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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과 원수(마태복음 10 : 32 - 38)

by 【고동엽】 2024. 3. 17.
목차

검과 원수(마태복음 10 : 32 - 38)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우리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을 말하자면 그것은 신앙을 고백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나의 주라고 분명하게 고백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하는 매우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비밀로 믿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 것으로, 이는 인간의 심리 상태를 두고 보아도 그렇습니다. 이제 어떤 일을 생각하고는 마음에만 두고 있으면 그저 그러다가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이것을 말로 표현하여 고백함으로써 다시 확인이 되어짐과 동시에 강해지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사랑을 두고 보아도 사랑한다는 것을 마음에만 품고 있다면 그것은 소위 말하는 짝사랑으로 상대에게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상태이기에 문제 또한 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직접 본인에게 고백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마음에 가졌던 사랑이 3배로 더해진다면 합니다. 그러니까 희미하게 좋아하는 정도로 있다가도 어느 계기에 "사랑합니다"라는 한 마디의 말을 함으로 그것이 굳어지고 확실해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심리학에서는 말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의 액센트(accent)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말로 표현한다고 하는 자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만약 이 말이라고 하는 언어적 표현을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면으로 생각해 본다면 이제 어떤 경우에 상대방으로부터 받은 마음의 섭섭함이나 불쾌감을 가졌다손치더라도 그대로 혼자 삭이어가면 괜찮은 것을 어느 순간에 한번 이것을 투덜거리며 말로 내뱉거나, 더욱이 본인에게 직접 표현을 하고 나면 이제는 지워버리기 힘든 나쁜 감정이 되고 증오하는 마음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의미로도 그렇습니다마는 특별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말이란 하나님께서 전부 듣고 계시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이제 말은 사람에게 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곧 하나님께 향한 기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수기 14장이나 20장 등 여러 곳에서 광야 생활에 힘들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장면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때의 원망하는 말은 실은 자기들끼리 서로 주고받은 말들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14:28)라고 말씀하십니다. 단 한 마디의 말! 그러나 이 말이 이렇게도 중요한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의 믿음의 신앙 고백은 공개적으로 되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이 언어적 수단인 말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에 로마서 109-10절에 보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입으로 시인한다는 말은 공개적으로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함으로써 이제는 하나의 분명한 소속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하여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그 순간, 지금까지는 우상에 속했던 사람일지라도 이 고백을 계기로 그 관계를 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드러나지 않는 마음으로는 두 가지의 고백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마는 말로 정리되어 표현되어지는 순간에 어느 하나를 포기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상과의 관계를 끊는 행위가 바로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공개적으로 고백함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믿음의 고백이 됨은 물론, 그만큼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며 나아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되고, 이제는 그분께 내 운명을 위탁하여 그분께만 충성을 약속하는 것이 됩니다.

이와 같이 이 고백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하는 자기 정체를 확고하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이 고백의 중요함이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이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을 직설적으로 풀이해 본다면 어떤 사람이 재판정에 섰을 때 재판장이 묻기를 "너 예수를 아느뇨?" 그리고 "예수를 믿느뇨?"할 때에 ", 알고 있습니다" ", 믿습니다"하는 바로 그런 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이 고백은 "예수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습니다"하는 고백과 더불어 이에 따르는 모든 책임을 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고백과 함께 모든 고난을 받아야 하고 저만큼 넘어서는 최후의 영광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요, 그 때문에 이 신앙 고백은 생명과도 같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라고 하신 이 말씀은 매우 종말론적인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벌벌 떨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증인이 되셔서 저들이 사람 앞에서 고백한 그대로 저 사람은 그리스도인, 곧 내가 아는 자라며 한 사람, 한 사람을 시인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가를 깊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도 이 고백이 쉽지를 않고,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여기에 따르는 많은 부수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할 때에 가장 중요한 의미로는 이 신앙 고백은 절대화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 신앙 고백은 어디까지나 절대적인 고백일 뿐 어떠한 경우에도 상대적인 고백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차라리 내 몸, 내 생명을 희생하며 물질을 빼앗기는 것은 가능하여도 신앙의 고백을 양보하거나 고치며 타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신앙 고백, 이것 하나만은 절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가장 귀중한 주제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힘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데에 있는 것입니다. 