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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충만한 교회 (행 5: 40-42)

by 【고동엽】 2022.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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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충만한 교회  (행 5: 40-42)

오늘은 사도행전 5장 40절에서 42절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은혜 충만한 교회"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교회"를 "성도"로 바꾸어도 좋습니다. "은혜 충만한 교회"라는 제목은 일년 동안 여러분들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기도할 때 제목을 삼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일년 동안의 기도제목이니까요.
하나님은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이것을 흔히 보편적인 은혜라고 합니다. 누구에게나 주는 은혜입니다. 선한 사람이나 악하나 사람이나 예수 믿는 사람에게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나 사람이기에 주는 은혜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농사를 짓거나 목축업을 하거나 공장을 세우거나 하려면 땅이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나 똑 같이 누리도록 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늘에 찬란한 햇빛, 맑은 공기와 우리가 늘 먹고 마시고 쓰는 맑은 물은 하나님께서 보편적으로 주시는 은혜에 속합니다. 그런가 하면 믿는 사람에게만 주시는 특수한 은혜가 있습니다. 이 특수한 은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되고, 천국의 백성 혹은 후사가 되는 은혜를 말하는데 믿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이 그것으로 끝을 내면 안됩니다. 우리는 예배에 열심히 참여해서 찬송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 말씀을 통해서 은혜 받고, 기도하는 중에 은혜 받고, 봉사하면서도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이런 은혜를 계속해서 받을 때 은혜 충만한 교회 또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가르침을 따라서 어떤 은혜가 충만해야 하는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놓임의 은혜 (40-)
베로니카라고 하는 여인은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았습니다. 아무리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도 전혀 효험이 없고 증세만 점점 악화되었습니다. 가지고 있던 돈은 전부 허비하였고 생활도 어려워졌습니다. 그 때 베로니카는 예수의 소문이 귀에 들리기도 하였습니다. 병들었지만 돈이 많을 때에는 별로 귀담아 듣지 않던 소문이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찾게 되었고 예수님께로부터 능력이 나타나 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질병에서 놓임을 받은 은혜입니다.
그런가 하면 네사람이 메고 나왔던 중풍병자는 예수님께 자발적이든 타의에 의해서든 예수님께 나와서 은혜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게 중풍병에 누웠으면 병부터 고쳐 주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네 죄 사함을 받았다"라고 하시면서 죄 문제부터 꺼내어 해결해 주셨습니다. 죄에서의 해방입니다. 즉 죄에서 놓임을 받은 은혜입니다.
거라사에 군대 귀신이 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힘이 장사인지 장정들이 아무리 많이 달려들어도 감당을 하지 못했습니다. 쇠고랑으로 채웠을 지라도 쇠고랑을 끊어 버렸습니다. 또 얼마나 사나운지 그 앞으로 지나다니는 사람에게 행패를 부렸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 한 마디로 군대 귀신을 좇아 내셨습니다. 그리하여 멀쩡한 사람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 악신에게 붙잡혀 악신의 종노릇을 하던 사람이 그 악신에게서 놓임을 받았습니다.
열왕기하서 4장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선지자의 생도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남편은 젊디 젊어서 죽었고 슬하에 어린 아들 형제가 있었습니다. 감당할 능력은 없는데 빚은 자꾸 늘어나기만 했고 나중에는 생활까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쯤 되자 채주가 찾아와서 아들을 내 놓으라고 합니다. 형제를 끌어다가 팔아서 빚을 해결해 버리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엄청난 문제를 안고 있는 선지자의 생도의 아내가 받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아들들 때문에 죽지를 못해서 살아 있다 할 만큼 죽고 싶은 심정뿐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예배하러 나오면서 죽고 싶은 심정으로 나오신 분들은 계시지 않습니까? 그 때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통해서 엄청난 복을 주셨습니다. 그릇 그릇 마다 기름을 가득 채워주셔서 빚 문제를 해결하고 생활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말 할 수 없이 시달리는 빚 문제에서 놓임을 받았습니다. 빚을 져 보지 않은 사람은 이 여인의 심정을 모를 것입니다.
