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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할 것 밖에 없는 사람 (눅17:11-19)

by 【고동엽】 2022.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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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할 것 밖에 없는 사람  (눅17:11-19)

요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힘들고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감사를 잃어 벼렸기 때문입니다. 감사가 없는 사회는 점점 어려워지고, 또 어려워지다 보니까 감사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어 지는 것입니다.
오늘은 맥추감사절입니다. 7일간 맥추절을 지켰는데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농작물인 밀, 보리. 포도. 무화과 등을 추수하는 것을 기념하는 감사절기입니다. 오늘의 맥추절은 이러한 성경적 배경과 더불어 지난 전반기 동안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와 축복을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다시 감사의 마음이 불일듯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사람과 동물이 다른 점이 있다면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며, 불신자와 성도들이 다른 점이 있다면 성도는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좋은 선물을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좋은 직장에 다니고, 좋은 남편이 있는데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이 병든 마음입니다. 혹시 마음속으로는 감사하고 있으나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면 그것도 병든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1-23) 영혼이 병들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썩어질 것들을 하나님으로 섬기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가 너무나 지극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세 가지만 들어주마.”
이 사람은 무척 기뻐하면서 무슨 소원을 아뢸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아마도 자기 아내가 퍽 싫었던 모양입니다. 첫 번째 소원으로 “지금 마누라를 데려가시고 새 마누라를 얻게 해 주십시오”라고 했던 것입니다.
소원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내를 데려가셨습니다. 장례식 날 문상객은 참 많이도 왔습니다. 그 문상객들은 한결같이 “아이고, 그 좋은 분이 돌아가셨군요.”하며 “남들 몰래 이런 일도 하고 저런 일도 하고, 참 좋은 일 많이 하셨는데, 그렇게 착하고 복된 분이 돌아가셨군요”라고 이구동성으로 죽은 아내를 칭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은 문상객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으면서 자기 아내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이고, 그런 사람이 죽어서 되겠나’ 싶어 하나님께 “제 마누라를 다시 살려 주십시오”라고 다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두 번째 소원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제 하나밖에 안 남았으니 무엇을 구할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하나 남은 소원을 투자할 만큼 귀한 것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아예 하나님께 여쭈어보기로 했습니다.
“하나님, 제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 지 좀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하나님께서 바로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라.” 이렇게 해서 그는 정말 세 번째 소원을 이렇게 기도하는데 사용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알고보면 다 감사할 것 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세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사계절로 불평하는 사람입니다. 말 그대로 시시때때로 불평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매사에 불평합니다. 가뭄과 더위가 계속되면 타 죽겠다고 짜증을 내다가, 장마철이 되면 질척질척하다고 불평합니다. 여름에는 더워서 못살겠다며 살고, 겨울에는 추워서 못살겠다고 합니다.
둘째는 감사할 일에는 감사하고, 불평할 일은 어김없이 불평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감사할 일, 이것은 불평할 일 . . . 심사를 거쳐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치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 없습니다.
영국의 선교사요, 탐험가인 리빙스턴은 명예의 절정에 올라 고국에 귀환하여 메달과 학위를 수여 받았습니다. 모두 그를 존경하고 부러워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그의 아들 로버트가 미 연합국에 가담하여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전사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감사할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구분하기 시작한다면 우리에게는 언제나 불평할 일이 더 많습니다. 그러면 불평의 사람, 실패의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셋째는 전천후로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눈이 감사를 낳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인생에 불평할 일로 가득 차 있습니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불평하지 않도록 저에게도 믿음의 눈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내 입술에서, 내 삶 속에서, 내 생각과 마음을 주장하여 주셔서 감사가 넘쳐나게 하옵소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幸福)은 감사하는 사람의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타고르도 “감사의 분량이 곧 행복의 분량이다.”라고 했습니다.
