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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사랑

사랑의 표준 (요14:12-24)

by 【고동엽】 2022.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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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표준   (요14:12-24)


예수께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순종으로서 표시하셨습니다. 사랑의 표준은 바로 순종인 것입니다. 자신의 사랑을 말로만 표현하고 행함이 없으면 거짓된 사랑입니다. 거짓된 사랑에는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성령은 진리(진실, 참)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수반되지 않는 사랑 또한 거짓된 사랑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으로 사랑하고, 성령으로 봉사할 때 참 사랑이요 참 봉사가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시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3:18-24)

우리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상대방에게 아픔과 괴로움, 비통함을 안겨주지는 않았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괴롭게 한 적은 없습니까? 예수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예수를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은 적은 없습니까? 우리는 교회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성도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교회를 어지럽히며 교회의 성장을 방해한 적은 없습니까? 부모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부모의 마음에 못 박은 것은 없습니까? 사울은 다윗을 미워하고 그의 아들 요나단은 다윗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미움 쪽에서는 떠나고 사랑 쪽에 함께 하셨습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그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사울이 보고 알았고 사울의 딸 미갈도 그를 사랑하므로..."(삼상18:12-28)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사랑 가운데 계시는 것입니다. 미움과 질투, 증오와 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그 가운데 예수께서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원수까지일지라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곳에 예수께서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그를 더욱 더 사랑하십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을 때 자기를 사랑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 보이셨던 것입니다. 사랑은커녕 오히려 증오하여 십자가에 예수를 못 박았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들, 적대하는 유대인들에게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 보여 주시지 않았습니다. 음악 영화 <지붕 위의 제금사>(Fiddler on the Roof)에서 남편 테부이가 아내 골디에게, "나를 사랑하오?"하고 묻습니다. 골디는 기가 막혀 한참동안 말을 못하다가 대답하는 독창을 합니다. "25년 동안 당신의 옷을 빨고 식사준비를 하고 집안 청소를 하고 당신의 아이를 낳아 기르고 소젖을 짜고 내 있는 것을 다 드렸는데 25년 후에 한다는 소리가 사랑하냐구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

진정한 사랑은 온전한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순종을 통해서 나타나는 사랑은 사실 쉽지 않습니다. 많은 어려움이 따르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끝까지 순종하는 십자가의 길이 그토록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처럼, 사랑의 순종은 그 길이 힘들고 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염려할 것 없습니다. 사랑에 따르는 순종의 어려움을 예수께서 아시고 우리에게 "보혜사(Helper)"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보혜사(保惠師,Helper)"는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parakletos)인데 이는 <청함 받은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법정에서 고소, 고발을 당해 형벌을 받게 될 누군가를 위해 변호하기 위해서 <청함 받은 자>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 말은 곤란이나 고민, 의혹 또는 당황하는 가운데 있는 사람을 도웁기 위하여 <청함 받은 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의 일을 잘 처리하여 위로하고 용기를 주고 기쁨을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보혜사"입니다. 이러한 일을 행하는 "보혜사"가 바로 성령입니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들의 불완전한 것을 제거해 주시고 우리들이 인생을 잘 처리할 수 있게 하여 주십니다. "보혜사"되시는 성령께서는 패배의 삶을 승리의 삶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보혜사" 성령은 삶의 모든 것을 잘 처리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 진리를 위한 싸움을 잘 싸울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보혜사" 성령은 세상에서 사랑에 실패한 사람을 참 사랑으로 인도하여 아프고 괴로웠던 사랑을 치유하시고 기쁘고 즐거운 사랑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보혜사" 성령은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도록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십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바람기 있는 여자와 결혼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아라." 그래서 호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호세아는 고멜을 통해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자녀가 있음에도 고멜은 정부와 눈이 맞아 도망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다시 호세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정부와 놀아난 네 아내를 찾아가 다시 사랑해 주어라." 호세아는 은 15세겔과 보리 한 호멜을 가지고 가서 창부가 된 고멜을 산 후에 이렇게 일렀습니다. "당신은 내 아내니 다시는 다른 남자와 어울려 불의한 관계를 갖지 마시오." 이렇게 하기를 여러 번 했습니다. 거듭되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결국 고멜을 사랑으로 변화시켰습니다. 호세아의 이러한 순종은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암시하는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해 사랑을 성공시킨 호세아의 사랑의 승리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보혜사" 성령을 깨닫지 못합니다.왜냐면 세상은 마치 하나님께서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고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을 완전히 배제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마음은 "보혜사" 성령이 거할 수 있는 성소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고 <성령의 전(殿)>이 되어져야만 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전6:19)

