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로 돌아가기 | 목차로 돌아가기 |
그치지 않는 고통(롬9:1~11)
로마서는 전부 16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로마서를 한번 객관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16장 가운데 1장으로부터 11장까지는 교리에 대한 것입니다. 어떻게 믿어야 하느냐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다음 12장으로부터 16장까지는 생활에 대한 말씀이요, 윤리에 대한 말씀입니다. 믿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1장으로부터 11장 중에서도 특별히 지난번에 우리가 공부한 바와 같이 1장에서 8장까지가 진실한 의미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얻는다 하는 교리를 말씀해줍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지금까지 우리가 이것을 공부해오지 않았습니까?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이 교리적인 문제를 진지하게, 또는 논리적으로, 혹은 법적관계에서 설명합니다. 그리고 9장에서 11장까지는 구원의 문제를 놓고 이스라엘에 대한 고민의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문제--이것이 본문에 나타난 내용입니다. 9장, 10장, 11장, 이 석 장에 걸쳐서 이스라엘에 대한 문제를 계속 설명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쓰면서 그 심중에 깊은 내용이 있었던 것 같아요.
오늘의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문제에 해답을 주는 내용 가운데 총론격인 '서론'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를 향해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로마사람' 하면 정치적으로는 가장 높은 권세를 누리는 사람입니다. 바울 자신이 로마시민권을 가졌다고 합니다마는, 당시에 있어서 로마시민권을 가졌다 하게 되면 온 세계를 지배하는 최고의 국민된 영광과 자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 그 로마를 향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사람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사람이 최고입니다. 철학적으로는 헬라사람이 최고입니다. 종교적으로는 유대사람이 최고입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고민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종교적으로는 가장 우월한 민족이요, 가장 중요한 민족인 이스라엘이 예수를 잘 안 믿는다는 거예요. 어떻게 된 일인지 예수를 잘 받아주지 않아요. 그래서 바울은 특별히 유대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무척 애를 썼어요. 어느 마을에 가든 유대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노력했어요. 하지만 그 때마다 그는 번번이 핍박을 당합니다. 그래 고민이 생깁니다. '왜 이런 일이 있을까? 어쩐 일인가? 도대체 어째서 유대사람들이 마음 문을 열어주지 않나?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만도 큰 죄인데 어째서 저들은 예수를 믿어주지 않느냐?'하고 말입니다. 전혀 하나님도 모르는 헬라사람들, 혹은 다른 나라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거나 심지어는 로마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하면 그대로 복음의 문이 확 열리고, 곧 예수를 믿어요. 고넬료 같은 사람은 그 자리에서 예수를 믿고, 그의 온 집안이 예수를 믿어요. 그런데 유대사람은 도대체 이렇게 되지 않는 거예요. 이게 왜 이럴까-바울은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뒤에 가서 공부하겠습니다마는 바울 나름대로는 확실한 해답이 있습니다. 해석이 있습니다. 영적인, 성서적인, 그리고 바울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간증도 있습니다. 유대 사람이 지금 예수 안 믿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이 민족을 버리시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오묘한 경륜이 있다, 장차 끝에 가서는 유대사람도 다 예수믿게 될 것이다, 유대사람은 훌륭하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그런 앞날을 환하게 내다봅니다. 이것은 대단한 통찰력이요, 성서적인 해석이요, 그리고 그의 위대한 신앙적 역사의식입니다. 이런 가운데서 사도 바울은 지금 유대사람에 대한 글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사람과 유대사람의 관계만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졌음을 이제 말해줍니다. 또한 구원론적이요,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그 깊은 진리는 여러분이 앞으로 계속 공부하면서 상고하면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세요. 바울 자신은 분명히 유대사람이요, 이스라엘사람입니다. 인종으로 말하면 '히브루'입니다. 히브리사람입니다.
