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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자의 은혜 (겔 11: 14-21)
오늘은 에스겔 11장 14절에서 21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남은 자의 은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에스겔 선지자가 예언한 내용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본래 사독이라고 하는 유대나라의 유명한 제사장의 후손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세습적으로 제사장이었던 사람입니다. 그의 나이 25살이 되던 해에 바벨론 나라에 의해서 유대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중에 여호야긴이 사로 잡힌지 제5년에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 임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나이 30살에 선지자로 세움을 받았고 연대를 계산해 보면 22년 동안 포로 선지자로 활동을 했습니다. 나이 52살 이후에는 전혀 기록이 없어서 그 이후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 중에서 좋지 못한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는 순교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설일 뿐입니다.
포로로 잡혀가서 끝까지 살아 남아 있는 자들 모두가 포로 생활이 끝나고 고국 땅에 돌아온 것은 아닙니다. 그 중에서도 철저하게 믿음의 자리에 남아 있는 사람들만이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일하셨습니다. 그 남은 자들에게 어떤 은혜를 주셨는지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임재의 은혜 (14-16)
요한계시록 21장은 하늘 나라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3절을 보면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 나라에 하나님이 사시는 천막이 있다고 합니다. 하늘 나라에 하나님이 계실 곳이 없어서 천막을 치고 계시겠습니까? 즉 텐트를 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일 뿐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과 철저하게 함께 거하신다는 것을 표현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하심에 대한 역사적인 사건이 있는데 그것이 배경이 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떠나 광야 생활 40년을 하고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부 천막을 둘러메고 진행하다가 진을 칠 때에는 모두 천막을 쳤습니다. 하나님의 성막을 중심에 세워 놓고 동서남북 사방으로 백성들이 천막을 쳤습니다. 그 성막 안에는 하나님의 법궤가 있습니다. 법궤 위에는 두 천사가 날개를 펴고 마주 대하여 섰고 천사가 서 있는 법궤의 뚜껑을 시은소라고 합니다. 그 곳에 하나님께서 좌정하셔서 은혜를 베푸신다는 뜻입니다. 밤에는 불 기둥, 낮에는 구름 기둥이 솟아올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황량한 광야 생활 속에서도 낮에는 구름 기둥을 보면서 '하나님이 저기에 천막을 치시고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 그리고 밤에는 불 기둥을 보면서 '하나님이 저기에 장막을 치시고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신다'라는 사실을 확실히 보고 체험을 했습니다. 물론 이 사건이 온전히 이스라엘과 함께 한 모든 역사의 완성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심은 하늘 나라에서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광야에서의 임재하셨던 역사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설명한 것이 요한계시록 21장 3절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하나님의 길로 전진하고 있는 자기 백성들과 하나님은 분명히 함께 거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이 사실은 하늘 나라에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코스로 달려갈 때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임재의 사실을 분명히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은혜를 임재의 은혜라고 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4절에서 16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예루살렘 거민이 너의 형제 곧 너의 형제와 친속과 이스라엘 온 족속을 향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라 이 땅은 우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신 것이라 하였나니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고 열방에 흩었으나 그들이 이른 열방에서 내가 잠간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라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즉 유대 나라 백성들이 바벨론에 침략을 받아 망하고 포로로 끌려가고 있을 때 예루살렘 거민이 그들을 조롱하고 저주하였다는 것입니다(14-15). 여기에서 말하는 예루살렘 거민이 누구입니까? 여기에 대한 배경을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바벨론 군대가 유다에서 포로를 잡아 갈 때 유다 백성을 전부 잡아간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살펴서 보고 부려먹고 써먹을 만한 사람들만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리고 데려가 봐야 별로 자신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은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서도 살고 농촌에서 농사도 짓게 하였습니다. 