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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지도자의 자질 (딤전3:1- 7)
이기선 목사님은 일제시대에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혀서 고생했습니다. 한 번은 경찰국장이 자기 방으로 불렀습니다. 경찰국장이 일어나서 이 목사를 맞았습니다.
“이 목사님, 연세도 많으신 분을 이렇게 고생을 시켜드려서 죄송합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좋은 의자에 앉혀드리고 차도 한 잔 대접했습니다. 그리고 경찰국장이 편지 하나를 내 놓았습니다. 그 편지는 미국서 공부하여 공학박사가 된 큰 아들 정근이 보낸 편지였습니다. 이 목사는 편지를 뜯어보고 아무 표정도 없이 다시 책상 위에 척 놓았습니다. 내용은 다른 목사들은 다 신사참배를 하고 편안히 사는데 아버님만은 신사참배를 반대하면서 고생하실 것이 무엇이냐면서 겉으로는 신사참배를 하고 속마음으로만 안 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아드님 편지를 받으니 생각이 어떠하십니까?” 경찰국장이 물었습니다. 이 목사는 담담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 지식으로 말하면 나는 지식이 많지 않지만 아들은 세계가 알아주는 공학박사이니 지식적으로 보면 내 선생격 입니다. 그러므로 사제의 관계로만 본다면 그 청을 들어주는 것이 옳을 것이고, 또 혈육의 관계인 부자간의 입장에서만 생각한대도 그 요청을 들어주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적으로 말하면 이 사람은 평신도이고 나는 이 사람을 지도하는 목사입니다. 그러므로 이 신사참배 문제는 신앙에 관한 문제이므로 평교인인 아들이 아버지가 고생하는 것이 하도 딱해 보여서 철없이 한 말이니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경찰국장은 “이 목사님은 과연 위대한 분입니다. 목사가 되려면 저런 목사가 되어야 해!” 하며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일본 경찰국장은 그 분을 진심으로 존경했습니다. 비록 믿음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아도 믿음의 정절을 지키며 일신의 평안을 위하여 타협하지 않을 때 뭇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습니다. 신자들은 속사람을 아름답게 단장하여 불신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요즈음 교육계에서나 사회에서 지도자 부재에 대해 탄식을 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세상의 지도자들은 백성들로부터 선택이 되고 선택을 받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의 선택이라는 게 한 인간의 내면의 인격과 성품을 기준한 선택이 아닌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잘 들어주는 세상적 물질적 사역이나 사업의 성취를 기준으로 해서 선택을 하고 있습니다. 고로 그 지도자가 그런 자질에 문제가 있는 것이 드러나면 가차없이 외면을 당하는 것이 세상의 지도자입니다. 그러니까 한 나라의 지도자는 백성들이 원하는 것을 얼마나 잘 들어주느냐 하는 그 자질에 따라 인정을 받거나 외면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의 경우 세상의 지도자처럼 그런 자질에 의해 평가받고 지도자 자격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것이라면 기독교라는 집단의 힘 아래 전통과 교세와 교권으로 결정되고 임명되고 권세를 행사해도 별 문제이겠으나 교회라는 게 본래 그런 곳이 아니기에 다시 한 번 교회 지도자의 자질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리스도의 몸된 것이 교회요,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주관하시고 이끄시는 교회요, 교단이요 신학교라고 강변한다고 해도 오늘날 실제로 배출되고 있는 교회 지도자 후보감들이 스스로가 진정으로 ‘사람에게로서가 아닌 하늘로서’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작금의 교회들의 주 사상의 흐름을 보면 이쪽저쪽으로부터 다 인정을 받아야 하니까 말입니다. 교회의 실정이 이렇다면 과연 세상을 향해 지도자 타령(?)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말세의 교회는 바리새인들처럼 외식에 빠질 것이라고 주님께서 예언을 하셨듯이 지금의 교회들을 보면 온통 세상적이고 육신적이고 임시적이고 가식적인 사역이나 업적을 주목적으로 놓고, 그것을 이루는 것이 믿음이고 신앙이라고 외치고 있으니 이것은 인간 내면의 속 성품이 주님처럼 신령적이고 영적이고 영원적이고 천국적인 인격으로 만들어지는 것과는 무관한 물질성적인 것에 속하는 참 진리운동이 아닌 하나의 종교운동이요 종교활동에 불과한 외식적 신앙인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사람이 만들어지는데 있는 것이지 사역성취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세계에 있는 대형교회 50개중에 반이 대한민국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세계에 내어놓을 만한 봉사자나 기독교적 사상가를 많이 배출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상하게도 인구의 0.3%에 불과한 기독교인을 가지고 있는 일본에게 여러 면에서 뒤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기독교인의 수는 많지만 신앙이 생활화된 기독교인은 별로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만 예수님을 따르는 신자이고 교회 문턱만 벗어나면 교회에서 배운 것을 생활에 연결시키지 못하는 신자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교육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박사는 수없이 많지만 세계적인 수준의 학자는 거의 없습니다. 