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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 3,276편◑/약속 설교 6편

약속 중의 약속 (잠 6:20-28)

by 【고동엽】 2022.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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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중의 약속  (잠 6:20-28)


지난주 화요일 노년부에서 전주 지역 문화 유적지 나들이를 다녀왔습니다. 태조 이성계의 영정이 걸린 경기전, 금산 ㄱ자 교회 등을 관람하고 본 안동교회의 송재욱 장로님이 설립하신 동동동심원(東同童心圜)을 관람했습니다. 동심원에서 영토회복기원비를 보며 영토회복을 기원하고 순수한 전통적 기술로 지어진 누각에서 바라본 호수의 전경은 절경이었습니다. 이 누각에서 절경을 바라보며 전주 지방 명창의 판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중의 한 곡이 판소리 심청가 중에서 심봉사가 눈을 뜨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심금을 울리는 소리 때문에 눈시울이 시큼해졌습니다. 감동적인 판소리였습니다.

판소리를 듣기 얼마전에 심청전의 심청이를 생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 학생이 국어시간에 받은 한 과제물의 제목이 ‘고전 소설 속 인물 비판하기’였습니다. 이 학생이 심청전의 심청이로 그 대상을 잡았습니다. 학생의 글의 일부입니다.

“우리나라 고전 소설 인물 중에 효녀를 한 명만 꼽아보라고 한다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청전’의 심청이를 꼽을 것이다. 심청이는 정말 최고의 효녀였을까? 나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심청의 잘못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공양미 삼백석을 몽은사에 바치면 바치면 아버지가 눈을 뜰 수 있다는 말을 그대로 믿은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둘째, 자신의 귀중한 몸을 팔아 인당수에 제물로 바쳐진 것은 불효 중의 불효다. (중략) 나는 이 행위가 일종의 자기 도피라고 생각한다 어머니를 여의고 눈먼 아버지와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분명 심청이는 자유로워지고 싶었을 것이다. 반복되는 힘든 하루하루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때마침 그런 기회가 오고 죽음으로써 자유를 얻고 아버지의 눈을 뜨게한다는 명분으로 (일종의 자살행위이므로) 원래는 불효인 것을 효도인 것처럼 바꿔버렸다고 생각된다. (중략) 심청이는 이기적인 불효자였다.”

물론 이 글은 학생들의 사고력을 개발하기 위한 과제물이지만, 어린 학생이 쓴 글 치고는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는 글이었습니다. 현대인들 중에서 생활의 어려움으로 자살을 하는 사람들의 처지에서 읽으면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런데 판소리를 들으면서 갑자기 앞의 학생의 글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러면서 몇가지 질문들이 생겼는데, 심청이가 왜 불효자의 길을 가게 되었는가? 심청전이 쓰여졌을 당시의 작가나 독자에게 현대인 같은 생각이 있었을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물론 과거에도 불효가 있었고, 고려장과 같은 비극적인 현상이 만연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간장타는 판소리를 들으면서 우리 전통 사회에서의 효는 오늘날의 현대인들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차원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효는 인생이 걸어가야할 절대적인 길이었습니다. 심청이가 불효자처럼 보여도 어리석게 보여도 그의 행동의 원인이 도리어 극진한 효에서 나온 행동입니다.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라도, 생명을 바쳐서라도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는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실낱 같은 희망이라도 붙잡는 간절함을 읽을 수 있습니다.

효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건 간에 선택사항이 아니고, 필수 사항이라는 것입니다. 효도는 결단의 내용이 아니고, 운명인 것입니다. 도리어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당연함이 있어야 합니다. 효 외에는 생각이 없어야 합니다.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운명처럼 받아 들여야 되는 것이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효도가 결단의 사항이 되고 선택 사항이 되어서 문제인 것입니다.



자식으로서, 부모께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엡 6, 1-3).

현대인들이 유아기부터 아동기 청소년기 청년기 장년기를 지나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인생 전기가 진행되면서 이에 따라 아버지에 대한 상이 변한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3 살 때는 “아버지는 전능하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우러러 봅니다.  5살 때는 “아버지는 전지하다.  아버지는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6살 때는 “아버지는 모든 사람보다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합니다.

