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로 돌아가기 | 목차로 돌아가기 |
그리스도인의 자유(8:1 ~ 4)
오늘의 본문에서는 로마서 중에서도 가장 귀한 말씀을 보게 됩니다. 로마서를 특별히 좋아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소위 로마서 격찬론자들이 많은 것입니다. 천지개벽이 되어 세상의 모든 책이 다 없어졌다고 해도 로마서만 있으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 정도입니다. 로마서 하나만 있으면 충분히 예수믿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로마서 중에서도 특히 로마서 8장이 제일 귀하다고들 얘기합니다. 스패너라고 하는 분은 그 대표적인 사람인데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을 다이아반지라고 한다면 로마서는 그 반지의 다이아몬드와 같고, 특히 로마서 8장은 그 다이아몬드의 첨단과도 같다." 이로써 로마서를 통하여 은혜 받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로마서가 그렇듯 소중하기 때문에 그런 자기 개인적인 신앙을 이렇게 간증하게 되는 줄로 압니다.
어쨌든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말씀은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요. 귀한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8장 1절로 4절의 이 말씀을 통하여 은혜 받고, 구원받고, 또 높은 신앙의 경지에 들어가게 되며, 사람이 변해서 이 말씀과 함께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여기에 사도 바울의 신학, 그 많은 교리, 그 신학적 지식이 아주 집중적으로 집약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그의 교리, 그의 신앙적 고백이 여기에 집약되어 있어요. 자세히 읽어보면 정말 바울 신학 전체가 여기에 나타나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비록 로마서 전부를 다는 못 읽는다 하더라도 정 안되면 이 로마서 8장 1절로 4절만 자꾸 읽고 또 읽고 해보면 바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지는 구원의 복음이 환하게 새로운 의미로 비치어오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의 주제는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없다는 것입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저도 이 말씀을 소중히 여겨서, 이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참회의 고백, 참회의 기도를 드린 다음에 사죄의 확인을 하면서 반드시 마지막에는 이 말씀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우리는 이 말씀을 의지하고, 바로 이 신앙, 이 고백에 의해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라 하여 7장에 있는 내용을 여기에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7장에서 우리는 인간의 고통, 그 죄인 됨으로 인해서 오는 고통, 그 많은 괴로움에 대한 고백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7장 25절에 가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여기에 복음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바로 그 구원의 사건을 놓고,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이제"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로 '눈'인데, 시간적으로만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러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진, 그 큰 충족된 조건을 전제하고 하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정죄함이 없다'하는 말은 헬라어로 '우 카타크리마'라고 하는데 여기서 '카타크리마'는 정죄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 카타크리마라'라 하면 무죄를 선언한다는 뜻이 됩니다. '크리마'라는 것은 비판한다, 심판한다, 라는 말이고, '카타크리마'는 정죄한다는 뜻이며, '우 카타크리마'는 정죄를 해제한다는 뜻입니다. 이말의 원문 그대로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재판 때에 원고가 고발을 하고, 변호사가 변론을 하고, 본인이 심문에 대한 답변을 하고, 다 거친 다음에 맨 마지막에 재판장이 '무죄' 선언을 한다면 바로 그 시간에 무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억울하게 당하던 사람들은 와 하고 감격하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런 시간, 곧 무죄라고 선언하는 그 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죄 선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무죄 선언입니다. 이 귀한 사죄의 선언이 여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이해하려면 세 가지 단어의 개념을 분명히 해야 됩니다. 그래야 이해가 됩니다. '육신'이라는 말과 '영'이라는 말과 '율법'이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이 세 단어에 대한 바울의 신학적 개념을 정리하고야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먼저 '육신'이라는 말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헬라어로 '사륵스'라고 하는 이 말의 뜻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바울은 이 말을 사용할 때에 적어도 세 가지 개념에서 사용하고 있는데 어느 경우에나 일반적으로 쓰는 이 말을 그대로 쓰는 것입니다. 첫째, 단순히 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륵스'는 영어로는 flesh입니다. 단순히 육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2장 28절에도 보면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라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서 '육신'이라 하는 것도 육체인 것입니다. 즉 '사륵스'는 몸이나 육신이나 육체-이 고깃덩어리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됩니다. 