세계에 내어놓을 만한 우리 고유의 책도 별로 없습니다. 이는 우리는 지식교육은 하고 있지만 스스로 생각하고 표현하는 교육은 하고 있지 않다는 표시 같습니다. 우리의 지도자들은 우리 사회의 밑바탕이 생활화된 종교와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층이 두터울 때, 우리가 원하는 개혁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리 제도를 고쳐도 큰 성과를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제도의 개혁을 하여야 하지만 사람이 변하지 않고는 개혁의 참뜻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한국 기독교가 부흥되고 다시 태어나려면 먼저 우리의 교회 지도자들이 거듭나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훌륭한 교회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또는 훌륭한 교회 지도자를 선택하기 위해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과 조건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지도자는 일상생활에서 평상인 보다 모범적이고 흠이 없어야 합니다.
본문 2절에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심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하였습니다. 즉 감독은 거룩하고 존경할 만한 생활의 모범을 보여야 할 뿐 아니라, 자기 가정을 믿음으로 잘 다스려야 하고, 믿지 않는 불신 사회에서도 좋은 평판을 얻고, 교인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올바로 교육시킬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또 성경에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딛1:7-9)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 지도자는 정직하고 잘못을 즉시 회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 같은 분은 그의 사생활에서까지 그 정직함으로 유명하고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한가지 말씀을 드리면은 그가 어느 때 서점으로부터 책을 빌려다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책을 보는 중에 물을 엎질러서 한 쪽에 물이 좀 젖었어요. 물론 말렸지요. 그 다음에 이 책을 돌려줄 때 가서 그 책을 펴주고 "여기에 물이 젖었었는데 지금 말랐습니다만은 제가 이렇게 실수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대가를 스스로 치뤘다는 거 아닙니까? 그 뭐 책에 물 좀 묻었다가 마르면 그만이지 뭐. 아, 접어놓으면 그만이지. 이걸 가지고 가서 여기에 물이 묻어 젖었었습니다, 라고 고백해야만 하는 그의 정직한 마음, 이것이 그의 지도력과 지혜와 용기에 근본이 됐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목회자들이 받은 목회학 박사 학위의 70% 이상이 엉터리 가짜라고 합니다. 외국의 박사 학위 장사꾼들에게는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 목회자들이 가짜 박사 학위의 최고의 단골 고객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일부 대학교에서 가짜 박사학위로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다. 나는 대학에서 가짜 학위를 받은 사람들을 쫓아내듯이 교회에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목사' 보다 '박사' 칭호를 좋아하는 목회자들은 강단을 떠나야 합니다. 그런 목회자들로부터 목회자의 양심이나 목회의 정신을 찾는 다는 것은 한낮에 별을 찾는 것보다 더 힘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 사무엘서에서 하나님이 인정한 위대한 지도자를 만납니다. 다윗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가리켜 "이는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를 고치고 역사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됩니까? 다윗은 무엇보다 자신의 죄에 대해 정직했고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데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그도 그렇게 깨끗한 지도자는 아니었습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목숨 바쳐 충성하는 부하의 아내 밧세바와 간통을 하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그의 남편을 격전지에 보내 간접 살인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허물과 죄를 깨닫고 잘못을 시인하고 철저히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구차한 변명으로 자기 죄를 정당화시키지 않았습니다. 거짓으로 죄를 숨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권력으로 죄를 무마하지 않았습니다. 