 긴 막대기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

뭘 얘기해요? 모세 손에 쥐어있던 막대기가 
보잘 것 없는 마른 막대기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마른 막대기와 함께하시면 
홍해가 갈라진다는 것입니다.
공과가 이걸 가르쳐 줘야 됩니다.

그런데 마치 모세의 지팡이가 신비한 것처럼...
그렇게 가르치면 안 됩니다.     

    *관련설교 : 하나님의 지팡이가 된 모세http://blog.daum.net/rfcdrfcd/11294567

△드려야 할 말씀이 많은데, 중요한 얘기니까 한 가지만 더 말씀 드릴게요. 
공과는 화가가 그리는 그림과는 달라야합니다. 

화가들은 어떤 예술적, 심미적인 면에서 성모 마리아를 표현합니다. 
그래서 그 외양간 구유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가 
하얀 옷을 입고 있습니다. 공과의 그림도 똑같습니다. 하얀 옷을 입고 있습니다. 

저는 공과는 달라야 된다고 봅니다.

로마황제가 로마제국 내에 있는 모든 국민들을 다 호적을 하라고 해서 
요셉이 만삭인 마리아를 데리고, 호적하러 베들레헴에 가지 않습니까?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무려 120킬로 입니다.
마리아를 나귀에 태우고 간다고 해도 엿새 길입니다. 

마리아는, 빈민촌 달동네 나사렛 처녀입니다. 
무슨 하얀 백색 옷을 입겠어요?

엿새 동안 나귀를 타고 가는데 옷을 갈아 입겠습니까? 
당시 그들은 거의 단벌로 살았습니다. 

예수가 태어나서 예수를 안을 때 
그 옷은 땟국물이 흘러야 합니다. 

그래야 어린 아이들이 그림을 볼 때 
가난한 집 아이가 '예수가 나를 위해서 오셨네..'
가슴이 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얀 백색 옷을 입고 예수가 앉아 있다...? 
정말 가난해서 새 옷 못 입고 사는 아이들이 
그 백색 옷에 인형처럼 안겨 있는 예수가 
내 예수가 될 수 있을까요?

저는 신학교에 들어가지마자 공과를 개발하는 위원이 되라 했지만
제가 거절하고, 제 눈으로 공과를 다 살펴보고 

그래서 저는요, 주님의교회를 목회하면서부터 
제가 목회하는 교회에서는 전부 교재를 직접 만들어서 썼습니다. 

주님의교회 에서는 전임 교육목사님 중심으로 
주님의교회 에 나오는 아이들에게 맞도록 
영아부부터 고등부까지 교재를 다 만들었습니다.

100주년 기념교회도 교재를 다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연동교회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만들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어린아이들에게 신앙교육을 시켜 주고 싶으면 
그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신앙심이 심어질 수 있도록 
교재부터  정말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야 합니다. 

▲이 교재와 관련해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그 대목이 있는데 
총신대 신대원 학생들이, 그 총회가 만든 교재를 보고 
'이 교재가 안 좋다' 라고 말을 하면서, 그 이유를 댄 게 
'재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흥미유발 부족!'

여러분 오늘 날, 어느 교회를 가든지 
교회학교는 아이들에게 재미를 주려고, 재밌게 해 주려고 애씁니다. 

교회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신앙교육보다도 
재미를 최우선으로 삼은 것이 
교회학교 쇠퇴와 직결됩니다.  

여러분 영아, 유아, 유치원생 만 해도 
어머니 품에 안겨서, 어머니하고 같이 교회에 오지요. 

근데 그 아이들이 초등학생이 되고, 중학생이 되어 봐요. 
고등학생이 되어 봐요. 

한국교회의 교회학교 구조를 보면 
밑에 유치원, 영아부, 초등학생이 제일 많고 
중등부는 확 줄어 들고, 고등부는 더 줄어들어요. 왜 그럴까요?