단순하고 공개적이며 그리고 순수하고 절대적일 때에 힘이 생기게 되는 것이 옳습니다. 이 절대라는 것이 바꾸어 말하면 상대를 배격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많은 핍박을 받게 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신앙은 절대적인 신앙이어야 합니다. 언젠가 한번 계룡산 신도의 집엘 가보았더니 집 2층을 넓은 다락처럼 목조로 지어 놓고는 거기에다 커다랗게 그린 하얀 할아버지의 초상화 다섯을 모셔 놓았는데 그 중 하나는 맨 위에 걸려 있고 나머지 넷은 그 아래에 나란히 걸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것이 무엇이냐고 하였더니 맨 위에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아래 이 넷은 석가, 공자, 야소(예수), 모하메트라는 것입니다. 그러길래 제가 한마디 더 "이게 무슨 짓이요?"하고 물었더니 그 분 대답인 즉 "아 그저 다 좋은 것 아닙니까?"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때 제가 농담 삼아 "그러면 그 중에 어느 것이 좀 나은 것 같소?"하고 물었더니 사람마다 자기 나름대로 더 나은 길이 있다며 그 모두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식으로 믿는 사람은 핍박을 받지 않습니다. 아무 것이나 다 좋다는데 핍박이나 순교가 무슨 필요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예수님도 거기에서는 야소라고 하는 한갓 부처님으로 모셔져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러한 상대주의적인 신앙, 이것은 우리의 신앙 고백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2천 년의 역사는 피로 얼룩진 핍박의 역사로 이어져 왔고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에 대한 핍박은 끊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양보할 수 있으나 이 신앙 고백 하나만은 단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이기에 예수를 알지 못하는 일반적인 사람들은 기독교인을 향해 독선적이요, 고집불통의 저만 잘났다고 하는 위선자라고들 합니다마는 우리가 믿는 복음은 절대적인 것이므로 따라서 우리의 신앙 고백도 절대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절대적 고백이 있는 사람! 그가 기독교인인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것을 두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싸움이 있고, 이를 위한 검, 곧 칼이 있습니다. 이 검은 싸움을 상징하는 것이며, 나아가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절대가 있는 곳에는 상대적인 것이 통하지 않는 것이기에 결국은 싸움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먼저 이 말씀의 개념부터 잘 이해하여야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세상에 뭐니 뭐니하여도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답답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도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 그 진의를 파악하지 못하므로 수제자인 베드로마저도 결정적인 순간에 실수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내가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고 하시는데 이제 누가복음 2236절을 전후하여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을 향하여 가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라고 하십니다. 당신의 상황에서 느닷없이 하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제자들의 차원에서는 아무래도 이해하기가 힘들었으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아무튼 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라는 보고를 하게 되는데 이 때에 예수님께서 ", 이녀석들아 그 소리가 아니다"라며 제대로 알아듣게 설명을 좀 해주셨으면 좋으련만 그러시지를 않고 그저 "족하다"는 한 마디를 해주시고 맙니다. 그랬다가 이제 예수님을 잡으러 오는 사람들이 밝게 불을 켜 들고 다가오자 "옳다구나, 바로 이때다"하고서는 검을 빼어 저들을 향해 내려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보신 예수님께서는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26:52)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베드로는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이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무슨 의도로 겉옷을 팔아서 검을 사라고 하셨는지 그 의도를 알만도 합니다. 이는 곧 마음의 무장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사느냐? 죽느냐의 시간이요, 아무렇게나 적당히 넘어가도 되는 그러한 시간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이 시간에 검을 주러 왔노라! 우리는 이 말씀의 뜻을 깊이 잘 이해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이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오신 분이십니다. 첫번 크리스마스의 메시지가 그렇고 오늘도 우리는 평화의 왕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오늘 본문 속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이겠습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절대적 교리, 양보할 수 없는 신앙 고백이 있음을 다시 한번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늘의 평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땅의 거짓된 평화는 무너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문화 신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외국 사람들의 경우 대체로 보아 한 가정의 종교는 하나입니다. 만일의 경우 종교가 둘이 되면 그것으로 인해 갈라서게 되고 맙니다. 이혼율 가운데에 보면 기독교와 유대교의 각각 다른 신앙을 가지고 만났을 경우에는 현재까지의 통계로 보아 99%가 이혼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종교 문제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며 종교가 다르고서는 결코 무사히 살아 넘길 수가 없다는 것이 종교에 대한 일반적이고도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실태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유독 우리 한국만은 예외입니다.

