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기도의 부탁(롬15:22~33)

by 【고동엽】 2024. 3. 18.

 

로마서 강해로 돌아가기 목차로 돌아가기

 

기도의 부탁(롬15:22~33)

 

사실 오늘의 본문에서 로마서는 끝이 납니다. 본문 마지막에 축복기도가 있지 않습니까?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33)"-이것으로써 편지가 일단 마감이 됩니다. 그 다음 로마서 16장은 문안의 말씀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부록적인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에게 문안하는 사사로운 이야기가 여기에 나옵니다.

그런고로 로마서의 편지는 엄격한 의미에서 15장까지로 끝이 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끝부분에서 지금 어떤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바로 로마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아직 사도바울은 로마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로마교회는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바울이 이미 세운 교회의 교인들이 로마로 이주해서 저들끼리 모이고, 거기서 전도하고 선교활동을 해서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사도 바울이 직접 세운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세운 교회입니다. 그래, 이제 다음 시간에도 보게 됩니다마는, 그는 로마에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저들은 사도 바울이 일찍이 알던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보면 무려24명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는 이렇듯 많은 사람의 이름을 죽 거론합니다. 기억력도 좋아요. 좌우간 누구에게 문안하고, 또 누구에게 문안하고…… 그런 것을 보면 이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을, 로마에 있는 사람들을 사도 바울이 알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저들은 사도 바울로 인해 예수 믿은 사람들이에요. 바로 이 사람들이 대 로마의 수도인 로마에 가서 전도하여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여기에 편지를 하는 것입니다. 로마교회를 향하여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들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나를 위하여 기도해달라'-그런 부탁을 하고 축복기도함으로써 편지를 마감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마디로 말하면 기도로 끝냈다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로마서는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납니다. 그러한 모습을, 그러한 구조를 우리는 본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기도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라고 한다면 저는 언제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은 곧 기도생활이다.' 뭐 교회에 출석한다든가, 성경을 많이 안다든가, 봉사를 많이 한다든가 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예요. 그것이 열매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것은 곧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먼저 우선적으로 맺어져야 합니다. 이게 바로 기도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윤리 문제가 아닙니다. 도덕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문제입니다. 종교는 곧 기도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바른 관계입니다. 이것이 긴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짐 그레이엄이라는 목사님의 글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봉사자의 영적 생활이라는 것은 그의 기도 수준을 결코 뛰어넘지 못한다'-어떤 사람이 영적으로 성장한다 합시다. 그것은 그의 기도만큼의, 그의 기도의 수준을 절대로 넘어서지 못합니다. 또 봉사자가 가지는 목표는 그의 기도의 수준을 뛰어넘지 못합니다. 봉사자가 목적으로 삼는 것이 있고, 목표로 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도 기도 속에서 결정이 되는 것이에요. 또 봉사자가 정말로 수고하고 희생해서 어떤 업적을 이루었다고 합시다. 열매를 맺었다고 합시다. 그것도 그 사람의 기도 수준을 뛰어넘지 못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결국은 그의 영적 생활이나, 그의 정신이나, 그의 사역이나, 그의 봉사나 무엇이든지 그의 기도 수준을 넘지 못합니다. 만일에 기도 없이 무엇이 이루어졌다고 한다면 그 뒤에는 반드시 합당치 못한 결과가 따라옵니다. 그 일로 인하여 시험에 빠지게 되고, 목적이 흔들리게 되고, 뜻이 바뀌게 되고, 동기가 중간에 그만 변질하고 맙니다.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목적이 바로 되고, 기회가 바로 되고, 능력이 바로 되고, 그 결과도 바로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 수준을 절대로 뛰어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대단히 실제적이고 또 신령한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고로 기도의 바른 자세가 아주 중요합니다. 기도의model이 중요합니다. 어떤 모델을 따라서 기도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바울의 서신을 보면, 특별히 에베소서에서 그렇습니다만는 편지 속에 종종 기도가 나옵니다. 그것만 추적해서 연구해보면 얼마나 은혜스러운지 모릅니다. 바울의 편지 속에는 중간 중간에 기도가 있어요. 그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내가 이렇게 기도한다, 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랑을 가지고 있다는 사랑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또 내가 이렇게 기도한다, 그런고로 너희도 이렇게 기도하라, 이것이 내 소원이다, 너희들도 이와 같은 소원을 가지고 살아가지를 바란다, 하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그런고로 그는 편지 속에서도 기도를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기도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기도를 부탁한다는 것은 더욱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가장 큰 선물이 기도이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누가 여러분을 위해서 한평생 기도해준다면 이보다 더 고마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이에요. 뭐 물질이야 어떤 경우에 일시적으로 줄 수도 있지요. 그러나 기도는 참사랑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이것이야말로 선물이요, 사랑이요, 또 가장 큰 성도의 교제입니다. 서로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저는 늘 기억합니다. '위하여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는 자식은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서 진정으로 간절히 기도한다고 할 때, 그 자식은 절대로 잘못될 수가 없는 거예요. 자식이 부모를 위해서 기도하고,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기도하고-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어요.

