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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지도자들이 회개할 때입니다. 마23: 1- 39

by 【고동엽】 2022.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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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지도자들이 회개할 때입니다.  마23: 1- 39


아이가 혼자 제 방에서 장난감벽돌을 가지고 이것을 높이 쌓으면서 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밖에서 들어와 이 아이의 방에 들어갔습니다. 관심을 보이느라고 아이가 하고 있는 일을 유심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옆에 있는 것도 모르고 열심히 벽돌쌓기를 하고 있는 아이를 보고 "너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니?"하고 물어보았습니다. 했더니 이 어린아이가 뒤돌아보면서 손가락을 입에 갖다댑니다. "쉿! 조용히 하세요, 아빠. 지금 교회를 짓고 있어요." 아버지는 깜짝 놀랐습니다. 늘 이 어린 것의 손을 잡고 교회에 다니기는 했지만, 교회에 갔을 때마다 떠들어서 조용히 하라고 주의시킬 정도로 이 아이는 늘 말썽이었는데 이만큼이나 믿음이 생겨 있구나 싶은 것이 자못 대견스러워서 한마디 더 물었습니다. "얘야, 교회에서는 왜 조용히 해야 되느냐?" 아이의 대답은 뜻밖이고 걸작이었습니다. "아빠도 참. 교회에서는 조용해야지요. 사람들이 다 잠들었으니까요. 떠들면 모두들 깨잖아요!" 어린아이를 데리고 교회 나가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갔을 때마다 이 아버지는 잤거든요. 존 것이 아니라 잤어요. 아이가 이걸 보아왔으니 저런 대답을 할 수 밖에요. 교회는 가서 조용히 자는 곳이다. 그러니 떠들지 말아야 된다, 라고 생각해온 것입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세상 모든 문제는 다 사람의 문제입니다. 물론 제도나 법의 문제일 수도 있고 상황이나 환경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다 삶의 문제요, 지도자들의 문제입니다. 수년 전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어떤 목사님이 "성수대교가 무너진 것은 부실 공사 때문이고 부실 공사는 부실한 인간 양심 때문이고 부실한 양심은 부실한 사람의 문제"라고 한 말을 기억합니다.

누군가 "고대교회의 진리운동은 그 지도자가 진리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중세교회의 부패는 중세교회의 지도자들이 부패한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지도자가 온전했을 때 교회가 온전했고 지도자가 부패했을 때 교회도 부패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썩고 병들게 하는 것도 지도자요, 교회를 깨끗하고 능력 있게 하는 것도 지도자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사회의 문제는 정치문제도 아니고 경제문제도 아니라 사람문제, 지도자들의 문제입니다. 정치불신의 원인이 되고 있는 사람이 정치개혁을 말하고 지역감정을 일소하겠다는 사람이 지역감정의 걸림돌이 되고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사람들이 경제를 불안하게 하고 있으니 우리 사회에 서광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목사, 장로들은 명예를 쫓아 신앙양심을 팔고 이익과 권익을 지키려고 추한 정치력을 휘두르고 있으면서 교인들에게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골고다 언덕까지 주를 좇으라"고 가르치는데 우리 교회의 문제가 있습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것은 오늘도 진리지만 많은 지도자들이 윗물은 다 썩어있는데 아랫물 개수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지도자가 변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 사무엘서에서 하나님이 인정한 위대한 지도자를 만납니다. 다윗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가리켜 "이는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를 고치고 역사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됩니까? 다윗은 무엇보다 자신의 죄에 대해 정직했고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데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그도 그렇게 깨끗한 지도자는 아니었습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목숨 바쳐 충성하는 부하의 아내 밧세바와 간통을 하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그의 남편을 격전지에 보내 간접 살인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허물과 죄를 깨닫고 잘못을 시인하고 철저히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구차한 변명으로 자기 죄를 정당화시키지 않았습니다. 거짓으로 죄를 숨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권력으로 죄를 무마하지 않았습니다. 철저히 회개하고 새로워졌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목사나 교회 지도자에게 퍽 경고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천당문에 서서 천당으로 들어오는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의 구원받은 무리를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얼마 후에 저 멀리 세상에서 목사였던 한 사람이 구원받은 무리에 끼어오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이 너무너무 기뻐서 팔을 벌리고 쫓아 나가서 반가와 하시면서 목을 끌어안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성도들이 예수님께 불평을 하였습니다. "주님, 너무하십니다. 세상에서 목사와 평신도를 구별하시더니 아니 천당에 와서도 그렇게 구별하십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퍽 미안해하시면서 "얘들아, 참 미안하다. 그런데 내 마음을 좀 이해하여 다오. 사실 내가 지금까지 천당에 오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목사는 하나도 만나지 못했다가 지금 이 사람이 처음이야. 그러니 내가 얼마나 반갑겠니?" 세상에서는 목사가 되어 일하고 교회의 지도자 일을 보지마는 예수님 앞에 서게 될 때는 어떨까? 하는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 지도자들이 회복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덕목은 바로 회개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완전한 사람을 찾지 않습니다. 도리어 자기의 부족함과 잘못을 시인하고 고치고 회개하려는 사람을 찾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을 직시해야 합니다. 지난날의 잘못들을 함께 인정하고 함께 고쳐나가야 합니다. "나는 아무 잘못이 없고 다 너희들 때문이다"라는 고집으로는 새로워질 수 없고 병든 사회를 치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의 절망이 지도자들 때문이라면 우리 사회의 희망 또한 지도자들에게 있습니다. 지도자들이 겸손히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하고 철저한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지도자가 될 때 우리 사회에 희망이 있습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3:19)