철저히 회개하고 새로워졌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목사나 교회 지도자에게 퍽 경고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천당문에 서서 천당으로 들어오는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의 구원받은 무리를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얼마 후에 저 멀리 세상에서 목사였던 한 사람이 구원받은 무리에 끼어오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이 너무너무 기뻐서 팔을 벌리고 쫓아 나가서 반가와 하시면서 목을 끌어안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성도들이 예수님께 불평을 하였습니다. "주님, 너무하십니다. 세상에서 목사와 평신도를 구별하시더니 아니 천당에 와서도 그렇게 구별하십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퍽 미안해하시면서 "얘들아, 참 미안하다. 그런데 내 마음을 좀 이해하여 다오. 사실 내가 지금까지 천당에 오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목사는 하나도 만나지 못했다가 지금 이 사람이 처음이야. 그러니 내가 얼마나 반갑겠니?" 세상에서는 목사가 되어 일하고 교회의 지도자 일을 보지마는 예수님 앞에 서게 될 때는 어떨까? 하는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 지도자들이 회복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덕목은 바로 정직과 회개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완전한 사람을 찾지 않습니다. 도리어 자기의 부족함과 잘못을 시인하고 고치고 회개하려는 사람을 찾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을 직시해야 합니다. 지난날의 잘못들을 함께 인정하고 함께 고쳐나가야 합니다. "나는 아무 잘못이 없고 다 너희들 때문이다"라는 고집으로는 새로워질 수 없고 병든 사회를 치유할 수 없습니다. 지도자들이 정직하고 겸손히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하고 철저한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지도자가 될 때, 우리 사회와 교회에 희망이 있습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3:19)
셋째, 지도자는 지혜와 성령이 충만하고 해박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한 단체의 성장은 지도자의 지도능력과 깊은 관계가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 기독인들은 헌금과 십일조는 잘 바치는데 똑똑한 자녀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바치는 데는 인색합니다. 우수한 자녀는 죄수나 환자를 다루는 법관이나 의사 시키려 하고, 열등한 자녀는 영적, 정신적 지도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에 보내고 있습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을 성전의 모퉁이 돌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섭리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한국 기독교 발전에 암적 요소라고 봅니다. 그런데 유의할 점은 성령충만과 함께 해박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의 체험담입니다. 그 목사님은 학식이 풍부하기로 소문난 분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석사과정을 두 학교에서 마쳤고 박사 학위까지 받은 학자였습니다. 공부를 마친 그 분이 한 교회를 담임하게 되었습니다. 1년 동안에 걸쳐 그 교회는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고 힘이 넘쳤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는 힘이 있고 다른 설교자에게서 들을 수 없는 새로운 것들을 들려 주었습니다. 교인들은 설교란 바로 저런 것이라고 감격하며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1년이 넘기 시작하면서 교회는 차츰 생명력을 잃어 가게 되었습니다. 강단의 설교는 아직도 해박한 지성과 학식을 담은 고상한 내용이 계속되고 있었으나, 교인들은 이제 더이상 감동을 받지 않았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는 교인들도 거의 없었습니다. 2년이 지나고부터는 처음보다도 더 힘이 없는 교회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목사님은 교회 부흥의 장애 요소를 찾아 내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목사님은 성경 말씀을 읽다가 어두워졌던 눈이 밝아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즉 말씀이 없는 학문과 지식의 전달과 윤리적인 교훈은 인간 지식의 지평은 넓혀 줄 수 있으나 결코 하나님의 생명을 줄 수는 없음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넷째, 지도자는 겸손하고, 섬기는 자야 합니다.(눅22:23-27, 롬14:18)
사사기9장 8절에서 15절에 나무들이 사는 나라에서 왕을 뽑는 얘기가 나옵니다.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 그리고 포도나무에게 나무들이 왕으로 삼고자 차례로 찾아갔으나 모두 정중히 사양했으나 가시나무는 우쭐대며 폭언까지 해가면서 응했습니다. 군림하는 가시나무 같은 인물을 지도자로 선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낮아지고 섬기신 마음을 본받아 진정 모두를 섬기는 자세를 갖춘 사람을 지도자로 선택해야 합니다.