그 애국심은 대답합니다. 만족을 사랑하는 마음 또한 굉장합니다. 특별히 그는 민족을 사랑하되 신앙적으로 사랑했습니다. 사랑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그저 그리워만 하는 것입니까? 그저 보고 싶은 것입니까? 잘 되기만 바라는 것입니까?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정말로 사랑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나라를 사랑합니다. 이 나라가 어떻게 되기를 바랍니까? 이 나라가 어떻게 되는 것이 잘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까? 바울의 애국심은 신앙적 애국심이요, 신앙적 민족애였습니다. 그런고로 자기 나라가 잘살기를 바라든가, 독립하기를 바라든가, 정치적으로 자유를 누리기 바라든가… 그의 바람은 이런 유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그것은 바로 온 민족이 그리스도 앞으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참 어려운 발걸음이었습니다 마는, 여러분도 잘 아시는 대로 저는 북녘땅에 두 번 다녀왔습니다. 다시 언제 또 가게 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자, 왜 이렇게 왔다갔다하며, 또 간절히 바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제가 왜 북한을 가야 합니까? 솔직히 말해서 저는 통일에는 그렇게 흥미가 없습니다. 내 고향에 가고 싶은 것도 아닙니다. 그곳의 어떤 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목사님 어머니의 무덤을 잘 꾸며드리겠습니다." "아이고, 그럴 필요 없어요. 나중에 천당 가서 만날 텐데, 세상 무덤이 어디 있든지, 뼈다귀가 있고 없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찾지 마세요." 그러니까 저보고 이상하다고 그래요. 오는 사람마다 이것 찾아달라, 저것 찾아달라 하는데 목사님 같은 양반은 처음 봤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거예요. 제 소원은 오직 하나, 저들로 하여금 예수 믿게 하는 것입니다. 저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고…… 저들이 어서 문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그것만이 내 목적이요 내 소원입니다. 가면 어떻고 오면 어떻고, 조금 잘살면 어떻고 조금 못살면 어떻습니까? 그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예요. 내 소원은, 내가 가진 민족애라고 하는 것은 오로지 이 민족이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것밖에 없어요.
바울의 입장으로 한번 돌아가 봅시다. 그는 사도행전 26장 29절에서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참 멋있는 말씀이에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바란다'-여러분, 자식에게 그 말을 할 자신이 있습니까? 제발 날 좀 닮아다오, 네가 나처럼 됐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대체로 그렇게는 말하지 못해요. 제발 나처럼 살지 말아라,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불행하니까요. 자신이 행복하다면 모든 사람이 나와 같았으면 좋겠다 하지 않겠어요? 바울의 위대함이 거기에 있3어요. 바울 자신이 행복했어요. 은혜로 충만했어요. 더 바랄 것이 없어요. 그래서 '내가 지금 쇠사슬에 매인 이것만 빼고는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기를 바랍니다'하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 중심은 나와 같이 예수 믿기를 바라요. 나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를 바라요. 나와 같이 은혜에 충만하기를 바라요. 그런데 그 대상이 어디까지인고 하니, 온 민족입니다. 이스라엘 온 민족이 그와 같게 되기를 바라요.