국민일보 독자란에 실린 글을 소개합니다. "혼자 성경을 읽다가 예수님에 대해 궁금해졌습니다. 예수님이 더 알고 싶어졌습니다. 교회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좋아서 교회에 갔습니다.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많을 줄 알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 안에서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습니다. 목사님은 예수님을 잘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 처음에는 예수님을 알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잊어 가는 것 같았습니다. 목사님은 예수님을 가장 닮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분명 목사님은 예수님을 많이 생각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큰바위얼굴'이야기 아시지요? 어니스트는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을 기다립니다. 큰 바위 얼굴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결국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은 어니스트 자신이었지요. 예수님 이야기를 하시는 목사님, 예수님에 대해 많이 생각하시는 목사님, 당연히 예수님을 닮아가고, 예수님 향기가 풍길 것 같은데, ... 예수님의 모습은 어디로 갔습니까? 예수님은 섬기러 오셨다고, 낮아져 오셨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나요? 그런데 목사님은 왜 그렇게 화려한 강단, 높은 강단에 계십니까? 목사님 본심은 그게 아니더라도, 왜 아첨하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묵시적 동의를 나타내시나요? 왜 직언을 하는 사람들은 내 몰고, 아첨하는 사람, 목사님을 예수님과 더 멀어지게 하는 사람, 목사님을 지옥으로 모는 사람들 말에 귀를 기울이시나요? 목사님, 정신차리십시오. 큰 교회 목사님도, 작은 교회 목사님도 정신차리십시오. "성도=돈"이 아닙니다. 이제 분주한 발걸음 멈추십시오. 홀로 고독한 시간 속으로 들어가서 지금까지 삶을 돌아보고 잘못된 많은 부분들을 바로잡으십시오. 교회는 돈놀이 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기업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교회는 성도의 모임,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모임입니다. 예수님 닮은 목사가 되십시오. 왕이 되려 하지 마세요. 사람들의 찬사에 취하지 마세요. 거짓의 사람들을 분별하고, 진실한 성도,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아 세우십시오. 교회를 봉사자로 채우십시오. 교회가 사업장이 되게 하지 마세요. 예수님이 슬피 우십니다. 사람 많이 모였다고 안심하지 마세요.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일, 기뻐하시는 사역을 하세요.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세요. 목사님께 주어진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욕심을 버리십시오. 세상에 대한 미련, 집착, 욕심을 다 비워버리십시오. 세상에서 받은 상, 인정, 칭찬 너무 많으면 하늘 나라에서 받을 게 별로 없어요. 목사님은 많은 일을 했다고 스스로 안심하시겠지만, 그 많은 일은 목사님이 한 게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은 목사님 자신이지요. 우리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게 없습니다. 내가 이만큼 했다고, ... 공로의식에 쌓여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왜 그걸 잊으셨나요? 하나님 일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은혜라는 것을... 왜 자꾸 잊어버리시나요? 왜 자꾸 제일 유명한 목사, 제일 휼륭한 목사, 제일 잘 나가는 목사, 제일 뜨는 목사, 제일 높은 목사가 되려 하시나요? 이제 예수님의 자리에서 내려오십시오. 이제 많은 어린양들의 시선을 예수님께로 돌려놓으십시오. 목사님만 바라보며 절름발이, 불구가 되게 하지말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가장 우선적으로 전해야 할 메시지가 무엇인지 고민해 보세요. 거대한 조직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어린 영혼들, 구원받지 못한 ... 구원받은 척하고 살아가는,... 구원받은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수많은 불쌍한 영혼들이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낮은 자리로 흘러가십시오. 예수님 닮은 목사가 되세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부패는 교회가 막아야 하며 교회의 부패는 목사가 막아야 한다면 과연 "목사 자신의 부패는 누가 막아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나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모든 목사들에게 던지고 싶습니다. 최근 모 시사 일간지에 나타난 특집 기사 “한국형 부패”라는 글을 보면 목사의 부패를 제일 먼저 다루었습니다. 공무원. 교수. 의사. 변호사 등 모든 직업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부패보다도 성직자의 부패가 이 특집을 다루는 기자에게 있어서 가장 충격적이었는지 모릅니다. 그 내용은 어느 부흥사의 부흥회 사례비에 관한 것이었는데 비정상적인 형태로 지급되는 큰 금액이 있다고 지적했고 또한 여러 가지 명목으로 강요된 헌금과 목사는 직결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그러한 내용은 일반적으로 볼 때 객관적 타당성이 있거나 쉽게 동의할 것은 되지 못하나 일부 부흥사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이러한 비리는 실제로 사실인 경우도 있습니다. 최근에 미국을 여행하면서 우리를 싣고 가는 택시 운전사에게 여러 가지 세상 이야기를 하다가 마지막으로 “당신은 크리스천인가.”라는 질문을 가볍게 던져 보았습니다. 이때 나이 많은 이 운전사는 정색을 하면서 교회요. 목사요.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도대체 세상에서 종교의 역할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대뜸 징 베이커와 지미 스와가드와 오랄 로버츠의 이름을 들먹거렸습니다. 아마도 이 운전사는 목사에 대한 심한 배신감에 사로 잡혀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전도하려다가 무엇이라고 대답하기가 궁해진 나는 한참 있다가 웃으면서 “당신은 좋은 목사에 대한 기억은 없고 나쁜 목사에 대한 기억만 있군요”라고 했지만 사실 지금 이 순간까지 찜찜한 여운은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최근에 언론의 보도 기사에서만 아니라 실제로 목사의 자질론에 대한 스스로의 반성과 비판의 소리가 높습니다. 사실 목사의 양심은 한 시대의 도덕적 영적 양심이 되어야 하며 동시에 목사의 삶은 그 시대의 삶의 사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이러한 면에서 실패하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몇 가지 목사의 부패와 타락의 현상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첫째는 목사의 물질적 사고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리에 돈과 물질이 스며든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했지만 실제로 우리들의 목사가 물질적인 성향을 띄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교인의 숫자와 교회당의 크기를 은근히 자랑하거나 강조하고 있는 점입니다. 또한 헌금의 액수와 일년의 예산액에 대한 강한 자부심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예. 우리교회는 금년에 이런 저런 일을 할 수 있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을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의지보다는 헌금액수 교인의 숫자와 몇몇 헌신자들의 지지에 근거해서 말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또한 교회당 건축이나 증축 그리고 교육관이나 수양관이나 교회 묘지에 대한 끊임없는 생각과 계획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 얼마나 물질적 생각에 오염되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장 큰 물질적 증거는 사례비에 대한 태도입니다. 적으면 적은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감사와 은혜로 생각지 못하고 그것을 자기 능력과 헌신에 대한 평가로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또 한가지 가난한 자들과 부한 자들에 대한 태도의 문제입니다. 어쩔 수 없이 부한 자들에게 좀더 친절하고 그들의 대변인 노릇을 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결국 가난한 자들은 교회에서도 소외를 당하고 그들의 문제가 목회자에 의해서 가리워져 있지 않나 하는 문제입니다.