둘째로는, '인간의 관점' '인간의 통념' '인간의 습속 내지 세계관'이라는 정도의 뜻으로 '사륵스'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육신으로 말하면 예수는 다윗의 자손이다'하면 '인간의 관점에서는' '인간의 통념으로는' 예수는 다윗의 자손이 되는 하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신'의 세 번째 개념-이것이 바울이 생각하는 독특한 개념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과 반대되는 본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예요. 혹은 몸의 어떤 욕망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는 것도 아닙니다. 혹은 육체적 본능 같은 것을 지칭하는 말로 이해해도 잘못된 것입니다. 그 본능 자체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서 결코 그 자체가 죄악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여기서 말하는 육신에 속한 자, 혹은 육신이라고 하는 것은 죄악된 인간성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독특한 의미입니다. 타락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본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타락된 나약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꾸만 낮은 데로 끌고 가는 인간의 본성을 가리켜 육신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바울 나름대로 설명해준 곳이 갈라디아서 5장 19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여기서 육체라고 하는 말이 결코 육신의 본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타락한 인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이 모든 것이 다 타락한 인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총칭해서 육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3절에서 말씀하는 '육신'은 다 저러한 의미에서 사용한 단어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영'이라는 말의 개념입니다. 사실은 이 로마서 8장을 가리켜 흔히「예정장」이라고도 말합니다. 예정에 대한 얘기는 뒤에도 나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깊이 읽어보면 로마서 8장은「성령장」입니다. 8장에만 '영' 곧 '프뉴마'라고 하는 말이 20회 나타납니다. 히브리말로는'루아흐'요, 헬라말로 '프뉴마'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적으로나 헬라적으로나 간에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보이지 않는 힘, 보인지 않는 인격적 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때로는 '영'만이 아니라 '영적인 마음'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됩니다. 인간 자신에게 있는 인간 스스로의 마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과 만나는 대상으로서의 영적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마음, 혹은 지향적인 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 안에 있는 아주 소중한 영적 기능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 '율법'이라고 하는 것의 개념입니다. 율법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로마서 강해를 통하여 계속해서 얘기했기 때문에 복습하는 마음으로 몇 말씀만 드립니다. 사도 바울이 생각할 때의 율법이라는 말에는 바울 나름의 독특한 개념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하는 지칭합니다. 율법을 생각할 때에 이것은 죄를 더하게 하는 법이다, 죄를 깨닫게 하는 법이다, 죄인에게 있어서는, 육신에 속한 죄인에게 있어서는 인간을 무력하게 하는 법이다, 그리고 가책을 느끼게 하고 공포에 떨게 하고 그 결과로서 죄를 더 짓게 만들고, 더 무서운 저주에로 우리를 끌고 가서 결과적으로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 이것이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죄가 죄 되는 것은 율법 때문이요, 또 죄가 더하게 되는 것도 율법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율법이 죄를 낳는다, 죄로 인도한다, 사망에로 인도한다-이렇게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 때문에 무기력하게 되고, 율법 때문에 더 죄짓게 되고, 율법 때문에 소망 없게 되고, 율법 때문에 감히 하나님을 쳐다볼 수도 없는 인간이 되어버린다고 하는 의미에서의 율법-본래적 의미에서의 율법이 아닌 것입니다. 실제적 의미에서일 뿐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본래 율법은 선합니다. 그러나 죄인에게, 이미 타락한 죄인에게 있어서는 실제적이고, 실제적으로 볼 때에는 율법이 결국은 사람을 죽이는 법이다, 라고 말씀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것도 법입니다. 같은 법적 관계에서 설명을 하고자 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율법은 사망에 이르게 하는 법이요, 죽이는 법이요, 성령은 생명에 이르게 하는 법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법이요, 영적인 법이요, 생명을 주고, 생명을 소성케 하는 활력을 더하는 법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이 성령의 법은 두려움 대신에 사랑을 주고, 저주 대신에 감사하는 마음을 줍니다. 그리고 두려운 마음은 사람을 죽이는 데로 인도하는데 사랑은 우리를 생명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생명의 법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 안에'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곧 '엔 크리스토'-'엔' 곧 '인(in)'이라고 하는 말은 바울에게 있어서 대단히 소중한 용어입니다. 바로 이 '안에서'라는 말이 바울로 하여금 철학적 사고로부터 출애굽하게 하는, 완전히 나오게 하는 귀중한 분기점을 이루는 용어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신비로운 말씀입니다. 이것은 생명적 관계입니다. 그리스도와 나 사이에 맺어지는 새로운 영적 관계를 말씀함입니다. 성령 안에서의, 은혜 안에서의 관계를 말씀합니다. '안에서'라는 말, 대단히 신비롭고도 현실적인 말입니다.