그런데 바울은 계속적으로 동족에게 핍박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이 너무 불쌍해요. 그렇듯 예배당에 가서 자기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애를 쓰는데, 갈 때마다 핍박을 받아요. 특별하게 핍박을 받아요. 그런데도 또다시 가서 어떻게든 전도하려고 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 하나만 들어봅시다. 사도행전 14장 1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바울을 돌로 치고, 그가 죽은 줄 알고 성밖으로 내쳤다고 합니다. 이 유대사람들이 어디서 왔는고 하니,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왔어요. 그러니까 자기네 사는 곳에 바울이 왔을 때에만 핍박한 게 아니라, 바울이 다니는 다른 곳까지 집요하게 따라가서 핍박했다는 말입니다. 이렇듯 바울은 끈질기게 유대사람으로부터 핍박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루스드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사실 바울은 마지막에 로마로 상소합니다. 결국은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가게 되는데, 그 이유도 우리가 사도행전을 공부할 때에 보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유대사람들 때문이에요. 바울을 죽이지 아니하고는 먹지 않겠다는 사람이 저들 중에 40명이나 있지 않았어요? 과연 그 사람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궁금해요. 아무튼 바울을 죽이지 않고는 안 먹겠다고 맹세하는 극성스런 사람들이 많으니 어떡하면 좋아요? 그래 이 땅에는 도저히 발붙일 데가 없어서 할 수 없이 그는 '나는 로마에 가겠소. 로마에 가서 재판 받겠소'-그래서 로마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유대사람들 때문에 바울은 평생토록 고생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유대사람을 사랑합니다. 동족을 사랑합니다. 또 이스라엘사람됨을 자랑합니다. 히브리사람됨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바울은 철저하게 죄는 미워하고 죄인은 사랑했어요. 이것 참 어려운 얘기입니다. 우리는 죄를 미워하다 보면 죄인까지 미워해요. 사람까지 미워해요. 그런데 바울은 그렇지 않았어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죄는 미워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미워하지 않았어요.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속에 있는 악한 마음은 미워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을 미워하지는 않았어요.
생각해보세요. 먼저 그는 이스라엘을 사랑했어요. 사랑하지 않고는 전도할 수 없어요. 구원할 수 없어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뜨거운 사랑이 없는 전도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여러분이 어떤 때에 봉사를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어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씀하지 않습니까?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3절)"-불사르게 내어준다는 것은 너무 드라마틱한 얘기고,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한평생 봉사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그런 경우가 많지 않아요? 사랑 없이 한평생 남편을 심기는 아내가 있어요. 한평생 남편을 위해서 고생한다고 하지만 그 중심에 사랑이 없어요. 그러니까 겉도는 거예요. 여러분, 혹 여러분의 식구 가운데 누구를 예수 믿게 하고 싶습니까? 혹은 전도해보았습니까? 전도했는데 효과가 없습니까? 그렇게 오랫동안 전도했는데도, 10년 동안 전도했는데도 아직도 돌아오지 않습니까? 다시 한번 반성해보세요. 정말로 사랑했습니까? 정말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했습니까?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권면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희생도, 수고도, 물론 전도까지도 그냥 메아리로 돌아올 뿐이에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민족을 사랑했어요. 뜨겁게 사랑했어요. 정말로 사랑했어요. 얼마나 사랑했는가-이에 대해서는 뒤에 가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또한 그는 죄인을 사랑하면서 그 죄인이 당하는 저주를 함께 당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여러분, 환자를 사랑한다면 그 환자에 전염되어서 병에 걸릴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돼요. 특별히 죄인을 사랑하면 나도 죄인취급 받아요. 악한 사람을 사랑하다보면 나도 '악한 사람의 친구'라는 말을 듣게 되고, 어떤 때에는 좋지 않은 악명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대로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사랑하셨어요. 그래서 별명이 '죄인이 친구'이십니다. 또 세리를 사랑하셨어요. 그래 '세리의 친구'라는 별명도 있습니다. 니고데모 같은 사람은 이런 사실이 못마땅해서 사람들이 안보는 저녁에 조용히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서 얘기하지 않아요? 아마도 낮에 예수님을 만나며 자기도 '죄인의 친구'라는 말을 들을까봐, 자기도 '죄인의 친구' 될까봐 그랬던 것 같아요.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인을 사랑하면 내가 죄인 취급받아요. 죄인 아니라도 죄인 대접받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것이 사랑이에요. 그런고로 사랑이라는 것은 물질만 주는 게 아니예요. 몸만 주는 게 아니예요. 시간만 주는 게 아니에요.
