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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은@ 빈들에 임한다. 눅3:1~2

by 【고동엽】 2022.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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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은 빈들에 임한다.       눅3:1~2       10.12.25.설교녹취

 

 

눅3:1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2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비교되는 두 부류의 등장인물

 

본문 눅3:1~2절에는 총 8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 8명은 아래 두 그룹으로 나누어지는데,

'제1인자들 그룹' 과 '빈들의 야인'이다.      *야인 :野人 광야의 사람

 

▲'제1인자들 그룹' 

이 그룹에는 7명이 속하는데, 그 7명은 참 대단한 사람들이다.

명실상부 각계의 1인자들이다.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①디베료 가이사

그는 2천 년 전 지중해 세계에서 최대 최고의 제국이었던

대로마 제국의 티베리우스 황제다.

그의 모든 말이 법이었고, 제국 내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생사여탈권을 지닌

절대 권력자였다.

 

그는 모든 백성들로부터 신으로 경배 받는 사람이었고,

자신이 살고 있던 황궁의 곳간에는, 세계 곳곳에서 모아들인 금은보화가 가득했다.

그는 명실공히 지중해 세계의 제 1인자였다.

 

②빌라도 총독

그는 주후 26년 티베리우스 로마 황제에 의해서,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받았다.

그는 이스라엘 땅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의 총사령관이었다.

로마 총독은

유대 땅에서 로마 정부에 바쳐지는 모든 세금에 대한 징세권을 지닌 권력자였다.

 

그는 또 대제사장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었고,

유대 땅에서 벌어지는 모든 송사에 대한 최종 판결자이었다.

'유대 땅에서' 빌라도 총독은, 명실상부한 제 1인자였다.

 

③헤롯 안티파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죽이려 했던 헤롯 대왕 Herod the Great

의 아들이다.

그는 당시 갈릴리의 분봉왕이었다.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분봉왕이란 로마 황제의 허락을 받아서,

로마 황제를 대신해서 한 지역을 다스리던 지방 왕을 뜻한다.

 

비록 신분상으로는 로마 황제의 신하였지만,

그러나 자기 통치 구역 내에서는,

헤롯 안티파스는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는 '갈릴리 땅'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제 1인자였다.

 

④헤롯 빌립

역시 헤롯 대왕의 아들이자, 위 헤롯 안티파스의 동생이다.

헤롯 빌립은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이었다.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은 갈릴리 북동쪽에 있는 광활한 영토였다.

헤롯 빌립은 그 광활한 영토 내에서 제 1인자였던 것이다.

 

⑤루사니아

루사니아는 아빌레네 왕국의 분봉왕이었다.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아빌레네 왕국은 헤롯 빌립이 통치하던 이두래의 북쪽에 위치한 분봉왕국이었다.

따라서 루사니아 역시, 자기 왕국에서는 제 1인자였다.

 

⑥안나스 ⑦가야바

눅3:2절은, 이 두 사람을 가리켜 모두 대제사장 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본래 이스라엘 땅에는 대제사장은 1명만 있어야 했다.

그러나 대제사장 안나스가, 자신이 대제사장 직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로마 총독에게 뇌물을 주고, 자기 사위를 대제사장으로 대신 내세웠다.

 

그리고 사위 가야바 뒤에서, 안나스 자신이 대제사장의 모든 종교권력을 마구 휘둘렀다.

그래서 본문은, 안나스와 그의 사위 가야바, 두 사람을 모두 대제사장으로 부르고 있다.

 

대제사장은 유대교의 최고지도자이다.

유대교 내에서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대리인이고, 그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처럼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유대교 내에 속해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대제사장의 영향력은

로마 황제의 영향력보다 더 컸다.

대제사장들은 그와 같은 자신의 직책과 권한을 이용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분봉왕 헤롯이나 빌라도 총독이 조금도 부럽지 않은 부귀영화를 누렸다.

 

대제사장인 안나스와 가야바 역시 유대교 내에서는 제 1인자로 군림하던 사람들이었다.

 

위의 7명은 크던 작던 자기 영토 혹은 자기 분야에서

제 1인자로 군림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절대 권력과 입신양명을 누리는 사람들이었다.

자기 영토 혹은 자기 분야에서 최고로 출세하고 성공한 사람들이었고,

당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으로 추앙받던 사람들이었다.

 

▲빈들의 야인

그러나 '제1인자들 그룹'과는 달리, 두 번째 그룹에는 단 한 사람만 속해 있다.