세상 사람들의 마음은 우상들로 가득 차 있으며, 그들의 사랑은 땅에 있는 것들에 집착되어 있습니다. 성령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 "보혜사" 성령이 그의 마음에 거처를 정할 수 있으려면 먼저 부정한 영(靈)이 나가야만 합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마12:43)

예수 믿는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에 말씀과 성령으로,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채워지지 않는다면 나갔던 세상의 영, 마귀는 더 많은 악신들을 불러들여 이전보다 더 악한 형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들, 이전보다 더욱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마음은 세상의 영들로 가득 차게 되어 거짓된 사랑과 거짓된 것에 속아 실패한 인생의 쓴맛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없는 마음속에는 거할 수 없습니다. 천문학자들은 우리 일반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먼 거리까지 하늘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식물학자는 식물학을 모르는 사람보다 휠씬 더 관목(灌木)을 분간할 수 있습니다. 의사는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보다 휠씬 더 정확하게 진단하고 병을 고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미술에 대하여 알고 있는 사람은 그 분야에 무식한 사람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을 그림 가운데서 볼 수가 있습니다. 음악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교향곡을 듣고서 전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보다 더 "보혜사" 성령을 잘 알고 깨닫게 됩니다. "보혜사" 성령은 누구의 마음속에라도 청함을 받지 아니하고서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처럼 분주하고 시끄러운 소용돌이 생활 가운데서도 성령과 그 능력이 임하시기를 조용히 바라며 기다리는 시간을 특별히 별도로 설정해 놓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성령을 구하지 않으면 참 사랑으로 승리할 수 없습니다. 런던의 유명한 샤프츠버리 경이 길을 지나가는데 어린아이가 횡단 보도를 지나가다가 자기의 힘으로 걸어 갈 수 없으니까 "아저씨, 나를 도와주세요." 하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샤프츠버리 경은 이 아이를 안고 길을 건너가 내려 놓았습니다. 여기에서 샤프츠버리 경은 어린 소년으로부터 위대한 신앙의 교훈을 받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즉 우리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혔을 때, "주여, 나를 도와 주소서."하며 소년처럼 도움을 요청한다면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삶의 에너지를 공급받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지금도 우리 곁에서 우리가 "나를 도와주세요."하고 도움을 청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계십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11:9-13)

예수 믿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성령을 진심으로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참 사랑을 구하면서도 성령을 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 바른 신앙 고백과 바르고 참된 사랑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7)

이 말씀들은 오직 예수를 구세주로 마음속에 영접하여 받아들이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만 "보혜사" 성령이 임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아야만 우리는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아야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성령의 가장 큰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고 성령을 받고 나서는 성령을 소멸치 말아야 합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며."(살전5:19) "소멸"이라는 말은 불을 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억제해서는 안됩니다. 다윗은 법궤가 들어올 때 너무 기쁜 나머지 옷을 다 벗고 춤을 추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신앙이요, 간증이요, 고백입니다. 성령의 감동이 일어날 때는 성령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령을 소멸시키는 결과가 됩니다. 성령을 소멸시키지 않는 방법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양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실 때 그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비록 내게 손해가 된다고 할지라도, 불 보듯이 뻔하게 자신에게 유익이 없을지라도 자신의 의지와 생각, 고집을 꺾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동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믿고 어떤 경우에도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해야만 합니다. 예루살렘에 혹독한 박해와 핍박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사도들과 하나님의 종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더 이상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 곳을 떠날 수밖에 없어서 이방 나라인 안디옥, 빌립보, 고린도 등 등 곳곳으로 흩어졌습니다. 그 결과 세계 복음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환난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슬픔과 고통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흩어지게 하심으로써 복음을 온 세계에 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고 성령에 순종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성령을 소멸치 않을 때 사랑의 능력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4:30)