이상의 여러 가지 환란에서 놓임을 받을 때 자기들이 한 일이 있습니까?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예수님의 도움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스트레스 받는 일, 자신이 감당키 어려운 일, 생각만 한다면 오로지 죽지 못해 살아 있다 싶은 심정을 가진 분들에게 하나님께서 놓임의 은혜를 약속해 주시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40절을 보면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오순절날 다락방에서 성령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을 비롯해서 온 교인이 얼마나 열심히 전도를 했는지 기독교가 불길같이 일어났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유대교 관원들이 모든 세도를 잡고 있을 때입니다. 그냥 두었다가는 큰 일이 날 것 같아서 '사도들을 없애 버려야겠다' 즉 '지도자들을 전부 처리해야 겠다'라고 생각하여 붙잡아 옥에 가두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가 모여서 이 사람들을 언제 죽일 것이며, 어떻게 죽일 것인지를 의논을 했습니다. 사도들은 불려 나갔고 공회의원들이 이렇게 하자, 혹은 저렇게 하자 말이 많은 중에 가말리엘이라고 하는 유명한 그리고 존경받는 교법사가 일어나더니 "우리는 이 사람들에게 관여하지 말자"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드다라고 하는 사람이 일어났을 때 400명이 똘똘 뭉쳐서 세상을 뒤엎을 것 같이 야단했지만 드다가 죽고 나니 흩어지고 말지 않았습니까? 사람에게서 난 일은 우리가 그것을 건드리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 후에 유다라고 하는 사람이 일어나 백성들을 충동하매 난리가 나고 소란이 났지만 유다가 죽고 나니 지금은 흔적도 없지 않습니까? 기독교가 지금 불길같이 일어나지만 예수는 벌써 죽지 않았소? 사람에게서 났으면 저러다가 없어지고 말테니까 건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에 기독교 운동이 하나님께로 났다고 하면 우리가 손을 대는 경우 하나님께 대적하는 결과가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손 댈 필요가 없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모든 공회의원들이 그 말이 옳다고 하여 사도들을 불러서 채찍질을 하고 내 보냈습니다. 그 사람들은 죽이자 하면 죽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도 공회에서 결정하고 총독의 싸인을 받아 죽였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이 제자들을 왜 못 죽이겠습니까? 그런 난감한 일을 당했다가 거기에서 놓임을 받고 해방과 자유를 얻었다 할 때에 제자들이 한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돈을 쓴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뒷배경이 좋아서 그 사람의 덕을 본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가말리엘은 제자들과 상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소리를 안 할 사람이 나서서 조리 있게 설명을 하니까 그냥 놓아주자고 결정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말리엘을 통해서 놓임의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직접이든지, 간접이든지 불행한 상황에서 놓임의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빚 문제라고 하는 것은 빚져 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제가 부산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밥 먹고 자는 문제도 해결해야 하고, 공부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딱히 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 때 누가 장사를 해 보라고 권했습니다. 제가 장사를 할 줄을 모를뿐더러 장사를 하게 생기지도 않지 않았습니까? 그렇지만 빚을 좀 얻어서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이 나 같은 사람을 믿고 돈을 꾸어 줬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그래서 조그만하게 무엇을 차려 놓고 시작을 했는데 장사가 되어야 어떻게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얼마 가지 않아서 다 끝나고 말았습니다. 결국 빚만 남았습니다. 저에게 돈을 빌려 준 사람은 어떻게 알았는지 제가 있는 자리를 알고 찾아오곤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와서 좋은 소리를 하고 가겠습니까? 오장육부를 뒤집어 놓고 가곤 하였습니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었겠지요. 그래도 제가 갚을 길이 없었습니다. 저에게는 사촌 형님이 한 분이 계십니다. 그 분도 넉넉히 살아서 저를 많이 도와줄 그런 형편은 아니었지만 저에게는 그 분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형님을 찾아가서 사정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참을 듣더니 돈을 해 주었습니다. 그 형님이 돈을 해 주기까지는 죽을 맛이었습니다. 그런데 돈을 갚고 나니까 살맛이 나고, 마음이 시원해지고, 기뻤습니다. 빚의 시달림에서 놓임을 받았습니다. 스트레스에서 벗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형님을 통해서 빚의 억압에서 저를 놓아 주셨습니다. 놓임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일을 당하고 있는지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든지, 아니면 직접 기적을 통해서든지 여러분들에게 이런 놓임의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기쁨의 은혜 (41-)
사람에게 기쁨이 없다고 하면 삶이 피곤합니다. 기쁨이 전혀 없다고 생각해 봅시다. 집에 들어가도 기쁨이 없고, 무슨 일을 해도 그 일에 기쁨이 없고, 교회에 나올지라도 교회 생활에 기쁨이 없다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믿음 생활에 기쁨이 없다면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기쁨은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기쁨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기쁨은 하나님이 주신 기쁨이어야 합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돈이 아쉬울 때 돈이 한 뭉치 생기면 그 돈이 주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돈을 도둑이 와서 들고 가 버리면 그 기쁨도 빼앗겨 버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이 주는 기쁨은 세상이 다 빼앗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기쁨은 세상이 빼앗아 가지 못하고 하나님만이 빼앗아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쁨을 왜 빼앗으시겠습니까?