내가 내 발로 걸어서 다닐 수 없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부모 따라서 교회 오는데 

교회가 재미만 위주로 해 주니까 
내가 게임 하고, 친구들 하고 모여서 놀면
교회 선생님들이 주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일을 만나니까
교회에 갈 필요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왜냐면 '재미'를 기준으로
교회를 다녔기 때문입니다. 

내가 재미있는 게임을 하다가도 
교회 시간이 되면, 재미와 전혀 다른 그 무엇이 있어서 
'나는 교회에 가야 돼!' 이렇게 돼야 되거든요. 

근데 교회가 재미를 최우선으로 삼다 보니까 
아이들이 커 갈수록, 교회는 재미가 없어집니다.
밖에서 노는 것이 훨씬 재미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목회하던 교회에서 
교회학교의 최우선 순위는 
아이들에게 '하나님께 굴복하는 DNA를 심어 주는' 거였습니다. 

△제가 37살에 신대원에 들어가고 나서, 제 큰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저는 참 하나님께 개인적으로 감사한 게, 
제가 그 전에 허랑방탕 했던 사람인데, 제 아이들은 태어나서 
제 코에서 담배 연기 뿜거나, 제 입에서 술 냄새 나는 것을 
한번도 보지 않고 자랄 수 있어서, 저는 그게 하나님께 참 감사합니다. 

그래서 신대원 1학년 때 첫째 아이가 태어났는데 
이 아이가 유아세례를 받고 어머니 품에 안겨서 
예배에 참석하게 되면, 대개 자모실에 가면 
아이들이 뛰어다니면서 놉니다.
 
어머니들은 자기가 예배 잘 드리려고
아이들은 놀게하고 혼자서 예배 드리죠. 

그렇제만 제 아내는 교회 가서부터, 아이를 꼭 안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OO아, 지금은 하나님한테 굴복하는 시간이야! 
네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굴복해야 될 때가 있어. 
그게 예배 시간이야! 
엄마가 너를 지금부터 꼭 안고 있는다. 너는 가만 있어야 돼!' 

처음에는 못 알아 듣지요. 움직이고 막 그러죠. 
엄마가 그럴 때마다 꼭 안고 있으면 
몇 주 지나면 아이가 압니다. 
'엄마가 딱 안으면, 아 이건 뭔가 내가 꼼짝 말고 있어야 돼!' 

△제가 신대원 2학년 때 영락교회 교육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당시에 영락교회 에서는 교육전도사들은 
수요일에는 의무적으로 영락교회에 안 나와도 된다고 했습니다. 공부에 집중하라는 거죠.

그래서 제 아내하고 다니던 수요성경공부를 참석했습니다. 
제 처가, 그 수요일 날, 여성 성가대 지휘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는 제가 안고 있어야지요. 
저도 똑같이 말했습니다. 
'OO아, 지금 예배 시작인데, 지금은 네가 하나님한테 굴복하는 시간이야.' 
아이가 꼼짝 않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한국 축구 선수로 최초로 독일에서 영웅이 되었던 차범근 선수가,
한국에 들어와서 어린이 축구교실을 만들었습니다. 

그 이후에 그 축구교실을 졸업한 선수들이 
지금 한국 축구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차범근 선수가 어린이 축구교실을 만들 때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어린아이 때 습득하는 기술이 있는데, 그건 어른이 되어서 절대로 몸에 익히지 못한다.'  
어릴 때 익혀야 될 때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자기가 유럽 무대에서 뛰어 보니까 
어릴 때부터 잔디밭에서 뛰던 사람하고 
자기하고 차이가 너무 나더라는 겁니다.

어른이 되어서 그걸 극복해 보려고 했는데 안되더라는 겁니다. 
어릴 때 습득해야 될 것은, 어릴 때 해야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어릴 때 교회학교는 
하나님께 굴복하는 DNA를 심어줘야 하는 때입니다.
'이 시간은 내가 하나님께 굴복하는 거야!' 