두 번째는 목사의 명예욕에 관한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많은 목사들이 총회나 회의 정치적인 자리에 연연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납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별로 이득이 없는 일인데 머리를 싸 메고 달려옵니다. 또 한가지는 부활절 연합 집회 등 대형 전도 집회의 순서지를 보면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기라성 같은 수많은 목사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는 점입니다. 어떤 실무자에게 이 많은 사람들과 순서를 좀 뺄 수 없느냐고 물었더니 자기 이름이 없으면 그 교회나 교파의 협조가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없는 순서까지 만들어서 이름을 적어 넣는 기현상이 생긴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명함을 보면 별로 중요하지도 않는 직함이 작은 명함에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 자기 이름 석자가 비록 작을지라도 신문지상에 나오기를 바라고 사진까지 나오면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아한다는 점입니다.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목사는 박사를 좋아한다는 유행어를 만들어 낼 정도로 가짜 박사라도 탐을 냈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설교단에서 화려한 박사 까운을 입고 설교하면 아마도 설교가 더욱더 좋아지고 권위가 생긴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세 번째는 목사의 도덕성의 문제입니다. 미국의 T. V 목사들이 돈의 문제나 명예의 문제뿐만 아니라 성 스캔달에 관련되어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T. V를 통하여 유명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문제가 들어 났을 뿐이지 유명하지 않은 사람들의 경우에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사건은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 이런 글을 쓰기가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우리나라 안에서도 아내를 구타하고 교인들과 성적인 스캔들에 관련되어 있는 목사가 한둘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러한 목사의 숫자가 극히 적다고 하더라도 그 하나의 영향력이란 무서울 정도로 크다는 사실입니다. 목사가 정직자의 도덕성이 의심받게 될 때 사실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타락과 부패보다 좀더 본질적인 것은 하나님 대신에 인간을. 성경대신에 다른 사상을 전하는 타락입니다. 이것은 아주 교묘한 것이어서 목사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저지르는 수가 많습니다. 말씀대신에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또한 복음대신에 민주화나 인권신장운동을 펴는 일입니다. 그리고 상대적이고 세상적인 철학이나 사상을 성경의 진리와 섞어서 전하는 타락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타락은 말씀의 타락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부터 모든 부패와 타락이 생겨납니다. 왜 물질과 명예와 쾌락에 노예가 됩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며 말씀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목사의 부패와 타락에는 반드시 사탄의 역사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어쩌면 사탄의 최고의 목표는 한 목사의 타락에 있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많은 교인들을 한꺼번에 실망시키고 타락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목사의 타락은 누가 막아야 합니까. 목사의 타락은 목사 스스로가 막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특별히 신학교 교육의 영적 개혁은 절대로 필요한 일이며 화급을 다투는 일입니다. 일반 사관학교도 술, 담배뿐 아니라 결혼까지도 재학시절에는 금하는데 요즘 신학교는 너무도 방종한다는 평이 있습니다. 성직은 성적순도 아니며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는 것도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신학교 때부터 철저하고 분명한 교육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없거나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결코 목사직이 생계유지나 자기 성취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1:9- 11)