그 때 붙잡혀 가지 아니하고 예루살렘에 남게 된 사람들을 예루살렘 거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사람들에게 온갖 조롱과 저주를 다 합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라 예루살렘과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셨다'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라는 말이 저주가 아닙니까? 조롱이 아닙니까? 그리고 이 땅은 우리에게 주셨으니 얼씬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같은 동족이 그런 불행을 당하고 있는데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 때 하나님은 예루살렘 거민을 상대로 하지 않으시고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이 본문의 16절입니다. 예루살렘 거민은 포로들이 잡혀가서 가나안 땅을 떠나게 되면 전부 하나님을 떠나서 망하게 되는 줄 아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희를 따라가서 너희가 포로 생활하는 중에 내가 잠깐 성소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소는 거룩한 처소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막이라는 뜻입니다. 포로 생활하는 백성들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이 성막을 치고 함께 계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본문이 주는 교훈을 잘 알아야 합니다. 유대 나라가 왜 망했습니까? 왜 그렇게 그 땅에서 쫓겨났습니까? 망할 짓을 해서 망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유대 나라가 망하기 전에 얼마나 선지자를 통해서 경고를 했습니까? 그럴 적마다 선지자를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내 알바가 아니라고 하면서 우상을 섬기고 제멋대로 살았습니다. 더 이상 너희의 꼴을 못 보겠다 하여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하여 멸망을 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망했다 혹은 어떤 큰 위험한 사고를 당했다고 하면 한번쯤 '내가 망할 짓은 하지 않았는가? 내가 하나님 앞에 정말 바로 서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인가?'라고 생각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망할 이유가 있어서 망했고 포로로 잡혀갈 이유가 있어서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멸망을 시켰다 할지라도 택한 백성은 그것으로 끝내지 아니하십니다. 반드시 고난을 통해서 연단을 시키고 바로 잡아 놓으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따라가서 성소가 되어 그 백성들과 70년을 함께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로 된 백성들은 포로 생활의 고난 중에서도 임마누엘 또는 임재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우리가 죽어 죽어 하는 입장이 되고 심지어 내가 망할 짓을 했다고 할지라도 먼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여러분들의 성소가 되시어 임재의 은혜로 역사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이 주는 교훈입니다.
유대인 소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독일 경찰들이 유대인들을 이잡듯이 수색하여 체포할 때 부모는 벌써 독일 경찰들에게 붙잡혀 갔으나 용하게도 이 소녀 하나는 왈소라고 하는 곳에서 도망을 갔습니다. 갈 곳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산으로 들어갔고 산 속에 굴이 있어서 굴속에 들어갔습니다. 그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전혀 모르지 않겠습니까?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 화란의 신학자 요하네스 할켄딕(johannes halkendijk)이라고 하는 신학 교수가 어떻게 입수했는지 이 소녀의 메모지를 공개하였습니다. 그 메모지에는 세 마디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첫째 '나는 지금 빛나는 태양을 보지 못하나 밖에는 찬란한 태양이 있음을 믿는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내가 지금 눈으로 보지는 못하나 하나님은 엄연히 살아 계신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지금 독일 경찰들에게 얼마나 억울하게 학살을 당하고 곤욕을 치룹니까? 그래도 하나님은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둘째 이런 험악한 세상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나는 믿는다'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독일에 의하여 끔찍한 만행이 저질러지는 그런 와중에도 여전히 하나님은 선민을 사랑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셋째 '지금 하나님은 말씀하지 않고 계시나 이 굴속에서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심을 믿는다'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상의 기록은 분명히 이 소녀 또는 유대인의 신앙 고백입니다. 평안할 때 신앙을 고백한 것입니까? 자기 부모들은 학살의 현장에 끌려갔고 자신은 겨우 도망쳐 나왔지만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굴속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에 굶어 죽어 가면서 그 신앙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고난을 당할수록 더욱 강해지는 것이 유대인들입니다.