영적인 사랑입니다. 높은 수준의 사랑입니다. 다른 것은 다 못 받았다하더라도, 유산도 못 받고 물질적으로는 아무 것도 받은 게 없다 하더라도 기도하는 어머니처럼 자랑스러운 것이 없는 법입니다. 또한 이것이 가장 큰 사랑이에요. 부부간에 어쩌고저쩌고 하지마는 아내가 남편을 위해서, 남편이 아내를 위해서 진정으로 기도한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이것이 신령한 사랑이요, 신령한 교제요, 힘이요, 능력인 것입니다.

월남전 당시, 우리나라 군인은 물론이고 사업하는 분들도 월남에 많이 가지 않았습니까? 여기에 얽힌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남편은 예수를 믿지 않아요. 아내만 예수를 믿어요. 그런데 남편이 사업하러 월남에 갔어요. 아내는 그런 남편이 걱정되어서 늘 기도하고, 또 편지할 때마다 '내가 당신을 위해서 기도합니다'라고 썼습니다. 남편은 늘 아내의 그런 편지를 받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곳은 전쟁의 와중이라 결코 편안하지 않잖아요? 여기서 꽝하고 터지고, 저기서 꽝하고 터지고 전방후방이 없는 그런 데서 사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쾅하고 터질 때마다 남편은 그래도 마음이 든든하더랍니다. 내 아내가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으니까요. 이것 하나가 가장 크게 의지가 되고 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남편은 돌아와서부터 아내를 따라 교회에 나왔습니다.

위해서 기도하는 것-참으로 큰 힘이 됩니다. 공부하는 아이들도, 시험장에 나가는 아이들도 '정말 어머니가 나를 위해서 기도한다' -그것을 알고 피부로 느끼고 있을 때, 그보다 더 힘이 되는 것이 없어요. 마음이 편안하고, 담대함이 생기고, 걱정도 없는 거예요. 이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내가 함께하겠다' '내 이름으로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너희에게 들어주마'-그런고로 비록 시간과 공간이 다르다 하더라도, 위해서 기도한다고 하는 것은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하심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에 위험한 함정이 있어요. 기도에는 시험이 있다는 말입니다. 잘못될 수 있는 길이 있어요. 그 첫번째가 뭐냐하면 욕망에 붙들리는 것입니다. 욕심에 매이는 거예요. 사도 야고보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4:2,3)." 무릇 정욕에 매이면 안되는 거예요. 자기 중심적인 그 끝도 없는 무거운 욕심에 붙들려 가지고 있으면 아무 정신이 없어요. 제가 그런 기도를 하는 사람들의 흉내를 내볼까요?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주십시오. 주십시오.