그의 이름은 세례요한이다.

 

세례 요한의 행색을 살펴보면, ('면면'이란 말보다는, 어쩌면 '행색'이란 말이 더 어울린다.)

'제 1인자들 그룹'에 속해있는 7명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민망한 모습이다.

 

'1인자들 그룹'에 속해 있는 7명은 화려한 왕궁이나 대저택에서 살았다.

그러나 세례요한에게는 변변한 움막 하나 없었다.

빈들이 침실이요, 하늘이 지붕이었다.

 

'1인자들 그룹'에 속해 있는 7명은 계절, 유행, 장소에 따라서 명품 옷을 바꾸어 입었다.

그러나 빈들의 세례요한은 낙타털옷에 가죽띠를 띤 것이 고작이었다. 마3:4

그 옷 한 벌이, 외출복인 동시에, 잠옷이기도 했다.

 

'1인자들 그룹'의 7명은, 끼니때 마다 진귀한 음식으로 진수성찬을 즐겼다.

그러나 빈들의 세례요한의 주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다. 마3:4

'1인자들 그룹' 사람들의 식탁에 비하면, 차마 식탁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다.

 

'1인자들 그룹'에 속한 7명은, 정치권력이든, 종교권력이든,

모두 절대 권력을 장악한 절대 권력자들이었다.

그러나 빈들의 세례요한에게는, 권력의 '권'자도 붙어있지 않았다.

 

'1인자들 그룹'의 7명은, 모두 자기 영토, 자기 분야에서 제 1인자로 군림하던 자들이었음에 반하여,

빈들에서 낙타털옷 한 벌로 평생을 사는 세례요한은, 가장 밑바닥 인생이나 다름없었다.

 

더욱이 '1인자들 그룹'과 빈들의 야인 세례요한은,

숫자상으로 7:1의 비율이었다. 본문 누가복음은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총8명 가운데 7명을 차지하고 있는 그 7명은,

당시의 유행이었고, 여론이었고, 상징이었다.

 

그 7명에 비하면, 빈들의 세례요한은, 시대에 뒤떨어져도 한참 뒤떨어진

초라한 밑바닥 인생일 뿐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빈들에 임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눅3:2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에서 제각각 제 1인자의 자리에서 군림하고 있던

'제 1인자 그룹' 7명에게 임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화려한 왕궁이나 대제사장의 대저택에 임하시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빈들에서 보잘것없이 살아가는 세례요한에게 임하셨다.

 

빈들의 세례요한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은,

이어지는 4~6절, 이제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시작될 것이다.. 라는 내용이었다.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말씀만 받은 것이 아니었다.

본문에 뒤이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예수님이 그리스도 되심'을 가장 먼저 알아보고,

예수님을 향해, 메시아라고 외쳤던 첫 번째 인물이기도 했다.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인가?

왜 하나님의 말씀은 제 1인자의 자리에서 군림하고 있던

'1인자 그룹' 7명에게 임하시지 않았는가?

왜 그들은 먼저 메시아를 알아볼 수 없었을까?

그들이 가진 금권, 인맥, 정보통을 통해서.. 더 먼저 알아볼 수 있었을 터인데..

 

또한 왜 그들은,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을 함께 공모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는가?

 

-그들은 모두 이 세상에서 가장 잘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예외 없이 자기 영토, 자기 분야에서 제 1인자들이었다.

그들의 생각과 말이 곧 법이었고, 그들의 모든 행동은 당시 사회에서 규범이 되었다.

그들의 행위는 언제나 정당했고, 정의는 항상 그들 편이라고 여겼다.

 

그럼으로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것은, 아예 꿈에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임하실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가진 것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금력까지고 갖고 있었다.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불가능은 없어보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달리 구원자를 필요로 할 이유가 없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는 그들 자신이, 자신들에 대한 구원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땅에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임하실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임하실만한 빈자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설교문의 주제를 '빈 들'에 맞추고 있으므로, 아래 단락 점프 가능)

그러나 그들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자신들에게도 언젠가 불현듯 죽음이 덮친다는 사실이었다.

 

언젠가 느닷없이 죽음이 덮치면,

죄의 문제를 해결함 없이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바로 설 수 없고,

세상의 권력이나 금력으로는,

자신들의 죄를 결코 깨끗이 씻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그들은 무지했던 것이다.  

 

그들은 세상의 이치와 물정에는 누구보다도 밝았다.

