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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이란 이름의 우상@ 삼하6:1~8, 왕하18:4

by 【고동엽】 2022.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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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이란 이름의 우상      삼하6:1~8, 왕하18:4     2021.11.18. 출처

*출처의 10분부터 녹취    

◑놋뱀 우상이 7백년이나 지속되다

 

여러분 왜 불뱀인가요?   *fiery serpent, 민21:8
그 뱀이 얼마나 독한지, 물리면 온 몸이 불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불뱀입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불뱀에 물려서 죽게 되었을 때 
그들은 또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모세야, 놋으로 뱀을 만들어라. 
그리고 그 놋뱀을 장대 위에 높이 메달아라.
누구든지 지금 불뱀에 물려서 아무리 상황이 악화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 놋뱀을 쳐다보는 사람들은 다 나을 것이다.'

여러분, 불뱀은 사막, 광야의 땅 위에 기는 동물입니다.
불뱀이 기어다니는 땅만 보고 살면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고도 원망 투성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놋뱀을 만들어서 장대 위에 달라고 하셨는가요? 
왜 장대위에 있는 놋뱀을 올려다 봐야 치유가 된다고 말씀하셨는가요? 

땅위에 있는 불뱀에 물려서 죽게된 사람이 
장대 위에 놋뱀을 보려면, 고개를 들어서 하늘로 향해야 합니다

하늘로 향하면, 하나님이 보입니다.
땅에 있는 불뱀만 보면, 모든 것이 원망거리이고 
나는 지금 현실에 파묻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고개를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 믿음을 회복한 사람은 다 살았습니다. 

이를 테면, 하나님께서는 땅만보고 살아가는 그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안을 열어주시기 위해서 
일회용으로 사용하신 것이 놋뱀이었던 것입니다. 
그건 단 일회성, 유효성으로 끝난 겁니다. 

▲근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놋뱀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걸 들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자기네들이 고개를 들어서 그것을 보았을 때 
불뱀에 물렸던 독이 다 해독됐거든요. 

그 놋뱀 자체가 신성한 성물이 됐습니다. 
사람들이 그 놋뱀 앞에서 분향하고 숭배했습니다. 몇 년 동안? 
무려 7백년 동안! 

누가 그 놋뱀을 없애버렸는가요?
히스기야 왕이 그 놋뱀을 파쇄했습니다. 

그리고 그 깨어진 놋조각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면서 
'자 똑바로 보세요. 이건 느후스단입니다. 이건 놋조각에 불과합니다.' 왕하18:4
그리고 내다버렸습니다.       *느후스단 : 놋쇠로 만들어진 것 a thing of brass

여러분 그 7백년 동안에 이스라엘을 거쳐간 제사장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율법사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생명 없는 무생물 놋뱀을
무려 7백년 동안 경배하는 것을,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그것이 "전통"이라는 이라는 이름의 우상으로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권위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법궤를 70년 지킨 아비나답 가문의 전통

오늘 본문이 전통이라는 이름의 우상이
한 번 권위를 발하기 시작하면 
얼마나 막강한 권위를 인간에게 발휘하는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삼상 도입부에 등장하는 대제사장 엘리는 늙고 무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 때 온갖 악행을 다 저질렀는데 
이 즈음에 블레셋과 전쟁할 때, 실로에 모셔져 있던 법궤를 전장터에 메고 나갔다가
법궤를 블레셋에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도 그 전쟁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법궤를, 이스라엘이 마치 부적처럼 사용했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법궤로 인해 블레셋 땅에 큰 재앙이 일어나자
결국은 6개월 후에, 그 법궤를 이스라엘 땅 벳세메스로 되돌려 보냅니다.

그런데 벳세메스 사람들이 법궤를 함부로 대하여
그 돌아온 법궤 속을 들여다 보다가, 70명이 죽었습니다. 삼상6:19

그래서 벳세메스 사람들은 법궤를 기럇여아림으로 보내버립니다. 삼상6:21

기럇여아림 동네 사람들도 하나님의 법궤를 보고는,  
법궤가 자기 동네 마을에 온 것은, 굉장히 기쁜 일인데 
혹시 자기네들이 잘못해서 이 법궤 때문에 
벳세메스 사람들처럼 무슨 화를 당할 지 모르겠거든요. 

그래서 법궤를 마을 한 가운데 둔 게 아니라 
기럇여아림의 저 산 위에, 외딴 곳에 있는 집 한 채,
거기에 살고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보내서, 아비나답 집에서 법궤를 돌보게 했습니다.