믿습니다.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저 달라고만 해요. 뭐 달라고 하고는 '주실 줄로 믿습니다'라고 합니다. 아주 욕심에 꽉 붙들려 있어요. 하나님의 뜻이 어떤지, 이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어떤 덕이 될 것인지, 교회에 덕이 되는지 안되는지, 유익한지 해로운지도 몰라요. '좌우간 주십시오'하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욕심에 붙들려 있으면 사실은 기도가 바로되지 않습니다. 영적인 교제가 이루어질 수 없어요. 무엇이든지 구하면 된다고 생각한다든가, 욕심에 붙들려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온당한 기도가 아닌 것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이것입니다. 기도는 명상이 아닙니다. 이것을 수양으로 생각해도 안되고, 독백으로 생각해도 안됩니다. meditation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를 수양처럼 생각해요. 조용하게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혹은 자기 자신을 살피면서 뉘우치고 자기 자신의 모든 허물을 반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반성하고, 뉘우치고, 때로는 회개도 하고, 명상을 합니다. 이것은 불교식이에요. 기도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분명히 생각해야 됩니다. 기도에 명상이 있을 것이에요. 그러나 기도를 이렇게 수양적으로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단순한 명상, 혹은 영원을 향하여 관조하는 그런 의미의 명상이 아니다-이것을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 기도에도 윤리성이 있어요. 주님께서는 누누이 가르쳐주십니다. '너희가 용서하면 기도하라. 누가 너를 원망하고 있으면 네 기도가 응답되는 않는다. 그런고로 원망할만한 것이 생각나거든 가서 화해하고 와서 기도하라. 그 후에 제물을 드리라'-용서가 절대조건이에요. 사랑이 기도의 조건이에요.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지 미워하는 마음으로 기도해 가지고는 응답될 수가 없어요. 또한 야고보서는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얻기를 바라지 말라'하고 말씀합니다. 그런고로 한마음으로 기도해야 됩니다. 기도에는 이렇게 윤리성이 있어요. 기도 자체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성경이 지시하는 이런 윤리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그래서 용서할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사람을 사랑하고, 그리고 한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하루는 우상 섬기고, 하루는 하나님 섬기고…… 이래서는 안됩니다.

태국에 가서 오랫동안 선교하던 선교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십디다. 태국에 선교가 잘 안되는 이유는, 아마도 맨 처음에 선교사들이 태국선교를 시작할 때부터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요. '교회 나오십시오'하면 안나올 것 같으니까 선교사들이 '절간에 가도 괜찮습니다'라고 말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태국사람들은 오전에 교회 나오고, 오후에 절간에 가요. 아주 안전하게 둘 다 섬기는 거예요. 결국은 이게 하나의 풍토가 되고 하나의 체질이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교회가 부흥이 안되는 거예요. 좀 어렵지마는 우상숭배를 끊고 교회에 나와야지요.

한마음으로.

기도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어디에 가서 날()잡고, 어디 가서 또 물어보고…… 이 짓을 하면 결코 안 되는 거예요.

이것은 기도가 될 수 없어요. 그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기도는 오직 한마음으로 정말 생명을 바치고, 운명을 하나님 앞에 걸고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주 쉬운 얘기입니다마는 사실 어려운 얘기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예수의 이름이라는 말은 기도 다 하고 나서 끝에 가서 예수의 이름으로 매듭지으라는 얘기가 아니예요. 그 기도 내용 전부가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내 이름으로 되는 것이 아니예요.

예수의 이름으로-그것을 꼭 기억해야 됩니다.

제가 지금은 그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마는, 인천에서 목회할 때에 교인들 생활이 다 어렵고 해서 취직을 시켜본 일이 있어요. 장로님들이 경영하기도 하고 목사님들이 경영하기도 하는 그런 공장에다가 제가 전화를 걸고 추천서를 써서 사람을 보냅니다. 제 이름으로요. 제 명함에다가 편지를 써서 보내요. 그러면 거기서는 취직하는 당사자가 어떤지 모르지마는 나를 생각해서 그 분을 받아요. 제 이름으로 취직이 된 거예요. 그런데 취직한 사람들이 가끔 그런 얘기를 해요. "제가 불만도 있고, 좀 어려운 일이 있어도 목사님의 이름이 더러워질까봐 참습니다. 이것, 내 이름으로 사는 것이면 몰라도 목사님 이름으로 살려니까 참 힘드네요." 그래, 제가 잘 생각했다고 말했어요.