교회와 그리스도를 비웃는 어떤 사람이 목사에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교회에서는 늘 죄의 짐이 무거운 것이라고 얘기하고 또 목사님은 말씀하기를 죄 짐을 벗어 버려야 한다고 하시는데 저는 아무 짐도 못 느끼거든요. 도대체 그 죄 짐이라는 게 얼마나 무게가 나갑니까? 한 50파운드 나가나요? 아니면 백 파운드쯤 되나요?" 이 사람을 이윽고 바라보던 목사가 입을 열어 말을 했습니다. "선생, 만약 여기에 죽은 사람이 한 사람 누워 있다면, 그 위에다 무거운 짐을 올려놓을 때 그 죽은 사람이 무게를 느낄 수 있을까요?"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을 했습니다.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못 느끼지요. 천 파운드의 무게를 올려놓아도 못 느끼지요." 목사는 다시 말했습니다. "선생, 그것과 똑 마찬가지입니다. 선생은 죄 가운데서 죽어있는 상태이기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일명 한센병이라고도 하는 문둥병의 병원균인 나균은 마취 주사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문둥병은 상처를 통해 감염이 되는데, 일단 감염이 되면 통증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온 몸이 흉칙한 모습으로 문드러집니다. 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죄는 아주 작은 모습으로 우리 안으로 침투합니다. 그리고는 우리의 중추신경을 마비시킵니다. 그런 다음 무서운 속도로 우리 온 몸과 영혼을 헤집고 다닙니다. 지금 당장 죄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입구를 막으십시오. 그리고 이미 들어와 있는 죄가 빨리 나가도록 출구를 활짝 열어 놓으십시오. 죄의 파괴력을 두려워하십시오. 아무리 작은 죄라도 허용하지 마십시오. 죄는 늘 작은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옵니다.