레위인 아비나답은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 엘리아살에게 그 법궤를 지키게 했습니다.  삼상7:1

그리고 70년이 흘렀습니다. 
여러분은 70년동안 하나님의 법궤가 아비나답 집에 모셔져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의 집이 성소입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아비나답의 아들 엘리아살이 지켰습니다.

이제 법궤에 관한 한, 아비나답 집안의 가족들 외에
그 누구도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전통'이 형성되었다는 뜻입니다.
법궤는, 당연히 아비나답 가문이 지키는 것! .. 이 (이상한) 전통이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이제 다윗이 왕이 되고
법궤가 아직까지도 아비나답 집에 안치 되어있다는 얘기를 듣고
자기가 사는 다윗 성에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 오고자 했습니다.

본문 삼하6:1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다시 모으고'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 성에 모셔오기 위한 오직 그 한 가지 목적으로
삼만 명의 호위병을 편성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에 대해서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지극정성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2 '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기럇여아림의 옛 이름)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메어 오려 하니'
하나님의 법궤는 반드시 레위인이 어깨에 메고 와야 한다는 사실을
다윗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법궤를 메어오려고 했습니다.  *민4:18

민4:18절에 법궤와 관련해서 하나님이 두 가지 명령을 내리셨는데
-법궤는 반드시 사람이 메는데, 아론의 아들 중 고핫 자손이 메어야 하고
-그 하나님의 법궤를 누구든지 임의로 만지면 죽는다.. 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공지하셨습니다. 
그러니 다윗은 그걸 알고, '법궤를 메어오려고' 한 것입니다. 삼하6:2

다윗이 동원한 3만명 중에는 고핫 자손도 포함되어 있었겠죠.
그 이외에는 제사장들, 기물을 운반하는 레위인들, 또 호위병들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메어오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거기로 갔습니다.

삼하6:3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그들이'
이들은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입니다.
원래는 아비나답의 손자이지만, 
히브리어 '아들'(벤)은 손자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지난 70년 동안 아비나답 - 엘리아살 - 웃사와 아효
이렇게 3대에 걸쳐, 법궤를 돌보아왔던 것입니다.

지금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메어오기 위해서
3만명의 사람을 데리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갔는데

그 소식을 듣고서, 아비나답의 집에서, 웃사와 아효
그 동안 법궤를 지키고 있었던 그 레위인 형제가
하나님의 법궤를 새 수레에 싣고 나오는 겁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몰라서 새 수레에 실었다면,
웃사와 아효는 유대인이요, 레위인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의 궤를 자기들 딴에는 정성들인다고, 
헌수레가 아니라 새수레를 만들어서, 그 새 수레 위에 하나님의 궤를 싣고서
자기 집에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웃사와 아효가 하나님의 법궤를
마치 물건짝처럼 수레에 실어서, 소를 몰고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다윗은 왜 그 장면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을까요?
왜냐면 법궤에 관한 한, 아비나답 가문이 지킨다는
전통이란 우상이 견고하게 세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 전통 앞에서는
왕이 입도 벙긋 못했습니다. 
다윗도 법궤에 관한 한, 레위인 아비나답 가문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왜냐면 그 가문은 70년 동안이나 전통적으로 법궤를 관리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 전통 앞에, 다윗도 그냥 어떨결에 인정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삼하6:4 '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가고

지금 법궤를 실은 새 수레가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고 있는데,
동생 아효가 수레 앞에서 갔습니다. 소를 몰았죠. :3

형 웃사는 수레 뒤에 서서 갑니다. 
수레 뒤에 서면, (일례로 장례 행렬에 연결지어 보면) 제일 돋보이는 자리입니다.
그렇게 당당하게 웃사가 법궤를 앞세우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5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

참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웃사와 아효가 그 전통이라는 권위를 갖고
어깨에 메어야 될 법궤를, 임의로 수레에 싣고 나오고 있습니다. 

다윗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 내가 모르는 사이에 성막 법이 바뀌었나?'  

그리고 그 시간에 대동했던 악사들이 막 연주를 시작하니
다윗은 더 이상 제대로 생각할 틈이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법궤를 실은 수레가 한 가운데 있고
삼만 명이나 되는 거대한 무리들과 호위병들이, 전후좌우에서 호위하며 행진합니다. 