여러분, 살든 죽든 자기 이름으로 사는 게 쉽지, 남의 이름으로 사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세요?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합니다. 그러니까 기도는 내가 하고 있지마는 예수님의 뜻,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의 성향, 예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 그것과 나와 하나가 되어야 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저런 것을 원하시는데 나는 이런 것을 원해요.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원하시는데 나는 미움을 원해요.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나라를 원하시는데 나는 물질을 원해요. , 이렇게 구한다면 이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예요. 우리의 기도 내용 전부가 헬라어 원문대로 보면 그 뜻이 'in the name of Jesus Chris'가 아니고 'into the name of Jesus Christ'입니다. 예수님 이름 속으로-그렇게 기도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기도는 예수의 이름으로 한다는 것이에요. 내 이름으로가 아니예요.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뜻을 따라서, 주님이 기도하시는 것과 일치한 그런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주님의 은혜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이에요. 그런데 감히 어떻게 기도를 한단 말입니까? 감히 어떻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까? 그것은 있을 수가 없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면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는 곧 너희의 아버지시다.

이제부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가 감히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내 이름은 없는 거예요. 내 존재는 완전히 없어져버린 거예요.

그의 의, 그의 사랑, 그의 능력을 의지해서 그의 명예로 조심스럽게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또 하나, 이것은 성경의 여러 곳에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성령은 그리스도의 마음이에요. 성령이 감당하시는 대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기도해야 됩니다. 내 마음이 아니예요.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이것이 기도의 조건입니다. 또하나는 '신자 개위제사'입니다. '개위제사'라는 말은 모두가 제사장이라는 말입니다. 모두가 제사장이라는 말은 각각 하나님 앞에,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중간에 누구 딴 사람이 필요 없다, 예수 외에는 증보가 없다는 그런 뜻입니다. 하지만 이 외에 또하나의 의미가 있습니다. 모두가 제사장이예요. 제사장은 남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이에요. 그런고로 우리 모두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그런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같이 제사장입니다. 갑이 을을 위해서 기도하고, 을이 갑을 위해서 기도하고, 교인이 교역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교역자가 교인을 위해서 기도하고, 서로서로 위해서 기도할 의무가 있어요. 이것이 바로 제사장적 의무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가운데 오늘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지금 기도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대 사도가, 위대한 사도가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보지도 못한 교인들이 많지만 그 분들에게 나를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바울의 겸손입니다. '내가 남에게 기도 부탁할 것 없어. 내가 기도하면 되지'-그런 생각이 아니예요. 내가 기도해요. 나도 열심히 기도해요. 그러나 주요한 것은 겸손한 마음으로 '저 분이 나를 위해서 기도해주었으면 좋겠다'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조금 더 심리적인 것을 생각해봅시다.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가정에서 식사할 때에 저희 집에서는 제일 어린아이가 기도해요. 그래서 저희 집 손녀가 늘 식사 기도를 합니다. 제 생각에는 그래요. 제가 백 마디 하는 것보다 그 아이가 한 마디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꼭 들어주실 것 같아요. 또 손녀가 오늘 소풍을 간다고 하면서 어젯밤 잠자리에 들면서 "하나님, 비 안오게 해주세요. 일년에 한번 가는 소풍인데 비가 오면 안돼요. 하나님, 비 안 오게 해주세요."-이렇게 기도하는 거예요. 제가 물어봤지요. ", 비오면 어떻게 할래?"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내 기도를 잘 들어주실 거예요"라고 대답합니다. 정말 오늘 아침에 일어나 보니 비가 안 와요. 그래서 제가 "네가 기도해서 비가 안 왔나보다"라고 말해주었더니 "제가 간절히 기도했거든요"하는 것이에요.

, 어떻습니까? 우리 어른들이 기도하지마는 어린아이의 기도가 더 잘 응답될 것 같지 않아요? 그렇게 느끼지 않으세요? 그것이 바로 우리의 겸손이에요. 그 깨끗한 마음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것 아니겠어요? '내가 의롭고 내가 기도하면 그만이지, '-이것은 건방진 생각이에요. 자기 의를 낮추십시다. '어쩌면 저 분이 위해서 기도하면 될 것이다. 아니, 저 권사님이 기도하면 더 들어주실 것 같다. 아니, 목사님이 한마디만 기도하면 꼭 들어주실 것 같다'-이런 마음들이 겸손이에요. 바로 영적인 겸손 아니겠습니까? 반면에 영적인 교만처럼 무서운 게 없어요. 꼭 내가 기도해야 된다, 내가 안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지요. 오히려 바울은 그렇지 않아요. 당신들이 나를 위해 기도해주기를 바랍니다-이런 마음이 겸손한 마음입니다.