본문에 보면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하고 말씀합니다. '해방'이 바로 구원의 개념입니다. 바울에게 독특한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곧 '해'이에요. 그리스도인은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사람의 사람됨은 그가 누리는 자유의 성격에 의해서 규명된다'라고들 말합니다. 당신은 어떤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느냐, 그리고 어느 정도의 자유를 누리고 있느냐, 하는 것이 바로미터가 되는 것입니다.
보세요, 경제적인 자유를 누리는데 도덕적인 자유가 없어요. 도덕적인 자유는 누리는데 영적 자유가 없어요. 이제 죽을 때가 가까워지면 하나님 앞에 갈 시간인데 벌벌 떨고 있어요. 그렇다면 그 사람은 자유가 없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정치적인 자유, 경제적인 자유, 도덕적인 자유, 인격적인 자유, 지식의 자유, 그 다음에는 모름지기 영적인 자유가 있어야 되거든요. 그러면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자유는 어떤 것입니까? 비록 경제적으로는 자유가 없어요. 그러나 도덕적으로 자유가 있어요.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부끄러움이 없어요. 그런가하면 도덕적으로는 자유가 있는데, 거기까지는 있는데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고개를 들 수가 없어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되어 있지 않아요.
그러면 신앙적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다른 자유 다 없어도 신앙적 자유, 신학적 자유만은 마음껏 향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옥중에 있는 성도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하는 찬송가 가사처럼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양심의 자유, 신앙적 자유를 누리고 사는 것이에요.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바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완전한 해방을 누리고 있어요. 자유를 누리고 있어요.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묘한 이치가 있습니다. 내가 죄를 짓지 않고 내가 거룩해져서, 내가 온전해져서 자유했느냐 하면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법이 달라진 것입니다. 법이 달라져서 자유해진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볼까요? 여러분이 여기 사는 자유의 마음 가지고 북한에 가면 북한에서는 반동분자가 됩니다. 또 거기서의 반동분자가 여기 오면 애국자가 됩니다. 거기서 순수하게 충성을 다하고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소위 유공자, 그런 '공산주의 동무'가 여기 오면 그는 죄인입니다. 반공법에 걸린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결국은 똑같은 사람인데 거기서는 아주 훌륭한 국민이다 하더라도 여기 오면 간첩인 것입니다. 사람은 달라진 것이 없지요. 법이 다른 것입니다. 법이 바뀌면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와 있는 간첩이 있다고 합시다. 북한에서 여기 내려와 가지고 무전을 그 쪽으로 보내면서 북한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간첩이 숨어 있다고 합시다. 대단히 실례되는 얘기지만 어느 때에 다시 전쟁이 일어나서 북한군이 서울에 오게 되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애국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은 그대로이므로 법이 바뀌면 됩니다. 그러면 내가 어느 법에 속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어느 법에 속하느냐-그리스도의 법에 속하면 은혜의 사람이 되고, 율법에 속하면 당장 죄인이 되는 거예요. 여기에 문제가 있어요. 바울이 깨닫고 술회하는 진리가 여기 있는 거예요. '당신은 지금 어느 법에 속한 사람입니까?'