그럼 이 거대한 행진 무리들 가운데서, 제일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당연히 법궤 뒤를 따라가는 웃사입니다. 아효는 앞에서 갔고요. 

:6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이 행렬이 나곤의 타작 마당이란 곳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소들이 뛰었습니다.
여러분, 소는 말처럼 뛰어오르는 짐승이 아닙니다.

그런데 소가 수레를 끌고 가다가, 뛰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거짓선지자 발람에게, 하나님께서 나귀를 통해서 경고하셨듯이
이 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것입니다. 
'웃사, 너 그러면 안 돼!
다윗 너 뭐하고 있니, 구경만 하는 거냐?'

그래서 소가 뛴 것입니다. 

여러분, 말은 원래 질주하는 본성이 있으므로, 뛰어도 높이 뜁니다. 
그러나 소는 뛰는 습성도 없거니와, 뛰어도 높이 뛰지 못합니다. 
(봄에 들판에 나오면 기뻐서, 소도 뛰는 때가 있다고 합니다)  *말4:2

그런데 갑자기 소가 뛰니까, 
웃사가 자기 손을 들어서,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습니다. :6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죠.

여기서 '붙들다'는 히브리어로 아하즈 인데
이것은 특별히 자기 소유를 붙잡는 동작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어느 상점에 가서
거기 진열된 물건들을 쭈욱 훑어보면서 
'어떤 걸 내가 살까?'하고 일이 저리 한번 붙잡아 보는 것.. 이건 아하즈가 아닙니다.

근데 거기에 진열된 물건들 중에 보니까, 제 물건이 하나 있어요. 
'이건 내 건데?' 하면서 제가 그걸 잡았습니다. 이게 아하즈 입니다. 
'내 거야'하면서 잡는다는 뜻입니다.

소가 뛰니까, 웃사가 그냥 법궤를 잡은 게 아닙니다.
'이것 내 거야' 하면서 마치 주인이 된 것처럼, 웃사는 법궤를 붙잡았던 것입니다. 

: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마치 자기가 그 법궤의 주인인 것처럼 '내 거야'하고 붙잡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웃사를 죽이셨습니다.

여러분, 옛날 수레는 높이가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높이가 약 60센티 됩니다.
법궤는 길이가 114센티, 넓이와 높이가 동일하게 68센티 입니다.

그래서 수레 높이 60센티, 법궤 높이 68센티.. 
그러면 뒤에서 웃사가 법궤를 따라갈 때, 아마 법궤를 내려다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웃사는 하나님의 법궤를 내려다보면서, 
소들이 뛸 때, 마치 '법궤는 내 거야!' 하면서 붙들었을 것입니다.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웃사를 치시니, 궤 옆에서 죽었습니다.
땅바닥으로 고꾸라졌겠지요.
  
:8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여러분, 그 광경을 보고 
다윗이 분했다 to be hot, furious, burn, become angry고 했습니다. 뭐 때문일까요?

첫째는, 아효와 웃사가 하나님의 법궤를 수레에 실어나오는 그 엉뚱한 짓을 했는데도
그 70년 전통이란 권위에 억눌려서, 말 한 마디도 하지 못했던
자기 자신에 대해 분노했고,

두번째는, 하나님의 법궤와 온 백성을 농락했던 웃사에 대해 분노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베레스 웃사'라고 불렀습니다.      *웃사는 strength 란 뜻
베레스는 친다, 웃사는 사람이름.. 하나님이 웃사를 치셨다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아비나답 가문에서
법궤에 관한한, 아비나답 가문이 뭘 어떻게 해도
그게 다 맞다는.. 전통이라는 이름의 우상을
하나님께서 치신 것입니다. 

인간이 해결하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해결해 버리십니다. 

그 '전통'이라는 이름의 우상이
70년 동안 형성된 것입니다. 

지금 제가 설교하고 있는 이 교회 역사는 127년입니다.
본문의 70년 역사의 약 2배에 해당합니다.

그러면 이 OO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전통이라는 이름의 우상을 세워놓고
다들 말하지 않고, 그 권위에 압도당하고 있는 것은 혹시 아닌지요?
여러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베레스 웃사를 제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베레스 웃사 하십니다. 즉 전통을 치십니다.

◑이 시간에는 범 한국 교회적으로 
반드시 제거해야 될 <전통이라는 이름의 우상>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직분의 서열화, 직분의 계급화, 직분의 권력화>라는 전통의 우상입니다.