그것은 왜냐 하면 조선 왕조 5백년 간을 그런 식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조선 왕조 5백년 간은 남성 위주의 유교적인 가치관 위에 사회나 가정이 틀을 잡게 되므로 여성이 설자리란 구조적으로 상실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유교란 오직 남성의 종교요, 봉건주의적 종교며, 귀족의 종교입니다. 그 때문에 당시의 여성들에게는 이름도 주어지지 않은 채 김씨, 이씨 아니면 지역 이름을 붙여 무슨 무슨 댁이라고 하거나 아무개 누나, 아무개 어머니 하는 식으로 불려졌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글도 가르치지 않았음은 물론 그 출입도 극히 부자유하여 부득이 한 경우 쓰개치마를 쓰고야 외출을 할 수 있는 것 외에는 그대로 안방에 갇혀 있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자니 얼마나 답답했겠으며 쌓이는 한인들 오죽했겠습니까? 이렇게 쌓여만 가는 한을 어떻게 해서라도 좀 풀어가야 하겠는데 그 재간이 없어요. 그래서 마침내 뒷문으로 몰래 끌어들인 것이 바로 이 무당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이것을 보는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는 여유 있는 마음에서 오죽이나 답답했으면 저런 짓을 하겠느냐 하는 생각에서 그런대로 넘겨보아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고 보니 조선 왕조 5백년 동안에는 어느 집이든 예외없이 종교가 둘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방에서는 무당종교요 밖에서는 유교를 했던 것입니다.

사실 유교에 골똘한 분들은 무당은 미신이요, 천박한 것이라 해서 대단히 나쁘게 생각하는 처지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그러운 남편들이 아내의 답답한 마음을 헤아려 주는 것으로 해서 어느 집이든 이중의 종교가 자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본래 이 샤머니즘(shamanism)이라는 것은 다신론적인 데가 있는 것이긴 합니다만 특별히 조선 왕조 5백년 간은 유교와 무속 종교, 게다가 불교까지 끼어 어쨌든 가정마다 이중 종교 내지 복합 종교로 자리가 잡혔고, 따라서 이러한 종교적인 체질로 여러 백년을 흘러왔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결과 요즈음도 보면 한국 가정은 묘한 종교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서 어떤 가정에서는 남편이 교회에는 나가지 않으면서도 자기 부인보고는 집은 내가 보아 줄 터이니 교회에 갔다오라고 하는가 하면, 자신은 안 나가면서도 아이들보고는 교회에 나가는 것은 좋은 것이라며 챙겨 보내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한 가정에서 신앙의 문제를 두고 이런 식의 사고, 이런 식의 생활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결혼식을 할 때에도 보면 앞자리에 나와 앉아 달라는 부탁을 아무리 하여도 기어이 저 멀리 뒤에 섰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알고 보면 그럴만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이 예배당은 하나님이 계시는 굉장한 집인데 어찌 감히 무당을 섬기던 사람들이 두려워서 들어올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 하나님의 집에 와서 한번 앉았다는 그 자체가 굉장한 문제가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는 뒤에서만 빙빙 돌다가 "나오세요"를 거듭하게 되면 그 때에는 아주 나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아무튼 한 가정에서 두 종교, 세 종교를 가지고도 무사히 넘어가는 것이 종교에 대한 한국적 체질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흔히들 불교도 좋고, 유교도 좋고, 무당도 믿을 만하고, 기독교는 더 좋고 하는 식으로 나오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이것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통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그 때문에 지금 예수님께서는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저 무턱대고 좋은 것이 좋다는 식의 그따위 화평 때문에 오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든 인본주의와 신본주의자는 만날 수가 없는 것이며, 복음이란 그 자체가 절대로 양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에 오늘 예수님께서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하시는 말씀의 그 배경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은 절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따라서 땅 위의 거짓 화평은 이 싸움에 의해 반드시 무너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검이라는 것은 싸움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누가 복음 235절에 보면 마리아의 품에 안긴 아기 예수가 할례를 받게 되는데 이 때 시므온이 축복의 말을 하는 것에 이어 그 모친 마리아에게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며 그로 인한 미래의 고통을 예언해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혈육의 정으로 볼 때 십자가상에 매달려 죽어 가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심정은 진정 칼로 가슴을 도려내는 것 같은 아픈 고통을 당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정말 검을 주러 오셨습니다. 싸움과 그리고 죽음이 있기 마련인 이 검! 