8살이 되면 “아버지가 다 아는 것은 아니다.  모르는 것도 있다.”고 생각하고, 12살이 되면 “아버지는 아무 것도 모른다.  옛날 사람이라 아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20 살이 되면 “아버지는 구제 불능이다.  뒤떨어진 사람으로서 옛날 생각에 메여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30살이 되면 “아버지의 의견을 들어 두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그 경험은 중요한 것으로서 인정할 만한 것이 조금은 있다”고 생각하고, 35살이 되면 “아버지께 여쭈어 보면 참 좋겠다. 이럴 때 아버지의 의견을 꼭 묻고 싶다.”  아버지의 잔소리가 아쉽다는 겁니다. 40살이 되면 “아버지라면 이런 때 어떻게 하셨을까? 아버지의 생각은 어떨까?” 아버지의 지혜가 그립습니다. 50살이 되면 “아버지는 확실히 훌륭했다. 그리고 그 훌륭한 지혜를 미쳐 좀 더 많이 들어 둘걸” 아버지의 교훈을 청종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됩니다.

존경과 사랑의 대상을 잃는다는 것만큼 괴로운 일이 없습니다.  살아 계실 때 무언가 기쁜 일을 보여 드리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 왔는데 기쁨을 함께 나눌 분이 안 계시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너를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진리를 사되 팔지는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로 말미암아 즐거울 것이니라.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 23,22-25).

어느 마을의 원님이 동네를 지나가다가 한 집안의 풍경을 들여다 보게 되었습니다. 그 집은 원래 효자로 소문난 젊은이의 집이었습니다. 효자로 소문난 아들은 마루에 앉고 팔십 노인네가 그 발을 씻기고 있었습니다. 원님은 놀라서 소리를 쳤습니다. “아니 저럴수가” 원님의 소리를 들은 옆집 사람이 말합니다. “원님, 이뿐 만이 아닙니다. 저 노인네는 아침 저녁으로 밥을 하여 아들을 먹입니다.” 이 말을 들은 원님은 분을 삭일 수가 없었습니다. 집에 돌아가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 효자로 소문난 사람을 그냥 둘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마을에 이같이 못된 사람이 있다니 내가 엄벌을 내리리라.’ 다음날 호된 벌을 내리기 위해 아들을 불렀습니다. 엄히 묻습니다. “우리 마을에서 그대는 효자로 소문이 나 있는데, 어제 내가 그대의 행동을 보니 불효자 중의 불효자였네. 자네한테 속은 것도 원통하려니와 자네 같은 불효자를 본 적이 없네.” 아들이 대답합니다. “원님의 마음을 저도 압니다. 그러나 제가 그렇게 하는 것은 어머니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기를 원합니다.” 효의 또다른 차원을 깨달은 원님은 이 아들을 아무 말없이 풀어주었습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골 3:20) 자식은 부모와 웃어른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효도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적 응답을 비유할 뿐만 아니라, 십계명 중 제 5계명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부모님의 사랑의 유비

부모에게 순종하되 특별히 믿음의 부모에게 순종할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훈계하는 부모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믿음 안에서의 훈계는 하나님 말씀의 대언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의인으로서의 삶과 지혜를 따라 사는 삶은 그의 부모를 즐겁게 합니다.

부모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데 가장 많이 사용되는 비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아버지로 나타내십니다. 주기도문의 시작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입니다. 누가복음의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다름 아닌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집을 나갔어도 방탕했어도 기대를 져버렸어도 날마다 낮이면 언덕배기에 올라가서 동네로 들어오는 길목을 바라보며 이제나 저제나 집나간 아들이 돌아오나 바라보는 아버지, 밤이면 밤늦게 돌아온 아들이 혹시나 돌아갈까봐 문을 잠그지도 않고, 바람만 불어도 혹시 아들이 돌아오나 잠을 깨는 아버지. 이 아버지 많큼 죄지은 인간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잘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어머니의 사랑을 알면 하나님의 사랑을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6절과 27절을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여러분 이 성경 구절을 다음처럼 한번 읽어 보십시오. “어머니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내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어머니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어머니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어머니가 하나님의 뜻대로 나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자식을 위한 어머니의 기도는 기독교만의 현상이 아니라 모든 종교에 있는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인정하시고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는 좋은 도구로 삼으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요일 3,1).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보여지고 만져지고 들려져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님을 통하여 보여지고 만져지고 들려지고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만 합니다.

“얘야,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부모님의 음성을 아이들은 매일 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부모님을 통해서 아이에게 들려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들의 아이들에게 날마다 아침마다 “얘야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우리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이고, 우리의 자녀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인간으로 양육하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사랑의 모범상

사랑 받은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닮아갑니다. 사람은 미워하는 사람도 닮아갑니다. 그 감정이 향하여 있는 사람과 같은 감정을 갖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대단한 행복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역시 대단한 행복입니다.

