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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가정과 십자가 -엡5:22~30

by 【고동엽】 2022.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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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5:22~30


이 땅을 지배하는 두 가지 원리가 있다. 첫째는 창조의 원리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시면서 인간과 자연과 환경 속에 넣으신 질서이다. 인간과 그 주위를 둘러싼 환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원리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과학이다. 자연과학이든지 인문과학이든지 우리는 이러한 원리를 잘 배워 삶에 적용시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주님의 일도 이러한 원리에서 해야 한다. 일례로, 교회개척을 하는데 광야에서 시작하는 것은 믿음이 좋은 게 아니라 아주 무식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것만 의지해서는 안 된다. 자연법칙에만 의존하려는 생각은 결국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는 교만으로 떨어진다. 인간이성으로 자연원리를 발견하여 삶에 적용하려는 생각, 이것을 휴머니즘이라고 한다. 이것만 의지해서는 안 된다. 인류의 불행의 뿌리가 바로 이 때문이다. 왜 그런가? 창조의 세계가 타락의 영향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죄 아래에는 늘 한계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 아래에 오염된 세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새로운 원리를 주셨다. 구속의 원리가 바로 그것이다. 구속의 원리는 타락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죄의 영향 아래에 있는 인간과 환경의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치료하고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된 존재들은 다 그리스도를 통과해야만 한다. 창조법칙이나 자연법칙만으로는 안 된다. 구속의 원리 안에 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회복될 수 없다.

▶ 구속의 원리를 배우는 두 기관

하나님께서는 이 구속의 원리를 위해서 세우신 대표적인 두 기관을 기억하자. 첫째는 교회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인을 새사람으로 만들고 말씀으로 양육하여 그 원리를 가르친다.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받은 사람은 그러므로 교회를 통해서 그 원리를 잘 습득해야 한다. 둘째는 가정이다. 가정은, 교회를 통하여 배운 원리를 적용해서 천국을 깨닫고 맛보는 곳이다. 가정은 예수를 통해서 구원받고 교육받은 성도가 그 원리를 적용하여 하늘가정, 천국을 맛보도록 고안된 곳이다.  

그러므로 가정은 이 땅에만 있다. 천국에 가면 혼인도 하지 않고 장가도 안 간다(마22:30). 이 땅에서처럼 혼인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그림자는 실체가 나타나면 사라진다. 이 땅에서의 결혼생활은 그림자이다. 무엇의 그림자인가? 우리의 신랑이신 예수님과 영원한 혼인으로 열리게 될 천국가정이 그것이다(계19:7~10). 우리는 천국에서 예수님을 신랑으로 하는 혼인에 참여하게 되고, 영원한 부부로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 땅의 결혼생활은 천국의 결혼생활을 위해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는 우리에게 가정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진정한 목적은 장차 임할 천국가정을 준비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본문에 보면, 부부의 얘기를 하시면서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실제로 말하는 것은 천국가정에 대한 얘기라는 것이다. 이 말을 가정에 대한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으로 성급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히려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가정은 구속원리를 적용하는 곳


가정은 이 땅의 생명을 잉태하고 양육하는 곳이다. 그렇게 태어난 생명은 교회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고 영원한 가정생활을 위하여 양육된다. 그러므로 가정과 교회는 서로 주고받고 넘나든다. 생명을 주고받고, 유한과 무한을 넘나들며, 피안과 차안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절대적인 관계에 있다. 교회가 가정을 요구하고, 가정이 교회를 통해서 존재한다. 하나님의 신비한 경륜 안에서, 두 둘은 함께 존재한다. 아무튼 가정생활의 목적은 구속원리를 체득하여 누리며 꽃피우는 데 있다.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 얻고 교회를 통해서 배운 원리를 가정에서 적용함으로 천국의 원리를 체득하는 곳이다.