우리는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은 언제 슬퍼합니까? 우리가 영적으로 육적으로 더러워질 때 성령께서는 슬퍼하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그리고 사랑하려면 우리 역시 거룩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항상 깨끗해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가 영육간에 더러워졌을 때 떠나십니다. 그는 거룩하신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떠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항상 회개하는 생활로 성결을 보존해야만 합니다. 성결을 보존하게 될 때 성령께서는 우리를 기뻐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거룩한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성결 보존하게 될 때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참 사랑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을 베풀어주십니다. 비둘기는 결코 쓰레기통에 가서 뒤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능력도 깨끗한 곳에 임하지 추한 곳에 임하지 않습니다. 경건한 생활, 성별된 생활, 이것이 바로 성령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의 생활 태도입니다.

다음으로, 성령과 동행하는 생활이 아름다운 사랑의 열매를 맺는 능력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교수 한 분이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논문을 내게 되었습니다. 틀림없이 학위를 받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만 그의 학위 논문 심의가 다음 해로 미루어지게 되었다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유는 마감일에 이틀 늦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세히 알아보니까 그의 논문이 틀리거나 잘못된 것도 아닌데 일 년 동안 미국에서 목회를 하면서 그의 지도 교수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서로 원만한 연락을 취하며 관계성을 유지하면서 지냈더라면 그 교수가 이해를 했을텐데 일 년 동안 아무런 연락도 없이 지내다가 갑자기 찾아와서는 논문을 제출하니까 지도 교수는 그의 논문이 마감보다 이틀 늦었다고 받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관계성을 맺을 때에는 "이해할 수 있어요. 열심히 노력하시오." 라고 오히려 격려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관계성을 맺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령과 끊임없이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문을 두드릴 때에, 때에 따라서 우리에게 후하게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과의 교통을 지속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며 사랑을 지속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13:13)

성령과의 지속적인 교통함을 이룩할 때 성령의 소욕에 따라 살게 되므로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들을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과의 지속적인 교통함이 두절되게 되면 자연히 인간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게 마련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합니다. 자기의 욕심을 채우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삶은 성령을 좇아 행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5:17-21)

미국에 사는 이사벨이라는 부인은 해산을 하다가 갑자기 하반신을 전혀 쓰지 못하는 불치의 병에 결렸습니다. 그 부인은 이 병을 고치기 위해서 수많은 재산을 허비했으나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은 병 치료를 포기하고 나머지 돈으로 당시 한국 동란 중에 고생하는 전쟁 고아를 위하여 보내 주었습니다. 그것을 기금으로 해서 부산에 고아원이 생겼는데 후일 그 고아원은 학교가 되었습니다. 이사벨 부인은 그 후로 1년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식에 모인 가족과 친지들은 이 부인이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치료비를 한국에 보내서 학교가 세워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모두 놀랐습니다. 부인의 최후의 치료비에 의해서 세워진 그 학교가 창립된 지 2주년이 되던 날 그의 남편인 데이비드씨가 초청을 받고 창립 기념식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아내가 치료비를 모아서 보내 세워진 학교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공부하는 것을 보고 그는 매우 감격하였습니다. 그 때에 그 학교의 교사가 건축 중에 재정이 부족하여 곤란을 당한다는 사정을 들은 데이비드씨는 미국에 있는 자기의 집과 재산을 저당 잡혀서 약 6만불을 보내 주었습니다. 그 학교가 바로 오늘날 4,500명의 학생들이 교육을 받고 있는 부산의 이사벨 여자 중고등학교입니다. 성령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보다는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 속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의 기초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사랑하시고 예수는 하나님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고 예수도 또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사람은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서로가 사랑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의 기초입니다. 사랑은 순종에 기초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할수록 그 만큼 우리들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없는 마음속에는 거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진실한 가를 판단할 수 있는 시금석은 그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보혜사"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어주시는 사랑의 능력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 할지라도 약한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행하는 결심이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시험에 빠지게 되면 그 결심을 포기할 가능성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베드로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요21:15-17)

이렇게 세 번씩이나 사랑을 다짐하고 결심하고 고백했지만 그는 오순절 성령 강림의 체험을 하고서야 비로소 그가 고백한 사랑, 그가 결심한 사랑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습니다. 예수 믿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시고자 하는 여러분들에게 사랑의 능력이 되시는 "보혜사" 성령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이동휘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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