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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사명 (요21:1-25)

by 【고동엽】 2022.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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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사명   (요21:1-25)


갈릴리 바다에서 일곱 제자들이 고기를 잡으려다가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피곤하고 지쳐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그대로 순종하였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순간 요한은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고 명령하신 분이 바로 예수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부활하신 예수를 체험하게 되는 것은 바로 순종하는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밤새도록 수고하였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어두운 모습의 일곱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환하게 밝아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에크론 대학 교수 텅크스(Tunks)박사의 말에 의하면, 유사 이래 문명시대가 21회나 있었는데, 그 모든 멸망의 원인들이 하나님을 거스린데 있다고 밝혔습니다.("무화과 나무 열매") 일곱 제자들처럼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면 비록 예수를 배반하고 낙향했지만 그의 용서와 은총을 입어 그의 사랑을 깨달아 부활하신 예수를 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심으로 부활의 예수를 체험하실 뿐 아니라 예수의 사랑하시는 자가 되시므로 제일 먼저 예수를 알아 볼 수 있는 축복을 누리시기 축원합니다. 예수의 사랑하시는 자는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그는 예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14:21-23)

예수의 사랑하시는 자, 베드로에게 제일 먼저 주고받으신 대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요21:15-17)

여기 세 번에 걸친 "네가 나를 사랑하는냐?"는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시는 예수의 말씀 속에는 다음과 같은 각기 다른 의미가 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첫 번째 질문,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여기 네 형제 자매 부모 친구들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것이며, 두 번째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것은 여기 네가 가지고 있는 배와 그물, 고기, 고향 갈릴리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것이며, 세 번째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것은 네 자신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확인하고 나서 예수께서는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는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사명을 말합니다. "만일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어린양을 먹이는데 너의 생애를 다 바치라."는 말씀이십니다.

우리는 이 예수의 말씀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비로소 예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세상에서 가장 큰 특권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또한 세상에서도 가장 큰 책임이기도 한 것입니다. 실로 사랑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셨던 것입니다. 또한 그 사랑은 사명만이 아니라 베드로에게 십자가를 주셨습니다.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신 예수께서 이어서 하신 말씀은 이렇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

로마에서 베드로가 주님을 위하여 죽는 날이 돌아 왔습니다. 베드로도 역시 십자가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십자가에 못박으려 했을 때 그는 그 곳에 거꾸로 달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주님과 같은 방법으로 죽을만큼 가치있는 사람이 못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었고, 사랑은 베드로에게 십자가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책임이 따르고 또한 사랑은 언제나 희생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사명을 위해 십자가를 질 각오가 없는 한 참으로 예수를 사랑하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명 완수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십자가 사랑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받은 사명은, 곧 "양을 치고 먹이는 것"과 최후에는 그리스도를 위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직분(사명)은 예수를 증거하고 장수하여 평안한 가운데 죽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받은 바 사명의 우열과 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기 주어진 사명에 따라 정해 진 곳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요21:22,23)

예수께서 오늘날의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영광은 단연코 다른 사람들과 비교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영광은 우리들에게 할당된 능력이 어떠하든 간에 그것에 따라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인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명예를 서로 쟁탈하는 사이가 아니라 베드로는 위대한 목자이며 요한은 위대한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전15:40,41)

베드로에게 주어진 "양을 치고 먹이는" 목자의 사명은 양의 특성상 성결 보존을 위해 죽도록 힘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미워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양들을 목양하는데 있어서 죄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말하기를, "만일 나에게, 하나님만을 사모하고 죄만을 두려워하는 사람 백 명만 있다면, 나는 세계를 움직일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역사의 주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이 시대에 역사의 운명을 가늠하는 천국 복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교회는 마땅히 성결하지 아니하면 역사에 대한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특히 죄악이 관영한 이 시대에 교회는 성결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때가 되면 양과 염소를 분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25:31-34)

경향신문 5월 31일자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습니다.