여러분 재미가 아니라, '내가 이 시간만큼은 
입을 닫고 하나님한테 굴복하는 거야!' 
아이들이 이걸 배우면, 일평생 살아 가는데 하나님께 굴복하는 걸 배옵니다. 

아이들이 예배시간에 마구 뛰어다니고 놀지요. 
권사님들이 또 예쁘다고 사탕 줘요. 

그런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하나님 앞에 굴복 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어릴 때 자기 마음대로 했거든요. 

▲3. 세 번째 그 설문조사에서 드러난 주일학교의 문제점은 
<주일학교 사역자, 그리고 교사의 전문성 부족> 입니다. 

어제 집회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칼빈은 개혁교회를 하면서 4중직을 두었는데, 

목사 다음에 교사는 
신학을 전공한 사람들로서 
박사나 교수로 불린 사람들이었다고 했습니다. 

근데 우리나라의 교회학교 교사는 
그냥 지원하면 다 됩니다.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데, 어린 아이를 낳아 보지도 않은 청년들이 제일 많습니다. 
왜요? 청년들이 교회 봉사를 제일 많이 하니까요.

그리고 신대원 시험에 합격하고 나면
신대원 학생들은 다들 자동적으로 '전도사'라고 불립니다.
이렇게 쉽게 전도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 없는, 교육철학 없는) 신대원 1학년생, 2학년생들이 
지역교회의 주일학교에 가서 한 부서를 맡습니다.

훈련 되지 않은 교사, 전도사들이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니까 
주일학교가 재미 미주가 됩니다. 

여러분, 정말 지역교회가 
이 어린아이들은 현존하는 미래인데 
이 아이들이 있어야, 우리의 미래가 견고해지는데 

 

정말 이 아이들이 바르게 신앙 생활하고, 
이 교회에 들어온 아이들이 미래의 신앙인으로서 
사회에서 한 몫을 담당할 수 있게끔 만들기 위해서는 

여력이 있는 교회는, 
반드시 교회 학교를 전담하는 목사님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의교회에서 목회할 때도 
교육담당 전임 목사님이 있었구요. 

그 후에 100주년기념교회 에서는 
제가 주님의교회 에서 목회할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아이들이 나왔기 때문에 
제가 퇴임하기 약 7년 전부터 
교회학교만 전담하는 교장 목사님을 따로 두었습니다. 

'당신이 지금부터 교장입니다. 
교회학교 어린이들, 초등부 졸업할 때 
졸업장을 당신 이름으로 발급하시오. 
당신이 아이들의 영혼을 전적으로 책임지세요.'

그리고 제가 100주년 기념교회를 퇴임하면서 
4분의 담임 목사님들이 공동 목회를 하게 되었는데 
그 4분 중에 한 분이, 교회학교만 전담하는 담임목사님이십니다.

또 정말 청년들, 아이도 낳아보지 않고 
교회를 위해서, 아이들을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는 그 청년들과 더불어서 

저는 교회학교 교사에 어머니들이 많이 지원해야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어머니들이, 내 아이와 다른 아이들을 신앙적으로 같이 양육해야 되는 겁니다.

절대로 일주일에 한 번 교회학교에 가는 것으로
내 아이가 온전한 신앙인으로 완전히 자랄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내가 집안에서 아이를 다 버릇 없이 만들어 놓고 
유치원에 보내면서 '유치원 갔다오면 예절바른 아이가 될 거야' 
라고 착각하는 거하고 똑같습니다. 

그래서 부모님들이 교회학교 교사 하는데 관심을 가져야 되고 
여기에 가정교육이 대두되는 것입니다. 

△교회학교보다 가정교육이 더 중요합니다.
가정 교육을 시키는데, 어린 아이들을 앞에 두고 
'야 이제부터 아빠 엄마가 가정교육 시킨다, 잘 들어!' 그런 거 아니지 않습니까. 
가정 교육을 시키는 가장 좋은 시간과 장소는 식탁입니다. 
밥 같이 먹으면서 서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야기하면서 부모의 가치관이 아이들에게 심어지고 
부모의 신앙관이 아이들의 신앙관이 되고 
부모의 인격이 아이들의 인격에 스며들게 됩니다. 