그래서 사탄은 두 기관을 집중적으로 공격한다. 교회와 가정이다. 교회를 무너뜨리는 데 갖은 방법을 다 쓴다. 또 가정을 문란하게 만들고 파괴한다. 요즘에 젊은이들이 가정에 대해서 ‘필요중심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필요에 따라서 가정이 선택되는 시대이다. 섹스는 욕구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가정을 별로 소중하지 않다. 사단의 계략이다. 또 더 교묘한 것은 교회에 열심인 성도를 통하여 가정을 버리게 한다. 이것은 아주 교묘한 술책이다. 이단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이러한 악행은 원수의 교묘한 궤계가 숨어있다. 가정이 죽으면, 교회도 죽는다. 구속의 원리가 꽃피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정이 좋은 성도가 실력 있는 성도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실력은 어디에 있는가? 성경지식인가? 충성인가? 놀라운 기도인가? 무슨 은사인가? 아니다. 가정이다. 그 사람이 구속의 원리를 얼마나 깨달았느냐, 예수를 얼마나 잘 믿느냐 하는 것은 그가 어떤 가정생활을 하느냐와 아주 긴밀한 관계가 있다. 그가 예수를 통해서 구원받고 교회에서 그 원리를 배워 얼마나 남편을 사랑하는가? 얼마나 아내와 하나가 되었는가? 어떻게 그 원리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훈육해서 자식교육을 시키는가? 이런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교회에 사람을 세울 때 가정을 잘 다스리는 사람을 뽑으라고 했다(딤전3:12). 왜? 그가 성경의 원리를 재대로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잘 사는 사람인가? 사람들은 돈 많으면 잘 산다고 한다. 돈이 판단기준이다. 돈이 많으면 잘 산다고 하고, 돈이 없으면 무조건 못산다고 한다. 이것은 이 사회가 얼마나 금전만능주의에 빠져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그러나 돈이 잘 사는 것의 기준일 수 없다. 나는 가정이 잘 사는 것의 기준이라 생각한다. 그 가정이 얼마나 행복하고 건강한 가정인가? 돈이 있고 건강한 가정도 좋은 가정이다. 그러나! 돈이 없는 대도 건강한 가정은 더 좋은 가정이다. 몸이 건강하지 않은데도 정신적으로 건장한 가정, 이것 대단한 가정이다. 심지어 남편이나 아내가 없는데도 건강한 가정, 진짜 좋은 가정이다.

어떤 사람이 성공한 사람인가? 출세하고 명성을 얻은 사람인가? 그렇지 않다. 일반적으로 러시아에서 최고로 성공한 사람은 레오 톨스토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는 불행한 사람이다. 그의 부인은 임종할 때 머리맡에 딸들을 불러놓고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것은 내 탓이었었다.” 톨스토이의 생애는 비극 그 자체였다. 그의 아내는 화려함을 원하는데 그는 그것을 경멸하였다. 그녀는 사회적 명성이나 칭찬을 갈망하고 있었으나 톨스토이는 그러나 그녀를 경멸하였다. 아내는 부를 동경하고 있었으나 그는 부를 죄악시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태도 때문에 아내는 화를 내고, 울기도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몇 년 동안 집요하게 그에게 정신적으로 고통을 주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발작을 일으켜서 그를 위협했다. 1910년 10월 어느 눈 내리는 밤, 83세의 톨스토이는 가정의 불화를 참고 견딜 수 없는 나머지 정처 없이 집을 나오고 말았다. 11일 후 그는 어느 역에서 숨을 거두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그에게는 아내를 절대로 곁에 오지 못하게 해달라는 것만이 소원이었다고 한다. 아! 그의 현란한 문장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지만, 가장 가까이 있는 아내 한 사람을 감동시키지는 못하였다.


링컨은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 중의 하나다. 그러나 그도 비극적이었다. 링컨은 수많은 정적들의 공격을 설득하고 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정치에서 큰 성공을 거두어들였지만 자기 아내는 자기편으로 만들지는 못하였다. 링컨의 아내는 세상에 보기 드문 잔소리 많은 여자로서 20년 이상의 결혼생활 동안 링컨을 곤경에 몰아넣었다. 그녀는 매일 남편에게 불평불만과 비난을 퍼부어 댔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링컨에게 좋은 점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등도 굽은데다 걸음걸이도 보기 흉하다, 인디언 그대로다, 귀 모양과 얼굴모습이 온통 마음이 안 든다.”는 것이었다. 링컨은 아내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성장과정, 기질, 취미, 사고방식 등 무엇 하나 공통된 것이 없었다. 링컨은 가능하면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변호사 시절 봄 3개월과 가을 3개월을 순회 재판에 나가면 결코 집에 오지 않았단다. 정작 가장 가까이에 있는 아내는 자기편으로 만들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심오한 철학으로 “네 자신을 알라”고 사람들을 일깨워 새로운 길로 이끌었지만, 정작 자기의 아내는 실패하였다. 그러면서 능청을 떨었다. 한번은 아내가 소크라테스에게 잔소리를 퍼부은 뒤 그래도 성이 안 찼는지 물통에 담긴 물을 머리에 부어 버렸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빙긋이 웃으며 “천둥이 친 다음에는 소나기가 오게 마련이지”라고 말했단다. “아니, 어떻게 대 철학자가 저런 부인과 사는가?” 주위에서 물을 때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사나운 말을 타고 연습을 하면 어떤 말도 다룰 수 있지. 아내를 다룰 수 있다면 어떤 사람인들 다루지 못하겠나?” 대단한 능청이다.