그리하여 살기 위해서는 저를 죽이고서야 내가 살 수 있는 양자 택일의 길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타협이나 양보 같은 것은 통하지 않는 그런 상태를 가리켜서 검이라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진리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거짓을 버리는 싸움이어야 하고 최후의 순간까지 계속해야 하는 싸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긍정하고 그 진리가 진리 되게 하기 위해서는 비 진리를 부정하고 없애야 하는 싸움을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신학을 공부하는 한 학도의 입장에서도 보면 어떤 때에는 "이거 온통 싸움판이로구나!"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왜냐 하면, 신학이란 결국 복음을 수호하기 위하여 거짓된 진리에 대항하여 싸우는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비복음적인 것과 싸우면서 계속 칼질을 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검을 주러 왔노라!"고 하신 이 말씀은 매우 실감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또한 하나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끊임없는 싸움을 통하여 세속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요소를 제거함으로 비로소 순수한 진리와 순수한 고백이 지켜지며 나아가서는 참된 화평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싸움은 필요 불가결한 것으로 반드시 있어져야 한다는 뜻에서 "검을 주러 왔노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916-21절에 보면 이 싸움에서 실패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한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물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계명을 지키라"고 하시게 되는데, 이 청년이 계명은 다 지켰다는 말을 하게 되자 그러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들은 청년은 이 싸움에서 그만 넘어지게 되어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 중에 보면 특별히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라는 말씀이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이 "불화"에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과정이 있습니다. 여러분! 화목함이 좋은 것이라고 하여 세상 욕정과 화목할 수가 있는 것이겠으며, 미신이나 유물주의 따위와 화목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또한 오늘 본문에는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며 원수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인간간의 화목이 먼저가 아니라 참 믿음, 참 고백이 먼저이기 때문에 부득불 불화한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했는데 이제 그 불화 중에서도 가장 어렵고 급한 것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바로 자기집 안에 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적으로 가장 친하고 가장 가까운 곳에 보다 큰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때문에 가족들에게 전도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아도 그저 화목하게 해야지 하고 화목 위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보면 남편이나 아내에게 교회로 인도해내기가 어려움을 알 수 있습니다. 당장은 조금 핍박이 있고 불화의 소리가 나더라도 처음부터 신앙을 똑바르게 지켜 나갈 때에 여기에서 무엇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무조건 화목해야겠다고 하여 오늘은 산으로 갑시다 하면 그리로 끌려가고, 다음에는 또 어디 어디로 하는 식으로 같이 다니다가 어쩌다 남편이 출장이라도 가고 나면 그때에 가서 몰래 교회에 나오고 한다면 그런 상태로서는 10년이 지나도 남편 하나 인도해 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 고백 자체를 양보해 가면서까지 화목을 하여 무엇이 되어질 줄 아는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냐 하는 것입니다. 이는 누구보다도 자기 집안 식구를 사랑하기 때문이지 집안 식구 자체가 곧 원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고 보면 이 말씀의 깊은 뜻은 원수를 사랑하는 내 마음이 원수라는 이야기입니다. 가정을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는 이 마음 때문에 그만 신앙을 바로 지키지 못하고 오히려 저들에게 끌려가며 양보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말입니다. 이제 몇 십 년 목회를 하면서 보노라면 열심히 바른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는 분인데도 자식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 자식에게 연연하느라고 다른 일은 아무 것도 못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내 죽은 다음에 저 자식들 어떻게 하나!"하는 생각으로 좀 많이 벌어 놓고 가겠다고 이것 저것 열심히 해 왔는데 진작 마지막에 자식이 잘못 되고 나면 이제는 "이럴 줄 알았더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을"하는 탄식과 함께 "이것은 자식이 아니라 원수!"라고 하며 나오는 것입니다.