제가 요즘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부부가 있는데,
식당에 가면, 젊은 부부들이 밥을 먹으면서 
아이들한테 전자기기를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 좀 편하게 밥 먹게, 너는 만화 영화 보고 있어!'

그건 부모와 자식의 대화를 단절시킵니다.
그 아이가 그거 보면 재밌는데, 
나중에 커서 엄마가 얘기 좀 하자 하면, 하겠습니까? 
재미 없다고 안 합니다. 

매일이면 더 좋지만 
다 직장 생활을 하고 다 힘드니까
일주일에 하루라도, 토요일에, 아이들하고 밥을 같이 먹는 겁니다. 

거기서 아이들의 인격이 다 세워지고 정서가 깊어집니다. 
그러면 그 아이들과 밥을 먹으면서 
이 자녀가 정말 이런 신앙인, 이런 사회인으로 자라나기를 바란다는 
하나의 상(그림)을 갖고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 상(그림)대로 부모가 삶의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먼저 그 삶을 보여주면서.. 밥을 먹을 때 이야기하는 거지요.

 

이렇게 집의 밥상 머리에서 자녀를 대화를 통해 양육할 때,

특별히 '공생성'과 '자립성'을 염두에 두고서, 자녀를 교육하십시오.

 

◑1. 공생하는 자녀로 키우십시오
                  
*관련설교 : 자립성과 공생성 1 http://blog.daum.net/rfcdrfcd/15975204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려고 하는 그 율법사가 
'선생님, 율법 중에 어떤 율법이 제일 커요?'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대답이든지 하면, 올무에 빠지는 겁니다.

모세오경에 있는 율법의 조항을, 
그 율법사들은 613개 조항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율법 중에 '뭐 뭐 하지 마라' 는 소극적인 명령을 365개, 
'이거 이것 하라' 라는 적극적인 명령을 248개로 분류하고, 
율법사(신학박사)들끼리 매일 앉아서 '어떤 계명이 더 크냐?' 하고
갑론을박을 벌였습니다. 그 질문을 예수님한테 던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만약에 'A가 제일 크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당장 '그러면 B는 안 크다는 말이네요?' 
이러고 이제 시비를 걸 수 있는 거죠. 

근데 그 질문을 받으신 주님께서 마22:37~40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신6:5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레19:18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여기서 첫째, 둘째 하니까
둘째가 첫째보다 덜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둘째도 첫째와 똑같은 비중을 가진 중요한 말씀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는 아직 신약성경이 없었습니다. 구약만 있었어요.
'온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 성경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 두 계명이 (구약)성경의 핵심이라는 말인데,
신구약성경의 핵심이라고 말해도 됩니다.

'성경'이라는 집이, 하나님 사람과, 사람 사랑이라는   
이 두 기둥 위에 지어졌다는 뜻입니다.   *공생성

율법사들이 더 이상 입도 벙긋 못 했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에 압도당한 거지요. 

성경의 핵심은 우리더러 이웃을 사랑하라는 겁니다.
나만 사랑하는 게 아니라, 저 사람 즉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불어 공생하는 겁니다. 

자녀에게 공생성을 가르치려면
어려서부터 교통질서 준수 등 준법정신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법을 어기면, 그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 되거든요..

중략

그리고 아이와 밥을 먹을 때, 이런 얘기를 한 번 나눠 보십시오.
'너희 반에 혹시 가난하거나 밥을 못 먹는 아이는 없니?'
'너는 그 아이를 어떻게 대하니?
친구들이 그 아이를 안 놀리니?
내일 네가 학교 갈 때, 그 아이에게 간식 하나 네가 살짝 갖다주면 어떨까?'