가장 중요한 것은 명예를 주는 것입니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값비싼 것은 명예입니다. 돈이 아니예요. 바로 명예예요. 어떤 때에는 우리가 이것을 잊어버리고 돈 몇푼 주고 명예는 내가 얻으려고 해요. 그것은 잘못입니다. 얼마나 큰 것이 명예인데요. 그런데 명예까지 주어야,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랑이더라 그 말이에요. 특별히 하나님 앞에 죄인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에요. 죄인을 사랑한 나머지 죄인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자기 의를 포기해야 됩니다. 자기 의를 완전히 포기해야 됩니다. 희생이라는 것은 의의 문제입니다. 좀 더 나아가서는 영적 문제입니다. 단순히 물질의 문제가 아니예요.
보세요. 출애굽기 32장 32절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는 내 이름을 지워버려주옵소서"-'하나님이여, 이 민족을 사하여주옵소서. 이 민족이 죄를 지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죄인임을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
만일에 용서하지 아니하시려거든 주님의 거룩한 책에서, 즉 생명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주세요.' 중보의 기도로는 이것이 대표적인 기도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 민족을 하나님께서 진멸하시려거든 나도 함께 멸하여주세요. 저들은 다 죄를 지었으나 나는 죄를 안 지었습니다, 저들은 우상을 섬겼으나 나는 우상을 안 섬겼습니다, 그러나 우상 섬긴 내 백성이 망한다면, 그 모습을 보면서까지 나는 평안하고 싶지 않습니다, 물론 가나안땅에 들어가고 싶지도 않습니다, 나도 함께 멸망시켜주세요-이것이 사랑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나만 구원받고자 하는 마음, 그것은 사랑이 아니예요. 나만 편안하고, 나 하나만 구원 얻고자 하는 마음은 절대로 사랑이 아니예요. 그런가하면 나만 형벌을 면하겠다는 마음도 아니예요. 남 죽을 때에 같이 죽어야지요.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예요. 나 하나만 쏙 빠져서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 죽는데 나 하나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이렇게 하면 안되는 거예요.
모세가 그런 경우에 처한 적이 있었어요.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백성은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우상을 섬기는 이 백성을 내가 진멸하고, 너와 네 후손만을 번창시켜 너희로 하여금 다시 큰 민족을 이루게 해서 가나안땅에 들어가게 해주마.'자, 보통사람 같았으면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했을는지 몰라요. 너무도 감격해서요. 그러나 모세는 그렇지 않았어요. '정히 그러실 것이면 나도 함께 죽겠습니다'-이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지불해야 될 댓가가 있어요. 필요한 수고가 있어요. 반드시 지불해야 될 희생이 있어요. 희생 없는 사랑이란 없어요. 지불을 할 각오가 있어야 해요.
바울은 사랑으로 고통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사람됨은 그가 누리는 기쁨에서 평가된다고도 합니다. 사람의 가치는 그가 어떤 걱정을 하고 사느냐, 곧 그가 가지는 염려에 의해서 평가됩니다. 쓸데없는 걱정하는 사람은 쓸데없는 사람이예요. 있을까 말까 하는 것을 걱정하는 사람은 정신분열증 환자예요. 걱정할 말한 것, 정말 걱정해야 될 일을 걱정하는 것-이것이 그 사람의 인격입니다. 그 사람의 인격의 수준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마음속에는 특별한 고통이 있어요. 마음의 아픔이 있어요. 오늘의 본문대로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어요. 이것이 계속적으로 마음을 짓누르는 거예요. 이것 때문에 늘 편하지 않아요. 마음이 괴로워요.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2절)"-그치지 않는 고통, 그것은 바로 동족 이스라엘이 예수를 잘 받아주지 않는 것이에요. '왜 골육친척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지 않을까?'-이것이 그의 고통이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여기까지 생각을 합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3절)"-정말 내 민족이 그리스도에게 돌아오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지불해야 될 값이 있다면 내가 저주를 받아도 좋다 함입니다. 이 '저주'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나데마'라고 하는데 이 말을 그대로 번역하면 '천벌'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저주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벌입니다. 천벌을 받아도 좋다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이것은 물질의 손해가 아니예요. 이것은 내 육신의 생명만 죽는다는 얘기도 아니예요. 잠깐 마음이 괴롭다는 그런 얘기도 절대로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를 받는 것이에요.