목사도 마찬가지다. 설교 잘하는 목사가 좋은 목사인가? 능력 있는 목사가 좋은 목사인가? 다른 사람과 잘 지내는 사람인가?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잘 주는 사람인가? 아니다. 건강한 가정을 이끄는 목사이다. 어떤 목사님이 자기 교회를 떠나는 성도에게 무엇을 보고 교회를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단다. “그 교회의 목사님의 가정을 보십시오. 자녀를 보십시오. 특별히 사모님의 얼굴을 보십시오. 사모님의 얼굴은 목사님의 영적실력이 피어나는 곳입니다.” 정말 맞는 말이다. 왜? 목사는 예수를 통해서 구원 얻고 교회에서 배운 원리를 가정에 적용하도록 인도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가정을 잘 이끄는 목사가 진짜 목사다. 이 말이 나에게 칼처럼 찌르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행복한 가정을 위해서, 첫째 부부중심의 가정을 이루라.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를 통해서 구원 얻고 교회에서 배운 원리로 행복한 가정을 추구하라.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다. 그러려면 부부가 중심인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 31절을 읽자. 그렇다. 특별히 어버이 중심의 사도에 젖어있는 우리들이 묵상해야 할 말씀이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가 ‘부모를 떠나’ 진정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언급을 통해서 우리는 가정이 부부중심의 공동체임을 유추할 수 있다.


여기 ‘부모를 떠나’라는 말은 단지 ‘분가하라’는 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떠나야 한다. 이 말을 노인을 경시하라는 말로 받아들이지는 마시라. 최선을 다해서 부모님께 효를 다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요점은, 정신적으로 독립적인 부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정의 중심이 부부라는 것이다.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님은 이를 주석하면서, ‘노인중심의 한국가정에서 겪고 있는 문제들, 특히 고부갈등은 여기에서 출발한다’고 지적하셨다. 한번 생각해 볼 말이다.

노인중심이 바람직하지 않듯이, 아이들 중심의 가정도 바람직하지 않다. 요즘 신세대의 가정은 대부분 아이들 중심이다. 잘못된 서구사상의 영향이다. 과다한 아동중심은 아이들 자신들에게도 해롭다. 자식들은 가정에서 행복한 부부생활을 보아야 한다. 아동중심의 가정은 “아, 엄마 아빠는 아이들을 위해서 죽도록 고생하는 분이구나.”라고 생각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요즘 젊은이들이 애를 안 키우려고 결혼을 안 하는 것이다.

정말 아이들에게 좋은 것은 부부중심의 행복한 가정이다. 남편과 아내가 중심이 되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서 아이들로 하여금 ‘야! 결혼해서 살면 저렇게 좋구나.’하고 생각이 들도록 해야 한다.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 한 교육전문가의 말이 떠오른다.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선물은 행복한 남편과 아내가 만들어내는 건강한 가정입니다.” 정말 맞는 말이다.


행복한 가정을 위해서, 둘째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

본문 말씀 22~24을 읽자. 가정생활은 구속의 원리를 체득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하늘가정의 원리를 절감하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 했다. 이 원리를 깊이 체득하려면,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이것이 구속의 원리를 위한 질서이다.

어떤 여성은 이런 구절을 싫어한다. 남녀평등을 해친다고 생각한다.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성경말씀을 근거로 하나님이야말로 남녀불평등의 원흉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나님이 여자를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었고, 구약의 역사를 통해서 여자로 남자의 지배하에 두었고, 신약에서도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만들었기 때문이란다. 하나님의 경륜과 질서를 오해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왜 이러한 이치를 만들었나에 대한 해답을 얻는 것이다. 그것은 남편과 아내는 가정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다. 이것이 불공평인가? 불평등인가? 아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희망이 없다. 우리는 전적으로 예수님께 의존해야 한다. 그래야 영생이 존재한다. 생명이 그에게 있기 때문이다.