또 그보다 조금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기도에는 공동체적 의미, 교회론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있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두세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 합심해서 기도한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비교를 합니다. 장작불을 붙일 때, 나무 한 개비에다 불을 붙여놓으면 불이 자꾸 죽어요. 그런데 두 개비를 가져다가 엎어놓으면 잘 타오르고, 세 개비를 가져다가 엎어놓으면 불이 아주 잘 타오릅니다. 마찬가지로, 나 혼자서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도야말로 둘이 합심해서 기도하고, 셋이 합심해서 기도하면 더 큰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캐더린 마샬이라고 하는 유명한 미국의 부흥사이자 치유의 은사를 가진 분이 있었어요. 그 분은 한 사람을 위해서만 기도하거나 '내가 기도하면 낫는다'--그런 생각을 안해요. 교인들을 다 모아놓고 "여기에 환자가 한 사람 있어요. , 여러분. 이 사람을 위해서 같이 기도합시다"합니다. 그리고 본인이 잠깐 기도해요. 전체 교인이 '아멘'해요. 그 다음에 그 환자에게 일어나라고 합니다. 보세요. '나 혼자서, 내가 손을 얹고 기도하면 될 것이다. 백 사람이 기도해도 소용없어'-이런 것 하고는 얘기가 다르지요. '나 혼자서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전체가 이 사람을 위해서, 이 순간만은 다른 기도하지 말고 이 사람만을 위해서 합심해서 기도합시다'-여기에 더 큰 힘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무엇이 부족해서 로마사람에게 부탁을 하겠습니까? 나를 위해서, 내 기도와 합해서 함께 기도하자-함께 기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여기에 교회론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또 힘을 모으는 것입니다. 힘을 모아야 돼요. 합심해서 힘을 모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거기에 더 큰 위력이 있는 것입니다. 열 사람보다, 백 사람보다 만 사람은 더하겠지요. 함께 한 제목을 가지고 기도할 때에 큰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다-이것을 믿고 있기에 저들에게 이렇게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 근거는 이렇습니다.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30)"-예수 때문에 내가 부탁한다는 것이지요. 예수 때문에-'나도 예수로 인하여 구원받고, 예수의 복음을 전하느라 힘쓰고 있다. 너희도 예수로 인하여 구원받고, 거기서 신앙생활을 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힘쓰고 있지 않느냐? 예수 때문에 우리는 형제요, 예수 때문에 내가 너희에게 부탁도 하고, 너희가 내 부탁을 들어줄 수도 있는 게 아니겠느냐? 오직 예수, 예수로 인하여, 예수 때문에 내가 너희에게 권면하고 있다. 또 성령 안에서 내가 내게 있는 성령, 나를 감동하시는 성령이 너희에게도 감동하고 있고, 그 성령이 지금 역사하고 있는 줄을 내가 믿기에 이 권면과 이 부탁을 하게 된다' 함입니다.

특별히 여기에 아주 친절한 표현이 있습니다. "나와 힘을 같이하여(30)"-나와 함께 힘을 합하자 합니다. 기도를 합치고, 기도 제목도 합치고, 뜻도 합치자는 거예요. 그리고 나를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말씀합니다.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30)." 에스더서 415절로 17절에 보면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에스더가 왕 앞에 나아갈 것을 결심합니다. 그녀는 이스라엘 민족이 멸망할 위기에 처한 것을 알고 왕 앞에 나아가려고 하는데, 그냥 바로 가지를 않고 유대인들 모두 사흘 동안 기도해달라고 합니다. '나도 나의 시녀와 함께 기도할 것입니다. 온 백성들도 나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내가 이제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겠습니다'-보세요. 자기의 생명을 걸고 앞으로 나가면서 모든 주의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를 위해서 합심해서 기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이것이 에스더입니다. 참 아름다운 시간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바울은 복음 전선 제일선에 있습니다. 그러면서 부탁합니다. '내 앞에 평탄한 길이 열리도록 당신들은 나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나와 힘을 합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십시다.'