자, 여기에 놀라운 진리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아픔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가장 큰 아픔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이에요. 이보다 더 큰 아픔이 없어요. 가장 큰 고통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이에요. 로마서 8장 35절로 37절, 또 39절에서 우리가 이미 살펴본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그리스도의 사랑과 나는 너무 가깝기 때문에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절대로 끊을 수 없다 함입니다. 환난도, 핍박도, 죽음도 상관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와의 관계, 그리스도의 사랑이 다른 모든 것보다 위에 있어요. 가장 크고, 가장 위대하고, 가장 소중하고, 생명보다 훨씬 더 귀한 것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우리 민족이, 내 골육친척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한이 있어도 원하는 바라'-무슨 말씀입니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맙시다.
이것은 저주를 받아도 좋다, 그 말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생명보다도 귀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서 지옥으로 떨어져도 좋다, 나하나 영원히 지옥으로 가서 우리 민족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지옥에 가겠다, 그 말이에요. 이 얼마나 굉장한 얘기입니까?
어차피 죽어야 할 목숨, 죽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예요. 우리가 '생명을 바친다'고들 하지만, 사실 어느 누가 죽는 것 좋아해요? 그러나 깊이 생각하면 생명을 바친다는 것은 그실 별것도 아니예요. 왜요? 어차피 죽을 사람인데 조금 일찍 가는 것뿐이에요. 안그래요? 조금 먼저 가는 거예요. 70에 갈 사람이 50에 간 거예요. 대단한 것이 아니거든요. 문제는 '영원한 형벌'입니다. 육체적인 생명 하나 끊어버린다든가, 재산을 얼마 손해본다든가,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예요. 바울이 생각한 사랑의 극치, 희생의 극치는 여기 있어요.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 해도, 내가 저주를 받아도, 내가 영원히 지옥으로 간다 하더라도 좋다, 그래서 우리 민족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되고 싶다는 거예요. 이 얼마나 굉장한 얘기입니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상적인 것이예요. 그렇게 될 수도 없어요. 바울이 지옥 간다고 그 민족이 구원받는 것도 아니예요. 그러나 바울의 마음속에 있는 붉은 중심을 보세요. 그렇게 희생을 해서라도 저들이 구원받기를 원하는 거예요. 얼마나 간절합니까?
그런데 내가 조금만 참으면 상대방이 구원받을 수 있는데 도저히 그렇게는 못하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집에 가보니까 그렇게 서로 말대답을 하고, 한치도 양보하지 않고, 하다가 나중에 은혜 받고서야 얌전해졌어요. 그러니까 주변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리가 비둘기가 됐다'고 표현하더군요. 이리가 비둘기가 됐대요. 아주 부드럽고 온순해요. 그렇게 되자마자 '그러면 나도 예수 믿겠다'하며 온 집안이 교회에 나옵디다. 이렇듯 간단한 것을… 보세요. 사랑이 뭔가, 어디까지 희생을 해야 하나-바울을 지금 엄청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대단한 말씀이에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그만큼 나는 간절히 원하고 있다고, 이 소원으로 인해서 지불해야 될 댓가는 얼마든지 지불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될 수만 있다면. 여러분, 이러한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 희생 정신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바울의 신앙적 세계관을 볼 수 있습니다. 그처럼 자기를 괴롭히는 민족, 정말 이제는 한 번 돌아서서 저주하고 싶은 그런 민족이련만, 그의 내심은 그렇지 않아요. 자기는 핍박을 받으면서도 그 민족을, 그 동족을 절대로 미워하지 않았어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 마음 깊은 곳에는 하나의 생각이 있어요. '이것은 이 민족이 모르기 때문이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하신 말씀처럼 그는 그 깊은 면을 보았어요. 율법주의에 빠지고, 민족적 교만에 빠져서, 무언가 몰라서, 생각이 잘못돼서 저 지경이 되어버린 거예요. 그것을 깨닫게 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개인적인 분노가 없습니다. 