이런 대화를 통해서, 자녀들 마음속에 다른 사람을 품는 마음을 확장시켜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각자가 기도하는 것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웃과 구역식구와 친구와 친척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만, 
진정 이웃을 사랑하며, 공생성을 가진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와 자기 집만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은, 공생성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2. 자립하는 자녀로 키우십시오

 

자립성과 공생성 2http://blog.daum.net/rfcdrfcd/15975207

자립성과 공생성 3http://blog.daum.net/rfcdrfcd/15975209


자립하지 않으면, 타인과 공생을 못 합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우리에게, 또한 우리 자녀들이
자립할 것을 명령합니다.  

레19:9~10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이 명령은 '시혜자의 법칙'입니다. 은혜를 베푸는 사람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추수하다 남은 것은

나그네들, 오늘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몫이니까 가만히 두라고 하십니다.

그럼 참 이상하죠. 그럼 하나님의 이 명령대로 
밭모퉁이 곡식들을 내가 다 따로 모으고, 
내가 이삭을 옮기다가 떨어진 거 다 모아서 창고에 보관해 두었다가 
가난한 사람들 오면 내가 나눠 주면 되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미운 놈은 안 주거든요. 
하나님은 우리 속을 아시는 겁니다. 

 

그러니 '너는 그냥 내버려 둬, 네가 미운사람도 나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야.
네 밭에는 그 사람이 먹을 몫도 있어!' 시혜자의 법칙입니다.

'보혜자의 법칙'도 있습니다. 은혜를 받는 사람을 법칙. 
신23:24~25절 '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는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되느니라 
그러나 그릇에 담지는 말 것이요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명령하시는 그 근저의 정신이 뭐예요?

만약 그렇지 않고, 남의 밭이나 포도원에 가서
자기가 가져오고 싶은 만큼 다 가져와 버리면
그 사람은 평생 남한테 빌붙어 사는 걸인이 될 겁니다. 
자립성을 가진 사람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걸인이 되길 원치 않습니다. 
'네가 살다가 어려운 고비를 만났니? 
한 끼를 해결하지 못 하니? 
그러면 남의 밭에 들어가서 도움을 받아라. 
그러나 그것은 네가 자립하기 위함이야!
평생 그렇게 남에게 피해 주며 살면 안 돼!'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해가지고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는데 
40년 동안 농사를 짓지 않았는데도, 하늘에서 만나가 내렸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광야에서도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해도 매일 만나가 떨어졌다면 
그보다 더 비옥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손가락 까딱 안 해도, 꿀도 나오고, 무슨 우유도 나오고.. 다 나와야지요. 

그런데 수5:10~12 '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니까 원주민들이 농사지었던 농산물들이 있었지요. 
그 농산물들을 먹은 다음 날부터, 하늘에서 만나가 안 내려왔어요. 

그 해에는 막 들어갔으니까 농사는 못 짓고
땅에서 지금 솟아나 있는 농작물을 먹었는데 
그 다음 해부터는 땀 흘리고 땅을 갈며 농사 지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의 땅은 무위도식의 땅이 아니라 
땀 흘리고, 스스로 자립하고, 일해야 되는 땅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자립인"이 되지 않으면 
"공생인"이 되지 못할 뿐더러
일평생 "기생인"으로 삽니다. 

여러분들 자식들이 50~60세가 되었는데도 
80, 90 되는 부모님 돈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그렇게 키워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자식들에게 줄 수 있는 부모의 가장 큰 선물은 
자립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돈이 좀 있어, 내가 여유가 있어, 네가 원하는 거, 내가 다 해 줄게!' 
부모가 아무리 그렇게 자식을 사랑해도 
하나님의 법칙은, 부모가 먼저 죽는 겁니다. 

자립심을 키우지 못한 자식을 두고, 부모가 먼저 죽으면 
그 자식은 어떻게 살까요?

유대인들이 자식들에게 물고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자립하도록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 준다는 것처럼 
자녀에게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걸 가르쳐 줘야 됩니다. 