시편 119편 71절을 보면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경건한 시인은 고난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고난의 내용은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굉장한 고난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나 놓고 보니 그 고난을 통해서 많은 유익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 유익의 내용은 하나님의 법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갈 때 어떤 방법으로 올라가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고난을 주시고 고난을 통해서 믿음을 키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키우는 하나님의 법을 배운 것이 큰 유익이라는 것이 시인의 고백입니다.
욥은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고백하였습니다(욥 23:10). 정금이 나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금광석을 녹여서 찌꺼기를 버리는 일을 몇 번이고 반복해야 하지 않습니까? 찌꺼기를 깨끗이 버린 것을 정금이라고 합니다. 정금이 나오기까지 용광로에 넣어서 녹이고 찌꺼기를 버리는 그 과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과정이 우리 성도가 당하는 고난의 과정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통해서 믿음의 찌꺼기를 제거하여 순금 같은 믿음을 키워주십니다. 우리의 믿음을 한 단계, 한 단계 올려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게 하십니다. 고난 없이 얻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고난까지라도 기뻐해야 합니다.
결혼한 젊은 여인은 임신의 고통, 해산의 고통, 아이들을 키우는 양육의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러나 그 여인에게 그 고통이 지겹습니까? 그렇다면 결혼을 안 하면 되고, 아이를 낳지 않으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 고통을 당하면서도 아이를 낳으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새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새생명을 얻는 당연한 과정입니다. 즉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새 생명을 선물로 받기 때문입니다. 고통없이 그런 은혜와 축복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 자체를 오히려 즐거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히려 성도의 고난 자체를 기뻐하는 사람은 평안할 때에도 감사하고, 잘 되었을 때 뿐 아니라 잘 되지 못했을 때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인들의 감사가 바로 그것이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들의 기쁨이 바로 그것입니다. 고난 자체까지도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41절을 보면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들을 죽이자고 야단하던 공회 의원들이 사도들을 채찍으로 치고 놓아주었습니다. 놓임을 받고 사도들이 얼마나 기뻐하는지 모릅니다. 그렇다고놓임 자체를 기뻐하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예수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내가 사도이기에 고난을 당한다는 것 그 자체가 자기들에게는 은혜요, 복이라는 것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사도가 아니었으면 당하지 않을 고난이 아닙니까? 사도이기에 고난을 받았고, 그것도 주님을 위한 고난이기에 고난 자체를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가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두고 이 사건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 믿기 까닭에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당하지 않을 고난을 믿음 때문에 당하는 일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주일에 가게문을 열어 놓고 장사를 하면 돈을 벌고 좋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가게문을 닫으라고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또 하고 싶은 일은 하지 말라 하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기어이 하라고 합니다. 이것 역시 믿는 사람만이 당하는 고난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목숨까지 내 놓아야 하는 일도 있습니다. 믿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입니다. 우리는 이런 고난을 기뻐하고 즐거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기쁘고 즐겁지 않으면 절대로 믿음 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본문의 내용에 나오는 사도들의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는 기쁨이었다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기쁨이기에 은헤입니다.