감사할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씨 엠 그로우라는 설교가는 매일 조간신문의 사망자란을 보면서 자기 이름이 거기서 빠진 것을 확인할 때마다 “아차!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나!”하며 감격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일본에 ‘한센병(나병) 환자의 어머니’라 불리우는 ‘다마키’라는 여인이 있습니다. 그 분은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요양원을 만들고 그들을 돌보다가 자기도 한센병에 감염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그녀는 그날의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균이 내 몸에 들어오니 육은 죽어가지만 영의 눈이 열린 것이 감사하다. 눈썹이 왜 있었는지도 몰랐는데 눈썹이 빠지면서 눈썹의 고마움을 알았다. 눈썹이 없으면 먼지가 온통 눈으로 들어가 시력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고통스럽다. 하나님은 눈을 지켜주시려고 눈썹을 주셨는데, 이제는 나에게 병을 주시어 마음과 영생을 지켜주시려고 하셨으니 더욱 감사하다.” 우리는 얼마나 감사하고 있습니까?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을 바라볼 때 믿음의 눈을 가지고 바라보면 됩니다. 믿음의 눈은 모든 것을 감사한 일로 보게 합니다.
신앙생활을 잘 한다는 것은 감사를 잘 한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나 감사는 누가나 잘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감사는 노력하고 훈련해야 잘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일본의 내촌감삼은 “하나님께서 만일 인간을 저주하신다면 질병이나 실패 그리고 배신이나 죽음으로 저주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으로, 그리고 성경을 읽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막힌 귀로, 또한 감사하는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도록 메마른 마음으로 저주하실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믿음이 약화되면 불만과 원망과 불평이 밖으로 나옵니다. 감사를 잡아먹는 일종의 바이러스입니다. 오늘, 원망과 불만과 불평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불평하는 사람들에게는 늘 불평의 조건만 늘어납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감사의 조건들이 더 많이 만들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감사가 결핍된 삶은 영혼과 정신과 육신의 건강에 모두 해롭습니다. 그러나 감사의 사람에게는 닫힌문도 열리는 것입니다. 하루에 세 번씩 무릎 끓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한 다니엘은 사자굴에서 살아 나왔고 형통한 복과 높은 지위의 복을 70년간 누렸습니다. 감옥에서도 감사찬송, 기도한 바울과 실라는 모진 매를 맞고 깊은 옥에 갇혀서 감사의 찬송을 부를 때 쇠고랑이 풀어지고 옥문이 열린 것처럼 감사하는 자는 환경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본문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지역 경계를 지나시면서 한 마을에 들어갔습니다. 나병 환자들이 저 멀리서 소리 지릅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이 때 이상하리만큼 예수님은 아무 질문이나 설명이 없이 “제사장들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에 다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홉은 먼저 제사장께 몸을 보이러 가고 그 중에 단 한 사람, 지극히 멸시 받는 사마리아인은 자기의 회복된 몸을 보고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예수님께로 돌아와 지체없이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 때 그 사마리아인은 정상인의 몸으로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말씀입니다.
1. 우리도 저주의 병에서 건짐받은 자들입니다.
문둥병은 나균으로 생기는 만성 전염병입니다. 1874년 노르웨이의 한센씨가 나균을 처음 발견한 후부터는 이 병을 "한센씨병"이라고 이름하고 있습니다. 주님 당시 메소포타미아와 동양 지역에서는 이 병으로 시달린 사람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나병’은 하늘이 내리는 저주의 병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병이 낫게 된 경우는 반드시 제사장의 확인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 열 명의 나환자들은 바로 발길을 옮겨 제사장에게로 가고 있었습니다. 신기하게도 가는 도중에 모두가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각기 제 길로 갔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주님의 능력을 봅니다. 이렇게 추한 죽음의 병에 걸린 사람도 주님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추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13)
주님이 오신 목적은 나 같은 영적인 문둥이를 구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결코 자기를 비하하지 마십시오. ‘나같은 사람을 사랑하실 리가, 용서하실리가 . . ’하며 스스로 정죄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2. 신앙은 모험입니다.