오늘 우리 택한 백성 특별히 광성교회 성도들은 형통한 중에, 부요한 중에도 이런 신앙을 고백 할 수 있어야 하겠지만 극한상황에 이르렀을 때에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신다'라는 신앙을 분명하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순교적인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실 때 그 이상의 영광이 어디에 있고, 그 이상의 은혜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와 같이 항상 임재의 은혜를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회복의 은혜 (17-18)
남자로서 예수님의 으뜸 가는 제자는 베드로입니다. 여자로서 예수님의 으뜸 가는 제자는 베다니 마리아가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한창 젊었을 때 일곱 귀신이 들렸던 여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비참했겠는가를 상상해 보십시오. 옷이나 제대로 입었겠습니까? 동네 아이들이 쫓아다니면서 온갖 조롱을 하고 행패를 부릴 때 그 현장에서는 마리아가 그 꼴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건강을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 인간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 자기의 생활을 잃어버린 사람, 가정이 있지만 가정을 잃어버린 사람, 마지막으로 신앙을 잃어버린 사람이었습니다. 신앙이 제대로 된 사람에게 왜 귀신 일곱 마리가 들어가겠습니까?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예수를 판 가롯 유다 마음속에 사탄이 들어갔다고 하였습니다. 사탄이 다른 제자에게는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막달라 마리아는 온갖 잃을 것을 다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불행의 근원이 되는 일곱 마리의 귀신을 깨끗이 쫓아냈습니다. 그리고는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인간성을 회복했습니다. 생활을 회복하고 가정을 회복했습니다. 믿음을 회복했습니다. 저 예수님을 위해서 나는 평생에 목숨을 다 받쳐도 한이 없겠다 하여 예수님을 따르며 온갖 봉사를 다 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후에 예수 부활하셨다고 온 세상 인류 역사이래 제일 처음으로 증거한 사람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부활하신 후에도 주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얼마나 사랑했으면 가장 먼저 찾아 가셨겠습니까? 그녀는 얼마나 아름다운 생애를 살았습니까? 예수님에 의해서 잃어버렸던 것을 전부 회복했습니다. 회복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건강을 잃어버릴 수도 있고, 재산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기도 하고 때로는 믿음을 잃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모든 것을 회복 시켜 주시는 분은 내 스스로가 아닌 예수님이요,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반드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7절에서 18절을 보면 '너는 또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만민 가운데서 모으며 너희를 흩은 열방 가운데서 모아 내고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다 하라 그들이 그리고 가서 그 가운데 모든 미운 물건과 가증한 것을 제하여 버릴찌라'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거민이 포로로 잡혀가는 백성들에게 온갖 저주와 조롱을 할 때 하나님께서 포로로 잡혀가는 백성들에게 계속적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바벨론이 쳐들어오거든 절대 반항하거나 도망가지 말라 차라리 항복하고 붙잡혀 가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지자들은 외쳤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포로로 잡혀간 자들에게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희를 흩어 버린 것도 사실이요,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남왕국 유다는 바벨론에 멸망을 당하고 포로로 잡혀가지만 내가 흩어진 가운데서 너희를 반드시 불러모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옛날 조상의 기업을 다시 주어 회복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기업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가서 그 전에 그렇게 만들어 놓았던 온갖 가증하고 미운 물건 즉 우상이란 우상을 전부 타파해 버리고 파괴된 성전을 세우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믿음 회복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포로에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성전재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성전 회복입니다. 그리고 훼파 되었던 예루살렘 성을 다시 쌓으므로 예루살렘이 회복되고 마카비 시대에는 나라가 회복되기도 합니다. 전부 하나님에 의해서 회복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회복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끝까지 믿음의 자리에 남아 있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만 하면 반드시 우리에게 회복의 은혜를 주신다는 교훈입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는 않고 회복만을 요청한다고 해서 회복이 되겠습니까? 그것은 죽어도 회복이 되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되는 것입니다. 포로들은 '우리가 무엇을 잘 못 믿었나?'를 되새겨 보도록 하는 훈련을 70년 동안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망할 짓을 하고 망했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그것을 이용하여 70년 동안 훈련시켜 바로 세워주셨습니다. 그리 한 후에야 모든 것을 회복해 주셨습니다. 이 때 유대 포로 중에 '아니요'라고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포로로 남아 있는 사람들 중에 전부가 고국으로 돌아온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소수가 돌아왔을 지라도 남은 자의 회복의 은혜였습니다.
제가 부산 대성교회에서 강도사로 시무한 적이 있습니다. 대청동이라고 하는 곳은 아래쪽으로 내려오면 부자들이 살고, 위쪽으로 올라가서 산동네로 가면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그 산동네는 판잣집에 많은 사람들이 사는 곳인데 어느 날 심방을 갔습니다. 대 심방이나 일제 심방은 한번 하므로 끝납니다. 계속해서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심방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유고 가정 즉 교회에 잘 안나오는 가정 또는 병자가 있는 가정에 심방을 갔더니 심방 받는 집 옆에 있는 여집사님이 알고 성경 찬송을 들고 예배에 참석을 했습니다. 찬송을 힘차게 불러 주고 함께 예배를 드리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 여집사님은 심방 대원이 아니기 까닭에 한 집만 심방을 해 주고 자기 집에 돌아갔습니다.