《청각장애 발레리나 강진희, 세상에 태어나 한번도 소리를 듣지 못한 스물 네살, 그녀는 어떻게 음악에 맞춰 춤을 출 수 있을까. 아니 어떻게 음악이 몸에 감겨들까, 그녀의 공연에서는 그래서 관객들이 숨을 죽인다. 음악이 춤속으로 스며들어 완전히 하나가 될 때 객석은 무대 위보다 더 격정에 휩싸인다. 춤동작은 또 어떠한가, 관객들의 경탄 속에 우뚝 솟아올라 힘차게 비상한다. 활달하고 시원하다. 내면에서 우러난 표정연기는 너무도 당당하다. 우아한 자태에 당당한 표정. 자칫 교만하게 보일 정도의 자신감. 그녀를 감싸고 있는 신비로운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무엇이 영혼 속을 흐르기에 침묵의 세계에서도 노래를 듣는가. 그것은 사랑이다. 부모가 자신의 딸이 농아라는 걸 알게 된 것은 생후 10개월 때였다. 놀라지 않는 아이. 울음소리가 이상한 아이. 어머니는 기도하며 울었다. 말 못하는 딸을 위해 여러 가지를 가르쳤다. 농아에 맞는다는 미술, 테니스, 육상,.... 그러나 딸은 무용만을 고집했다. 그렇다고 듣지 못하는 딸에게 무용을 시킬 순 없었다. 중학교에 들어간 농아 소녀의 담임선생은 마침 무용교사였다. 소녀는 담임선생에게 매달렸다. 선생은 단호히 뿌리쳤다. 그러나 뜻밖에 어머니가 소녀의 편이 되었다. 어머니의 기도 속에 춤추는 딸이 보였던 것이다. 기도의 응답이었다. 이번엔 모녀가 함께 졸랐다. 이렇게 해서 소녀의 바람은 이뤄졌다. 선생은 농아라고 봐주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 똑같이 가르치고 따라오지 못하면 가혹하게 나무랐다. 매도 들었다. 울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울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음악을 따라갈 수 없었다. 자신보다 앞서거나 뒤에 처지는 음악과 간격을 좁힐 수 없었다. 다른 아이가 다섯 번 연습하면 꼭 4배인 스무 번을 했다. 발가락에 피멍이 가실 때쯤 되면 선생은 연습량을 더 늘렸다.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솔로 콩쿠르에 참가했다. 탁월한 기량으로 예선을 통과했지만 본선에선 탈락했다. 역시 음악이 문제였다 음악을 타지 못하는 발레리나. 듣지 못하는 음악을 눈으로 헤아려 외우고 리듬을 타는 연습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것은 어쩌면 신의 몫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녀에겐 음악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소리의 작은 입자--진동이 느껴졌다. 끝내 이듬해 참가한 콩쿠르에서는 1위를 차지했다. 그 후 그녀는 대학에서 좋은 스승을 만나 연기를 배웠다. 거친 동작들은 하나씩 시어(詩語)로 변했다. 그녀의 춤은 갈수록 무르익었다. 92년 전국대학 콩쿠르 금상, 93년 마카오 초청공연 북큐수 국제 양무 콩쿠르 준우승. 마침내 대학 졸업을 앞둔 95년 2월 그녀는 조승미 발레단이 공연하는 <삼손과 데릴라>에 주연으로 발탁됐다. <기적의 발레리나 강진희. 청각장애인으로 세계에서 유일한 발레리나인 강진희양은 천부적인 예술성과 고도의 테크닉, 그리고 예민한 감성으로 강렬한 인상을 줄 것이다.> 필담을 통해 그녀와 얘기를 나누었다. "발레를 통해 무엇을 얻는가?" "평강이다. 마음에 알 수 없는 것들이 흐른다. 난 느끼지 못하지만 아마 노래인지도 모른다." "감명 받은 영화가 있는가?" "십계명과 작년에 본 쉰들러리스트다. 십계명에서 기적의 하나님을 확인했고 쉰들러리스트에선 인간 사랑이 감동적이었다. 쉰들러의 자기 본성 고백은 잊혀지지 않는다." ----- 그녀의 삶은 사랑이다. 어머니는 지금도 그녀를 위해 새벽기도를 올린다.》