난 이 하나님의 복종의 경륜(도) 앞에서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호소하는 지를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아내들처럼 순종과 복종의 의미를 깊이 헤아리는 사람들도 없음을 또한 나는 알고 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므로 많은 것을 깨닫는다. 사실 남편에게 복종하려면 복종할 수 없는 것이 많이 있음을 발견한다. 그래서 이래저래 참견도 하고, 반기도 들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왜 그런가? 남편이 복종할 만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편도 나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완전한 신랑 예수의 가치를 배워간다. 복종할만한 예수가 바로 자신의 진정한 남편임을 깨달아가면서, 인간의 참다운 행복이 그분에 대한 진정한 순종과 복종을 통해서 소유된다는 것을 알아갈 것이다. 나는 이땅의 아내들이 남편에 대한 순종과 복종의 길에서 일탈하지 말기를 바란다. 아내들이 이 길 외에 다른 방편을 통해서 주께 드려야 할 순종과 복종을 배우는데 더 많은 길을 돌아가지 말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내들이여, 매듭은 얽힌 데서 풀어야 한다. 이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는 아내들을 하나님이 도우실 것이다.

행복한 가정을 위해서, 둘째로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

25~30절을 읽자.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남편이 해야 할 일은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하는 대상을 위하여 자기를 주는 것이다. 자기가 죽는 것이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을 아내에게 주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아내를 사랑하려고 해 본 사람이라면, 남편들은 불만을 가질 것이다. 왜? 아내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과연 아내가 나에게 있어서 내가 죽어야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 아내가 나를 위해서 죽어도 시원찮은 판인데 내가 죽으라구? 그럴 수 없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남편 역시 진정한 남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하여 조금씩 자라가게 될 것이다. 아내를 사랑하려고 노력하면서 실망하고 지칠 때마다, 하나님은 “너의 신랑 예수는 너를 사랑했다. 너와같이 죄 많은 인생을 위해서 존귀한 예수가 죽었다. 이 사랑을 깨달아라. 이 예수의 사랑이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고 거룩하게 해서 흠이 없게 만들어 예수와 혼인하게 만들었다.”라는 말씀을 들을 것이다. 아내를 사랑하는 그 가시밭길에서 죄의 근본정신인 자기중심성이 깨어지고 참 사랑의 정신을 배워갈 것이다.  

그러므로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남편은 예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다. 명심하라! 아내를 끝까지 사랑하려 하지 않는 남편은 예수님의 사랑을 도무지 알 수 없다. 아내가 이래서 못하고 아내가 저래서 못한다고 핑계를 대는 남편은 조건 없이 자기를 구원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혀 깨달을 수 없다. 남편들이여! 그대들에게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사랑하라! 이 말씀에 순종하는 남편들을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이다.

행복한 가정은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라. 복종과 사랑은 둘 다 같은 것이다. 다 죽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종도 죽어야 가능한 일이고, 사랑도 죽어야 가능한 일이다. 다 죽는 것이다. 결국 십자가다! 아내와 남편의 도는 십자가의 도인 것이다! 십자가의 도, 제자도인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예수님의 십자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복종이었으며, 사람을 위한 사랑이었다.


결국 구속의 원리는 십자가에서 완성되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여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함으로 천국가정을 완성하셨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말씀하신다.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여 예수 십자가의 정신을 이루라. 그리하여 지상천국을 만들라고 말씀하신다.


가정은 십자가를 배우는 곳이다. 아내들이여, 남편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라. 이것이 진짜 남편인 예수께 복종하는 것이다. 남편들이여, 아내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라. 이것이 진짜 남편인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가정은 무엇인가? 십자가를 지는 곳이다. 부부가 서로를 위해서 십자가를 짐으로 행복을 만들어가도록 고안된 하나님의 비밀한 장소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천국가정을 완성하였듯이, 우리들도 십자가에서 지상가정을 천국으로 만들어야 한다. 여러분에게 이 십자가의 원리가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비결이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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