저는 몇 집을 심방하고 돌아오는 중에 저를 찾아왔습니다. 얼마나 불안해했는지 모릅니다. "강도사님! 큰 변이 났습니다" "왜요?" "제 남편은 노동을 하면서 가난하게 살지 않습니까? 예수도 믿지 않구요. 그런데 애써 마련한 양복을 한 두 번 입고 곱게 걸어 모셔 놓았는데 옆집에 가서 예배하는 중에 도둑이 와서 들고 가 버렸습니다. 저는 남편이 들어오면 맞아 죽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저는 신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양복 한 벌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군복을 물들여서 입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부산 대성교회에 부임해 갈 때 돈을 꾸어서 신사복 한 벌을 맞추어 입고 갔습니다. 그래서 다달이 빌린 돈을 갚아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저에게 그 집사님 남편의 양복을 맞추어 줄 돈이 있겠습니까? 참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집에 들어가 예배합시다"라고 하여 그 집에 들어가서 예배하고 위로하고 돌아왔습니다.
사택에 돌아와서도 얼마나 찜찜했는지 모릅니다. 저녁때가 되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문을 열어 보니 그 여집사였습니다. 여집사가 예쁘게 생긴 것은 아닌데 얼마나 생글생글 웃던지 꼭 천사 같았습니다. 못생긴 여자도 웃으면 천사 같고 아무리 예쁘게 생긴 여자도 독이 오르면 꼭 악마 같습니다. 그래서 "집사님 왜 그렇게 기뻐하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강도사님 기뻐해 주십시오. 도둑이 양복을 두 손에 받쳐들고 찾아왔습니다"라고 합니다. 부산에 가면 범일동 시장이라고 하는 곳이 있습니다. 이 도둑이 그것을 팔기 위하여 여기 저기 기웃거리고 있을 때 마침 순찰을 나왔던 경찰에게 붙들렸습니다. 붙잡혀 파출소에 가서 한참 문초를 받으니 '아무 곳에서 도둑질을 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곳에 직접 가서 확인을 하자 하여 두 손으로 양복을 받쳐들고 찾아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딸이 큰 변을 당하겠으니 그렇게 찾아주셨습니다. 그것도 놀다가 잊어버린 것입니까? 믿음 약한 사람의 집에 가서 함께 기도하고 예배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까? 요즘은 아무것도 아닌 문제이지만 그 때는 또 그 집사의 가정에는 아주 큰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이 그 여집사님의 기쁨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생기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회복의 은혜가 얼마나 귀합니까?
셋째, 새 사람의 은혜 (19-21)
본문으로 돌아가서 19절에서 21절을 보면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그러나 미운 것과 가증한 것을 마음으로 좇는 자는 내가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갚으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포로 된 그 백성들을 전부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새 신 즉 성령을 부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주시면 우리들의 신분의 변화가 일어나 새로워집니다. 둘째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준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마음이 변화되면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바뀌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법을 철저히 지키게 하므로 나는 저희의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관계가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씀을 드리면 성령으로 새로운 신분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시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새 사람을 지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기적 중에 기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의 부활이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그러나 나 자신에게 두고 기적 중에 기적은 죽어 죽어 하던 병에 걸렸다가 살아나는 것입니까? 일년을 살면서도 감기 한번 안 걸리는 것은 기적이 아닙니까? 물론 기적이지만 기적 중에 기적은 아닙니다. 완전히 망했다가 다시 흥하게 된 것입니까? 이것이 기적은 될는지 모르지만 기적 중에 기적은 아닙니다. 기적 중에 기적은 사람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믿지 않던 내 남편, 술주정을 부리고, 싸움질합니다. 집에 들어오면 살림을 뒤엎습니다. 차리리 없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로 폐인이 된 인간이 완전히 새 사람이 된다면 세상에 이런 기적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람의 변화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포로 된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완전히 새 사람을 만들어 기적을 일으켜 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사람 됨의 은혜입니다. 우리들 자신도 날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들 가정에 믿지 않는 식구들도 하나님이 새롭게 하는 새 사람됨의 은혜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남은 자의 받은 은혜는 첫째 임재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평안하고 형통할 때만 함께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죄를 짓고 망하는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함께 계실 뿐 아니라 우리를 연단 하실 때에도 하나님이 반드시 함께 계시는 임재의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회복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살다 보면 하나님이 주신 온갖 은사를 우리의 잘못 때문에 잃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보다도 믿음을 바로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할 때 반드시 회복시켜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새 사람됨의 은혜입니다. 나 자신도 날로 날로 새로워지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가족 중에 믿지 아니하는 식구, 즉 속을 썩이는 식구를 하나님께서 새 사람이 되게 하실 때 그 가정에 변화가 일어나고 그 사람에게 큰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새 사람의 은혜가 여러분의 것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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