▲1. 자립이라는 것은 첫째로 <경제적 자립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 경제적 자립은,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처럼 
내가 필요로 하는 만큼의 경제력을 내가 얻어낼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건 세상 사람들이 얘기하는 경제적인 자립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자립은
나한테 주어진 경제적 여건에 나를 맞추어서 자족하게 사는 겁니다. 
그게 경제적 자립입니다. 

나한테 주어진 경제적 여건에 나를 맞추어서 자족하게 사는 '경제적 자립인'이 못 되면
그 사람이 공무원 되면 뇌물 받게 됩니다. 

내가 필요로 하는 만큼의 돈이 있어야 되니까 
내 직위를 이용해서 내가 필요로 하는 만큼의 돈을 거두어야 되는 겁니다.

'내게 주어진 경제적 여건에 나를 맞추어 넣는' 자립인이 되면 
그런 공무원은 세상을 바꿀 겁니다. 

빌4:11~13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13절이 아주 유명하죠. 한국 신자들은 거의 다 외웁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런데 이 13절은, 11~12절과 한데 묶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11~13절을 한꺼번에 이해해야 합니다. 

한꺼번에 이해하면, 이런 말입니다. 
바울이 11~12절을 통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나는 말이야, 정말 찢어지게 가난한 할 때도 있었어! 
나는 경제적으로 좀 여유가 있을 때도 있었어! 

그런데 나는 내가 가난하다고 비굴해지지 않았고 
내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고 교만하지 않고 
언제든지 내게 주어지는 경제적 여건에 
나를 맞출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어!

그랬더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었어!'

무슨 얘기입니까? 
'내가 돈에서 자유해지니까, 하나님 안에서 내가 못할 것이 없었어!' 

 

왜 오늘날 교인들이 힘이 없습니까?
돈의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내가 필요로 하는 돈이 더 중요해요. 
늘 이걸로 뭘 얻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 '경제적인 자립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경제적으로 자식을 도와줄 수 있지만 
자식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자기에게 주어진 경제적인 여건에 자기를 맞추어 갈 때 
그 자식의 삶 속에 창의력이 생기는 겁니다. 

그 헝그리 정신 속에서, 이 세상의 모든 도전을 이겨낼 수 있는 
인내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 자식들이 새로운 길을 만드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네가 얼마 필요해? 아빠가 다 줄게. 너 돈은 걱정하지 마,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그런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돈을 쓰고, 자기 인생을 탕진하는 경우는 
세상에서 정말 많이 볼 수 있고요, 

그런 자식들이 세상을 새롭게 한 경우는
저는 73세가 되기까지, 아직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2. 두 번째는 <행위의 자립>입니다. 
내 자식이 지나간 자리는, 다른 사람이 치우지 않도록 
내 자식이 행위의 자립인이 되게 해야 합니다.

'저 사람이 지나가면 뭔가 내가 치워야 돼' 
사람들은 그 사람하고 공생하려고 안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더불어 사는 데도 
'행위의 자립' 없이는, 하나님도 어쩔 수 없습니다.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약1: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행위의 자립인이 안 되면, 여러분은 일평생 입으로만 예수를 믿게 됩니다. 
내가 행위의 자립인이 될 때, 
내 손과 발이,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서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겁니다. 
우리 자식들이 그렇게 되어야 됩니다.

▲3. 세 번째로 우리 자식들이 <의식의 자립인>이 되어야 됩니다.
생각의 자립인 입니다.

이 세상에는 진정한 자립에 걸림돌이 되는 
그릇된 풍조나 관습이 만연해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에는 그릇된 체면문화가 세상을 지배합니다. 
'아휴 뭐 나이 한 50되고, 사회생활을 어느 정도 했으면 
아파트 한 40평은 살아야 돼!' 
거기 안 살면 체면 구기고, 괜히 열등감 느끼는 겁니다.