▲한국 장로교회 교인들은, 거의 99%가 장로교회의 효시를
존 칼빈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16세기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혁운동을 했던 존 칼빈(프. 쟝 칼뱅)이
장로교회를 세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존 칼빈은 장로교회를 세운 적이 없습니다.
존 칼빈은 스위스에서 개혁을 하면서
자기가 이끄는 교회의 이름을 Reformed Church 개혁교회 라고 불렀습니다.

그 부패한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의해서,
왜곡된 교회와 세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개혁하는데
교회의 방점을 찍었습니다. 
모든 교회의 목적과 목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개혁하는데 있었습니다.

그 개혁의 통로로, 존 칼빈은 교회에 4개의 직분을 두었습니다.
-목사 :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성례전을 집전하고, 교회를 이끄는 직분입니다.
-교사 : 존 칼빈의 개혁교회에서 교사는, 오늘날의 교회학교 교사와 본질적으로 달랐어요.
개혁교회에서 교사는, 신학을 반드시 전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교사는, 박사 혹은 교수로 불렸습니다.

-장로 : 목사와 함께 치리와 권징을 행하고
목사를 지원하는 직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존 칼빈의 개혁교회에서, 장로는 항존직이 아니었습니다.
1년 임기의 임시직이었습니다. 

모든 장로는, 1년마다 신임을 받아야 했습니다.
신임을 만약 못 받으면, 관두어야 했습니다. 

-집사 : 집사는 제네바 시에 소속되어 있는 병원, 복지시설, 교회에서 봉사하는
직분이었습니다. 

존 칼빈은 바로 이 4개의 직분으로
교황 1인체제의 독선과 오만에 맞서는
대의(교인의 대표) 체제를 만든 것입니다. 
민주적인 대의 체제로 모든 교인들의 의사가 반영되도록 제도를 만들었어요.

존 칼빈이 목사와 장로들로 구성되는 컨시스트리 라는 협의체를 만들었지만
장로가 다른 직분보다 더 비중이 커서가 아니라
장로 역시 대의 체제의 일환이었을 뿐입니다.

왜냐면 그 때의 장로는, 1년 임시직이었거든요.

존 칼빈은 '개혁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이것을 강조했습니다.
한 번 교회가 개혁되었다고 멈추면, 죄성을 가진 인간들의 이해집단으로
전락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날마다 개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죠.

이처럼 존 칼빈의 개혁교회는, 교회의 방점이 개혁에 있었기 때문에
어떤 직분도, 계급화, 서열화, 권력화가 있을 수 없었고
어떤 특정인도 교회를 좌지우지 할 수 없었습니다.
그건 개혁에 반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존 칼빈과 동시대에 스코틀랜드에서도 종교개혁이 있었습니다.
그 구심점은 존 낙스였습니다.

메리 여왕이 즉위하고나서 개신교도들에 대한 대 박해가 시작되자
존 낙스가 망명 길에 올랐다가
스위스 제네바에 들러서, 잠시 존 칼빈 곁에서 개혁운동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칼빈의 개혁교회를 몸소 상세하게 배웠습니다.

그 후에 낙스는 스코틀랜드로 돌아가서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교회를 조직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스위스 제네바에서 배웠던 칼빈의 개혁교회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칼빈의 개혁교회는 목사, 교사, 장로, 집사의 네 직분이 있었는데
낙스는 그 중에서 교사를 빼버렸습니다.
그래서 목사, 장로, 집사의 세 직분만 두었습니다.  

목사도 장로거든요.
장로들 중에서 '가르치는 장로'가 목사였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의 이름을, Presbyterian Church 장로교회 라고 불렀습니다.
장로교회라는 이름은 결코 칼빈이 만든 게 아닙니다. 
존 낙스가 '장로교회'라고 명명했습니다. 

그리고 이 존 낙스의 장로교회가 대서양을 건너서 미국으로 갔고
그 장로교회가 미국에서 태평양을 건너서 한국으로 진출했습니다.

그러니까 장로교회의 (제도적) 효시는, 존 칼빈이 아니고, 존 낙스입니다. 