자식이 원수라!는 이 말은 새삼스러운 말도 아니요, 뒤늦게 깨달아야 할 말도 아닙니다. 이는 이미 예수님께서 예언적으로 분명하게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니라!"고 하신 말씀에 따른 응답이요 고백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결정적인 어느 순간에는 이 자식, 이 가정이 원수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고백할 때가 오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여기에는 육정에 끌리는 인정이 있기에 그러는 동안에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에게 충성하는 것보다는 가족을 사랑하고 저들을 위한 마음과 책임이 더욱 앞서게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 때문에 심지어 선교사로 가는 사람에게 있어서도 이 가족 문제, 특별히 자녀의 문제는 매우 심각한 장애의 요소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 저의 제자 되는 청년이 찾아와서는 선교사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결혼했느냐 하고서는 아이가 몇이냐고 물었더니 셋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길래 제가 "그러면 자네 선교사로 가지 말게, 자식들 그렇게 데리고 선교사로 가서는 큰 일을 할 수가 없어. 꼭 자네가 가야 될 것도 아닌데 다른 사람보고 가라고 하지 뭐" 했더니 "아 그래도 목사님, 제가 굳은 결심을 하고 준비를 하였는데요"라며 섭섭해하기에 그러면 마음대로 하게나 하고 보냈는데 선교사로 간 지 3년만에 돌아와서는 저의 사무실로 찾아와 울면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막상 가서 보니 아이들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학교가 없기 때문에 아이들은 국민학교도 다닐 수가 없고 그렇다고 선교비가 넉넉한 것도 아니고 하여 이리 저리 하다보니 아이들 밑에 선교비가 다 들어가도 모자랄 지경이니 도대체 자식들 때문에 아무 것도 못하겠더랍니다. 그래서는 겨우 3년을 버티다가 결국은 본부에 이야기를 하여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니 그간의 3년 세월은 완전히 공을 친 것이 되었고 자기의 마음에는 큰 상처를 입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있을 수도 없는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제가 다시 태어난다면 선교사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그 때엔 장가가지 않겠습니다."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참으로 결정적인 시간이 있습니다. 제가 이름은 밝히지 않습니다마는 지금 브라질에 가 있는 모 선교사님 내외분은 자녀가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못 낳은 것이 아니라 낳지를 않는 것 같아요. 그런 가운데 브라질의 오지, 아주 벌거벗고 사는 원주민들 속에 들어가서 전도를 하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부모를 잃고 불쌍하게 된 아이들을 데려다가 양자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전도를 하다보니 이제는 그 마을에서 아주 성자 취급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복음이 어떻게 잘 전해지는지 그곳을 떠나 돌아올 생각이 나지를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선교사로 갔다가 제 몫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이유 중 거의 대부분이 다 자녀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는 내가 고생하는 것은 참을 수 있으나 자식이 멍청하게 바보가 되는 것은 볼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결정적인 순간! 이제 순교를 하려는 그 순간! 이런 때에는 자식도 가정도 원수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예수님께서는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는 합당치 않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비록 부모 자식간이라 하더라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이 있는 한 예수님을 바로 믿는다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거기에서는 바로 신앙 생활도, 바른 신앙 고백도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까지도 주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아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내 생명보다 더 사랑한 이후에라야 내가 예수를 알고, 예수를 믿으며, 예수를 사랑한다고 하는 바른 고백을 할 수가 있으며 그 고백을 따라 살수가 있겠다는 말입니다. 이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자기 사랑이 주님을 따르는 길에 원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을 극복하고서야 비로소 바른 신앙 고백, 바른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염려하지 마십시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나라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10 : 30)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자식을 더 사랑한즉 그리스도를 버리게 되고 결국은 자식까지도 잃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고 보면 마침내는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자식도, 부모도 더 사랑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실상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 진정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요,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 되며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없이 사랑하는 그 모든 것의 결국은 파멸과 죽음뿐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진정한 신앙 고백에 따르는 불화와 원수, 그리고 검이라고 하는 이 싸움의 문제가 있음을 알고, 이것을 넘어섬으로 진정한 화평과, 참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 종말적으로 하나님 앞에 선 나를 향해 내가 너를 아노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축복이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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