'내가 이 정도 되면, 자동차도 고급 승용차 타야지!' 합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에 기름 한 방울 안 나는데 
우리 나라처럼 길거리에 대형차 많은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저는 한 60개 국을 여행을 해봤는데요. 그런 나라는 대한민국 밖에 없습니다. 체면문화!
그래서 우리는 얼마나 옷을 화려하게 입습니까? 

의식이 자립이 안 되어 있으니까, 남의 눈에 종속되어 있는 겁니다.
내가 이런 옷을 입고, 이런 핸드백을 들어야
남 앞에 가서 내가 체면이 서는 겁니다.

우리 자식들이, 남의 눈에 종속되는.. 그런 의식의 비자유인이 아니라 
우리 자식들이, 
'내가 비록 지금은 경제적인 여건이 좋지 않아서 
내가 남루한 옷을 입고, 쪽방에 살아도 
중요한 것은 나야!'

이런 사람이 세상을 바꿉니다. 

▲4. 자립 일이 된다는 것은 <영적인 자립인>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이 주일 날 예배에 참석해서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거는 
한 주간을 살아가는 총론을 듣는 겁니다.

그 총론의 바탕에서, '매일매일 현장에 삶 속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건 씨름하면서, 하나님께 질문하면서, 내가 스스로 찾아야 됩니다. 
이게 영적 자립입니다. 

내가 뭘 하든지, 기도 많이 하는 권사님께 꼬치꼬치 물어보고 하는 사람, 
목사님하고 상담하고 한다는 사람, 
'영적인 자립인'이 되지 않아서 그런 겁니다.

여러분, 편의점을 경영하는 점주가 계시면 
적어도 편의점을 경영하는 데는 그분이 전문인 아닙니까? 
그 분이 교구 목사랑, 편의점에 대해 상담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 자식이 영적 자립인이 되지 못해서 
일평생 어떤 목사, 어떤 장로, 어떤 권사, 어떤 선교회 리더에게 종속되어서 
사사건건 그 사람한테 전화하고 의논해서 
그 사람이 하라는 대로 인생을 살아간다면.. 여러분 그건 비극입니다.

식탁에서 이야기하면서 
내 아이들이 질문하고, 부모가 코치하면서 
영적 자립인이 되게 해 줘야 합니다. 

◑공생인이며 동시에 자립인이었던 소년 다윗 

 

오늘 본문 잠시 보겠습니다. 
사무엘상 17:12~19절입니다. 

이새의 8아들 중에, 위에 3 아들이 전쟁터에 나갔으면, 
집에는 다윗 외에, 4명의 아들이 집에 더 있었습니다.

:15 '다윗은 사울에게로 왕래하며 베들레헴에서 그의 아버지의 양을 칠 때에'

 '다윗은 사울에게로 왕래하며'
사울은 가끔씩 악귀에 시달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저 베들레헴에는 다윗이라는 소년이 있는데 
그 소년이 수금을 타면, 얼마나 영흠한지 악귀가 물러갑니다'

그래서 다윗이 소환되어, 사울왕 앞에서 수금을 타면서 노래를 했더니 
진짜 서울 왕을 옥죄던 악귀가 물러갔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도 종종 악귀가 사울 왕을 괴롭히면 
사울 왕이 다윗을 왕궁으로 부르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에게로 왕래하며'가 그뜻입니다.
이미 이때 다윗은 영적 자립인이었던 거죠.

 

영적으로 다윗은 누구에게 예속된 사람이 아니라
영적으로 다윗은 다른 사람의 영을 맑게 해 줄 수 있는
자기 만의 영혼을 지닌 사람이었죠.

그러면 다윗이 사울 왕에게 안 갈 때는 
베들레헴에서 그의 아버지의 양을 쳤습니다.

집에는 지금 다윗 말고 4명의 형이 더 있습니다. 
근데 다윗이 오면, 다윗이 양을 쳐야 했습니다. 