미국의 한 목사님이 한탄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는 부모를 존경하라는 말을 설교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내가 부모를 존경하라고 설교한다면 반 이상의 성도들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나갈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부모를 도무지 존경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부모가 자신들의 어린 시절에 끼친 악영향을 생각하면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에 대한 증오심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모의 사랑을 못 받은 것에 대해서는 배우자도 선생님도 성직자도 그 누구도 보상해 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부모의 사랑의 결핍으로 인한 인격의 손상은 부모 외의 그 누구도 치유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치될 수 없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꼭 필요한 것이다. 부모의 사랑은 자녀의 삶에 있어서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하고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의 객관적인 모습도 중요하지만, 내 마음 속에 있는 부모에 대해서 가지는 상도 중요합니다. 같은 부모아래 있는 자식들이라도 어떤 자식은 부모를 존경하고 어떤 자식은 부모를 미워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가진 부모 상에 대해서 스스로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 나는 우리 부모님의 부정적인 면만 생각할까?’ 하는 사람과 ‘나는 우리 부모님이 너무 좋다!’ 생각하는 사람 중에서 누가 더 행복한 사람일까요?

여러분, 부모님을 미워하지 마십시오. 스스로 불행해집니다. 스스로 불행해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적극적으로 부모님을 존경하십시오. 스스로 행복해지는 길입니다. 살아계신 부모님께 효도하시기 바랍니다. 돌아가신 부모님에게도 항상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부모가 효의 모범이 되라

부모는 아이에게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모범상을 가진 사람에게 모범상이 형상화되고 그가 다음 세대의 모범이 됩니다. 여러분의 부모를 존경하십시오. 존경하는 모습 속에서 존경받을 모습이 여러분 속에 만들어 질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존경받는 부모가 될 것입니다. 자식들이 존경하는 모습을 배우게 됩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본능적인 일 외에는 배우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그렇지만 생물학적인 본능도 그 자체는 배울 필요가 없지만, 본능을 만족해가는 방법은 배워야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욕구의 처리 방법을 자신의 문화 안에서 배워야만 합니다.

저희 집 둘째 아이가 초등학교 때 교과서에 나오는 인사말과 존대말을 배우는데, 그 시간에 선생님께서 “너의 집에서는 아침에 무슨 인사를 하니?”하는 너무나 평범한 질문을 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대답을 하는데 제 아이는 대답을 못했답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또는 안녕?” 하고 인사를 한다고 대답하는 것이 모범 답안인줄은 알겠는데 저희 집 아침 인사가 보통 인사와 너무나 차이가 나서 과연 대답을 해도 되는지 망설였다고 합니다. 저희 집의 아침 인사로 정한 것이 있었습니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Ich liebe dich. Ich liebe dich auch) 였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아침 인사를 하지 않지만, 아이가 어릴 때 상당한 기간 동안 이렇게 인사를 하였습니다. 제 아이가 남들에게 이런 인사를 한다고 하면 너무 튈까봐 말을 못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한 가지 어휘를 사용할 수 있기 위해 만 번 이상의 연습이 필요합니다. 하나의 행동을 배우는데도 수없이 보고 흉내를 낸 다음에 자신의 습관으로 만듭니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말을 하기 위해서 “사랑한다”는 말을 만 번 이상 들어야 하고 만 번 이상의 연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이혼율이 증가하고 있는데, 문제는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이 정상적인 부모의 역할을 보고 배울 기회가 없다는 점입니다. 결손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이 나중에 자신들의 가정을 가졌을 때 정상적인 가정을 꾸미는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배워야만 합니다. 가르쳐 주지도 않고, 보여 주지도 않고 어떤 일을 하라고 하면 그것처럼 괴로운 일이 없습니다. 부모가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자식보고는 이웃을 사랑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라면 그 아이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결국 교육은 자식의 문제이기도 하고, 부모와 자식 사이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부모 자신의 문제라는 말입니다. 자식 교육 이전에 부모가 자기 인생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 신앙적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보다 더 좋은 교육은 있을 수 없습니다.

부모된 여러분, 자신의 부정적인 것을 자식을 통해서 재생산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나 자신을 다시금 갈고 닦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자식의 교육을 위해서 나 자신이 인격적이 되고 나 자신이 또한 나이에 걸맞게 성장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스스로는 도저히 담배를 끊지 못했는데 천식에 걸린 자식 때문에 금연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자식을 키우는 것은 부모에게 있어서 발전과 치유의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교육이란 여러분이 완성된 상태에서 어떤 내용을 아이에게 가르치는 것이 결코 아니고, 여러분 자신의 삶의 과정인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효자 효녀가 되는 것 자체가 효 교육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효자 효녀가 되어서 효자를 재생산 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대대로 효자 가정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5:16).

모든 계명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약속 안에 또 다시 약속을 한 계명은 이 한 계명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의 약속을 이중으로 하신 것입니다. 이중의 약속 속에 있는 이중의 복을 소유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박병욱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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