청각장애자의 발레리나 성공은 딸에 대한 어머니의 뜨거운 사랑과, 무용에 대한 청각장애자의 사랑의 역사(役事)인 것입니다. 사랑으로 사명을 감당할 때 즐겁고 기쁘게 일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실린 심리학자들의 연구결과를 보면 지난 15년간 복권 당첨으로 백만장자가 된 139명을 추적, 조사해 보았더니 약 60%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1년 후에는 다시 직장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행복해지기 위해서였습니다. "행복해지려면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잘못된 인식이라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인간은 일(사명)을 가질 때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먹고 살기 위해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서는 행복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가장 큰 행복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일찍이 무자극 실험을 한 적이 있는데 아무런 치장도 되어 있지 않은 방에서 아무 하는 일없이 먹고 자기만 하면 일정한 돈을 지급하겠다는 실험을 해 본 결과 대부분 2-3일만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고 합니다. 일(사명)은 자기 자신이 가치를 느껴서 자발적으로 일을 해야 즐겁고 성과도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강제로 시키면 똑같은 일이라도 재미가 없어지고 성과도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직장인 중에는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하면서도 좋은 건강을 유지하고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늘 피로를 느끼며 지쳐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차이는 자기 자신이 하는 일에 어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느냐 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 "양을 치고 먹이는 일"은 영원한 의미와 가치가 있는 일(사명)입니다. 때문에 사도(제자)들은, 그리고 초대교회 성도들은 순교하기까지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음을 위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했던 것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으로, 감사함으로 주어진 사명과 십자가를 지고 가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끊임없이 출렁대는 가슴의 번민을 안고서 그의 고뇌처럼 얽히고 설킨 그물을 하염없이 던지고 또 던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여윈 슬픔에서 그가 도망쳐 갈 수 있는 곳은 이전의 삶의 터전이었던 갈릴리 바다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허탕이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손금보듯 환하게 알고 있는 그였지만........ 마침내 그물질을 포기하고 텅 빈배를 저어 해변에 이르렀을 때 그는 해변가에 서 계신 예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내 양을 먹이라!"

폴란드 소설가 셍케비치의 소설 <쿼바디스>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한 이후로 네로 황제는 더욱 더 잔인한 방법으로 기독교인들을 학살합니다. 그 때 기독교인이던 <기리아>가 수많은 시민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무시무시한 들소가 들어있는 원형 극장 안으로 들여 보내집니다. 그러나 당시 노예였던 <우르서스>가 원형 극장 안으로 뛰어들어가 들소의 머리를 비틀어 가까스로 <기리아>를 구출해 나옵니다. 이처럼 구사 일생으로 살아남은 <기리아>와 <우르서스>는 지하 교회에 숨어 있는 베드로를 찾아가 한시 바삐 이 죽음의 도시인 로마를 탈출한 것을 종용합니다. 신도들의 요구에 의해 베드로가 로마를 빠져나와 캄파니아 들을 향해 가고 있을 때, 갑자기 환한 한 줄기의 빛이 그를 향해 다가옵니다. 그 빛이 그리스도임을 안 베드로는 땅에 엎드린 채 묻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Quo Vadis Domine?) 그러자 그 빛이신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가 나의 양을 버렸으니 내가 다시 로마로 돌아가 다시 한번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지 않겠는가?"

1920년대 후반 메사추세츠 주(州)의 법정에서 흥미진진한 사건을 다룬 적이 있습니다. 그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날 부둣가를 거닐던 한 사람이 로프에 걸려 그만 차갑고 깊은 바다 속으로 빠지게 되었습니다. 원래 헤엄을 칠 줄 모르던 사람인데다 갑자기 차가운 물이 닿는 바람에 다리에 쥐까지 나서 그는 물 위에 떠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살려줘요!" 그는 잠시 동안 허우적대며 도와 달라고 소리치다가 그만 물 속으로 깊이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잠시 후 그의 친구들이 달려 왔을 때는 너무 늦어 이미 그의 생명은 끊어진 뒤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물에 빠진 사람으로부터 불과 몇 미터도 못되는 거리에 젊은이 한 사람이 의자에 기대어 앉아서 한가롭게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분명히 물에 빠진 사람이 "살려줘요!" 라고 애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또한 수영에도 능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심하게도 그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일광욕을 즐기며......이것을 알게 된 익사자의 가족은 그의 이러한 행동에 분개한 나머지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사람의 탈을 쓰고는 도저히 이럴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죽어 가는 것을 그냥 보고 있다니요! 그것도 수영을 할 줄 아는 사람이......" 그러나 결과는 익사자의 가족이 패소한 것으로 끝났습니다. 법정의 판결은 부둣가에 앉아 있던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야 할 법적 책임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에 대한 영적 책임을 묻습니다. 결코 죄 없다 하지 않습니다.

"들의 짐승들아 삼림 중의 짐승들아 다 와서 삼키라 그 파숫군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만 도모하며 피차 이르기를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먹자 내일도 오늘 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사56:9-12)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또 의인이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 의는 기억할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라 그가 그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치 않게 하므로 그가 범죄치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겔3:17-21)

예수께서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어린양을 찾으려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15:3-7)

오늘 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지옥으로 빠져 가는 이웃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영적 흑암에서 꺼내라고 우리에게 분명히 명령하고 계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출처/이동휘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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