누구와 결탁해야 자신들의 권력이 더 견고해 질 것인지,

어떻게 해야 더 많은 금력을 축적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들은 탁월한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불행하게도 (무지했던 것은)

죽음 앞에서는.. 출세도, 입신양명도, 권력도, 부귀영화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

그 모든 것들은 한 순간 인간의 욕망이나 쾌락을 채워주는 수단은 될 수 있을지언정,

인간의 코끝에서 호흡이 멎는 순간, 절대로 인간을 공동묘지 너머로

자신을 인도해 줄 수 없다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니 그들은 그 중요한 사실을 알려고 하지조차 않았다.

그들이 세상에서 누리고 있는 지위와 소유가, 너무나도 높고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기 영토, 자기 분야에서 제 1인자로 군림했던 그들의 최후는,

모두 비참하게 끝나고 말았다.

 

▲그들의 비참한 최후

①로마 제국의 티베리우스 황제는, 말년에 정신이상이 생겨서,

지중해 카프리 섬에서 은둔 생활을 하다가, 주후 37년 그 섬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지중해 세계 최고의 직인, 대로마 제국의 황제직이

티베리우스의 정신 건강을 지켜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를 은둔폐인으로 만들었다.

 

②빌라도 총독은, 몇 년 지나서 파면당하고, 로마로 되돌아가

로마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증언하고 있다.

 

유대 땅에서 제 1인자로 군림했던 로마 총독직이  (주후 26~36년 재직)

빌라도의 자연 수명마저 보장해 줄 수는 없었다.

 

③헤롯 안티파스와 ④헤롯 빌립은,

살아생전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저주를 받다가,

그들의 자식 대에 헤롯 왕조가 역사에서 멸절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⑤아빌레네의 분봉왕 루사니아는

그의 당대에 그의 왕국과 함께 멸망당해 버리고 말았다.

 

⑥대제사장 안나스와 ⑦가야바는

<예수전>을 쓴 르낭의 지적처럼 온 인류로부터 저주받은 가장 비참한 인간으로

그 생이 끝나고 말았다.

 

그들은 살아생전에 모두 자기 영토, 자기 분야에서

제 1인자로 군림했던 사람들이었다.

절대 권력과 금력을 장악했던 사람들이었다.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의인인 것처럼 보였다.

그들에게는 불가능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이 지닌 것 가운데 그 무엇도,

그들의 비참한 최후로부터, 그들을 건져내 주지는 못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없는 그들의 공통된 최후였다.

 

▲반면에 왜 하나님의 말씀이 세례 요한에게 임하셨을까?

세례요한은 빈들의 사람, 다시 말해서 그 심령 속에 빈들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낙타 털옷 한 벌에, 빈들에서 마치 밑바닥과 같은 인생을 살던 세례요한은,

자신의 부족함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소유한 것이 너무 없었다.

믿을 구석이라고는 그 자신에게 하나도 없었기에,

세례요한은 누구보다도 메시아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세례요한은 빈자리 투성이인 사람이었다.

 

그의 심령은 온통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빈들이었다.

그 심령의 빈들 속으로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또한 육신으로 임하셨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하신 말씀도.. 같은 맥락이다. 마5:3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택하신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엘리트들이 아니라,

갈릴리의 무식한 어부들을 당신의 제자로 선택하셨다.

스스로 믿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그들의 심령이

온통 예수님께서 거하시기에 충분한 빈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주 사역지가

모자라는 것 투성이인 빈 갈릴리였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2천 년 전 예수님은 빈들의 세례요한에게 임하셨듯이,

오늘날에도 예수님께서는 어김없이 그 심령이 빈들인 사람들에게 임하신다.

 

마음이 비워져야, 그 빈 공간에,

예수님께서 임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

예수님 없는 제 1인자의 자리보다, 예수님 임하신 빈들이 더 귀한 자리임을 일깨워 주소서,

예수님 없이 세상 모든 것을 지닌 사람보다,

심령의 빈들에 예수님을 모신 사람이 더 부자임을 깨닫게 해 주소서. 

 

예수님의 말씀이 빈들의 세례요한에게 임하시고,

당신의 길을 예비하게 하셨고,

빈 마음을 지닌 갈릴리의 미천한 어부들을

당신의 제자로 택하셨음을 잊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날마다 우리 심령이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것들을 신봉하지 않는,

빈 들빈 갈릴리가 되게 해 주소서.

그리하여 예수님을 향해 가난하고 비어있는 심령 속에, 주님의 말씀이 날마다 임하게 하소서.  ▣ 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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