그러니 다른 4명의 형은 놀고 있었고, 
다윗은 양도 치고, 사울 왕에게 가서 수금을 타고, 
또 아버지 심부름으로 전장에 형들에게 음식 전달해 주러 갔습니다.
1인 삼역을 감당한 거죠.

 

이렇게 다윗은 '의식의 자립인', '영적인 자립인' 이었습니다.

여러분, 다윗이 집에 있으면, 그래도 식사를 잘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양을 치러 나가면, 가져간 큰 빵 덩어리 찢어서 먹는 거 말고는
다른 음식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주어진 조건에 자족하는 '경제적 자립인'으로 훈련받는 것입니다.

다윗은 형들에게 음식을 주러 심부름을 갔는데
당시 이스라엘은 나라가 정비가 안 돼서, 군대도 제대로 없었고
각자 집에서 일하다가 군대로 호출되면, 
먹을 음식도 자기가 싸서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골리앗과의 전쟁이 길어지니까, 아버지 이새가 염려해서
다윗에게 형들이 먹을 음식을 전달하게 시킨 것입니다.

다윗은 혼자서 볶은 곡식 한 에바 (22리터)와 떡 열 덩이와 치즈 열 덩이를 운반했습니다.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입니다. 삼상17:17~18

전쟁터는 엘라 골짜기였고, 베들레헴에서 거기까지는 20킬로가 넘습니다.
하루 종일 걸어야 하는 거리입니다.
결코 쉬운 심부름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집에 4명의 형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명을 받아서, 전장터인 엘라 골짜기로 묵묵히 떠났던 이유는
그의 마음에 형들을 사랑하는, 염려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즉 다윗은 공생인의 삶, 공생인의 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이것 좀 힘들더라도 전쟁터에서 내 형들이 음식을 먹고 
전쟁을 잘 버텨낼 수 있다면..' 내가 힘들어도 가는 겁니다. 

여러분 이때 벌써 다윗은 
이미 완벽한 공생인 과 자립인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다윗을 들어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역사 지평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다윗이 이 즈음에 제일 잘한 게 뭔지 아십니까? 
골리앗 장군을 이긴 게 아닙니다.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 무거운 걸 짊어지고 전쟁터로 간 겁니다. 
이때 순종 했기 때문에 
전쟁터에 가서 골리앗을 보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을 보고 
분노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맞서서 골리앗을 물리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자녀를 공생인과 자립인으로 키우는 것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어제는 수능일 이었습니다.
집집마다 희비가 엇갈릴 것 같아요. 그러면 거기에 너무 연연해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 자녀들에게 실패할 권리를 주십시오. 
실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그보다 자립인이 되기에 더 좋은 과정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스펙을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공생성과 자립성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들어서 쓰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미래는 그냥 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가 토막난 것처럼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우리의 과거 미래 현재는 한데 붙어 있습니다. 

새로운 미래가 여러분들에게 오게 하려면, 지금부터 뭔가를 해야 합니다. 
지금 구태의연하게 살면서, 미래에 내 자녀가 새로워질 것이다.. 
절대로 새로워 지지 않습니다. 학교 공부로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자녀와 같이 밥 먹으면서 그 아이들에게
여러분의 신앙으로 자립성과 공생성을 길러 주십시오. 

그러면 미래는.. 지금 여러분을 식탁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선생님들도 자격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 우리는 아무런 자격증도 없이 부모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부족함은 생각하지도 않고, 
우리의 생각대로 자식을, 내가 만든 틀 속에 구겨 넣으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온전한 원석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우리가 잘못 셑팅해 온 것을 용서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지금부터 세상의 스펙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자식들에게 자립성과 공생성을
길러주는 부모가 되게 해주십시오. 

어린 시절부터 자립성과 공생성을 지녔던 다윗을 통해
이스라엘 역사의 지평을 새롭게 하셨던 것처럼 
공생성과 자립성을 길러가는 우리 자녀를 통해 
대한민국 미래의 역사를 새롭게 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 시간이 이제 우리 가정의 식탁에서부터 시작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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