지도자는 섬기는 가치관을 생활화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지도자가 되겠다는 젊은이들이 지식을 습득하는 데에만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하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 대접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도자들은 남을 위하여 봉사하는 경험도 많이 축적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섬김의 생활은 종교인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육자도, 정치인도, 기업인도 누구를 막론하고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꼭 갖추어야 할 생활의식입니다. 권력을 얻고, 재물을 얻고, 명예를 얻기 위하여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섬기는 삶을 가져 보람있는 삶을 느끼기 위하여 공부도 하고, 정치도 하고, 연구도 하고, 행정도 하고 사업도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지도자는 이웃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 믿음의 형제를 위하여 밤낮 기도하며, 축복하고, 말씀을 통하여 믿음과 지혜를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잘 봉사할 수 있도록 갖출 수 있게 해주고, 영적으로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엡4:11-12) 참된 지도자는 먼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종이 되고 성도를 위하여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요10:11-17)
여섯째, 지도자는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중보자가 되어야 합니다.(출32:11) 신랑되시는 예수님께 신부 되는 정결한 처녀를 중매하는 중매자가 되어야 합니다.(고후11:2) 그리고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여야 합니다. 나는 부족하고 세상은 험해도 하나님만 믿는 담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나를 택하여 주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일곱째, 교회 지도자는 말로써 설교만이 아니라 행함으로 설교해야 합니다.
몇년 전에 나는 연극배우 친구를 가진 어느 목사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배우는 연극이 상연될 때마다 많은 관객을 끌었으며 목사님은 대조적으로 교회에서 몇 사람 되지 않는 교인들에게 설교를 했습니다. 목사님은 배우인 그의 친구에게 "자네는 관객을 많이 끌어들이지만 내 경우는 소수에 불과하네. 그 이유가 뭘까? 자네 말은 꾸며낸 이야기이고 내 말은 불변하는 진리이기 때문일거야"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배우 친구는 "나는 꾸며낸 이야기를 진리인 것처럼 말하고 자네는 진리를 꾸며낸 이야기처럼 말하고 있다네 " 하고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생활태도나 방식을 통하여 또는 주님의 가르침에 대한 이행부족으로 진리를 꾸며낸 이야기로 알리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여덟째, 지도자는 앞을 내다보고 준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뱀이 있었습니다. 뱀의 꼬리는 언제나 머리에 맞붙어 다니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꼬리는 드디어 불만을 터트려 머리에게 대들었습니다. "어째서 나는 언제나 네 뒤에 맹목적으로 맞붙어 다니고 네가 언제나 나를 대신해서 의견을 말하고 방향을 정하느냐? 이건 아주 불공평하다. 나도 말이지 뱀의 일부인데 언제나 노예처럼 붙어다닌다는 것은 이야기가 좀 이상하다." 머리는 응수했습니다. "아니 멍청이 같은 소리 작작해라. 네게는 앞을 살펴 분간할 눈도 없고 위험을 탐지할 귀도 없고 행동을 결정할 두뇌도 없다. 나는 결코 나 때문에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너의 일을 생각하기에 언제나 너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꼬리는 큰 소리로 웃으며 "그런 소리는 실컷 들었다. 어떠한 독재자도 어떠한 압재자도 모두 따르는 자를 위하여 하고 있다고 하는 핑계아래 제멋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머리는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네가 내 역할을 해보렴"했습니다. 꼬리는 기뻐서 이번에는 앞장서서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이내 수채에 떨어져 버렸습니다. 머리가 갖은 수고를 다한 나머지 간신히 수채에서 기어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드디어 조금 나가니 꼬리는 가시투성이인 덤불 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꼬리는 애쓰면 애쓸수록 가시 속에 찡겨서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간신히 머리에게 구조되어 상처를 입으며 가시 수풀에서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꼬리가 또 앞장서서 나가니까 이번에는 불이 타고 있는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점점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다급해진 머리가 필사적으로 구출하려 했으나 때는 늦었습니다. 몸은 태워지고 머리도 함께 죽어버렸습니다. 지도자를 선택할 때에는 언제나 머리를 선택하고 이 꼬리와 같은 자를 선택해서는 안됩니다.
지도자는 미래를 내다보고 준비해야 합니다. 미래는 오늘의 변화를 수용하고 준비하는 자만이 소유할 수 있습니다.
아홉째, 교회 지도자는 자기의 재능을 힘껏 사용하며 교인들에게 본을 보여야 합니다.