하고 묻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 율법에 속해서 지금도 허덕이고 있다면 영원히 죄인입니다. 그런데 이제 법 체제를 바꿔서 율법으로부터 벗어나 은혜의 법, 그리스도의 법을 따르게 될 때에는 그 순간에 완전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포도원 주인이 사람들을 포도원에 들여보내서 일 시키는 얘기가 나옵니다. 아침에 일찍 나가서 품꾼들을 들여보냈다, 그 다음에 또 나가보니 사람들이 놀고 있어서 그 시간으로, 제 삼시, 제 오시, 제 구시, 열한 시… 우리 시간으로 말하면 9시에도 아직 사람들이 놀고 있으므로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고, 들여보낼 때마다 한 데나리온을 주마, 약속을 했어요.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씩을 똑같이 줘요. 그랬더니 아침부터 와 가지고 수고한 사람들이 불평입니다. 하루종일 땡볕에서 일했는데 한 시간밖에 일 아니한 사람에게도 우리와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다니 말이 안 된다, 하면서 따지고 들어요. 이게 율법입니다. 오랫동안 일한 사람은 더 주고, 조금 일한 사람은 조금 주는 것이 율법 아닙니까? 합당한 법이지요. 그러나 주인은 말합니다. 네 것이나 가져가면 됐지, 내 마음대로 하는데 웬말이 그리 많으냐, 내가 주고 싶어 주는 것이고 또 너와 나와 약속한 게 한 데나리온 아니냐, 그렇다면 네 것이나 가져가면 됐지 다른 사람에게 더 주건 말건 무슨 상관이냐 합니다. 보세요. 이 두 번째 법은 은혜의 법입니다. 몇 시간 일했느냐 하는 것은 상관없어요. 어떤 의미에서는 돈주기 위해서 일시키는 거예요. 빈둥빈둥하는 게 보기 싫어서 일해라, 그러면 내가 주마, 한 것입니다. 주려고 일 시킨 것입니다. 일 많이 했다 적게 했다 하는 것을 묻는 게 아니거든요. 은혜의 법입니다. 일했다는 것이 중요해요. 그러니까 일하는 사람으로 보면 그저 오늘 공칠 뻔했는데 일 시켜주시니 감사합니다, 벌써 시간이 늦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러주시니 감사합니다, 돈까지 주시니 더욱 감사합니다--이러면 끝나는 것입니다. 누군 덜 주고, 누군 더 주고…… 이러고 따지는 것은 율법주의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속했습니까? 율법에 속한 자가 많아요. 그래서 문제가 많아요. 왜 나같은 사람에겐 복을 안주고 저 사람에게 복을 줄까, 나는 이렇듯 진실하게 사는데 왜 이렇게 형편없이 살고 저 사람은 엉터리로 사는데 왜 저렇게 잘살까-그러느라고 고민이에요. 그런 생각하느라고 항상 머리가 복잡해요. 율법주의자인 것입니다. 은혜에 사는 사람은 그런 것 없어요. 남이야 어쨌든 상관없어요. 하나님께서는 나같은 죄인을 사랑하시고, 오늘 내게 은혜를 주시고…… 그저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다 감사해요. 부족해도 주십니다.
가령 죄를 놓고 생각해보세요. 내가 조금 실수를 했어요. 그럴 때에 또 실수했구나,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제가 이런 나쁜 놈입니다, 구제불능입니다, 하고 회개합니다. 그러느라고 정신이 없어요. 그러나 은혜에 속한 사람은 내가 실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다 아시면서 사랑해주시니 할말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또 실수할 것입니다, 미리 얘기합니다마는 그런 줄 아시고 사랑해주셔야 됩니다… 이러면서 하나님 앞에 나오니 이거, 하나님이신들 어떻게 하시겠어요? 이런 사람이 은혜의 법안에 사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오늘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다시 하나 더 예를 듭니다. 아주 중요한 얘기니까요. 탕자의 비유를 보세요. 탕자는 집에 돌아와서 그저 감지덕지해요. 아버지가 잔치를 해주고 하니까 좋아서 그저 감사하고, 미안하고… 그런 마음으로 있는데 형은 그렇지 않아요. 형은 집을 안나갔던 사람이니까 왜 내게는 염소새끼 한 마리도 주지 않아서 내 친구와 더불어 먹도록 하지 않았으면서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저 못된 동생은 저렇듯 환영하는 것입니까, 하고 따져요. 그 사람 얼굴, 우리가 안 봐도 알 것 같아요. 어지간히 얼굴이 비틀어졌을 것 같아요. 동생 돌아왔으면 그저 고맙지 뭘 비판을 하고 앉아 있는 것입니까? 율법주의예요.