▲그런데 칼빈의 개혁교회는, 교회의 방점을 '개혁'에 두었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교회가 부패되기 어려웠지만, 

존 낙스의 장로교회는 처음부터 방점을 '장로'에 두었습니다.
교회의 가장 큰 비중을 장로에 두었습니다.
장로교회는 처음부터 인적 타락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장로교회 하다 보니까, 
일반 사회인과의 접점이 전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장로교회 교인이니까, 장로교회 라는 말이 조금도 이상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대한 예수교 목사교회'.. 여러분이 지금 웃으시는데요
그런 교회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대한 예수교 목사교회'가 존재한다면, 그게 시사하는 바가 뭡니까?
목사가 자기들끼리 다 한다는 교회 아닙니까.
다른 사람들 끼어들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 됩니다. 

만약에 '대한 예수교 권사교회' .. 이런 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대한 예수교 집사교회' ..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대한 예수교 장로교회' .. 하나도 이상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전통 때문입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도, 장로의 절대 권위를 내세우는 장로교회를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스코틀랜드에서도 장로교회는 오래지 않아 거의 소멸되어 갔습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목숨을 걸고, 대서양을 건넜던 사람들입니다.  

내가 교회에 가는데, 장로 라는 직분을 절대시해서 '장로교회'가 있다면
자유분방한 사고를 가진 미국 사람들이 누가 그런 교회에 가겠습니까?

그래서 미국 장로교회는 처음부터 군소교단이었습니다. 

북장로교회, 남장로교회가 있다가
서로 교세가 약해지니까, 서로 합쳤습니다. 

그리고 이 장로교회가 갖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장로는 20대 대표도 장로가 되고, 
30대 대표도 장로가 되고 
장로를 직능 대표제로 바꿨습니다. 요즘도 그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연합장로교회 PCUSA 의 
작년 (2020)의 총 교인 숫자가 124만명입니다. 
여기엔 한국교포 교인들 숫자도 다 포함된 통계입니다.

(*지금 이 설교는, 장로교회의 제도적 문제점을 지적한다기 보다는
장로교회 시스템이 역사적으로 검증된 가장 안정된 교회 정치 제도임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절대화" 했을 때, 발생될 수 있는 문제점을 다루고 있는 것이지
장로교회 시스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님. 다만 "절대화" 하지는 말라는 뜻인듯 합니다/편)

한국에 예수교 장로교회 통합측 250만명
합동측 250만명
두 교단만 더해도 5백만 명입니다.

미국 인구가 3억3천만 명인데
그 중에 장로교인이 124만명 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이 미국 장로교회가 140년 전에 한국에 들어와서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였습니다. 

한국의 유교적 가부장 제도에, 장로교회 시스템이 딱 드러맞았습니다.
그래서 장로가, 원래 취지를 벗어나 계급이 되고, 서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장로교회 제도가 한국에서는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국 문화와 잘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지금 한국에는 장로교회 교단이 약 3백개 있다고 합니다.
장로교회 간판을 달아야 교인들이 모인다고 합니다.

본래 감리교회와 침례교회는 장로 제도가 없습니다.
감리회는 속장과 권사 밖에 없습니다.
감리회 권사는 남자, 여자가 다 합니다.

그런데 한국 감리교회, 침례교회에.. 다 장로가 존재합니다.
장로 없이는, 한국에서 교회가 안 되는 것입니다. 
계급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장로가 계급이 되니까, 서리집사 위에 안수집사 있고, 권사 있고, 장로 있고
본의 아니게 계급이 되어버렸습니다. 

여러분, 종교개혁의 핵심이 만인제사장 설인데
입술로는 만인제사장이라 운운하지만, 교회에는 계급이 엄연히 존재합니다.

성도 중에서 '가르치는 장로'가 목사입니다.
그리고 '권징과 치리하는 장로', 누가 헤게모니를 장악할 것인가?
교회마다 분쟁이 있지 않습니까?

장로들 사이에 다툼이 있지 않습니까?
왜 다툼이 생깁니까?
그게 계급이고, 서열이고, 권력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장로가 계급이다 보니까, 지금 통합측에서는 여자에게도 안수해서 장로직을 주지만
그 전에 남자에게 장로라는 최고의 계급이 있는데
여자에게도 최고의 계급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교회에만 있는 여자 권사직이 생겼습니다.
남자 장로에 대비해서 생긴 여성 최고직입니다.

여러분, 장로와 안수집사 투표를 하는데
은연 중에 또는 공개적으로 왜 선거운동을 하십니까?

선거운동 해서 뽑히는 장로, 안수집사가 
정말 성경이 말씀하는 종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런데도 선거 운동합니다. 왜요? 계급이고, 권력이 되었으니까요.