오늘은 본문에 보니, 부탁하는 기도의 제목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달라는 것입니다.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31)"-여기서 구원이라는 말은 결코 영생을 얻는 구원이라든가 하는, 그런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유대사람들의 핍박과 그 무서운 고난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적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이 아니라, 영적인 구원이 아니라 물리적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혹은 사회적 구원을 말합니다. 외적인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이런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순교할 생각은 이미 정해진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께 생명을 바치고 살고 있습니다. 순교가 두려워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순교하더라도 로마사람으로 인하여 순교를 당하는 것은 좋지마는 내 동족 유대사람에게 맞아 죽는 것은 원치 않는 것입니다. 왜요? 그는 스데반을 죽였지요. 스데반을 죽인 것으로 족해요. 유대사람이 예수를 죽이고, 야고보를 죽이고, 스데반을 죽이고, 또 바울을 죽이고…… 유대사람들이 이렇게 계속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을 원치 않아요.

여자분들, 혹시 남편에게 맞아보셨어요? 맞아서 내가 아프고, 내가 억울하고……그것만 생각했지요? 생각할 것이 하나 더 있어요. 왜 남편을 때리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까? 도망이라도 가서 안 맞으면 될 것 아니예요? 어떻게 해서라도 안 맞아야 남편이 좋은 사람되지요. 남편을 아내 때린 사람으로 만드는 것도 죄예요. 내가 그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왜 나쁜 사람으로 만드느냐는 얘기예요. 어떻게 해서라도 안 맞으면 남편이 나쁜 사람 안될 것 아니예요? 남 화나게 만드는 게 죄 아닌 줄 아십니까? 그것도 반은 내가 부담해야 되는 거예요. 상대방만 나쁘다고 해서는 안돼요. 그 사람을 그렇게 나쁘게 만든 원인을 당신이 제공했잖아요?

그런고로 오늘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생각합니다. '내가 순교하는 것은 좋지만은 유대사람으로부터 맞아 죽는다면, 그렇지 않아도 저들은 죄를 많이 지었는데 또 죄짓는 것이다. 또 죄짓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고로 제발 유대사람으로부터 내가 맞아 죽는 그런 일을 당해서는 안되겠다'-그래서 유대인으로부터, 그 핍박으로부터 구원받게 되기 위하여 기도한다는 것이에요. 그는 유대사람들로 인하여 시험에 빠지지 않고, 낙심하지도 않아요. 또 유대사람들이 그를 미워한다고 해서 똑같이 유대사람들을 미워하지도 않아요. 그리고 끝까지 신실하게 저들의 분노를 사지 않도록, 그렇게 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달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여러분이 아시는대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맹세한 사람이 40명이나 있지 않았습니까? 저는 정말 그 사람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궁금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그 틈에서 지금 복음을 전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고로 내가 저 유대사람들의 악한 마음, 악한 행동으로부터 구원받도록 위하여 기도해달라 함입니다.

그 다음에는 아주 귀한 기도입니다.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31)"-내가 섬기는 일, 내 봉사가 받음직한 봉사가 되기를 원한다, 그렇게 기도해달라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전도하러 다니면서 어디 가든지 모금 운동을 했어요.

이것은 참 중요한 것입니다. 오순절교회에서도 성령충만 하자마자 열매가 나타난 것이 바로 유무상통 아닙니까? 가난한 자를 돌아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어디 가서 교회를 세우든지 '예루살렘교회의 사람들이 지금 흉년이 들어서 많이들 굶어 죽고 있습니다. 저들을 도웁시다' -이렇듯 오늘 교회를 세우고 오늘 헌금을 했어요. 사방에 다니면서 연보를 하게 했어요. 그런데 이 소중한 연보를, 이 헌금을 그냥 다른 사람을 통해서 보낼 수는 없어요. 너무도 귀한 헌금 아니겠습니까? 처음으로 예수믿은 사람들이 먼저 예수믿은 사람들을 위해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헌금한 것이거든요. 그래,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담겨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바울이 손수 가지고 가야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에 대한 성도 섬기는 일'이에요.