이스라엘에 가보면 유다 광야에서 목자와 양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의 모습에서 변하지 않는 한 가지는 목자는 양보다 앞서간다는 것입니다. 한 번은 일단의 양떼를 만났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양 앞에는 아무도 없고 뒤에 한 사람이 따라올 뿐이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저 사람이 목자입니까?”하고 물었더니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저 사람은 목자가 아니고 장사꾼입니다. 시장에서 양을 사다 도살해서 파는 장사꾼이죠” 자세히 보니 장사꾼은 막대기를 든 채 양들의 뒤를 좇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목회 현장에서 자주 묻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나는 지금 양 앞에 가는 목자인가, 뒤에 따라가는 장사꾼인가?” 요한복음 10장 4절 말씀은 목회자들의 리더십이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 자주 인용되는 구절입니다.“목자는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 오되” 말씀대로 목자는 양보다 앞서가며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습니다. 목회자의 목양적 사명과 리더십은 분명 하늘에서 온 것입니다. 피터 와그너의 말대로 목회자는 하늘로부터 목회 지도력(leadership)을 받고 평신도는 그 사역(ministry)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특권은 언제나 책임을 동반합니다. 목자가 양 앞에 간다는 것은 특권이지만 양들에게 무엇인가 보여주면서 앞서가야 한다는 점에서 커다란 책임입니다. 가끔 교회안에서 제자 훈련이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제자 훈련을 보고 배우게 하지 않고 듣고 배우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도들이 잘못하는 것은 대개 목회자들이 잘못하는 것임을 목회자들은 고백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도들이 헌금을 안 하면 대개 목회자가 인색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자기노출을 안 하면 대개 목회자가 숨기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예배를 잘못 드리면 대개 목회자가 예배를 잘못 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보라”고 말하지 않고 “나를 따르라”고만 소리치는 리더십은 예수님이 가르친 리더십이 아닙니다. 존 맥스웰이 말한 것처럼 “리더는 자기가 가는 길을 알고 그 길을 가고 또한 그 길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양들은 오늘도 보고 배울 수 있는 목자를 따릅니다.
목회자도 설교자이기 전에 예배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설교자가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을 뜨겁게 찬양하며 예배하면 그 모습은 성도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어 더욱 큰 감동을 주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설교자의 삶과 예배의 모습 자체를 메시지의 도구로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오순절날 마가 다락방에서 120여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임재를 맛본 후 복음을 역동적으로 전하여 삼 천명을 구원시켰습니다. 설교자이기 전에 성도들과 함께 성령의 임재를 기다린 예배자였던 베드로에게 성령께서 임하시자마자 복음이 놀랍게 선포되고 폭발적인 영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펜사콜라 브라운스 빌 교회의 담임 킬 페트릭 목사는 예배시간에 성도들과 한데 어우러져서 다윗과 같이 역동적으로 춤을 추며 하나님을 찬미합니다. 다윗은 국가의 최고 통수권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법궤가 돌아올 때 심지어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야웨 앞에 뛰놀며 찬양했습니다 (삼하 6장). 다윗은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에는 항상 그 어느 누구보다 앞섰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찬양 하는데에 있어서는 항상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야웨 앞에서 뛰놀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아가는 자기의 예배를 빈정대는 아내 미갈에게 그 보다 더 천한 여김을 당할 지라도 내가 야웨 앞에서 뛰놀겠다는 놀라운 선포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늘 참된 예배자로 있었던 다윗의 때에 이스라엘이 가장 강한 나라를 이루었다는 것을 지도자들은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많은 주의 종들이 자신이 설교할 때 성도들에게 찬송도 뜨겁게 하고 아멘도 크게 하라고 강조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이 그다지 역동적이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에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이, '계집종들과 신하들 앞에서 천히 여김을 당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찬양하리라'고 고백한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순수한 예배자로 나아간다면 부흥은 더욱 앞당겨 질 수 있을 것입니다. 찬양뿐 아니라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들에게 전도하라고 강조하기 전에 자신의 재능을 다 사용하면서 전도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열 번째, 지도자는 큰 꿈과 비전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 지도자가 단순히 설교나 잘하고, 교인 숫자나 늘리고, 교회건물을 아름답고 크게 짓는 외형적인 성장만 꿈꾸고 있다면 그는 소경된 지도자입니다. 참 교회 지도자는 모든 성도에게 주님이 주신 소망과 기쁨과 평안을 충만히 줄 수 있는 비전을 가르치고 보여주어야 하며, 지도자는 목표를 정하고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자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참된 지도자는 찾아보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저마다 자신이야말로 참된 지도자라고 소리를 내지만 우리는 그들에 대하여 속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지도자는 오직 주님에게 속한 자여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분에게만 충성스러운 자가 참된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부디 주님의 의해 인정받는 지도자들이 되시고, 참된 지도자를 선택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한태완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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