요즈음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사람들이 모두 세뇌 당한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들도 결코 예외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누구나 다 이 세상을 본받고 있습니다. 세뇌라는 말은 "상대편을 일종의 마비상태에 빠지게 하여 어떤 특정의 사상이나 주의를 주입하는 일"입니다. 세상에 세뇌 당한 현대인들은 판단의 기준이 흐려졌습니다. 특히 매스컴의 영향은 엄청난 위력을 갖고 사람들의 사고를 획일화시키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판단해야 할 선악의 기준을 잊었습니다. 다만 주위의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면 어떤 일을 해도 괜찮다는 식으로 생각을 합니다. 모두들 소위 "관행"이라는 말을 하며 아무런 죄의식 없이 계속 범죄하는 "관행범"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명하셨습니다. "예루살렘 거리에 가서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렘5:1)

남왕국 유다는 얻어맞으면서도 아픈 줄을 모르고 하나님을 거역하였습니다. 그 결과 나라는 멸망당하고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잡혀가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오늘 서울 거리에서 바르게 살며 신용을 지키는 사람을 찾으면 얼마나 찾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 종교지도자들, 바리세인들과 서기관들이 회당의 상석에 앉아, 군림하면서, 성도의 헌물로 배불린 모습(겔34:2-4)과 오늘날 지도자들의 부정과 비리를 보면서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별다른 생각 없이 같은 죄를 저지르지는 않았겠는가?"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에스라는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자복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많은 백성들이 구름처럼 모였습니다. 그들은 남녀노소 모두 크게 통곡하였습니다. 그들은 민족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하여 이방여인과 결혼했던 사람들이 처자를 버리는 고통까지도 감수하였습니다.(스10장) 또한 그들은 모여서 에스라가 읽고 풀이해 주는 하나님의 율법을 듣고 울며 회개하였습니다. 오랫동안 지키지 못했던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백성들은 베옷을 걸치고 흙을 뒤집어썼습니다. 금식을 하며 죄를 뉘우쳤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대로 살 것을 맹세하였습니다.(느8-10장) 유대인들은 지금도 종교적 전통에 따라 일년에 한 번씩 속죄일을 지킵니다. 이날은 대중교통 수단도 메스컴도 전체가 쉽니다. 노래도 부르지 않고 웃지도 않으며 일체의 오락을 하지 않습니다. 신앙심 깊은 유대인들은 금식을 합니다. 온 국민이 하루를 조용하고 경건하게 보내며 하나님께 죄를 고백합니다. 참으로 부러운 전통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의 개념이 희미한 국민은 미래가 없는 민족입니다. 예루살렘을 보시며 한탄하셨던 예수님께서 오늘 서울을 보시며 탄식하실 것입니다. "서울아! 서울아!"(눅13:34)

우리도 유대인들처럼 온 국민이 엎드려 울며 죄를 회개할 때입니다. 일반인 보다 기독교인들이, 그리고 직분 맡은 제직자들(장로, 권사) 특히 교역자들이 먼저 회개할 때입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를 멀리 사라지게 하시고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용서를 구하는 사람에게 무궁한 사랑을 베풀어주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회개하는 자에게는 영생을 주시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가 하늘에 사무쳐 큰 재앙과 진노가 임하기 전에 우리 모두 어서 속히 회개합시다. 지금은 무엇보다 회개할 때입니다.(대하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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