예수님은 문둥병자들이게 왜, 그 자리에서 고쳐주시지 않고 제사장에게 가서 그 몸을 보이라고 하셨을까? 문둥병자들은 제사장에게 가서 진단을 받고 고침 받았다고 인정을 받아야 사회에 복귀 할 수 있었습니다. 일반인들과 접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제사장에게 도착하기도 전에 문둥병이 그대로 있었다면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그런 위험한 일을 명령하셨을까요?
주님은 그런 모험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믿고 가라는 것입니다. 목숨걸고 . .믿음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믿음은 모험입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지금도 그런 모험을 요구하십니다. 목숨걸고 믿고 나아갈 것을 . .
성도는 믿는대로 얻습니다.
철도의 객차와 화물차를 연결, 분리하는 곳에서 일하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동료들과의 관계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그에게 있어서 문제는 부정적이었습니다. 어느날 어느 직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퇴근 시간을 한시간 당기고 다른 동료들은 퇴근을 했습니다. 이 사람은 조금 늦게 가게 되었는데 사고로 냉동 열차안에 갖히게 되었습니다. 냉동열차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팔과 주먹으로 치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피멍이 들 정도였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추워 왔습니다. ‘여기서 나가지 못하면 밤새 . . 죽어 버릴 거야.’ 바닥에 주저 앉아버렸습니다. 허름한 종이한장을 주워서 자신의 상황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춥다. 몸이 마비된다. 빨리 나가지 않으면 이것이 내 마지막이 될 것이다. . . .”다음날 아침 출근한 승무원들이 문을 열었을 때 그 사람은 쪼그린 채로 죽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경찰 조사에 의하면 그 냉동열차는 고장나 있었고 그가 죽었을 때의 온도는 보통 실내 온도보다 조금 낮았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믿은 대로 된 것입니다. 우리는 잘 믿어야 합니다. 바로 믿어야 합니다.
믿을 수 있는 것을 믿고 눈에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은 불신자들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판단과 이성과 경험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주님의 말씀과 언약을 믿고 행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모험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주님의 제자들도 . . . 영적인 일에 모험심이 없는 사람들은 결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신앙의 모험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감사에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고침받은 이들의 모습에서 차이점을 하나 찾는다면 그 차이는 시간적인 차이일 뿐입니다. 감사의 마음은 열사람 다 동일한 마음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홉 사람은 주어진 축복을 먼저 가족과 함께 누리고, 그 다음에 예수님께 감사드리려고 하였던 것이고 . . . 사마리아 출신 한 사람은 예수님께 감사를 먼저 드리고, 그 다음에 주신 축복을 가족과 함께 누리려고 했을 것입니다.
같은 감사라도...주어진 복을 자신이 먼저 누리고 그 후에 드리는 감사와 먼저 감사를 드리고 나중에 복을 누리는 것이 그 가치 면에 있어서 다르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선과 차선이 중요합니다. 먼저 할 일과 나중할 일이 따로 있습니다.
주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의 삶에서 우선순위를 바로 결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챤 억만장자가운데 ‘하이드’란 분이 있습니다. 한동안 사업이 잘되다가 부도가 났습니다. 10만달러의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사람이 빚을 지고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고난속에서 하이드는 참된 신앙인으로 거듭났습니다. 고통속에서 거듭났습니다. 그가 구원받고 인생의 재기를 결심한 순간 두가지 변화가 왔습니다. 교회를 신실하게 출석하기 시작했고, 십일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회사에서 같이 일하는 참모 한 사람이 “당신은 빚이 이렇게 많은데 빚은 놔두고 십일조 드리는 헌금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라고 반문했답니다. 이때 이 사람이 아주 재미있는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제가 드리는 이것은 아직은 헌금수준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직도 빚 갚는 수준입니다. 하나님은 저의 첫 번째 채권자이십니다. 저는 하나님한테 우선 빚을 갚고자 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내 사랑하는 주님 앞에 가장 존귀한 것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고백은 예언처럼 들어맞았습니다. 그의 삶은 새로워지 시작했고, 재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가 인생의 초점을 바로 맞춘 순간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관심이 되기 시작한 순간부터 모든 것은 달라졌습니다.
