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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은혜

오직 은혜로 사는 삶 (갈라디아서 2:15~21)

by 【고동엽】 2022.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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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은혜로 사는 삶     (갈라디아서 2:15~21)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본 베드로는 거기가 좋으니 거기에 초막 셋을 짓고 그냥 머물자고 했습니다. 제자들의 눈에는 스승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세와 엘리야가 매우 위대하게 보였을지 모릅니다.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 그리고 선지자를 대표하는 엘리야 모두 다 대단한 인물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볼 때에 스승인 예수님과 수준이 같거나 아니면 더 위대한 인물로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 17:5) 깜짝 놀란 나머지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는 그들에게 예수님이 손을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마 17:7) 제자들이 다시 눈을 들고 보자 오직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더라고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믿음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모세와 엘리야는 거의 절대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의 생각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였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모세와 엘리야의 모습은 가리셨던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더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는 과연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재물과 명예를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권력이나 지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이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계십니까? 그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 예수님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율법주의에 현혹된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을 향해서 구원받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가 뭐라고 외치고 있습니까?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율법이 오기 전에 사람들은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지냈습니다. 비록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지냈지만 모두 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모두 죽음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왜냐 하면 죄의 삯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6장 23절 말씀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인류의 시조 아담이 죄를 짓고 타락한 후 모든 사람들이 죄 가운데 났고 죄 가운데 지냈습니다. 그 죄의 댓가가 얼마나 무거운 줄 알고 있습니까? 벌금 몇 푼이나 징역 몇 년 정도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모두 다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인들입니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롬 1:32 상반절) 아담의 후예인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사형 선고를 받고 태어납니다.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가릴 것 없이 시한부 인생으로 태어나서 죽음의 지배를 받고 지내다가 결국 죽는 참으로 불쌍한 존재인 것입니다. 때문에 인간의 현주소는 죄의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신분도 사망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들 의술의 발전은 진단 기술의 발전이라고도 합니다.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병으로 죽어 가면서도 대체로 무슨 병 때문에 죽는지조차 몰랐습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이 오기 전에는 죄가 무엇인지 모르고 지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지내던 때에도 죽음이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율법이 주어진 후 비로소 사람들은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죄 때문에 죽음이 오게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율법이란 마치 환자를 진단하는 시약과도 같아서 율법을 통해서 사람들은 죄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0절 말씀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이란 처음부터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신 시약과도 같은 것이지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치료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모세를 통해서 받은 그 율법을 지켜서 의인이 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그 율법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은 정죄하고 자기들 스스로는 의롭다고 착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분명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갈 2:16 상반절)

   그렇다면 율법이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 그는 또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롬 7:14 상반절) 그렇습니다! 율법은 거룩하고 신령한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비록 거룩하고 신령한 것이지만 결코 죄를 치료하는 치료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죄를 진단하는 시약과 같은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개혁자들이 외쳤던 “오직 믿음!”이라는 구호를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종교 개혁 당시 율법화되어 가고 있는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깨우쳐 주려고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결코 율법을 부정하거나 폐기하려는 뜻에서 개혁자들이 믿음을 그토록 강조했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율법은 그리스도가 오셔서 구속 사역을 완성하실 때까지 다만 초등 교사, 즉 인도자의 역할을 해 왔던 것입니다. 죄를 깨닫게 함으로 말미암아 죄인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갈망하도록 그 역할을 다 해 왔던 것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일찍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그 말씀도 결국 율법으로는 그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처럼 목숨을 걸고 율법을 지키려고 해도 결코 율법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달리 구원에 이르는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율법의 행위나 높은 수준의 윤리, 도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총을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21절, 22절 말씀으로 분명히 확증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가능합니다. 사도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인격적으로 그 사람 안에 거하시는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한 무엇인가를 행함으로 구원을 완성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말처럼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봄이 되면 우리 교회 담장 밑 꽃밭에도 여러 가지 꽃들이 피어납니다. 그리고 어김없이 나비들이 찾아듭니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과연 나비가 꽃을 선택한 것인가, 아니면 꽃이 나비를 선택한 것인가?’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물론 그냥 보면 나비가 꽃을 선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꽃이 나비를 선택한 것입니다. 꽃이 향기를 발해서 자신을 드러냈기 때문에 나비가 찾아왔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주님이 우리를 선택해서 불러 주셨습니다. 주님의 은혜의 향기가 우리의 영혼을 일깨워서 은혜의 꽃밭으로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라.”(마 7:21) 물론 구원은 믿음을 통해서 얻습니다. 그러나 천국 곳간에 들어가는 알곡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알곡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주님은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삶이라고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리 쉽지 않습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기도하고 또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까지 좋아하던 모든 것 다 내려놓고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오직 은혜로 살기로 다짐하고 결단하는 여러분 모두의 삶의 현장에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항상 넘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강석공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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