그러니까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은혜의 법, 그리스도의 법, 성령의 법을 따라야 돼요. 성령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사랑의 법입니다. 은혜의 법입니다. 성령의 법이 모든 법을 이기는 것입니다. 종의 법이 아니라 아들의 법입니다. 율법의 법이 아니라 은혜의 법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될 문제입니다. 오늘의 3절을 다시 한 번 보면 깊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자, 우리는 할 수가 없어요. 이미 구제불능의 사람이에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십니다.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십니다.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셔서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켰습니다. 지난번에 우리 대통령이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에 이번에 보니 거기에 한국전쟁 박물관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기념관이라니 건물인 줄 아는데 실은 벽을 잘 만들어놓고 큰 글자로 새겨놓았어요. 서양사람들이 이런 것은 참 잘해요. 'The Freedom is not free.'-두고두고 외워야 될 말입니다.
참 좋은 말입니다. 'Free' 라는 말은 '공짜'라는 말이거든요. 'That's free.'하면 공짜로 먹어라, 공짜로 가져가라 하는 얘기가 됩니다. The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거저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한 것입니다.
자,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어요. 그리고 성령의 법에 살아요. 거저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값을, 율법이 요구하는 값을 예수님께서 대신 치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그것을 강조합니다.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그렇습니다. 이래서 충족한 것입니다. 다시 번역을 좀 바꿔보면, 인간의 본성이 약하기 때문에 율법이 이룰 수 없었던 것인데,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죄 많은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시어 죽게 하심으로 율법의 요구가 모두 이루어졌다, 충족되었다, 하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충족됐느냐-인간이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인 우리가 못 지켰습니다. 또 지킬 수도 없게 됐습니다. 그럴 때에 그리스도께서 대신 지키셨습니다. 죄인이 죽어야 하는데 의인이 죽었어요.
그것은 바로 죄인이 의인처럼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것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먼저 자신이 율법을 지키셨습니다. 율법을 다 지키셔서 의인이 되셨습니다. 완전한 의인이 되시고, 또 죄인처럼 죽으셨습니다. 그런고로 죄인을 구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율법을 대신 지키셨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께서는 당신은 죄 없으시면서 죄인처럼 벌을 받으셨습니다.
결국은 이 두 가지로 인하여 율법을 충족케 하셨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의인으로 사시고 죄인으로 죽으셨습니다. 그런고로 죄인으로 사는 우리가 의인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해방되어 이제는 은혜의 법, 성령의 법안에 살아야 합니다. 꼭 성령 안에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대한민국사람은 대한만국에 있어야 대한민국 법을 지키면서 온전한 시민이 될 수 있지, 그 법을 가지고 북한으로 가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거기서는 죄인이에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꼭 여기에 있어야 해요. 이 법안에서만, 은혜의 법안에만 있어야 됩니다. 그리스도안에 꼭 연합된 존재로 살아가야 합니다. 한순간도 흔들리면 안됩니다. 우리는 성령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성령의 법안에 충실하게 살아가야 됩니다. 그럴 때에만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율법적 관계로 빗나가서는 안됩니다. 나 자신을 평가할 때에나, 내가 남을 평가할 때에나, 세상을 볼 때에나, 절대로 원망이 없어야 합니다.
왜요? 은혜 안에 사는 사람에게는 원망이 있을 수 없으니까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오직 은혜, 오직 감사, 오직 찬송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불평합니다. 원망합니다. 원망하는 자는 자유인이 아닙니다. 어느 때에든지 원망하는 사람은 절대로 자유인이 아닙니다. 자유를 버린 사람입니다. 이제는 율법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고로 오직 은혜 안에 살아야 합니다. 은혜로 충만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그 사람만이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4절말씀을 눈여겨보세요.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좇지 않고"-아까 이에 대한 개념을 우리가 정리해보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그런고로 우리는 항상 육신의 법대로 살지 않고,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살아야 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판단하고, 항상 성령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성령의 법안에 충실하게 연합된 생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 안에 머무를 때에 죄와 사망의 법이 우리를 절대로 심판하지 못합니다. 우리를 가까이하지 못합니다. 사실은 여러분 자신도 매일매일 이것을 경험합니다. 이것은 원리적이며, 교리적이며, 신학적이며, 동시에 실제적입니다. 아마 여러분이 깊이 생각해보면 한순간도 이 원리에서 떠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잠깐이라도 이 은혜에서 떠나면 그 순간에 벌써 율법에 매입니다.
그런고로 죄와 사망이 법에서부터 온전히 자유 하는 길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에 죄와 사망과 율법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신령한 존재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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