그런데 보세요. 이렇게 귀한 예물을 가지고 가는데 예루살렘사람들은 바울이 오기만 하면 죽이겠다는 거예요. 그 위험을 바울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위험을 무릅쓰고 지금 헌금을 가지고 갑니다. 가면서 지금 부탁하는 거예요. '내가 섬길 때에 저들이 마음을 열도록 기도해주십시오'-이 헌금을 가지고 가서 ', 이제 어디서 헌금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헌금을 했고, 저런 사람들이 헌금을 했습니다'하고 내놓을 때에 저들의 마음이 감동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실 여기에서야말로 얼굴빛 하나라도 중요한 것이지요. 어떻게 말하느냐도 중요합니다. 주는 자와 받는 자가 다 은혜 안에 있어야 합니다. 주는 자의 얼굴도 그렇거니와 너무 교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당당하게 '내가 이렇게 모아온 것입니다'하고 자기 자랑을 한다면 안되지요. 섬기는 일에서 조금도 우월감이 있다든가 자기 자랑이 따라서는 안되지요. 겸손한 가운데 섬겨야 하거든요. 그런고로 주는 자와 섬김을 받는 자가 다같이 감동되어서 봉사하는 일이 받음직하게 되어야 합니다. 받음직하게, 하나님께서 받음직하게-그런 봉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름다운 효과가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합니다. 이것은 내가 어디에 가면서 '저 사람을 감동해서 내게 선물을 좀 주게 해주십시오'하는 기도와는 다릅니다. 이것은 주러 가면서 하는 말이에요. 베풀러 가면서 하는 말이에요. 이런 봉사가, 받음직한 아름다운 봉사가, 순수한 봉사가, 또 순수한 결과를 가져오는 봉사가 되기를 위해서 기도해달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이렇게 다 일이 잘 끝나고나서, 지금 예루살렘에 가는 목적을 다 달성하고 이제는 이곳의 일을 마치고 나서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함께 쉬게 되기를 바란다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상당히 인도적인 표현입니다.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32)"-일을 다 마치고 너희에게 가서 반갑게 대하면서 편안하게 서로 만나 옛날 얘기를 하면서, 또 앞으로의 은혜로운 얘기를 나누면서 좀 쉴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이를 위해서 기도해달라 함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여러분, 기도 부탁도 하고, 또 위해서 기도도 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고 남을 위해 기도하는 데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열심히 기도해야겠어요. 다 못해도 열심히 기도해야겠어요.

지난 주일에 제가 말씀드렸습니다마는 '북한 동포를 위해서 좀 애씁시다. 우선 한 달에 10만 명을 살리려면 8천만 원이 필요합니다'라고 했더니 그 어려운 가운데 8천만 원을 들고 온 분이 있었어요. 그 분은 생활이 넉넉한 분이 아니예요. 그럼에도 "한 달분을 제가 맡겠습니다"하시는 거예요. 이 말에 너무너무 감격했어요. 아무튼 우리가 이렇게 봉사를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받음직한 일이에요. 받는 사람의 마음이 감동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이것이 기도와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돈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예요. 물질만, 빵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꼭 기도가 함께 있어야 돼요. 선한 일에는 기도가 따라야 해요. 그래서 이 모든 일이 받음직하게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저들에게 전달될 때에 그 마음이 활짝 열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감사한 마음으로 주고받고-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에요? 우리가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특별히 북한 동포를 위해서 기도할 것입니다.

시간시간 기도할 것입니다. 1달러가 우리 돈으로 800원이에요. 1달라면 한 사람이 한 달을 산다고 합니다. 그것이 없어서 지금 우리들에게 부탁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어려운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위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먼저 기도하는 것이 큰 섬김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이것은 사귐이 되고, 하나님 앞에 큰 축복의 길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겠습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사도 바울은 이렇게 편지를 마치고 있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