영적인 우선순위를 지키면 하나님의 복이 임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4. 제사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감사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시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입니다. 그리고 그 길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시고 십자가를 지고 죽으십니다.
지금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아니하고 기회를 놓치면 사실은 영원히 주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마는 셈이 됩니다. 감사를 드림에 있어서 중요한 시간이요 기회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 외에는 아홉 사람은 그 기회를 놓치고 만 것입니다. 세상에는 기회라는 것이 있습니다. 기회는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에도 기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복이 주어지면 먼저 그것을 누리고, 감사는 나중으로 미루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까?
우리의 생명이 어느 순간에 죽을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은혜 받은 때...즉시 해야 되는 것이지 미루면 화가 될 수 있습니다. 감사를 미루다 보면...점점 감사의 마음이 퇴색이 되면서 결국에는 감사드리는 것을 잊어버리고 그 마음에 욕심과, 사단의 생각이 채워질 수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처음에는 얼마나 감사했으면 밭을 팔아 전부 바치겠다고 했겠습니까? 그러나 . . .
감사의 기회를 놓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즉시로 감사 하십시오. 감사를 표현 해야 할 때 제 때에 하는 것은 따끈따끈한 찐빵과 같은 것이라면 나중에 드리는 감사는 식어버린 찐빵과 같이 맛을 잃는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열 문둥병자가 제사장들에게 달려갑니다. 레14:의 문둥병의 정결규례 때문입니다. 문둥병이 나을 때는 제사장이 진찰을 합니다. 그리고 나았음이 확인되면 제물을 잡고 절차를 따라 행하는 의식이 있습니다. 이런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아홉 사람들은 제사장에게로 갔으나,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은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기 전에, 또 여호와의 제단에서 제사를 드리기 전에, 예수님께 달려와서 하나님께 큰 소리로 영광을 돌리며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은 그 사마리아 사람을 보고. . . 왜 먼저 제사장에게 보이고 제사부터 먼저 드려야지 이렇게 감사하러 달려왔느냐 책망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사장을 향해 달려간 아홉 명을 향하여 왜 감사하러 오지 않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섭섭해 하십니다.
감사가 선행되지 않는 제사는 무의미 하다는 뜻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감사가 없는 예배는 그것이 예배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50:23)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제물 때문에 받으시고 받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제물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가인은 욕심으로 드린 제사였습니다. 복을 받기 위한 조건적인 제사 였고 아벨의 제사는 감사의 제사였습니다. 감사하여 감격으로 드림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했던 것입니다. 그런 제사를 어찌 안 받을 수 있겠습니까?
감사가 충만한 성도의 예배는 기다림이 있습니다. 갈망함이 있습니다. 사모함이 있습니다. 겸손함이 있습니다. 순종함이 있습니다. 그러니 은혜가 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5. 감사하는 사람은 더 귀한 것을 받게 됩니다.
19절.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감사하는 행위를 ‘믿음’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감사가 있는 믿음과 감사가 없는 믿음은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감사가 있는 믿음이 구원을 얻습니다. 구원의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감사하러 달려온 그 사마리아 사람에게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아홉은 아무리 문둥병을 고침 받고, 육신의 고질병은 고침 받았다고 할지라도 세월이 흘러, 또 병들거나 늙어서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그들에게 없었습니다.
주님이 구원을 선포한 사마리아 사람도 늙었고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 구원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나님 안에 살다가 다시 하나님 앞에 가는 영원한 생명을 받은 것입니다.
감사하는 성도에게 하나님은 점점 더 귀한 것을 주십니다.
우리는 감사할 것 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감사하는 자가 되십시오. 감사하되 크게 감사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임경택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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