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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 (로마서 8:22~27)
탄식을 인생이 허무하다고 해서 한숨이나 쉬는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은 옳지 못한 생각입니다. 탄식은 그 이상의 깊은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을 통해서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지 않습니까?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만 탄식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탄식하며 몸의 속량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또한 말 못하는 피조물도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고 계신다고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이 탄식하며 간구하고 계십니다.
요즘 사람들은 아무리 바쁘더라도 밤 9시가 되면 TV 수상기 앞에 앉아 있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무리 하루의 일과가 힘들고 그로 인해서 지쳤더라도 TV 뉴스 시청에 거의 한 시간 이상을 투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난 후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한결같이 한숨을 쉬며 탄식합니다. “에이, 이 못된 세상...” 사람들은 뉴스를 통해서 전쟁, 폭력, 술수, 배신 등 절망스러운 사건들을 늘 접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사람들은 또 무엇을 찾습니까? 신문부터 찾고 있지 않습니까? 신문인들 어디 좋은 소식만 전해 줍니까? “이러다가 다 망하고 말지... 정말 희망이 없어...” 결국 아침부터 장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루는 고통과 한숨과 탄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항상 이렇게 탄식하고 있습니까? 어째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조차 늘 탄식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현재 받는 고난과 장차 받을 영광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피조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해서 궁극적으로 영광을 얻기 위해서 지금 탄식하고 있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실 불법과 불의가 지배하는 이 세상을 보며 탄식할 마음조차 없다면 돌처럼 굳어진 그 마음은 이미 소망이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경우 장래의 영광을 소유할 가치나 자격도 없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과연 오늘 누가 탄식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왜 탄식하고 있습니까?
먼저 성경은 피조물이 다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피조물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만물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산과 바다, 나무와 꽃들, 대자연의 모든 것들이 다 함께 탄식하며 고통을 겪고 있는 까닭은 바로 인간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무엇을 하셨습니까? 먼저 인간이 살기에 가장 좋은 환경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좋은 환경 가운데서 인간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첫 번 인간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했습니다. 그 결과 땅이 저주를 받지 않았습니까? 때문에 지금까지도 모든 피조물은 우리 인간 때문에 탄식하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주님이 다시 오실 그 날을 고대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사실 작년에도 얼마나 많은 자연 재해가 있었습니까? 이 지구는 심한 대기 오염으로 인해서 점점 더워지고 있습니다. 극지방의 얼음들이 녹아서 해수면은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육지의 면적이 점점 줄어들고 있지 않습니까? 또 매우 빠른 속도로 곳곳에서 사막화 현상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허리케인이 휩쓸어서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태풍 피해 이재민이 발생하지 않았습니까? 초강대국 미국도 대기의 탄식 앞에서는 전혀 손을 쓸 도리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인간은 편리함이라는 명분을 앞세우고 산을 깎아 내리고 바다를 막아 버렸습니다. 골프장을 만들기 위해서 울창한 나무들을 마구 베어 버렸습니다. 고속도로를 건설하기 위해서 생태계를 마구 파괴해 버렸습니다. 도로를 달리는 차에 치어 죽은 수많은 고라니, 토끼, 노루, 사슴... 그 동물들은 먹이를 찾기 위해서 길을 건너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어떤 신문 기자가 도로 갓길에 튕겨 나와 죽어가고 있는 고라니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말 없는 짐승도 표정은 있다. 그 표정은 인간을 원망하고 있는 것 같다.”
만물을 조용히 바라보며 믿음을 가지고 귀를 열면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산도 탄식하며 바다도 탄식하고 있습니다. 나무들도 탄식하며 심지어 바위들도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 탄식 소리는 마치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라고 독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다음으로 성경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까지도 속으로 탄식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자녀들도 육적으로는 죽을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육적인 구원의 완성을 기다리며 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가 매우 크지만 그 은혜를 받기 위해서 준비한 우리의 그릇이 너무나 작기 때문에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원하지 않는 불법과 불의와 타락과 부패의 소용돌이 속으로 종종 휩쓸려 들어가기 까닭에 또한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 주시고 많은 증인들 앞에서 그 관계를 확증하셨는데 그 놀라운 사랑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못난 모습을 보며 또한 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죄 때문에 탄식하게 됩니다. 범죄한 우리가 죄의 종 노릇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탄식할 수 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주님이 오셔서 이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온전히 속량해 주실 것을 고대하며 계속 탄식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성경은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친히 우리를 위하여 탄식하신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어떤 신학자들은 성령은 결코 탄식하실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성령이 다만 우리로 하여금 탄식하게 하실 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성령은 분명히 탄식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너무도 연약한 존재이고 또 스스로 빌 바를 알지도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성령이 친히 탄식하며 간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이 보실 때 우리는 현재 겪고 있는 고통도 제대로 이겨 낼 수 없는 지극히 연약한 존재입니다. 뿐만 아니라 시험이 닥칠 것 같으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어린 아이와도 같습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간구해야 할지도 모르고 또 마땅히 빌 바도 알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인간이 왜 이렇게 어리석은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모세와 같이 위대한 지도자도 자기 자신이 출애굽한 히브리 노예들을 직접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사도 바울도 역시 자기 몸의 가시를 제거해 주실 것을 세 번씩이나 간청하지 않았습니까? 인간의 그릇된 욕심을 좇다 보니 하나님의 뜻을 모르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있어서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인지도 모르게 됩니다. 때문에 성령이 우리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성령이 친히 도우시는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령이 친히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고 계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찬송가에 6.25 사변으로 인해서 황폐해진 세상을 보며 탄식하는 시가 있습니다. 찬송가 256장 1절입니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 소리 들려온다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헤매이며 탕자처럼 기진하니 믿는 자여 어이할고?” 전쟁으로 모두 다 파괴되어 신음할 수밖에 없었던 이 땅, 구원을 고대하며 탄식하는 성도들, 그들을 돌보시는 성령, 모두가 탄식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떻습니까? 전쟁의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었고 이제 먹고 살 만큼 되지 않았습니까? 여름철이면 반드시 피서를 가고 겨울철이면 반드시 스키장을 찾는 지금은 과연 어떻습니까? 우리 곁에서 탄식 소리가 다 사라졌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조용히 귀를 기울이면 모든 피조물이 다 함께 고통을 당하며 함께 탄식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교회를 외면하고 있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는 모습을 보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탄식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간구하고 계신 성령의 탄식 소리가 들려오지 않습니까? 오늘 성령 강림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를 위한 성령의 탄식 소리를 듣고 자기를 부인하고 그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기 자신을 온전히 맡김으로 말미암아 장차 누릴 그 영광의 자유를 지금 여기서부터 마음껏 누리는 참으로 복된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강석공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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