전혀 증오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는 진실합니다. 그리고 그 백성이 구원 얻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이라도 다 지불하겠다는 각오가 있습니다. 사실로 그는 많은 희생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오늘의 본문말씀 4절 이하를 죽 읽어보면,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자랑을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영광이 있다, 이스라엘은 이런 자랑을 가졌다, 하고 말씀합니다. 첫째, "저희는 이스라엘사람이라"-저들은 선민이다, 택함 받은 백성이다,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특별한 사명을 지니고 이 땅에 존재하는 백성이다, 함입니다. "저희에게는 양자됨과"-이것은 하나님의 주도적 능력 가운데서 일방적으로 구원받음을 의미합니다. 양자됨은 스스로가 선택하는 게 아니예요. 양자 하는 자가 선택해요. 따로이 양자시험 봐가지고 양자 되는 게 아니예요. 양자 하는 부모가 아무 아이나 딱 데려다가 "이제부터 너는 내 아들이다"하면 그 아들이지, 거기에 대해서 무슨 조건이 따로 있는 게 아니예요. 그러니까 비록 이스라엘에게는 의가 없지마는 하나님 앞에 양자됨을 힘입었다 함입니다. 이것은 특권이에요. 또 "영광과"-이스라엘에게는 선민의 영광이 있다, "언약들과"-아브라함 때부터 시작해서 저들에게 주신 종말론적 약속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또 "율법을 세우신 것과"-율법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하여 율법을 주셨어요. 우리가 이미 공부한 바와 같이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夢學先生)입니다. 또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마땅한 법이기도 합니다. 이 율법을 이스라엘사람이 받았어요. 또 지켜오고 있어요. 이것은 영광입니다.
또 "예배와"-사실 우리가 지금 드리는 이 예배도 이스라엘사람들의 회당예배로부터 유래합니다. 그 민족이 예루살렘성전에서부터, 또한 회당에서부터 하나님께 드려온 예배가 오늘의 우리 예배의 예표가 되고 있습니다. 그 전승에 의해서 우리가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니까 당당한 선배가 되는 것이지요. 이는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또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하는 교리도 사실 이스라엘로부터 우리가 배운 것 아닙니까? 아브라함으로부터 배우고, 또 하박국 선지로부터 배우고, 사도 바울로부터 우리가 배웁니다. 또한 아브라함, 이삭, 야곱…… 죽 이어지는 이 '믿음의 조상' 이야기가 전부 이스라엘에서 나오지 않습니까? 특별히 오늘의 본문의 끝에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5절)"-예수 그리스도가 그 민족 속에서 태어나십니다. 그 문화권에서 태어나십니다. 그러나 그 민족이 더욱 더 소중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6절에 가서 사도 바울은 이런 결론을 맺습니다. 그것은 참 이스라엘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그렇습니다. 육체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해서 다 이스라엘이 아니예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그 혈통을 따라 태어났다고 해서 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예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이미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참이스라엘은 예수믿는 사람입니다. 참하나님의 백성, 즉 아브라함의 후손이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얻는 그 교리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런고로 참이스라엘은 곧 그리스도인이다, 함입니다
오늘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바울로부터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정말 민족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여러분, 혹 누군가가 구원받기를 바라고 있습니까? 그 한 사람을 구원받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정말 뜨겁게 사랑하고, 전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수고해야만 결실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마음속에 있었던 그 꺼지지 않았던 고통이 동시에 우리에게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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