조선조 시대에는 매품팔이꾼이 있었습니다. 즉 매를 맞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부자나 양반 중에 돈이 있는 사람은 매 맞는 사람을 돈을 주고 삽니다. 그 부자가 잘 못을 저지르고 곤장을 맞게 되면 매품팔이를 사는 것입니다. 즉 한 대에 한냥씩 주기로 하고 매품팔이하는 사람을 대신 보냅니다. 적지 않은 돈입니다. 매품팔이 하는 사람이 관가에 나아가면 관원이 밧줄로 형틀에 붙들어 맨 다음 죄 값만큼 곤장을 칩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웃을 것 같습니까? 죽겠다고 야단 할 것 같습니까? 고통을 잘 참아 냅니다. 내심으로는 기뻐하면서 한 번 치면 한 냥, 두 번 치면 두냥 , 세 번 치면 석 냥, 이렇게 세어 가며 50대를 맞는 것입니다. 50대면 얼마입니까? 돈을 보고 매를 맞는 것입니다. 매품팔이꾼들은 고난을 당할 때 돈을 보고 매를 맞으면서도 내심으로 기뻐하였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보고 고난에도 기뻐해야 합니다. 그들은 곤장을 맞으면서 돈을 보고 기뻐했지만 우리는 고난 속에 키워 주시는 믿음을 하나 하나 세어가면서 감사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이런 기쁨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런 기쁨이 없으면 믿음 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기쁨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셋째, 열심의 은혜 (42-)
본문으로 돌아가서 42절을 보면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쉬지 않는 사람은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부지런한 사람은 열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건강한 사람이 왜 게으름을 피웁니까? 열심이 없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성공은 열심있는 사람의 것입니다. 공부를 해도 열심히 하고, 성가대를 해도 열심히 하고, 예수를 믿어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장사를 해도 직장생활을 해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성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열심히 없는 사람에게 주어질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들은 첫째로 날마다 열심을 냈습니다. 둘째는 성전에 있을 때는 성전에서 열심을 냈습니다. 셋째는 각 가정을 심방하며 가정을 찾아 전도하러 갔을 때에는 가정에서 열심을 냈습니다. 넷째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가르치는 교육에 열심을 냈습니다. 교육은 이미 믿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믿지 않는 사람을 전도하는 일에 열심을 냈습니다. 사도들은 다섯 가지 열심에 더 붙일 열심이 없을 정도로 열심이 불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처럼 믿음 생활에 열심있는 사람이 승리하는 줄로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람은 낮 예배를 빠지는 법도 없습니다. 예배 시간에 늦는 법도 없습니다. 주일 저녁 예배도 참석하고, 수요일 예배도 참석을 합니다. 열심이 불같아서 앉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열심은 그로 하여금 쉬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헨델은 작곡가로 유명하지만 올갠 연주로도 유명한 음악가입니다. 헨델이 연주를 한다고 하면 자리를 못 얻어서 난리였습니다. 연주회가 끝난 다음에 올갠을 공부하는 젊은 학도가 찾아와서 "선생님, 세상에 열 손가락과 폐달을 밟는 두 다리만 가지고 어떻게 그런 천사가 연주하듯이 연주할 수 있습니까? 선생님은 사람이 아니고 천사의 경지에 이른 것 같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헨델이 "이 사람아 이 올갠 연주가 손가락 열 개로 하는 것인가? 두 다리로 폐달을 밟는다고 되는 것인가? 자네 정신 자세가 틀렸네, 나는 올갠을 연주할 때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내가 내 몸 전체를 던져 연주를 하는 것이지 손가락만을 가지고 하는 것은 아닐세"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맞지 않습니까? 나에게 맡겨진 일에 내 몸 전부를 던져서 정열적으로 할 때 성공하지 않습니까? 무엇을 하든지 말입니다. 우리 믿음 생활도 그래야 합니다. 손가락만 가지고 하려고 하지 마시고, 입만 가지고 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대가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대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열심이 불같은 은혜를 받아야 하고 불같은 열심의 은혜가 충만한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결론을 지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놓임의 은혜가 충만한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도들마다 문제가 없을 수 없습니다. 평탄하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산 사람에게 평안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과 예수님의 은혜라면 어떠한 불행에서도 놓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둘째 기쁨의 은혜가 충만한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늘이 주는 즉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의 은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고난까지라도 기뻐하는 은혜를 말합니다. 셋째 열심이 불같은 은혜가 충만해야 하겠습니다. 열심은 우리가 가만히 앉아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열심이 생명을 풍성케 합니다. 금년 한해 동안 은혜가 충만한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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