교회 직분이 계급이고, 권력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이거 쉽게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당회에서 장로 후보를 아예 내는 교회가 있습니다.
첫번째 조건이 뭡니까? 십일조를 제대로 내는가?

장로 되고 싶으면, 봉투에 이름 써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게 아닙니다.

당회원들 보라고, 
'나 이렇게 십일조 내고 있어요.
나중에 장로 후보 세울 때, 나도 뽑아주세요..' 하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과연 교회의 본모습인가요?
직분의 계급화, 서열화, 권력화.. 라는 이 '전통'이라는 이름의 우상이
한국교회를 압도하고 있는데

다윗 왕이 웃사와 아효가 수레에 법궤를 싣고 나오는 것을
보고도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들의 잘못을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라고 생각하면서도, 이 문제를 고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전통'이라는 우상의 권위가 너무 막강하거든요.

제가 단언합니다. 직분이 계급이 된 교회,
직분이 서열화되고, 권력이 된 교회는
절대로 성경이 말하는 주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공생애를 마치시고,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려고 하십니다.

그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에게
내가 모독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이다'
이렇게 당신의 죽음을 세 번 예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동안 보여주셨던 그 신통한 능력, 
그 능력이면, 예수님께서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로마제국을 물리치고 집권하게 되실 거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려고 올라가는데
그 길 위에서, 요한과 야고보 형제가 예수님께 은밀하게 찾아와서 청탁했습니다.

'예수님, 예루살렘에 가면, 우리 두 형제를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이 집권하시면, 중직을 달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다른 제자들이, 그 두 사람이 예수님께 청탁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들을 화를 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인데
제자들은 그 곁에서 '네가 더 높아, 내가 더 높지..
네가 더 커? 내가 더 크지!'
이렇게 계급싸움, 서열싸움, 권력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마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막10: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들 지금 보고 있지? 저기 봐, 저 세상 지도자들이
백성들 위에서 마음대로 군림하고 있지?
왜냐면 자기의 계급이나 지위가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의 권력이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너희 눈으로 지금 보고 있잖아?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들이 내 제자라면, 너희는 저렇게 하면 안 돼!
너희가 저렇게 하면, 내 제자가 아니야!

진짜 너희가 제일 높은 자가 되고 싶니?
그러면 너희는 섬기는 자가 되어라!

여러분, 한국교회에서 '섬긴다'는 말이 요즘 타락했습니다.
섬기지도 않으면서 섬긴다는 말을 씁니다.

주님께서 섬기는 자가 되라.. 하신 말씀은 
'디아코노스' 즉 하인이 되고, 일꾼이 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지나가다가 뭐 커피 한 잔 사주고는 '내가 저 분을 섬겼다'고 하는데요
그게 아닙니다. 그분의 하인이 되라는, 일꾼이 되라는 뜻입니다.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너희들이 가장 높은 자가 되기 원한다면
종(둘로스)이 되거라!

그래서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이 말도 한국교회에서는 스포일 되어 있습니다.
목사를 가리켜 '우리 종님' 그럽니다.

세상에 그런 종님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이 말씀하신 둘로스는 노예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 프랑스성경, 전부 다 slave 노예라고 썼습니다. *servant와 비교요 

너희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아니?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얘들아,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았단다.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내가 왔어!

'대속물'을 속전이라는 뜻입니다.
예전에는 노예시장이 있어서, 노예를 돈 받고 팔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 보니까, 노예가 한 명 있는데 
정말 일을 잘 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면 노예상에게 값을 지불하고 데려옵니다. 그게 바로 '속전'입니다.
자유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속전만 치르면 말이죠.

정말 볼 품도 없고, 온갖 나쁜 짓 다한 노예가 지금 노예시장에 서 있는데
노예상인한테 '여보게, 내가 저 친구 대신해서 내가 평생 노예로 살 게,
그러니 저 노예를 풀어주게!'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 분이 우리가 죽어야 될 십자가에서, 제물로 그분이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얘들아, 내가 온 것은 그 일을 하러 온 거야
너희들이 내 제자들이라면, 너희들은 이렇게 계급 다툼, 서열 다툼 하면 안 돼!
서로의 하인이 되거라! 서로의 일꾼이 되어줘!
서로에게 노예가 되어주어라!'

여러분, 지금 주님의 이 말씀에 비하면,
권력화되고, 서열화된 한국교회 직분제는
바른 교회가 맞습니까?

▲요한복음15장 포도나무의 비유는, 흔히 교회론의 비유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는 농부, 나는 포도나무, 너희는 가지다.
너희가 내 안에 붙어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
나한테서 떨어져나가면 말라서 버리워서 불 타 없어질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가 주님께 붙어있어야 생명의 열매를 맺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주님께서 언급하신 포도나무를 포함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나무들은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땅에서 나무 줄기가 올라오지요.
그 줄기에서 첫번째 가지가 나옵니다.
그 첫번째 가지는, 세월이 흘러갈수록 그 나무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한 가지가 됩니다.

두번째 나무가지가 나옵니다. 
첫번째 나무가지가 '야, 너는 내 밑으로 들어와라, 내가 너 위야'
세번째 나무가지보고도 '너도 내 밑으로 내려가'

여러분, 먼저 나온 가지들이, 내가 더 크고 강하다고
나무의 높은 윗자리를 만약 차지한다고 하면
그 나무는 먼저 나온 가지들의 무게 때문에, 쓰러지고 맙니다. (역삼각형 처럼 되어서)

세상의 조직들이 오래 안 가고 다 꺾어집니다.
왜냐면 오래된 사람들이 윗자리를 계속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무를 보십시오.
제일 먼저 나온 가지가, 크고 강한 가지이지만
아무리 세월이 흘러가도 제일 밑바닥에 자리잡습니다.

그 다음 가지는, 그 뒤에 자리를 잡고요.
나무 꼭대기에는 항상 제일 늦게 나온 여린 가지가 자리 잡습니다.
예수님 말씀하고 똑 같지요.

너희들이 정말 크고 강한 사람이 되기 원하느냐?
그러면 하인이 되라!
나무는 그 말씀대로 행합니다. 
그래서 이 자연은 그렇게 아름답습니다.

강한 것들이, 큰 것들이 아래서, 밑에서
디아코노스(섬김)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래서 버텨 줄게, 위에서 마음껏 놀아라'
그래서 태풍이 불어도 견디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게 교회입니다.

▲이 교회의 역사가 127년이라고 했습니다.
그동안 한국교회에 많은 좋은 영향력을 미쳐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 직분제의 서열화, 계급화, 권력화라는 전통의 우상화가
이렇게 견고하게 자리잡는데
이 교회도 혹시 일조하지는 않았습니까?

여러분, 이대로 주님께서는 '너희들이 크고 강한 자일수록
크기를 원하면 하인이 되라'고 하시는데

전부 장로, 집사, 권사를 계급으로 알고
서로 높아지려고 하는 이런 교회를
앞으로도 10년 20년 이어가시렵니까?

이제 이 우상을 깨뜨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저는 올해 73세입니다.
제가 이 강단에서 여러분들과 만나서 이야기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수 있습니다.

제가 사는 거창 집의 바로 앞 집은 보살이 삽니다.
불교에서는 우리 교회의 집사님을.. 보살님이라 부릅니다.

그 남편은 불교에서도 처사님이라 하는데요
그 처사님이 며칠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 집회 오기 전에
장례식장으로 보살님 한테 조문을 갔습니다.

보살님의 그러셨습니다.
'남편이 휴휴휴휴 숨 네 번 크게 들이쉬고는 가셨습니다'

여러분, 죽음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내 쉰 숨을 다시 못 들이키면,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죽음은 늘 코끝에 달려있다'고 말합니다.
코 끝에서 호흡이 멎으면 죽는 것입니다. 오늘 밤일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생명의 속전, 십자가의 속전을 
당신이 스스로 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데

단 한 번만 사는 인생입니다.
여러분, 우리 코 끝에 호흡이 있는 동안에
우리가 진짜 예수쟁이로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위를 둘러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 말씀 위에 올려두고 있는 
'전통'이라는 우상이 참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 7백년이 지나서야 히스기야가 놋뱀을 깨뜨렸던 것처럼
우리 삶속에서 깨뜨려야 할 놋뱀들을, 미련 없이 깨뜨리게 해 주십시오.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가
세상의 조직이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너희들이 크고 싶으냐, 그러면 하인이 되거라
으뜸이 되고 싶으냐, 그러면 노예가 되거라
웬지 알지? 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본을 보이지 않았니?'
이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진짜 교회 되게 해 주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내가 속한 교회를 진짜 교회로 일구는
진짜 예수쟁이로 살다가
주님이 부르시는 날, 주님 품에 안기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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